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사를 일단락짓고 한숨 돌리니 지금 시간이다(마무리 뒷정리가 아직 남아 있지만 오늘은 더이상의 기력을 짜낼 수 없다). 아직 바닥에 책이 많이 남아있지만(예상한 바이다) 그래도 책을 찾아볼 수는 있게 되었다. 지레 포기하고 책을 다시 구입하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한다.

내친 김에 이번주에 서재에 쌓여있는 책을 거실이나 베란다로 빼내면(모두 서가로 돼 있다) 강의준비와 집필에 좀더 최적화된 공간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책상이 결고 작지 않은데 지금은 빈틈이 전혀 없는 상태라 책을 펴놓고 읽을 수가 없다. 그리고 서가 배치를 강의와 집필에 맞게 바꾸려고 하고, 강의자료도 체계적으로 정돈하려 한다. 진작 했어야 하는 일인데 관성으로 미뤄두고 있었다.

책이사를 하며 다시 느낀 것이지만 이제는 읽을 수 있는 책이 한정돼 있다는 분명한 자각이 필요하다. 나이와 체력을 고려하건대 그렇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새로운 책이나 저자와 만나기보다는 이미 만난 책이나 저자와의 인연을 마무리하는 게 필요하다고 할까. 그리고 계획하고 있는 책들도 더 늦기 전에 착수해야 할 것 같다.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을 것이기에. 앞으로 10-15년 정도이지 않을까.

내게 책이사라는 건 집에 있는 책들을 서고에다 옮겨두는 것인데 지난 여름에 많이 들여놓은 책장 덕분에 오늘 옮긴 책들은 모두 서가에 꽂을 수 있었다(급하게 정리하고 나오느라 사진을 찍지 못했다. 여름에 빈 서가 사진을 올려놓았었는데 그걸 책으로 거의 다 채웠다고 보시면 된다). 그리고 강의에 필요한 책 몇권을 다시 빼들고 왔다(백석 전집도 가져오려다 참았다). 책이사의 수확이랄까.

<소설의 곡예사>(문학과지성사)는 토마스 만 연구서다. 주요 장편들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는데 정작 강의 때는 참조하지 않았다. 특히 후기 장편들에 대해 다시 강의한 일이 생기면 요긴하게 참고해 보려 한다.

그리고 이미 읽은 책들이지만 지젝의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도 라캉의 <에크리>가 번역돼 나온 김에 들고 왔다(<소설의 곡예사>와 <라캉>은 품절된 책이군). 니콜러스 로일의 <자크 데리다의 유령>(앨피)은 원서 복사본. 오전에 번역본을 발견한 우연 때문에 손이 갔다.

로일의 책은 번역이 썩 좋지는 않다고 예전에 페이퍼를 쓰기도 했는데, 몆 권의 데리다 입문서를 다시 읽으려는 김에 다시 검토해보려 한다. 데리다를 다시 읽는 건, 그간에 사둔 책이 너무 많아서 더 미뤄둘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최근에 유튜브에서 짧은 동영상을 몇 개 본 때문이기도 하다.

오래 전 일이지만 나는 영화 <데리다>의 자막 작업을 하기도 했다. 충무로역 재미동의 요청으로 작업을 하고 소개강의도 한 적이 있으니 나름대로 인연이 없지 않다. 같은 작업을 영화 <지젝!>에 대해서도 했다. 나의 철학적 관심은 이 두 철학자 사이에서 진동한다(내가 가장 많은 책을 갖고 있는 두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인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규모의 정리가 필요하다. 집필 계획들 가운데 하나다.

인간의 발견과 자기인식의 역사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셰익스피어, 그리고 괴테를 거쳐서 프랑스혁명과 19세기 중반 프랑스문학, 미국문학, 독일 관념론을 거쳐서 19세기 후반의 러시아문학, 프로이트와 정신분석의 탄생, 그리고 라캉과 조이스, 데리다와 지젝에 이르는 여정이 갖는 의미를 해명하는 게 나의 관심사다. 더하여 20세기와 21세기 문학사의 해명. 과제에 비하면 시간이 결코 많지 않다.

이 과제가 대단한 무엇을 목표로 하는 건 아니다. 나 자신에 대한 이해, 그런데 나 자신은 인류의 일원이기에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한 가지 이해를 표현하고 공유하려는 것뿐이다. 스무 살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 청춘을 대가로 지불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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