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에 예기치 않은 펌질을 하게 됐지만 내가 찾으려고 했던 박노자의 칼럼은 '이슬람의 이광수, 루시디'이다. 그의 두번째 책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한겨레출판, 2002)에 재수록되어 있는데, 그맘때쯤 '강의자료'로 사용했던 기억이 있다. 문득 이 칼럼이 생각난 것은 이달의 '사회적 독서' 목록에 이광수의 <무정>을 올려놓은 데다가 마침 루시디(루슈디)의 신간 <분노>(문학동네, 2007)가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박노자의 칼럼제목을 뒤집어 '한국의 루시디, 이광수'로 읽을 수 있다면 <분노>는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그런 상처"(김현) 같은 이광수를 읽기 위한 자료로서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먼저, 칼럼을 다시 일독해본다.

한겨레21(01. 11. 04) 이슬람의 이광수, 루시디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의 사관에는 ‘도전과 응답’이라는 도식이 중심적인 위치에 놓여져 있다. 각 문명권이 그 역사의 전환기에서 내부적 모순이나 외부 세력의 ‘도전’을 받게 돼 있고, 그 ‘도전’의 형태·심도·규모와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그 ‘응답’을 제시한다는 논리다. 그 논리에서, 사회 현상들의 의미와 인과론적인 뿌리를 내외부적 상황의 ‘도전’에서 찾아야 한다는 역사 연구의 접근 방식이 성립된다. 필자는 토인비의 관념주의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않지만 세상의 표피만 보지 말고 ‘도전’이라는 ‘뿌리’를 중시하라는 신중한 논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완전히 무시된 ‘도전과 응전’

토인비의 ‘도전·응답론’ 이야기를 왜 꺼내게 됐는가? 지금 노르웨이를 포함한 북구사회에서는 반전의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경우에 평상시에 주로 우파를 두둔해주는 루터교회(노르웨이의 국교)마저도 주요 이슬람 단체와 공동으로 강한 반전 성명서를 낼 정도이다. 주요 좌익 정당인 노동당의 대중적 기반인 전국 노총(LO, 약 80만명의 노조원을 대표함) 등의 핵심적 단체들이 확고한 반전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보수적 일간지마저도 미국의 전쟁을 ‘중앙아시아의 자연자원에 접근하기 위한 인종주의적 민간인 말살·인권침해’로 보고 있는 만큼, 인종차별 방지·인권옹호 운동가들이 앞장서서 전국적으로 데모를 이끌어나간다. 보수적 일간지에서마저도 “내 식구들을 이유도 없이 죽인 미국을 나는 평생 용서못할 것”이라는 미국폭격의 희생자 유가족들의 인터뷰들을 선보인다.

그런데 이번 사태의 책임을 전적으로 아랍·이슬람 세계에 물어 미국 행동의 ‘당위성’을 암시하는 한 저명한 지식인의 논문이 나와 반전 운동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그 논문의 영향력이 크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저자가 다름아닌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1947년생)라는 인도의 이슬람 출신 영국 문호이기 때문이다. 몇 작품이 각급 학교의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명성을 떨친 그는, <악마의 시>라는 이슬람의 교주 마호메트를 풍자한 포스트모던 소설로 1980년대 후반부터 이슬람 극우의 극단적인 노여움을 산 뒤에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는데, 미국의 <뉴욕타임스>(11월2일치)와 노르웨이의 <다그블라데트>(11월3일치)에 실린 그 논문의 비중은 매우 높다. 그러나 찬란한 문체로 쓰인 그의 논문을 읽어가면서 느낀 것은, 사회 현상의 표피 뒤에 숨겨져 있는 ‘도전에 대한 응답’이라는 인과론적 구조를 루시디가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루시디의 논문은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그게 바로 이슬람이 문제다”는 제목은, “이슬람과의 전쟁이 아니고 테러리스트와의 전쟁이다”는 식의 미국 지도부 궤변의 맹점을 찌른다. 루시디의 진단의 핵심은, 전쟁의 원인이 이슬람 과격분자들의 ‘반(反)서구적·반(反)근대적 편집병’에 있다는 것이다. 루시디가 생각하는 ‘편집병의 증후군’은, 이슬람주의를 이질시·적대시하는 대부분의 서구의 보수 논객들이 많이 언급하는 신에 대한 공포심리의 강조와 여성인권의 부정, 성직자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의 강요와 현대 대중문화의 절대적 부정 등이다. 한마디로 루시디는 이슬람주의를 ‘근대에 대한 중세 복고적·정신병적인 반란’으로 규정하고 이 반란이 마땅히 패배해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반전운동 확산에 찬물을 끼얹다

루시디의 논리가 헌팅턴의 악명높은 ‘문명 충돌론’과 확연히 다른 점은, 그가 이슬람주의를 ‘문명’도 아닌 단순한 ‘집단 정신질환’으로 보고, ‘이슬람 문화권의 이슬람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외친다는 것이다. 수백만명의 이슬람 신도들이 동시에 ‘집단 정신질환’에 걸린 이유로서, 루시디는 미국의 ‘부패한 독재정권에의 지원’도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지만, 주된 이유로는 ‘근대에의 적응 실패, 종교를 사생활적인 부분으로 보는 개인주의 수용에의 실패’ 등을 제시한다. 요약하자면 서구적 근대를 제대로 자기화하지 못한 자신들이 결국 ‘문명’한 인류를 위협할 만한 집단 정신질환이 생길 토양을 만들어낸 만큼, 반성하여 ‘근대화’에 좀더 힘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프간을 공격하는 미군과 영국군을, 루시디는 물론 공개적으로 ‘치료해주는 의사’로까지 칭찬하지 않지만 그가 이번의 전쟁에 ‘정신질환의 치유’라는 명분을 부여하는 것이 문맥상으로 파악된다. 지성인답게 루시디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공동적인 책임 유기에 대한 이슬람 세계 지성인의 반성”을 촉구하고 나선다. 식민주의 침략의 책임이 열등하고 잘 개화되지 못한 조선인들에게 있다는 개화 지상주의자 출신의 친일파 윤치호나 이광수의 논리와 놀랍게도 닮은 루시디의 논지는, 이미 일부의 보수 노르웨이 독자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이로 봐서는 그의 글이 반전 운동의 확산을 억제하는 쪽으로 작용할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까지 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이 전쟁에 명분이 있다”는 주장을 펴고자 하는 일부 우파와 극우들의 위치를 크게 강화시킬 가능성이 많다. 그들 ‘주전’(主戰)쪽에서 루시디의 ‘근대화 실패론’이 귀중하게 평가되는 이유는 외부인인 서구인이 아니라 이슬람 문화권의 내부인이 이슬람의 ‘내재적 결함’을 논한다는 것이다.

루시디의 글을 읽으면서 필자가 안타까웠던 부분은, 이슬람권 출신의 작가가 중동 상황의 표피만 보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피상성과 그 글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이용될지에 대해 관심없는 무책임성이었다. 루시디가 이미 글머리에 언급했던 토인비의 ‘도전·응답론’만이라도 인식했다면, “근대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기에 이슬람주의라는 집단 정신병에 걸렸다”는 자기비하적이며 단순한 논리를 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다 아는 서구·미국, 그리고 그 첨병인 이스라엘의 노골적인 침략과 약탈, 제국주의적 착취에 의한 ‘강요된 빈곤’ 이외에도 이슬람권이 20세기에 직면한 ‘서구의 도전’이 과연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지적인 도전 정도였는가?

서구적 제국주의적 ‘근대’가 중동의 후진성 심화라는 결과를 가져다준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루시디 자신도 미국에 의한 ‘중동 독재들의 지원’을 간단히 언급했지만, 이를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대부분 이슬람 국가 정권들의 전반적인 예속화와 대미 예속관계에 의한 부패한 독재의 영구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동·북아프리카의 친미 독재정권의 대다수는 그 주민들에게 약탈자·폭군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몇천명의 주민들을 “이슬람 게릴라 지원을 했다”는 혐의로 살육한 알제리의 군사정권, 고문의 기술로 전세계적인 악명을 떨친 이집트의 독재,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장군도 정상적인 정통성의 부재를 미국의 원조로 메우고 있다.

친미 약탈정권의 희생자인 주민들이 결국 반미 운동의 중심지인 사원과 이슬람주의를 구심점으로 결집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국가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과연 ‘집단 정신병’만으로 취급할 수 있는가? 과연 민중 복지와 교육, 그리고 전통 풍속의 옹호에 주력을 경주하는 모든 이슬람주의자들이 다 테러리스트인가? 그리고 친미 압제하에서 약탈적 정권의 희생자들이 힘을 모을 수 있는 또다른 구심점- 예컨대 좌익 정당이나 독립적 노조- 이 존재하는가?

용서받을 수 없는 ‘오만한 귀족주의’

물론 현재 뉴욕의 고급 주택가에서 살고 있는 루시디는(*지난 2004년에 루시디는 인도의 모델 겸 여배우 파드마 라크시미와 네번째 결혼을 했다. '신여성'에 대한 취향에 있어서도 루시디는 이광수와 닮은 듯하다), 언제나 고문과 암살의 위험하에서 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운동 방식을 ‘정신병’으로밖에 보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오만한 귀족주의이다. 그리고 과연 그는 양민들을 죽이는 미국 폭탄들이 중동인들로 하여금 사생활과 여성인권, 그리고 개인주의의 중요성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믿을 만큼 순진한가? 미국의 침략이 중동의 오히려 ‘저항적인 종교적 극우’들의 영향력만을 키울 것이라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사실이다.

루시디는 반전 운동의 무의미성을 암시하지만 사실상 그가 갈망한다는 ‘중동에서의 근대의 달성’은 반전 운동의 성공에도 크게 달려 있다. 반전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인 미국의 중동 독재 지원의 중지가 이루어져 중동에서도 민주화가 시작해야 그들이 공포·복종 심리를 떨쳐버리고 개인주의의 매력과 사생활의 귀중함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루시디가 이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가 속하는 포스트모던 문화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와 같은 ‘문화 귀족’들이 약자의 보호라는 문학인의 본연의 의무를 망각하고 제국주의에 대한 주구(走狗)적 역할을 하는 것이 사회적인 해악을 끼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반제·반전 운동의 큰 흐름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칼럼에서 언급되고 있는 뉴욕타임즈 기고문(http://www.nytimes.com/2001/11/02/opinion/02RUSH.html?ex=1172898000&en=7a8a39033f2c46bf&ei=5070) 전문은 아래와 같다.

November 2, 2001

Yes, This Is About Islam

By SALMAN RUSHDIE

LONDON -- "This isn't about Islam." The world's leaders have been repeating this mantra for weeks, partly in the virtuous hope of deterring reprisal attacks on innocent Muslims living in the West, partly because if the United States is to maintain its coalition against terror it can't afford to suggest that Islam and terrorism are in any way related.

The trouble with this necessary disclaimer is that it isn't true. If this isn't about Islam, why the worldwide Muslim demonstrations in support of Osama bin Laden and Al Qaeda? Why did those 10,000 men armed with swords and axes mass on the Pakistan-Afghanistan frontier, answering some mullah's call to jihad? Why are the war's first British casualties three Muslim men who died fighting on the Taliban side?

Why the routine anti-Semitism of the much-repeated Islamic slander that "the Jews" arranged the hits on the World Trade Center and the Pentagon, with the oddly self-deprecating explanation offered by the Taliban leadership, among others, that Muslims could not have the technological know-how or organizational sophistication to pull off such a feat? Why does Imran Khan, the Pakistani ex-sports star turned politician, demand to be shown the evidence of Al Qaeda's guilt while apparently turning a deaf ear to the self-incriminating statements of Al Qaeda's own spokesmen (there will be a rain of aircraft from the skies, Muslims in the West are warned not to live or work in tall buildings)? Why all the talk about American military infidels desecrating the sacred soil of Saudi Arabia if some sort of definition of what is sacred is not at the heart of the present discontents?

Of course this is "about Islam." The question is, what exactly does that mean? After all, most religious belief isn't very theological. Most Muslims are not profound Koranic analysts. For a vast number of "believing" Muslim men, "Islam" stands, in a jumbled, half-examined way, not only for the fear of God ?the fear more than the love, one suspects ?but also for a cluster of customs, opinions and prejudices that include their dietary practices; the sequestration or near-sequestration of "their" women; the sermons delivered by their mullahs of choice; a loathing of modern society in general, riddled as it is with music, godlessness and sex; and a more particularized loathing (and fear) of the prospect that their own immediate surroundings could be taken over ?"Westoxicated" ?by the liberal Western-style way of life.

Highly motivated organizations of Muslim men (oh, for the voices of Muslim women to be heard!) have been engaged over the last 30 years or so in growing radical political movements out of this mulch of "belief." These Islamists ?we must get used to this word, "Islamists," meaning those who are engaged upon such political projects, and learn to distinguish it from the more general and politically neutral "Muslim" ?include the Muslim Brotherhood in Egypt, the blood-soaked combatants of the Islamic Salvation Front and Armed Islamic Group in Algeria, the Shiite revolutionaries of Iran, and the Taliban. Poverty is their great helper, and the fruit of their efforts is paranoia. This paranoid Islam, which blames outsiders, "infidels," for all the ills of Muslim societies, and whose proposed remedy is the closing of those societies to the rival project of modernity, is presently the fastest growing version of Islam in the world.

This is not wholly to go along with Samuel Huntington's thesis about the clash of civilizations, for the simple reason that the Islamists' project is turned not only against the West and "the Jews," but also against their fellow Islamists. Whatever the public rhetoric, there's little love lost between the Taliban and Iranian regimes. Dissensions between Muslim nations run at least as deep, if not deeper, than those nations' resentment of the West. Nevertheless, it would be absurd to deny that this self-exculpatory, paranoiac Islam is an ideology with widespread appeal.

Twenty years ago, when I was writing a novel about power struggles in a fictionalized Pakistan, it was already de rigueur in the Muslim world to blame all its troubles on the West and, in particular, the United States. Then as now, some of these criticisms were well-founded; no room here to rehearse the geopolitics of the cold war and America's frequently damaging foreign policy "tilts," to use the Kissinger term, toward (or away from) this or that temporarily useful (or disapproved-of) nation-state, or America's role in the installation and deposition of sundry unsavory leaders and regimes. But I wanted then to ask a question that is no less important now: Suppose we say that the ills of our societies are not primarily America's fault, that we are to blame for our own failings? How would we understand them then? Might we not, by accepting our own responsibility for our problems, begin to learn to solve them for ourselves?

Many Muslims, as well as secularist analysts with roots in the Muslim world, are beginning to ask such questions now. In recent weeks Muslim voices have everywhere been raised against the obscurantist hijacking of their religion. Yesterday's hotheads (among them Yusuf Islam, a k a Cat Stevens) are improbably repackaging themselves as today's pussycats.

An Iraqi writer quotes an earlier Iraqi satirist: "The disease that is in us, is from us." A British Muslim writes, "Islam has become its own enemy." A Lebanese friend, returning from Beirut, tells me that in the aftermath of the attacks on Sept. 11, public criticism of Islamism has become much more outspoken. Many commentators have spoken of the need for a Reformation in the Muslim world.

I'm reminded of the way noncommunist socialists used to distance themselves from the tyrannical socialism of the Soviets; nevertheless, the first stirrings of this counterproject are of great significance. If Islam is to be reconciled with modernity, these voices must be encouraged until they swell into a roar. Many of them speak of another Islam, their personal, private faith.

The restoration of religion to the sphere of the personal, its depoliticization, is the nettle that all Muslim societies must grasp in order to become modern. The only aspect of modernity interesting to the terrorists is technology, which they see as a weapon that can be turned on its makers. If terrorism is to be defeated, the world of Islam must take on board the secularist-humanist principles on which the modern is based, and without which Muslim countries' freedom will remain a distant dream.

Salman Rushdie is the author, most recently, of "Fury: A Novel

 

 

 

 

맨마지막 필자 소개가 최근작 <분노>의 작가라고 돼 있는데, 그 소설이 이번에 번역돼 나온 것이다. 소개에 따르면, "1988년 작 <악마의 시>로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오르는 동시에, 이슬람계의 격분을 촉발하며 사형선고를 받은 작가 살만 루슈디. 그가 영국에서의 도피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집필한 첫 번째 작품이다. 2000년 뉴욕을 무대로 쓴 이 자전적 소설에서 루슈디는 '분노와 폭력의 21세기'를 냉소적으로 그려낸다."



소개된 줄거리에 따르면 "케임브리지 대학의 사상사 교수인 말릭 솔랑카는 학문적인 삶에 염증을 느끼고 종신 교수직을 포기한다. 학교를 그만둔 그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온다. BBC에서 그에게 대중적인 심야 철학사 시리즈 기획을 제안하면서, 방송계에 진출하게 된 것. 지식인 인형들이 나와 대담을 나누며 논쟁을 벌이는 '리틀 브레인의 모험'은 당대의 컬트 클래식으로 자리 잡고, 이 프로그램의 사회를 맡은 여자 인형 '리틀 브레인'은 신드롬 수준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인형 '리틀 브레인'이 곧 저속하고 속물적인 대중의 아이콘으로 변질되자, 솔랑카는 참을 수 없는 노여움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이 가족들을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다 도망치듯 미국으로 건너간다. 부와 힘이 절정에 달해 있는 곳, 모든 과거가 사라지고 현재만 있는 곳, 모두가 현대인이라는 익명 속에 살아가고 있는 미국 땅에서 솔랑카는 철저하게 은둔생활을 한다. 그러나 분노는 잠재워지지 않는다."

거기에 덧붙은 코멘트에 따르면 "인도 출생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것, 아내와 어린 자식을 남겨두고 미국으로 도피한 것,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연인의 흉터까지... 자신의 실제 이력과 매우 흡사한 주인공 솔랑카의 입을 빌려 루슈디는 21세기 미국의 표정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그런 점에서도 루시디판 <나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이광수의 <나의 고백>(1948)은 소설이 아닌 수필 형식의 회고록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덧붙이자면 루시디는 재작년에 부시 대통령과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이슬람교를 풍자한 소설 ‘악마의 시’로 유명한 영국 작가 살만 루시디(58)가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의 일방주의 외교정책이 이슬람 테러리즘을 부추긴다고 비판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12일 보도했다. 루시디는 “사람들을 반미로 뭉치게 하는 현 (미국) 행정부의 기묘한 능력이 이슬람 테러주의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며 “9·11테러 이후 세계가 미국에 느낀 엄청난 동정이 급속히 사라지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은 미국을 떠나자마자 미국의 적들과 미국의 우방들이 아주 비판적으로 미국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루시디는 미국에 대한 자신의 감정 변화 이유가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 정책들과 세계 다른 나라들과 진지하게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 태도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따라서 “세계사의 이 특정한 순간에 일반 미국인들은 세계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넓히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면서 국제적 대화를 강조했다. 인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성장한 루시디는 전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툴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1989년 ‘악마의 시’를 불경하다며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이후 살해 위협을 받으며 수년 간 숨어 살아왔다
.(국민일보, 05. 04. 14)

그렇다고 루시디가 반미주의로 전향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이슬람을 '비하하는' 소설 <악마의 시>를 썼다고 해서 그를 반이슬람주의 작가로 매도하는 것만큼이나 성급한 일로 보인다. 문제는 그러한 불경과 분노의 '문학적 형식'이다(이 점에서 이광수는 적어도 '작가'로서는 철저하지 못했다. 물론 그에겐 '소설'보다 더 중요한 '대의'들이 많았겠지만). 루시디의 <분노>는 그런 점에서 흥미를 끈다. 그의 고백/분노는 미국이란 나라, 더 나아가 '이 세계'에서 한 (망명)작가가 어떤 삶을 살 수 있고 어떤 소설을 쓸 수 있는가에 대한 한 가지 척도를 제시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덧붙여 이광수에게 결여돼 있었던 게 무엇인지 확인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07. 03.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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