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의 <안티고네의 주장>(동문선, 2005)을 예전에 읽다가 체크해놓은 대목들이 있어서 다시 대조해보기 위해 원서를 찾았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이런 일이 드물진 않다. 내일 학교에 가서 다시 복사해야 할까?). '안티고네'란 주제에 대해서라면 한 학기 강의가 가능할 정도로 많은 수의 관련서들이 있고 나는 그 중 몇몇 권을 갖고 있다. 이 참에 견적이라도 내볼까 했는데 며칠 미뤄야겠다.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버틀러의 책과 함께 임옥희의 <주디스 버틀러 읽기>(여이연, 2006)를 참조하실 수 있겠다. 버틀러의 주저 7권에 대한 해설을 겸하고 있는 이 책은 당연히 <안티고네의 주장>에 대해서도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내가 꺼내든 책은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이다. 전체 6개의 장에서 제5장이 '프로이트 독자로서의 주디스 버틀러'를 다루고 있는바, 지젝의 독자들뿐만 아니라 버틀러의 독자들도 필독해야 하는 장이다(두어 페이지만 읽어도 이토록 재미있는 책을 사람들이 왜 읽지 않는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guilty pleasure'라도 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안티고네'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도 다루어지는군.  

미리 말하자면, 이달말쯤에는 지젝의 또다른 주저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도 출간된다(예정대로 출간된다면 2월의 이론서로 꼽아둘 참이다). 참고로, 지젝 스스로가 꼽은 네 권의 대표작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 <까다로운 주체>, 그리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시차적 관점>(2006)이다. 뒤의 두 권은 분량도 만만찮은데, 지젝의 이론적 매트릭스를 구성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만큼 반복적으로 읽어두는 게 지젝을 이해하는 관건이다(*<부정성과 함께 머물기>는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란 제목으로 2월 중순에 출간됐다. 이제 <시차적 관점>만 소개되면 지젝의 '4대 주저'는 모두 번역된 셈이 된다).  

각설하고, 지젝의 버틀러론을 시간날 때마다 정리해둘 작정이다. 그 첫번째 꼭지는 '왜 도착은 전복이 아닌가?'이다. 이것만으로도 견적이 너무 많이 나와서 '도착적 주체와 히스테리적 주체'란 제목을 달고 도착증과 히스테리증을 비교하고 있는 대목 정도만을 따라가볼 생각이다(이 절은 명실상부한 '도착적 철학자' 미셀 푸코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건 다른 자리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먼저, 서두: "'칸트와 사드와 더불어'라는 주제에서 이끌어낼 핵심 결론들 가운데 하나는, 미셸 푸코처럼 도착의 전복적 잠재력을 옹호하는 자들이 조만간 프로이트적 무의식을 부정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395쪽) 즉, 전복의 철학이나 정치적 기획은 프로이트적 무의식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것. 왜인가?

"이론적으로 이 부정은 프로이트 스스로가 강조한 바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정신분석에 있어서 히스테리와 정신증은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길을 제공한다, 즉 무의식은 도착증을 경유해서는 접근할 수 없다. 프로이트를 뒤따라서 라캉은, 도착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건설적인 태도인 반면에 히스테리는 훨씬 더 전복적이며 지배적 헤게모니를 위협한다는 점을 되풀이해서 강조했다."(396쪽)

그러니까 겉보기에는 훨씬 더 '쎄' 보이는 도착보다도 히스테리가 오히려 더 전복적이라는 것. 이것이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갖는 역설이다('프로이트로 돌아가자!'란 구호를 내건 라캉이 이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한 건 당연한 일이겠고). 물론 상식적으로 보자면 상황은 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도착증자들은 히스테리증자들이 단지 은밀하게 꿈꾸는 것을 공공연하게 실현하고 실행하지 않는가?"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우리는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역설과 대면하게 된다. 무의식은 우리가 (히스테리증자로 머무는 한에서) 공상하기만 할 뿐 실현하는 것은 기피하는 은밀한 도착적 시나리오들로 구성되는 것인 아닌 반면에 도착증자들은 영웅적으로 '그것을 한다'는 역설과 말이다."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역설이란 무엇인가? 그게 은밀한 도착적 시나리오들과 무관하다는 것. 그러니 그러한 시나리오를 실현/실행하는 건 비록 '영웅적'이라 하더라도 헛발질이다. "우리가 우리의 은밀한 도착적 환상들을 실현(acting out)할 때 모든 것이 폭로되지만 무의식은 여하간 빠뜨리고" 마는 것이다. 무의식은 거기에 없었다?

왜인가? "왜냐하면 프로이트적 무의식이란 은밀한 환상적 내용이 아니며, 오히려 사이에 끼여드는, 은밀한 환상적 내용을 꿈의 텍스트(혹은 히스테리적 증상)으로 번역/치환하는 과정에 끼어드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이 향유를 가져오는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도착증자는 무의식의 핵심인 그 틈새를, 그 '화급한 물음'을, 그 장애물을 흐려놓는다."(396쪽)

히스테리와 도착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다. "다시 말해서 도착증자는 (무엇이 향유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타자에 대한) 답을 알기 때문에 무의식을 배제한다. 그는 그것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는다. 그의 위치는 흔들릴 수 없다. 반면에 히스테리증자는 의심한다. 즉 그녀의 위치는 영원하고도 구성적인 (자기-)물음의 자리이다: 타자는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지? 타자에게 나는 무엇이지?..."(397쪽) 마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처럼!

 

"도착과 히스테리의 이런 대립은 특별히 오늘날 적실하다. 주체성의 전형적 양태가, 상징적 거세를 통해 부성적 법칙에로 통합된 주체인 것이 더 이상 아니라, 즐기라는 초자아의 명령을 따르는 '다형적으로 도착적인' 주체인, 우리 '오이디푸스 몰락'의 시대에 말이다." 즉, 오늘날의 주체는 '다형 도착적' 주체이다. '오이디푸스 몰락'의 시대에 넘쳐나는 건 갖가지 도착증자들의 행태이다(그럼에도 여전히 안티-오이티푸스가 우리의 구호인가? 누가 오이디푸스에 시달리는가? 아래 사진은 최근에 뜨고 있다는 인형방).

따라서, 오늘날 정치적 무대에서 중요한 것은 "도착증의 닫힌 원환고리에 사로잡힌 주체를 어떻게 히스테리화할 것인가"이다. 지젝의 통찰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후기 자본주의 시장 관계의 주체는 도착적이며, 반면에 '민주적 주체'는 내속적으로 히스테리적이다. 다시 말해서, 시장 메커니즘에 사로잡힌 부르주아와 보편적인 정치적 영역에 연루된 시민의 관계는, 주체적 경제에서 볼 때, 도착증과 히스테리의 관계이다."(397-8쪽)

"따라서 랑시에르가 우리의 시대를 '후-정치적'(*탈정치적)이라고 부를 때 그는 정치적 담론이 히스테리에서 도착증으로 이처럼 이행했음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후정치'란 사회적 사태들을 관리하는 도착적 양태이며, '히스테리화된' 보편적/탈구적 차원이 박탈된 양태이다."(강조는 나의 것)

최근에 이러한 포스트-폴리틱스의 시대, 도착적 '탈정치 시대'를 징후적으로 드러내주는 유행어가 '참 나쁜 대통령' 아닐까? 아마도 곧 웃찾사나 개그야에서도 패러디될 만한 이 유행어를 듣거나 발언하면서 우리가 희희락락할 때 도착적 쾌락은 따로 먼 곳에 있지 않다('탈정치'의 노무현 버전이 '탈권위'이므로 대통령에 대한 조롱과 희화화는 자초한 면도 없지 않다). 관련기사를 읽어보는 것으로 이 페이퍼는 일단락짓도록 한다.

한겨레(07. 01. 12) '참 나쁜~’ ‘참 좋은~’ 요즘 정치권 최고 유행어  

노무현 대통령이 새해 벽두에 꺼내든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 카드는 단숨에 정국을 개헌정국으로 몰아넣었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정치판을 뒤흔들 수 있는, 매우 엄중한 ‘개헌 국면’ 속에서, 아기자기한 유행어와 패러디가 탄생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입으로부터 시작된 ‘참 나쁜 대통령’ 시리즈다.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 제안에 박근혜 전 대표가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단순명쾌하게 비판하자, 이튿날 노 대통령이 재반박하더니, 다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안에서 각각 이 말을 빗대 엄호와 반격을 펴면서 ‘참 나쁜 ~’, ‘참 좋은 ~’이 정치권에 유행어가 됐다.

#1. ‘참 나쁜 대통령’의 탄생/ 1월9일

지난 9일 노무현 대통령에 개헌 제안을 하자, 박근혜 전 대표 캠프는 박 전 대표의 말이라며 다음과 같은 반응을 기자들에게 이메일로 돌렸다.

<박근혜 전 대표, 노무현 대통령 회견 관련 반응>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행하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 보이느냐?”

#2. 노무현의 반격/ 1월10일

이튿날인 10일, 3부 요인 및 헌법기관장과의 청와대 오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다.

“나쁜 대통령은 자기를 위해 개헌하는 대통령이다. 이번 개헌은 나를 위한 개헌이 아니고, 차기 대통령을 위한 개헌이다.”

정권연장을 위해 3선 개헌을 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염두에 둔 듯한 발언이다. 전날 자신에게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말한, 박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전 대표를 공격한 것이다. 청와대는 청와대브리핑에 ‘나쁜 개헌, 나쁜 대통령’이라는 글을 올려 노 대통령을 엄호했다.

“우리 역사에 정말 ‘나쁜 개헌, 나쁜 대통령’이 있었다. 자신의 임기를 연장하려는 개헌, 독재를 항구화하고자 한 개헌, 그것을 날치기나 폭력으로 추진하려 했던 대통령이 진짜 나쁜 개헌, 나쁜 대통령이다. 박근혜 전 대표에게 묻는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을 추진한 이승만 대통령, 3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고 유신 헌법을 제정한 박정희 대통령, 단임제이지만 7년 임기를 누릴 수 있도록 개헌한 전두환 대통령은 어떤 대통령인가.”

#3. 박근혜, “참 좋은 대통령 만들자”/ 1월11일

11일 서울 여의도에 새로 마련된 한나라당 서울시당 사무소 개소식에서 ‘참 나쁜’ 시리즈가 업그레이드됐다. 이 행사는 강재섭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와, 박근혜 전 대표, 이명박 전 서울시장, 손학규 전 경기지사, 원희룡 전 최고위원, 고진화 의원 등 대선 주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먼저, 강재섭 대표가 인사말에서 개헌론을 비판하며 외쳤다. “노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국가안보나 국민경제는 없고 오로지 선거와 정권연장 음모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볼 때도 ‘참 나쁜 대통령’입니다!”

행사장에는 “명언이다”, “옳소”라는 추임새와 환호성이 터져나왔고, 박근혜 전 대표도 환하게 웃었다. 이어 단상에 오른 박 전 대표가 말했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서 민생 챙기기에 매진해도 모자라는 정권이 또다시 개헌을 들고 나오면서 온 나라를 흔들어 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정신을 차리고 한마음으로 뛰어서 ‘참 좋은 대통령’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4. 김한길 “참 나쁜 발상”/ 1월12일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확대간부회의에서, ‘참 나쁜’ 패러디를 활용해 한나라당을 공격했다. “한나라당에 말씀드린다. 헌법이 규정한 헌법 발의권 행사하는 대통령에 무대응하고 함구령으로 일관하는 한나라당은 초헌법적 발상이고, 초헌법적 발상은 ‘참 나쁜 발상’이다.”

이날 여의도 국회 주변 식당가에서는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참 나쁜 사람이군요” 등 ‘참 좋고, 나쁜’ 시리즈가 밥상, 술상에 올랐다.(황준범 기자)

07. 01. 11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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