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에 '이현우의 언어의 경계에서'를 4주에 한번씩 연재하게 되었다. 오늘 첫 회가 나갔는데(지면에는 축약 버전이 실렸다) 원전 번역으로 새로 나온 카잔차키스(카잔자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음미해보았다. 나대로의 해석은 <너의 운명으로 달아나라>(마음산책)에서 다룬 바 있다.  



한겨레(18. 06. 15) ‘그리스인 조르바’는 럼주의 향을 풍긴다

 

그리스의 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1946)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일찍이 번역가이자 소설가 이윤기 선생의 번역으로 소개되어 널리 읽혔고 수많은 번역본이 뒤를 이었다. 원작이 그리스어로 쓰인 걸 고려하면 대부분은 영어판에서 옮긴 중역본들이었다. 그리스학 전공자인 유재원 교수의 원전 번역본이 눈길을 끄는 것은 그래서이다. 원전 번역본과 중역본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동안 우리가 읽어온 <그리스인 조르바>와는 전혀 다른 <그리스인 조르바>가 따로 있을까? 자연스레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흥미로운 건 영어권에 소개된 <그리스인 조르바>도 사정이 우리와 비슷했다는 사실이다. 1950년대 초에 프랑스어판(1947)을 저본으로 옮긴 중역본이 그간에 읽히다가 2014년에 가서야 그리스어에서 직접 긴 새 번역본이 나온다. 카잔차키스 전문가로 대표 평전까지 쓴 피터 빈이 번역자인데 그는 기존 번역본이 많은 누락과 오역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윤기판을 비롯해서 대다수 한국어판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는 오류였다. 몇 가지 예외가 새로 나온 번역본들인데, 김욱동판(민음사), 이종인판(연암서가)은 피터 빈의 새 영어판을 옮긴 것이고 이재형판(문예출판사)은 2015년에 나온 새 프랑스어판을 옮긴 것이며 유재원판(문학과지성사)은 그리스어판 번역이다.



지금까지는 이윤기판이 가장 많이 읽히는 번역본이었지만 원전 번역과 새 중역본들이 그에 도전장을 내민 형국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둘러싼 ‘번역 전쟁'의 풍경을 잠시 들여다보면 어떨까. 소설의 결말에서 나(카잔차키스)가 스스로 자유롭기에 조르바에게 동행할 수 있다고 말하자 조르바는 아직 그렇지 않다고 대꾸한다. 매여 있는 줄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길어서 자유롭다고 생각할 뿐이고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그 줄을 잘라내야 한다고 충고한다. 언젠가는 그 줄을 잘라낼 거라고 하자 조르바는 정색하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지요. 하지만 당신에게 좋은 머리가 있으니까 잘은 해나가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이윤기) 조르바의 말은 카잔차키스가 좋은 머리를 갖고 있기에 계산하다 보면 줄을 잘라낼 수 없을 거라는 것이다.

 

같은 대목을 원전 번역은 이렇게 옮긴다. “대장, 그건 어렵수다. 아주 어려워요. 그러려면 미쳐야 하는데, 듣고 있수? 미쳐야 한단 말요. 모든 걸 걸어야 해요! 하지만 대장, 당신은 머리가 있어 그게 대장을 갉아먹고 있죠. 정신이란 식료품 주인 같은 거요. 장부를 팔에 끼고서는 얼마 들어왔고 얼마 나갔고, 이건 이득이고 이건 손해고, 일일이 기입하죠. 정신은 알뜰한 주부 같아서 모든 걸 포기하지 못해요.”(유재원)

 

‘머리'와 ‘정신'의 차이가 대수롭지 않다면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과 '알뜰한 주부'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느껴진다. 전자가 직설적이라면 후자는 반어적이기에 그렇다. 아무려나 카잔차키스 같은 먹물은 줄을 잘라내기 어려울 거라는 게 조르바의 장담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 점이 조르바로서는 안타깝다. “그러나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노란 카밀레 맛이지. 멀건 카밀레 차 말이오. 럼주 같은 맛이 아니오.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이윤기) “하지만 그 끈을 자르지 않으면, 대장 인생에 뭐가 있겠수? 캐모마일 차, 맛있는 캐모마일 차 정도? 세상을 뒤집어엎을 럼주는 절대 아니죠.”(유재원)

 

이 대목에서도 ‘멀건 카밀레 차'를 ‘맛있는 캐모마일 차'라고 하면 반어적으로 말하는 게 된다. 다른 번역본들에서는 ‘희석한 캐모마일 차'(김욱동)나 ‘이 맛도 저 맛도 없는 카밀레 차'(이재형)라고 옮겼다. 차이가 없지는 않지만 판을 뒤엎을 정도는 아니다. 캐모마일과 럼주의 대조만 확실하게 전달된다면 번역의 임무는 완수된 것으로 보아도 좋겠다. 책상물림과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조르바라면 번역본의 사소한 차이들을 장부에다 적어놓을 것 같지도 않다. 조르바의 가르침에 충실하자면 <그리스인 조르바>는 캐모마일 차를 마시며 읽을 게 아니라 럼주를 마시며 읽어야 한다. 멀겋게 읽을 것인가 독하게 읽을 것인가. 번역본을 검토해본다고 나섰지만 좀상스러운 일 같아서 접어둔다.

18.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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