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마땅한 김소월 평전이 없다고 적었는데 그와 무관하지 않게도 그의 스승 김억 평전도 나와있지 않다. 두 사람의 긴밀한 관계는 사제지간 이상이었기에(안서는 소월의 멘토이자 편집자였고 요즘식으로는 매니저였다) 둘의 관계에 대한 자세한 해명이 없으면 소월 평전은 성립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소월 평전 쓰기의 난관이면서 성패의 관건이다.

김소월 시 강의에서 내가 강조한 것은 김억 번역시의 시사적 중요성과 김억과 김소월의 관계 해명의 필요성이다. 두 가지는 한국 근대시 형성과 소월시 이해에 필수적인 선결 요건이다. 김억의 번역시에 대해서는 다행히 연구자들의 손길이 많이 닿고 있어서 연구서와 논문이 계속 나오고 있다. 아쉬운 것은 김억과 소월의 관계다. 해명까지 필요한 것은 단순한 사제지간이나 동지적 관계를 넘어서 애증의 관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주로 시에 대한 견해 차이와 소월의 재능에 대한 김억의 질투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단적인 사례가 ‘진달래꽃‘을 두고 벌어진 갈등이다. ‘진달래꽃‘은 공식적으로는 1922년 ‘개벽‘지 발표본과 시집 ‘진달래꽃‘(1925), 그리고 소월 사후에 김억이 간행한 ‘소월시초‘(1939)에 실린 것까지 세 가지 판본이 있다. ‘개벽‘에 발표된 뒤에 쓰인 김억의 편지에는 또다른 ‘진달래꽃‘이 등장하기에 네 가지 판본이 있다고 해도 된다. 시집 ‘진달래꽃‘본을 통상 정본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판본들 간의 차이를 비교하고 음미하는 일도 소월시 이해를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그 대목에서부터 난관이 시작된다. 여러 판본은 흔히 소월이 개작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으로 이해되지만 김억이 편집자로서 제자의 시에 가필과 첨삭을 임의로 하기도 했던 점을 고려해야 한다. 미묘한 부분에서는 사소한 첨삭도 시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놓기 때문에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가령 ‘즈려밟고‘라는 시어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게다가 ‘개벽‘ 발표시에 ‘진달래꽃‘에는 ‘민요시‘라는 부제가 붙여졌는데 이는 순전히 김억의 독단에 의한 것이다. 소월은 ‘민요시‘란 분류도, ‘민요시인‘이라는 명칭도 마땅찮아 했다. 민요시 운동을 주창한 김억이 제자의 시를 동원한 형국이다.

오늘날까지 소월을 ‘민요시인‘으로 부르는 게 일반적인데(그러면서 7.5조의 율격을 들먹인다), 그건 소월의 시나 삶에 별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소월시문학상까지 있는 나라에 소월 평전이 없는 이유가 대략 가늠이 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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