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16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최근에 문제가 된 5.18 부정 발언 때문에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어크로스)의 주장을 다시 되새겨보았다.
주간경향(19. 03. 04) 혐오표현, 이대로 두고볼 것인가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라는 물음에 저자의 문제의식이 집약돼 있다. 간단히 말하면 혐오표현은 소수자(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표현이다. 소수자 혐오라는 점에서 ‘남혐’과 ‘개독’ 같은 경우는 혐오표현에 해당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과 기독교도는 현재 다수자의 지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은 소수자를 사회에서 배제하고 차별하는 효과를 낳는다. 표현 수위와 무관하게 혐오표현은 차별을 재생산하고 공고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혐오표현은 증오범죄로까지 치달을 수 있다. 침묵과 무시가 능사일 수 없는 이유다.
혐오표현의 대표 사례로 여성혐오(여혐)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한 건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가 사회문제로 부각된 2010년부터이고,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은 이를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켰다. 여성이나 이주자 같은 사회적 소수자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일베식 혐오가 물의를 일으키면서 이에 대한 규제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입법화가 지체되는 사이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제는 정치권(자유한국당)에서조차 공식석상에서 막말과 함께 역사 부정과 왜곡된 인식을 담은 말들을 앞다퉈 쏟아내고 있다.
혐오표현을 서슴지 않는 이들이 방패로 내세우는 것은 ‘표현의 자유’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인 표현의 자유는 충분히 보장되어야 하지만 다수자의 횡포를 정당화하는 핑계로 악용되는 것이 문제다.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혐오표현을 적절히 규제하는 방도를 찾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세계 주요 국가들은 이미 혐오표현을 처벌하거나 이에 대응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견주면 한국은 상당히 뒤처진 상태다.
예외가 없지는 않다. 미국의 경우가 그러한데, 특수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미국에서는 ‘서로 침범하거나 간섭하지 말자’는 최소주의를 원칙으로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혐오표현에 ‘개입’하는 미국 나름의 방식이다. 혐오표현을 제한하는 다양한 사회적 기제들이 작동하고 있으며, 정치인이나 저명인사들이 수시로 인종차별이나 성소수자 차별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힌다. 형사 규제를 제외한 모든 규제가 시행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혐오표현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면 이의 대응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범위한 규제를 가하는 ‘유럽식 접근’과 최소 규제를 선호하는 ‘미국식 접근’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규제 찬성론과 규제 반대론이다. 감안해야 할 것은 미국식 접근은 혐오표현에 대해 일관되고 명확하게 대응하는 미국과 같은 사회적 조건이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입장을 바꾸거나 정치인이 노골적인 혐오표현을 공론장에서도 서슴지 않는 한국의 상황은 당연히 미국 사회와 같지 않다.
혐오와 차별이 공존과 상호존중의 가치와 양립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책임있는 행동이다. 저자의 우려대로 ‘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가 ‘저들을 반대한다’로, 그리고 다시 ‘저들을 박멸하자’로 이행하는 건 한순간이다. 혐오표현과 역사 부정에 대해 불관용이 필요한 시점이다.
19. 0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