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분량'에 대해 몇 자 적으려다가 제목을 '글쓰기 분량과 글쓰기 장애'로 바꾼다. '글쓰기 장애' 때문이다. 책에 관해서라면 남못지 않게 수다스러운 내가 '글쓰기 장애'를 갖고 있다면 의외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좀 특이한 '장애'를 갖고 있다. '특이'하다는 것은 내가 가진 장애가 '첫문장 쓰기' 장애이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페이퍼라면 별 문제가 아니지만 '공식적인' 종류의 글쓰기에 있어서 내가 가장 애를 먹는 것은 마땅한 제목을 붙이고 첫문장을 쓰는 것이다. 두 가지만 해결되면 글의 절반 이상은 씌어진 셈이 되지만, 반대로 그게 잘 안되면 소위 '먹통'이 된다. '글쓰기 블록'과 '하이퍼그라피아'가 특이하게 결합돼 있는 경우가 아닌가 싶다. 아직 치료를 요할 정도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여하튼 최근에 이 장애 때문에 계속 애를 먹고 있다. '만만한' 페이퍼들만 애꿎게도 계속 만들어지는 한 가지 이유이다.

교수신문(06. 11. 14) 지식인들의 글쓰기 분량 적당한가

한 교수에게 원고청탁 때문에 전화를 돌렸다가 바로 내렸다. “이번 달에 고정칼럼 합쳐서 20편 썼다”란 말에 “건강 잘 챙기시고요” 하고 끊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공장장급’ 칼럼니스트들이 우리 사회에 늘어나고 있다.

생태론자이자 경제학 박사인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요즘 거의 3일에 한편 꼴로 글을 생산하고 있다. 참여정부가 FTA, 부동산·재개발 같은 ‘사건’을 자꾸 터뜨리기 때문인데, 어떻게 저런 노동이 가능할까 싶을 만큼 글을 통해 복잡한 사안들을 분석, 처방하고 있다. 사회과학 분야의 홍성태·이해영·서동만, 문화계열의 고병권, 과학의 정재승·이덕환 같은 이름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메이커’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글을 잘 써도 독자와 얼굴 맞추는 빈도가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나중엔 풍경이 돼버린다.

물론 물량공세가 질적 전화를 이루기도 한다. 요즘 고명철 광운대 교수의 글이 “좋아졌다”는 평들이 오간다. 한 때 막노동 하듯이 평론을 쓴 결과라는 게 나름의 원인분석. 평론처럼 호흡이 긴 글을 한 달에 2~3편씩 쓰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글 속에 유야무야한 부분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어떤 감각과 성찰성이 개발되는 것일까. 잠깐 쉬었다가 다시 발표한 고 교수의 글은 좋은 평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문 편.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한 달에 학술대회 발제문만 2편을 쓰고, 신문칼럼을 매주 4회 쓴다. 홍 교수 같은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글쓰기는 운동적 성격을 띤다. 그것은 구호와도 같아 반복적으로, 그리고 충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효과를 거두지만 글은 퍼석거릴 수밖에 없다. 학자나 전문가의 내공이 실리기보다 특유의 관점과 스타일 속에 담궜다가 꺼내는 정도의 글이다. 과연 이런 글이 반복됨으로써 어떤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까.

사실 요즘 지면이 대폭 늘어난 문학평론이나 소설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글쓰기의 형식, 어떻게 말을 할까에 대한 고민은 없이 점조직처럼 부지런히 거점만 이동한다. 마치 간첩처럼 정체성도 불투명하고, 그저 말을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장식들이 뒤죽박죽 돼 있는 평론들은 글쓰기를 힘겨운 노동으로, 프로필과 원고료로 교환되는 자본주의적 가치로 제도화시킨다.

평자들이 지친 기색이 가득하다. 문학평론가 고봉준 씨는 계간지 마감이 있는 달은 6~7편까지 편수가 올라간다. 이 중 절반은 인간관계 때문에 쓰고 원고료는 80매에 8만원. 고 씨는 “노동이라 하면 슬퍼지죠. 노동은 팔려고 하는 건데요, 판다고 생각하진 않구요. 저는 그냥 일(業)이 많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노동이든 일이든 글쓰기란 행위 자체에서 힘겹다는 이미지를 벗겨낼 순 없을까. 롤랑 바르트는 일본에 다녀와서 ‘기호의 제국’을 펴냈다. 그는 일본에 매우 고마워했는데, 그에게 글쓰는 재미를 줬기 때문이다. 1960년대 구조주의를 통해 당시 범람하던 역사주의를 패퇴시킨 바르트는 후기로 갈수록 글쓰기의 목적을 어떻게 그것의 즐거움을 확대시키고 고양시킬 것인가의 문제로 선회시켰다. 그가 실험한 독특한 자서전, 글쓰기를 즐기고 있다는 감이 선명한 에세이들을 보면 오늘날 문필가들에게 부족한 것은 자기만족의 정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관련 한 문학평론가는 “늘 머리 속에는 그럴듯한 책 한권을 꿈꾸고 설계하지만 공부하다가 볼 일 다보고 정작 쓰지는 못한다”라고 털어놓는다. 꿈꾸는 동시에 쓸 수 있는 환경이란 아마 ‘연재’의 형식일 것인데, 잡지 편집위원 급이 아니면 좀처럼 이런 기회는 오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정말 ‘연재스러운’ 낡은 에세이식 주제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정말 연재가 필요한 글은 통상적인 연재 포맷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전문연구나 장편 주제론·작가론 같은 것이 아닐까. 가까운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그것이 마치 존재의 끈처럼 기능을 하는 그런 연재글 말이다.(강성민 기자)

06. 11. 15-16.

 

 

 

 

P.S. 청탁받은 원고들을 계속 펑크내면서 '글쓰기의 분량'에 대해서도 회의를 갖게 됐다. 교수신문의 기사에 눈길이 간 것은 그 때문이다. '개인차'라는 게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능력에 비하면 더 많이 쓰거나 더 많이 써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능력을 배가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분량을 축소시켜야 하는가. 욕심은 많지만 인생만큼 욕심대로 잘 안되는 것이 글쓰기가 아닌가 한다(글쓰기의 즐거움은 글쓰기의 고통과 나란하다). 문득 두어 달 전에 읽고 스크랩해놓은 칼럼이 생각난다.

문화일보(06. 09. 12) 글쓰기 장애

연세대에서 11, 12일 열리고 있는 노벨포럼 참석차 한국에 온 196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머리 겔만(77). 15세에 예일대에 입 학하고 21세에 박사가 된 천재다. 유명한 ‘쿼크’이론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본업인 물리학뿐 아니라 언어학·역사학·고고학·생태학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9개 언어를 구사하는 그는 분명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知性)이다.

한때 언어학자를 지망했을 만큼 언어감각이 탁월한 겔만에게 ‘글쓰기 장애’가 있다는 건 역설에 가깝다. 그는 노벨상 수상자 들이 ‘영예의 의무’로 여기는 수상논문집에 글을 올리지 못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쓰더라도 자신의 지식창고에서 최적의 표현을 찾아내는 데 결벽증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고 한다.

의도와 달리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을 ‘블록현상(writer’s block)’이라고 한다. 마감이 코 앞에 닥쳤는데도 글은 한 줄의 진척 도 없는 그런 상황이다. 밥을 먹을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지만 다가가면 글은 천리 밖으로 달아나고 만다. 머리를 쥐어뜯고, 방을 들락거리고, 그나마 몇 자 쓴 종이를 찢어버리고…. 글쓰기 고민이 없을 것 같은 찰스 디킨스도 “가족에게는 괴물이요, 나 자신에게는 공포”라고 토로했을 정도다.
 


글을 못쓰는 고통만이 글쓰기 장애는 아니다. 블록현상과는 거꾸로 식음을 거르면서까지 닥치는 대로 써대는 유형도 있다. ‘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는 이런 글쓰기 중독증을 표현하는 의학용어다. “컴퓨터 자판이나 빈 종이를 보면 마약을 본 마약 중독자 같은 쾌감을 느꼈다”고 할 정도면 하이퍼그라피아다. 평생 9만 8721통의 편지를 썼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작가 루이스 캐럴, 수많은 글을 언론에 발표했던 ‘유나바머’(시어도어 카진스키)가 이런 부류에 속한다.

개인 홈피·블로그가 확산되면서 우리 주변에서도 글쓰기 마니아들이 넘쳐나고 있다. 요즘 청와대 홈페이지에 들어가봐도 그걸 느낀다. 비서진이 “일은 언제 하느냐”는 걱정까지 들어가며 열정적인 글을 쏟아내고 있다. 표현도 거침이 없다. 정책을 널리 알리겠다는 충정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국정은 블록상태인데 참모진은 하이퍼그라피아에 빠진 듯한 부조화가 마음에 걸린다.(김회평 논설위원)

 
 
 
 
 
 
 
 
P.S.2. 하이퍼그라피아, 곧 '글쓰기 중독증' 환자로 분류된 루이스 캐롤과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책들이 최근에 또 출간됐다. <신기한 나라의 앨리스>와 <산업사회외 그 미래>로 제목이 바뀐 게 특이하다고나 할까. 아무려나 너무 안 써져도 너무 잘 써져도 문제가 되는 '글쓰기 나라' 또한 '신기한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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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7 0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17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동병상련'이란 말을 이런 때 쓰는 것이죠? 서로의 위로와 치유도 각각 따로 노는 것인지 걱정됩니다.^^;

2006-11-17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17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이런! 이거 무슨 헤어진 가족상봉 장면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