이번주에 나온 신간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책은 <세계를 뒤흔든 열흘>의 저자 존 리드의 평전이다. 워렌 비티가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영화 <레즈>(1981)의 원작이었다고도 하니까 로젠스톤의 원저 자체는 좀 오래된 책이다. <낭만적 혁명가(Romantic Revolutionary)>(1975)가 그 원제이다. 32년만에 번역된 것에 의의가 있다기보다는 러시아혁명 90주년을 맞는 해에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더 뜻깊다고 하겠다. 프레시안에 실린 리뷰가 자세하기에 옮겨놓는다.

 

프레시안(07. 03. 22) 진정 이 시대엔 '혁명'이 사라졌는가

"철도공무원."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어린이가 장래 희망을 묻자 망설임없이 이렇게 답하는 것을 봤다. 그 어린 나이에 '장래 희망'을 구체적인 '직업'으로 콕 짚어 이야기한 것도 놀랍지만, 철도공무원이 되고 싶은 이유를 물어보자 "직업이 안정적이잖아요"라고 대답한 대목에선 경악을 금치 못했다(안타깝게도 그는 너무 어려 지난 2005년 철도청이 민영화돼 철도공사로 전환된 사실은 모르고 있는 듯 했다). 채 열 살도 안 된 어린 소년이 추구하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안정적 삶'이라는 사실은 어느덧 '불안'이 사회를 지배하는 키워드가 돼버린 21세기 초 한국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하지만 자아가 확립되기 이전 단계에서부터 '부'와 '안정적 삶'을 목표로 삼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형성 이후 어느 사회에서든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이게도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을 취재한 책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쓴 존 리드(Jhon Reed)의 평전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백만장자를 꿈꾸던 청년이 혁명가가 되기까지
  
최근 출간된 로버트 로젠스톤의 <존 리드 평전- 사랑과 열정 그리도 혁명의 투혼>(정병선 역. 아고라 펴냄)에 따르면, 대학 시절 존 리드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모든 것은 이렇게 요약된다. 행복과 모험, 아니면 돈과 판에 박힌 일상." 그리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몇 개월간 유럽을 여행한 뒤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리드는 두 가지 인생 목표를 설정했다. "백만장자가 되는 것과 결혼하는 것." 물론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돈과 일상'이 아닌 '행복과 모험'을 택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의 삶에도 불행한 순간이 많았지만.


  
특히 기자로서 그를 변화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1913년 봄 뉴저지 주 패터슨 노동자 파업 취재였다. 그는 이 파업을 취재하다가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구금됐다. 이 경험에 대해 그는 "나는 영웅도 아니고 순교자도 아니다. 모든 것이 한바탕의 장난일 뿐"이라고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지만, 대학시절 낭만주의적 발상으로 고기잡이 배를 탔던 것과 나흘에 불과했지만 노동자들과 함께한 감옥 생활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낭만주의적 지식인에서 실천적 지식인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은 1914년 판초 비야가 이끄는 멕시코 원주민 반군을 취재해 쓴 <반란의 멕시코>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 책에 대해 그의 친구는 "멕시코는 물론이고 너와 함께 약동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그는 "멕시코 혁명을 취재하면서 대의가 삶보다 더 중요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리드는 유럽 전역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취재하면서 철저한 반전주의자가 됐다. 전쟁을 두고 미국 내 진보적 지식인과 예술가, 급진주의자들의 공동체가 혼란에 빠졌고, 종국에는 대다수가 전쟁에 찬성했지만, 그는 국회의사당에 출석해 전쟁 반대 주장을 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사실상 '실업자'가 됐다. 어느 매체도 공개적으로 전쟁 반대 입장을 밝힌 그에게 일거리를 맡기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혁명'의 기운을 감지하고 러시아로 건너가 1917년 11월 볼세비키 혁명을 목격했다. 그는 "대중의 승리"인 이 혁명의 기록을 담은 책을 두 달 만에 완성했다. 이 기록이 바로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와 함께 세계 3대 르포르타주로 평가받는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다.

한 세기의 시간을 두고 변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볼세비키 집권 이후 소비에트 선전국에서 일했으며, 뉴욕 주재 소련 영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대중의 승리'를 꿈꾸며 공산주의 노동당을 창당하고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으러 러시아로 갔다가, 1920년 모스크바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레닌을 비롯한 동지들의 애도를 받으며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크렘린에 묻혔다. 안타깝게도 그가 1776년 '독립 영웅'들 이외의 혁명가들은 존경받지 못 하는 미국인이라 점에서 자국민들의 기억 속엔 깊이 남아 있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나마 그에 대한 기억이 환기된 것은 1981년 이 평전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레즈(Reds)> 덕분이다. 이 영화는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착오로 보인다. 그해 작품상은 <불의 전차>가 수상했으며 <레즈>는 감독상과 여우조연상 등을 수상했다. 오래전에 본 이 영화를 며칠전에 상기할 수 있었는데, 보드리야르가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 대담에서 털어놓을 걸 읽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1927년 사망한 존 리드의 모스크바에서의 장례식).

서른셋 짧은 생을 불꽃같이 살다간 리드의 평전을 읽다보면 100년 가까운 시간과 미국과 한국이라는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리드는 1913년 패터슨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뉴저지주 패터슨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한 전쟁이다. 일방적으로 한쪽, 다시 말해 공장 소유주들만이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들의 하수인인 경찰이 저항하지 않는 남녀를 곤봉으로 구타하고, 법을 준수하는 군중을 탄압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돈을 받은 용역 깡패들이 총탄을 사용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그들의 신문인 <패터슨 프레스>와 <패터슨 콜>은 선동적이고 범죄를 조장하는 기사를 씀으로써 파업 지도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도록 조장하고 있다. 그들의 끄나풀인 캐럴 치안판사는 경찰서에서 잡아들인 평화 시위대원들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있다. 그들이 경찰과 언론, 법원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자본가들과 경찰, 법원, 그리고 주류 언론의 '끈끈한 관계'는 사실상 변한 게 없다. 또 당시 패터슨 노동자들의 요구는 '8시간 노동'과 '최저 임금'이었다. 이는 현재의 대다수 노동자들도 여전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리드는 1916년 미국의 참전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 때 아래와 같은 이유를 들어 전쟁을 반대했다.
  
"근로대중은 자신의 적이 독일이나 일본이 아님을 깨달아야만 할 것이다. 국가의 부를 60%나 소유하고 있는 미국의 2%가 근로대중의 적이다. 근로대중의 재산을 빼앗아간 이 사악한 '애국자' 집단이 이제는 그들을 군인으로 동원해 자신들의 약탈재산을 보호하려 획책하고 있다."
  
존재하지도 않는 '대량살상무기'를 들어 이라크를 적으로 설정한 지금의 전쟁에서도 딕 체니 부통령의 헬리버튼 등 부시 정권과 결탁한 미국 군수업체들만 엄청난 이득을 보고 있다. 이 전쟁에서 죽어 나가는 것은 근로대중들의 자녀인 동원된 군인들과 점령국의 무고한 민중들이다.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하지만 20대 초 백만장자를 꿈꾸던 평범한 청년이 혁명가가 된 것은 그의 특출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여자를 밝히고, 한때 부인의 배신에 괴로워하고, 돈벌이를 위해 글을 쓰기도 하는 등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기도 했다. 다만 그는 역사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몸을 맡겼고, 자신의 방식으로 역사에 발자취를 남겼다.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나 더 이상 '혁명'을 꿈꿀 수 없다는 21세기 초,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저항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또 미국이 일으키고 있는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남미에선 여러 국가들에 좌파 정부들이 들어서고 있다. 이들은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리드는 <세계를 뒤흔든 열흘> 서문에서 "내 감정은 중립적이지 않았다"고 썼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이 과연 누구의 시각인가를 다시 한번 뒤돌아보게 만드는 말이다. 살아가면서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살다간 기자이자 혁명가인 그의 삶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전홍기혜 기자) 

07. 03.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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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3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23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3-24 12:35   좋아요 0 | URL
ㄱ님/ 품성론은 그래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과학'과 결합되면 '인간개조론'이 되는 것이죠...
ㅁ님/ 러시아혁명 자료를 찾으면서 비디오로 보아서인지 전반부를 몰입해서 보지 못했습니다. 스크린으로 본다면 느낌이 좀 다를 거란 생각은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