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신간들 가운데 가장 묵직한 책은 며칠전 소개한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배>(안티쿠스)와 함께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1914-1984) 등이 편집한 <사생활의 역사>(새물결, 2006)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두 권이 마저 나와서 전체 5권이 완간된 이 책은 올해 완간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함께 '사건'이라 할 만한, 새물결출판사의 역작이다.

 

 

 

지난 2002년에 나온 1,3,4권 중에서 나는 한권을 갖고 있는데 당장은 눈길이 닿지 않는다(출판사 할인판매시 30% 할인 가격으로 구입했던 기억이 있다). <아동의 탄생>이나 <죽음 앞의 인간>이 아리에스의 대표작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제안으로 기획됐다는 <사생활의 역사>가 갖는 의의도 간과될 수는 없겠다. 책을 당장 곁에다 둘 형편은 아니어서 리뷰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사회학자 김종엽 교수의 글인데, 나름대로 의미가 없지 않은 건 (내 기억에) 필립 아리에스란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이 그의 <웃음의 해석학, 행복의 정치학>(한나래, 1994)에서였기 때문이다. 그게 어느덧 12년 전 이야기다. 결자해지 차원에서라도 아리에스에 관한 해설은 그의 몫으로 돌리는 게 낫겠다.  

경향신문(06. 12. 09) 公과 私 영역, 분리와 융합의 역사

‘사생활의 역사’는 어린이와 죽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역사학을 혁신한 필립 아리에스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으며, 아날학파의 노장 및 신진 모두의 역량이 투입돼 프랑스에서 1985년에 출간되었다. 모두 다섯 권으로 된 1권(로마제국~11세기)과 3권(르네상스~계몽주의), 4권(프랑스 혁명~1차 세계대전)이 2002년에 먼저 우리말로 번역되었는데, 이때 각종 매체의 서평들은 부부의 침실과 귀족의 일기장과 집안 하녀들의 생활 같은 영역에 대한 핍진한 연구에 경이감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고 의의는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번에 2권(중세~르네상스)과 5권(1차 세계대전~현대)이 나옴으로써 마침내 완역됐는데, 더 이상 사생활 속으로 역사적 시선을 투과시키는 것의 중요성과 의미를 해설할 필요는 없어진 듯하다. 먼저 번역된 ‘사생활의 역사’가 제법 널리 읽힌 데다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도 이 책과 같은 시도가 이미 꽤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생활의 역사’ 전체에 대한 논평보다는 이번에 새로 번역된 것들을 중심으로 논의하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필자가 보기에 두 책 중 2권보다 5권이 더 적합해 보인다. 2권을 읽으려는 독자는 이미 이전 번역을 읽고 그 결락 부분을 채우려는 독자일 것이고, 그런 독자에게 책의 의의를 논하는 것은 불필요해 보인다. 이에 비해 5권은 이미 ‘사생활의 역사’를 읽어본 독자에게도 새로울 뿐 아니라 읽어본 적이 없는 독자가 ‘사생활의 역사’에 접근해 보려 할 때도 제일 먼저 읽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 독서의 쉽고도 좋은 길은 역시 자기가 속한 시대와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5권은 흔히 사생활이라 불릴 만한 것인 섹스와 자신의 육체에 대한 태도나 가족생활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변화와 제1,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대도시의 형성사가 다뤄진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사생활의 역사가 친밀한 인간관계의 영역, 그리고 개인의 자기관계를 다루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런 역사를 다루기 위해서도 사생활의 영역을 규정하는 공·사의 분리선과 변동을 그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제1차 세계대전은 규모나 전개 양상 모든 면에서 인류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런 전쟁은 개인의 사생활을 바꿀 뿐 아니라 군인의 참호 생활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사생활을 만들어냈다. 그렇기 때문에 사생활의 역사를 추구하는 한 전쟁에 대한 분석을 피할 수 없다. 같은 논리의 연장선에서 20세기에 대두한 집단수용소는 수용소 안에서의 삶이라는 새로운 사생활을 야기했기에 분석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이렇게 공적 구조의 변화가 사생활의 변화와 적응 그리고 새로운 창출을 야기할 뿐 아니라 사생활의 변화가 공적 구조의 변화와 개입을 유발하기도 한다. 20세기는 이혼과 동거가 폭증하고 임신과 섹스가 역사상 어느 때보다 인간의 의지에 의해 조절된 시대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병원과 법률이라는 공적 장치가 끊임없이 개입해 들어온다. 결국 가족생활의 주도권이 국가와 개인에 의해서 분점되고 개인은 그 여분의 주도권마저 의사와 교사 그리고 양육 전문가와 심리치료사 같은 각종 전문가 집단에 양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가족은 오로지 감정생활이라는 단 하나의 줄에 매달려 나부끼게 된다.

그리하여 제5권은 사적 영역의 역사이자 그 자리에서 바라본 공적 영역의 역사가 되는데, 책장을 계속 넘겨보면 이 책의 저자들이 좀더 야심적임을 알게 된다. 문화적 다양성을 다룬 제3부는 종교와 내면생활의 변화(‘가톨릭 신자들: 상상과 죄’), 정치적 정체성(‘공산주의자 되기?-하나의 존재방식’), 인종적 정체성(‘유대인으로 살아가기’와 ‘이민자로 살아가기’)을 다룸으로써 20세기가 만들어낸 특유한 자아 정체성의 궤적을 범례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제4부는 미국·스웨덴·이탈리아·독일의 사생활을 분석함으로써 사생활의 비교사회학의 토대를 놓고 있다. 이렇게 해서 ‘사생활의 역사’는 한 권의 훌륭한 20세기 서양사에까지 근접해 간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이 책의 의의는 서구인의 삶 그리고 사생활이라는 소재에 대한 관음증적 호기심을 격조 있게 충족시켜주는 것에 그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이유 가운데 두 가지 정도를 꼽고 싶다. 우선 이 책을 읽으면서(특히 제4부) 우리의 사생활이 의외로 서구인의 삶과 가까우면서 또한 다르다는 것을 시종일관 깨닫게 된다. 우리 사생활의 어떤 측면은 미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과 닮았고 심지어 스웨덴과도 유사한 데가 있지만 동시에 이 모든 사례와 다르다. 공시성과 역사적·문화적 차이를 매개로 한 공시성의 다양한 조합, 변화에 대한 민감함과 어떤 끈덕진 지속을 모두 실감하게 되는데, 이런 독서 경험을 통해 자기 성찰의 길이 열린다는 점이 소중하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이 책의 독서가 주는 각별한 기쁨의 원천은 사생활이라는 소재에서 오는 재미이기보다는 사유를 촉구하는 힘을 가진 역사학적 통찰을 담은 문장들에서 오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고 싶지만 지면이 허락지 않아 아쉽다. 하지만 우선 읽기 바란다. 읽게 되면 밑줄을 긋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 장담할 수 있다.(김종엽|한신대교수·사회학)
 
06. 1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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