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패자 - 6.25 국군포로 체험기
박진홍 지음 / 역사비평사 / 2001년 6월
품절


열아홉 살 어린 나이에 삶을 마친다고 생각해도 왠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멀리 남쪽에서 계시는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엄마와 단둘이서 온갖 역경을 견디며 소학교,중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구의과대학에 입학했을 때 엄마는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른다. 그런데 곧 6.25전쟁이 터졌다. 나는 학도병에 지원 입대했다. 이제 아무도 모르는 산속에서 엄마에게 죽음조차 알려주지 못한 채, 적진 속에서 중국군의 총에 맞아 죽게 되다니. (중략) 하느님이 계신다면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나쁜 일도 안하고 학교 공부만 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묻고 싶었다. 총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사람을 죽여본 일도 없었다. [저자는 위생병이었다. - 인용자주]-14쪽

"야 진홍이, 살았구나."
허군은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허군의 손을 잡자마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허군은 우리와는 달리 대구 근교의 농촌 출신이었다. 우리와 같이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살아서인지 그는 나약하지 않고 참을성이 있어서 이곳에서도 적응을 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년배로 대구의과대학에 같이 입학했을 때도, 그는 어딘가 어른스러운 데가 있었다. (중략)
"임마, 니 울보 아니가. 울지 마."
허군이 울지 말라고 했는데도 나는 울고만 있었다. 그 후에도 나는 허군을 만났다 하면 울곤 해서, 허군이 내 별명을 '울보'라고 지어주었다. 의사가 된 지금도 만나면, 허군은 나를 '울보'라고 부른다. -84-85쪽

우리는 인민군이 우리를 어떻게 사상교육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사실 사회주의 사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중략) 우리는 사상교육 시간에 무슨 거창한 말이 나올 줄 알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인민군 대위가 나와 자기는 정치부 장교라고 우선 소개했다. 그는 함경도 사투리의 억센 악센트가 특색이었다. 나이는 마흔이 넘을까 말까 했다. 교육 내용은, 여기에서 '강냉이' 몇 알 먹고 배고프게 있지 말고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인민군에 자원 입대하면,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준다는 게 사상교육의 요지였다. 선동조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민군에 입대할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는 등의 반 강요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설득조로 이야기했다. (중략) 학습이 끝난 후에는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모여 인민군 지원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다. 대부분 여기에서 배고픔과 발진티푸스로 죽는 것보다는 인민군에 입대하여 살고봐야 할 것이 아니냐는 의논들이 지배적이었다.
우리가 포로교환되기 위해서 기차로 사리원역에 도착했을 때였다. 한 인민군 이등병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나는 전에 같은 포로였으나 인민군에 입대하여 집에 못 가게 되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이나 가족에게 전해달라"며 남쪽 주소를 적어주었다. 나는 그때 눈물을 흘리던 옛 포로 동료 한 사람을 잊지 못한다. -99-100쪽

사리원 비행장 복구대에 있을 때 대장실에서 조군에게 출두 명령이 내려왔다. 인민군 대장이 일개 포로병을 출두시키는 것은 드문 일이다.. 조군은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가 생각하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군이 대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인민군 대위가 웃는 얼굴로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조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장은 조군을 한참 쳐다보더니 말했다.
"나를 모르겠는가?"
"모르겠습니다."
"나는 너보다도 2년 선배다. 너는 조교장 선생님의 아들이 아닌가?"
경북중학교의 선후배가 인민군 대위와 포로병으로 다시 만나다니, 조군은 할 말을 잊었다. (중략)그때 묵시적으로 조군에게 탈출을 암시해준 선배 인민군 대위는 어떻게 되었을까. 두 명이나 탈주를 했으니, 어떤 문책을 받았을까. 학연은 남북을 초월한다.(중략)
조군과 인민군 대위가 이같이 남북으로 서로 갈리게 된 것은, 내가 중학교 4학년 때 일어난 10.1사건 때문이었다. 10.1 사건에 적극 가담했던 그 인민군 대위는 경찰이 사건의 주동자 검거에 나서자 구속을 피하기 위해 월북했던 것이다.-119-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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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6-08-21 0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통받았던 저자의 포로 생활을 보며,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에게 포로가 된 일본군의 삶을 다룬 오오카 쇼헤이의 소설 <포로기>를 생각했다. 그쪽은 반대로 포로가 되는 순간 굶주림과 고통이 끝났었는데. 한국전쟁 때도 미군에 잡힌 인민군 포로들은 먹고 입는 문제는 없었던 듯하고. 포로가 됐을 때의 처우를 생각한다면, 전쟁은 역시 돈 많은 나라하고 해야 할 듯. -_-;;
어쨌든, 전쟁이라는 제 정신이 아닌 상황을 무사히 살아서 넘겼다는 것만으로도 저자는 "패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임전무퇴"는 전쟁을 일으키고 아까운 목숨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자들의 기만적인 구호일 뿐, 기다리는 사람들한텐 그저 몸 성히 살아돌아오는 게 최고지. 전쟁의 희생자에 대해 국가가 바쳐야 할 것은 '감사'가 아니라 '사죄'라는 믿음이 좀 더 강해졌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박지향, 김일영, 이영훈 외 지음 / 책세상 / 2006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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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의 나는 반항아였다. 교과서 내용에 대해 혼자 화내던 기억, 선생님에게 "그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아요?"하고 대들다가 급우들의 눈총을 받던 기억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읽으며 암울한 기억들을 거슬러 올라가다, 그것들의  시작이 중학교 2학년 <국사>수업임을 알게 되었다. 교과서에 넘쳐나던 위대한 한민족에 대한 찬사와 민족의 적들에 대한 비난. 거기에 나타난 편견과 증오와 선동적 잔인성이 역겨웠다.

"서양사는 너무 좋지만 국사는 싫어" 가 입버릇이던 내가 다시 한국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대학교 2학년 때. 계기가 된 책은 패어뱅크,크레이그,라이샤워의 <동양문화사>였다. 민족주의를 주입하려는 의도가 배제된 한국사 서술이 너무나 신선해서, 이후 역사책 읽기는 나의 취미가 되었다. 세계사의 흐름 안에서 한국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 즐겁다.

아직 어설픈 역사 팬에게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가슴 설레는 종합선물세트같은 책이었다. 정치, 경제, 사회, 여성, 문학, 어학 등 여러 방면을 아우르는 논문들은 어느 것이나 진지하면서도 흥미진진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는 애국주의 선동의 역겨움이 없다. 일제시대의 삶을 다룬 1권은 <일제의 만행과 애국적인 독립운동>이라는 구호를 외치느라 바쁜 역사 교과서가 무시해 온 "보통 사람들의 삶"을 정당하게 평가하려고 노력한다. 차분하고 합리적인 저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상상의 날개를 펴는 동안, 국사 수업의 오래된 상처들이 조금씩 치유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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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박지향, 김일영, 이영훈 외 지음 / 책세상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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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는 본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이념이다. 그것은 자기 민족의 우월함을 주장하고 증명하기 위해 다른 민족들을 깎아내려야 하는데, 이 점에서 민족주의는 굳이 배타적일 필요가 없는 혈육이나 고향에 대한 애정과 구분된다. 우리 역사에서 특히 민족 지상주의가 야기하는 문제점은 첫째, 그것으로는 고난의 우리 현대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민족은 대단히 우수한데 다른 나라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식민 지배와 민족 분단의 비극을 겪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말자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남 탓을 하기 전에 우리 잘못이 무엇이었나를 자성해야 하고, 그럴 때 우리가 참으로 많은 것을 잘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100년 전, 국가의 생존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위정자들은 무엇을 했는지, 사회 지도층은 또 무슨 노력을 했는지에 생각이 미칠 때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지난 100년 전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는 이유는 다시는 그런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서이다.
- 이영훈 <머리말>-13-14쪽

한국의 역사가들은 특히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20세기 전반기에 관한 역사 쓰기에 있어서 실증의 자세를 쉽게 포기한다. 그들은 일제를 비판하기 위히서라면 사료의 뒷받침 없이 어떠한 주장도 펼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태도는 1960년대 중반부터 중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에서 뚜렷이 관찰된다. 예컨대 1964년부터 역사교육연구회라는 역사가 단체가 지은 국사교과서는 어떠한 근거도 없이 일제가 토지조사사업(1910-1918) 과정에서 전국 토지의 절반이나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이 대목은 1967년 다른 역사가에 의해 40퍼센트로 고쳐진 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내가 비판을 제기한 것이 1992년의 일인데도 지금까지 13년이 되도록 그 오류는 방치되고 있다. 또 국사 교과서는 조선과 일본이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된 가운데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수출된 것을 두고, 쌀을 빼앗아 실어 나른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 이영훈 <왜 다시 해방 전후사인가>-39-40쪽

2005년 현재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조선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1912년 0.77석에서 1930년 0.45석으로 42퍼센트나 감소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과장된 것이다. 낙성대 경제 연구소 작업 팀의 추계에 의하면 곡물 소비량은 1912-1939년에 12퍼센트 가량 감소했다.
이러한 곡물 소비량의 감소는 곧바로 식량 소비량의 감소로 해석되어 생활수준 악화의 명백한 증거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여타 식품의 소비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감자, 고구마의 소비 증가를 더하면 1912-1939년 사이에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은 8퍼센트 감소한 것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여타 식품의 소비가 급증했다. 예컨대 1인당 육류 소비는 1.2배로 소채과실은 2.6배로 어패류는 3.3배로 장류는 1.5배로 증가했으며, 기타 가공식품은 1.6배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보강된 칼로리를 더하면 1인당 총 칼로리 섭취량은 거의 감소하지 않았다고 하겠다.
- 주익종 <식민지 시기의 생활 수준>-128-130쪽

일제 사법 제도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과 일어를 사용하는 법정의 높은 문턱, 1930년대에도 전국의 변호사가 400명을 넘지 않았을 정도로 적은 법률 서비스 인력 등을 생각하면 당시 국민들이 법원을 이용한 빈도가 얼마나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1928년과 1937년의 소송 빈도를 보면 각각 인구 330명당 1건과 428명당 1건을 기록하여 오히려 1950년대와 1960년대보다 높았으며, 1970년대 중엽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지방의 최하급 법원 중 하나로 전남 동부 5개 군, 인구로는 40-50만 정도를 관할한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의 예를 보자. 이 법원은 1928년과 1937년 각각 인구 364명당 1건, 380명당 1건의 소송을 수리했다. 이 법원의 소송물 가액 상한은 1000원이었는데, 여기에서 다룬 사건 중 68퍼센트가 100원 이하였고 500원 이상의 사건은 6퍼센트에 불과했다. 이 법원 관할 지역에서 활동한 변호사는 한 시점에 5명을 넘지 않았는데, 전체 판결 사건의 82퍼센트가 원피고 모두 변호사 없이 진행되었다.
- 이철우 <일제하 법치와 권력>-180쪽

북한 지역에는 전력과 화학, 제철 공업이 발달했으며 특히 전시에는 군수공업으로 전용할 수 있는 중화학공업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 결과 북한은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공업 지대로 변모해 있었다. 이 생산 설비는 전쟁 피해를 거의 입지 않고 소련 점령군의 손을 거쳐 김일성 정권으로 이양되었다. 그리고 일본인 기술자를 억류하는 방식으로 생산력을 유지하고 기술의 강제 이전을 시도했다. 이것은 결국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는 데 물적 기반이 되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 제국의 전쟁 준비는 김일성의 전쟁 준비로 직결되었던 것이다.
- 김낙년 <식민지 시기의 공업화 재론>-226쪽

예를 들면 표 5-4에서 '위안업'(아마 위안소 경영을 가리킬 것이다.)으로 소개된 공돈이라는 인물이 해방 후에 취한 행동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1945년 12월 12일자 <상하이대공보>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일본군에게 속아 위안소나 군사 기구 내에서 일했던 조선인 여성이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므로 공돈 등이 한국부녀공제회를 조직하고 그녀들에게 거처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거처에는 처음에 19명이 수용되었지만 지금은 270명으로 늘어났으며, 이제까지 이 공제회가 구제한 자는 800명에 달한다는 것, 머지않아 한커우에서 600명이 찾아오는데 그들 역시 구제할 예정이라는 것, 또 이 공제회가 전날 중국과 조선의 언론인을 초대하여 잔류 일본인을 귀국시킬 때 이들 조선인 여성들도 잊지 않도록 호소한 것 등도 아울러 전하고 있다.
위안소 경여자로 생각되는 인물들의 이러한 행동이 친일파의 낙인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인지, 친일 행위에 대한 속죄 의식 때문인지는 물론 알 수 없다. 그리고 공돈이 해방 후 이와 같이 조선인 '위안부'의 보호나 귀환에 진력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위안소 경영에 종사한 전쟁 협력자로서의 과거까지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돈과 같은 인물의 존재는 친일파 문제의 본질을 확인하는 데 '성악설'적인발상으로 그들을 지탄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 후지나가 다케시 <상하이의 일본군 위안소와 조선인>-355쪽

그렇지만 같은 연설에서 윤정옥은 다음과 같은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성문제와는 아무런 관계 없이 근로만 했던 정신대가 있었다. 이들은 대구 근처에 있던 방직 공장, 큐슈의 오무타와 나가사키에 있던 탄광에서, 나고야에 있던 미쓰비시 비행기 공장 등에서 일을 했다. 우리가 종군위안부라는 뜻으로 정신대라고 할 때, 이들에게 상당한 폐를 끼친다."
주목할 것은 위안부 여성들을 정신대와 동일시하는 한국의 관례에도 불구하고 오직 네 경우들 -60개 이상의 출판된 증언구술들 중에서-만이 처음에 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위안부로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주로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한국정신대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정신대를 위안부를 가리키는 말로 남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그것을 정당화하는 완벅한 증거를 밝혀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정신대를 위안부로, 즉 '강요된 매춘부'로 보는 인식과 용례가 한국사회에서 보편시되고 있다. (중략)
생존하는 옛 정신대 여성들이 이중으로 고통받는 것은 일제 식민 통치 아래에서 창출된 전시의 사회적 범주인 정신대를 잘못 표상하여 위안부 운동을 위해 주물화하는 정체성의 정치라는 사회정치적 맥락에서이다. 1990년대에 모습을 드러낸 소수의 옛 정신대 여성들은 자신들이 성노동이 아니라 오직 육체노동만을 수행했음을 간곡하게 강조했다. 1999년 3월 1일에 다섯 명의 옛 정신대 여성들이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중공업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을 때, 일부는 가명을 사용했고 다른 일부는 얼굴 공개를 거부함으로써 자신들이 위안부로 오해받는 일을 피하려고 했다.
- 소정희 <교육받고 자립된 자아 실현을 열망했건만: 조선인 '위안부'와 정신대에 관한 '개인 중심'의 비판인류학적 고찰>-449-452쪽

제2세대 조선의 근대 여성 노동자로 특징지을 수도 있을 정신대의 경우를 보면서, 역사가 재니스 김은 근대적인 산업부문에서 임노동에 종사한 전시 경험이야말로 그들이 인생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새로운 사항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 도움을 주었고, 나아가 이는 광복 이후에 그들로 하여금 더 진전된 자기계발 노력을 경주하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정신대로 고용된 여성들에게 제공된 다양한 작업들은 '광산, 전기, 통신, 기계, 항공기 생산, 조선, 화학, 도기, 목공, 건설' 부문의 산업체들의 필요로부터 나왔다. 젊은 정신대 노동자가 어떤 종류의 작업을 수행하는가는 그녀의 배경과 교육 수주에 달려 있었다. 물론 구직 광고들에 따르면, 일본어 어학 능력을 비롯하여 기타 숙련 기능들이 필요했지만, 국내의 기업들이나 조선 밖의 공장들에서 필요한 견습 작업과 기타 '비숙련' 직업들에는 특별한 경험이 없어도 아주 초보적인 교육만 마쳤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일본 토야마 소재 후지코시 강철 회사에서 일하기 위해 12세의 나이로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간 김정남은 전후에도 공부를 계속하여 결국 교사가 되었다. 또 다른 옛 정신대 김정민은 후지코시 공장에서 일했을 때 받은 노임으로 광복 이후에 국립서울대학교엣 학위를 취득했다. 정신대의 생활이 자기 인생에서 득보다 실이 더 컸다고 회상한 강복점 조차도 60년 넘게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살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얻었는데, 이는 "그 자체 굉장한 재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 소정희 <교육받고 자립된 자아 실현을 열망했건만: 조선인 '위안부'와 정신대에 관한 '개인 중심'의 비판인류학적 고찰>-459-460쪽

당시의 기사를 검토해볼 때 눈에 띄는 것은 이 사건[완바오산 사건. 1931년 4월-7월, 만주 완바오산에서 수로를 둘러싸고 중국 농민과 일본 경찰의 보호를 받는 한국 농민이 충돌한 사건. 위협 사격이 있었을 뿐 사상자는 없었다. 정작 문제는 만주가 아닌 조선에서 일어났다. 7월 3 일 조선일보의 선동적인 오보가 시작되며 조선은 반중국 감정으로 들끓었고, 인천, 평양 등지에서중국인들에 대한 폭행 사건이 빈발했다. 7월 2일부터 30까지 전국적으로 30여 군데가 넘는 곳에서 폭행 사건이 벌어져 중국인 127명이 사망, 393명이 부상당했다.-인용자 주]이 처음부터 '민족적 수난 의식'에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주에 이주한 조선 농민들이 중국 당국으로부터 이러저러한 압박을 겪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당시의 신문과 잡지는 '중국 당국에 의한 재만 동포의 구축 사건'을 일상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피식민지인의 '수난자', '파해자' 의식을 강하게 자극하는 이러한 사건들은 완바오산 사건의 허위 보도로 인하여 순식간에 '동포애'로 무장한 가학적 폭력으로 전화하였던 것이다. (중략)
<조선일보>의 허위 보도로 촉발된 중국인 화교에 대한 살상 행위는 제국주의 피지배 집단의 정신분열적 가학성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사례였다. 더불어, 이 사건의 책임을 일제의 간교한 음모로 돌리는 것 역시 사건을 은폐하는 것 못지않게 떳떳하지 못한 행위다. 이른바 '식민 잔재 청산'의 근본 취지가 식민지 범죄의 책임을 가리고 유사한 사건들의 재발 방지를 보장하자는 것이라면, 한국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이 사건을 공론화하였어야 한다. 그러나 9월 18일 관동군의 군사 행동으로 시작된 만주사변의 발발과 그 이듬해의이른바 '만주국'의 건국 등으로 이어지는 긴박한 사회 정세의 변화에 따라 이 사건은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 김철 <몰락하는 신생-'만주'의 꿈과 ,<농군>의 오독>-491-493쪽

이처럼 민족의 이익에 회수되는 참전의 논리는 미국의 반공 선전에 협력하여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이 한국 경제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심판이 공정한 것이라면, 미국의 패권주의에서 민족 생존의 이익을 얻은 한국 내셔널리즘을 어떠한 범주에서 해명하고 심판할 수 있겠는가? 베트남전 협력은 국가 주권의 결정이고 자유의사가 반영된 선택이었다. 그 참전자는 호국 영령으로서 기념되며, 베트남에 대한 사죄는 호국 영령에 대한 모독으로 호도된다.
- 조관자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551쪽

이광수가 추구한 힘과 행복도 절대로 '민족'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의 이름으로 친일한 것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민족'의 이름으로 친일을 심판할 수도 없다. 민족해방운동사에서 '민족'이라는 하나의 통일체는 없었으며, 식민지 시대를 살던 조선인들도 남북 분단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그들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고통을 함께 나누어/ㅆ다고 해서 일심일체가 되어 행복을 똑같이 나누어 가진 적은 한 번도 없다.
'민족'을 신화화하는 권력 운동이 위험한 것은 파시즘의 운동에서 증명되듯이 민족주의가 대중의 혼을 사로잡는 절대 신앙을 구축함으로써 대중의 권력 비판 능력을 차단하고 상실하게 만드는 정치 신학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전망하기 위하여 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모든 내셔널리즘이 '민족'의 이름으로 행사하는 권력 운동의 성격을 분해하고 그 권력이 '민족'의 이름으로 은폐하고 회수해버린 문제들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해명하는 일이다. (중략)
민족주의가 개개인의 권력 의지를 하나로 통일하는 날은 '민족'을 '주체=신민'으로 통일하는 날이다. 그러나 권력을 욕망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대립과 타협, 연대 속에서 역사는 변해가는 것이 아닐까? 모두가 권력을 욕망하는 사회에서는 권력의 신민이 아니라 권력의 주체로서 권력의 횡포에 대하여 '아니요'를 말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 어떤 주의가 없어도, 오로지 권력 운동의 부당함에 저항할 수 있는 힘. 그것은 '동조동근'의 동포애나 자기 생존의 이익에 얽매이기 전에 우러나오는 타자에 대한 배려이며, 자타의 이해관계를 공정하게 직시하는 자유로운 사고의 합리적인 힘이라고 생각한다.
- 조관자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553-555쪽

전통적인 견해와는 달리, 조선인들에게 (관리직 진출의) 문호가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으며, 제국적인 환경에서 안정된 임기와 상대적인 고임금, 그리고 상당한 위신까지 따라오는 일본 기업과 관계의 고위직들이 조선의 교육받은 엘리트들을 많이 유인했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지위는 1960년대 남한의 공업화를 계획하고 추진한 많은 이들에게 중요한 훈련의 토대가 되었다. (중략)
조선인들은 합방 당시부터 이러한 조직들, 특히 총독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이미 다른 영역들에서 살표본 바와 같이, 대개의 경우 조선인의 채용과 승진이 급증하게 되었다. 가령 경성의 총독부 본부의 경우, 1931년에서 1942년 사이에 조선인은 일정하게 고위직(칙임관)의 18-25퍼센트, 하위직(판임관)의 30-36퍼센트를 차지했다. 일본인 관료에 대한 조선인 관료의 비율은 이 시기에 6퍼센트 감소하지만, 조선인 관료의 수는 고위직과 하위직 모두에서 각각 22퍼센트와 52퍼센트 증가하여 1942년 경에는 거의 1만 6000명에 달하는 조선인 관리들이 총독부 본부에 있게 되었다.
지방에서는 조선인 관리의 증가가 훨씬 더 큰 폭으로 이루어졌다. 같은 기간 동안 조선인 칙임관이 네 배 증가하고, 판임관은 약 1.5배 증가하는데, 가장 극적인 증가는 만주국 건국 직후와 중일전쟁 기간 중에 발생했다.
- 카터 J. 에커트, <식민지 말기 조선의 총력전, 공업화, 사회 변화>-634-635쪽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총 141명의 조선인들이 사관학교[도쿄의 육군 사관학교-인용자주]를 졸업했고, 이중 절반 이상이 1933년 이후 졸업생이었다. (중략) 사관학교 입학은 일본인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하물며 조선인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신체검사와 학과 시험을 통과한 후에, 조선인 사관후보생은 일본어가 모국어이고, 조선에서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수준보다 더 나은 여건에서 일본인 지원자들과 경쟁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1930-1940년대에 배경과 재력에 의존해서 육사에 들어가고자 했던 조선인들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한 방법을 선택했다. 약 60퍼센트는 4년 과정인 도쿄의 육군사관학교에 직접 지원했는데, 이는 2년 과정의 예과와 2년 과정의 본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본에서의 시험 통과 가능성이 희박했던 다른 사람들은 만주를 거치는 간접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중략) 우수한 학생들을 일본의 본과로 보내던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와 그 전신인 중앙 육군 훈련처는 가난하지만 명석한 조선인들에게 일본군 엘리트로 진입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다. 비록 입학 후에 조선인 생도들은 일본인 동급생들과 동등한 학업 기준을 적용받았지만, 만계와 일계의 입학시험은 분리되어 실시되었고, 조선인 지원자는 자신보다 일본어 교육을 더 많이 받지 않았거나 종종 매우 적게 받은 중국인이나 몽골인들과 입학을 놓고 경쟁하였다.
1950년대에 한국 육군의 참모장이 된 백선엽과 정일권을 포함하여 만주 국군 출신 한국 군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게 된 사람은 물론 박정희다. 그는 이후의 정치 경력 때문만이 아니라, 예외적인 지능을 소유했지만 빈궁한 농촌 소년이 식민지 말기 조선에서 체계화된 기회를 이용해서 일본군 장교로 진출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경우이다.
- 카터 J. 에커트 <식민지 말기 조선의 총력전, 공업화, 사회 변화>
-640-642쪽

(북한의) 공산 정권은 농업의 집단화를 추진함과 더불어 소규모 공업과 상업을 구축하고 그들을 협동 조합이나 국유 기업으로 재조직했다. 이 계획은 1960년까지 완료되어 개인의 경제적, 사회적 활동에 대한 엄격한 국가 통제 체제가 수립되었다. 그러한 성과는 이전에 급신적 '혁신 관료' 진영의 일본 우익들이 달성하고자 노력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 북한은 일본의 경제정책을 물려받아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셈이다. 이러한 연속성과 발전은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상 그것은 1930년대 이래 북한을 지배한 집산주의 철학, 곧 일제의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와, 최종적으로는 마오쩌둥주의에 영향을 받은 철학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1960년 이후 소비에트와 중국의 원조에 힘입은 북한 내 경제 여건의 개선은 국가 통제의 완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지도자 김일성은 국가 통제를 오히려 강화함으로써 경제의 군국주의화를 추구했다. 결국 최근의 북한 체제는 보다 노골적인 군국적 속성에서나 경제에 대한 국가 관리의 방식에서 전시 일본 체제와 더욱 닮아 있다.
- 기무라 미쓰히코 <파시즘에서 공산주의로-북한 집산주의 경제정책의 연속성과 발전>-763-7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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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 한 말씀만 하소서 박완서 소설전집 15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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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지혜>라는 말을 흔히 하지만,  할머니가 되는 것은 멋있어지기보다는 누추해지는 과정이기 쉽다. 50대 중반을 넘은 우리 어머니의 경우 그 누추함은 TV연속극에 탐닉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퇴근 후 첫 마디가 "얘들아, TV 꺼라."였던 엄마는,  뉴스에 큰 일이 나올 때 외엔 TV 앞에 앉지도 않던 엄마는 얼마나 멋있어 보였던가. 그런데 그 엄마가 이제 할머니가 되어, 귀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볼룸을 높이고 앉아 금순이니 삼순이니 국화니 하는 별 같잖은 여자들의 일거일동에 눈물을 찔끔거리는 모습이라니! 어머니가 열광하는 그 '별 같잖은 여자들' 중 하나가 배종옥 표 차문경이어서,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가 TV연속극으로 방영되던 지난 겨울, 나는 거실에 울리는 신파조의 "문혁아! 문혁아!"에 몇 번이나 짜증이 솟구쳤었다.

 

우리집 책장에 있는 이 책은 필시 그 때 드라마에 반한 어머니가 사다 놓은 것이겠지만, 예상대로 원작에는 신파조의 끈적끈적함이 없었다. 남자에게 속고,  학교에서 쫓겨나고, 미혼모로 손가락질 당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감정을 배제한 건조한 묘사를 통해 위화감 없이 전달된다. '그래, 사는 게 이런 거지. 인간이란 게 이렇게 무서운 데가 있지. 세상이 참 치사하지.' 라는 느낌. 박완서의 소설은 보통 그런 느낌이었다. 불행도 고통도 혼자만 겪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겪고 있는 거라고 일깨우는  나직한 목소리에는  호들갑 따위 발 붙이지 못하게 하는 단호함이 있다. 그 단호함이 작가의 목소리에 사회의 불합리를 준열하게 꾸짖는 힘을 실어 준다.

 

이 작가는 극한의 고통을 통해서 몸과 마음이 최악으로 망가지는 <한 말씀만 하소서>의 시간도 결국은 이겨낸다. 섭식과 배설에 대한 끈질긴 묘사를 통해 누추하게 더 누추하게 바닥을 향하던 할머니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자기 자신을 훌륭하게 추스르는 것이다. "왜 하필 내가 이런 불행을 당하는 것인가" 에서 "나라고 이런 불행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나?"로의 엄청난 전환이 가능한 것은 결국 작가 자신이 강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무서운 점은 자신의 이러한 강인함을 쉽게 드러내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아줌마로서,  중산층 서울 아줌마의 상식과 감성을 솔직하게 보여준다는 형태로 그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왔다. 그리고 이제  노년기에 접어든 그의 글에는 인생의 무게가 더해지고 좀처럼 접하기 힘든 지혜까지 묻어난다. 햇볕에 탄 얼굴과 수더분한 한복으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슬쩍 가리고 세상을 향해 매서운 펜 끝을 휘두르는 이 <지혜로운 노인>에 대면,  TV드라마가 저속하다고 혼자 튀는 나 따위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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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이름은 유괴 - g@me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광고회사 사이버플랜의 잘 나가는 젊은 팀장 사쿠마 šœ스케가 어린 시절 터득한 인생의 요령은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쓰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우등생을 연기한 건 아니야. 어렸을 때는 개구쟁이 가면을 쓰고, 조금 지나서는 반항기의 가면을 썼어. 그 뒤에는 사춘기의 가면, 장래를 고민하는 청년의 가면. 어쨌든 어른들이 익숙해지기 쉬워야 한다는 게 포인트야 ...그러면서 다음에는 어떤 가면을 쓰면 상대가 기뻐할까 생각하는 거지. 인간관계란 원래 번거로운 거야. 그렇지만 이 방법을 쓰면 아무것도 아니지. ......맨얼굴을 드러내면 언제 어느 때 얻어맞을지 몰라. 이 세상은 게임이야. 상황에 따라 얼마나 적절한 가면을 쓰느냐 하는 게임."

이 원칙에 따라 좋은 대학, 좋은 회사를 거치며 요령 좋게 살아 온 인생. 회사에서는 능력을 인정 받고, 깔끔한 집과 스포츠카를 소유하고, 매력적인 여자들과 취미 생활을 즐기며 산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그에게 위기가 닥쳤으니,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광고프로젝트의 팀장 자리에서 갑작스레 해임된 것이다.

무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잔혹하게 그를 잘라낸 광고주는 닛세이 자동차의 가쓰라기 가쓰토시 부회장이다. 재벌 2세로 40대 후반에 경영 능력을 인정 받아 부회장에 취임. 매처럼 날카로운 눈에 좀처럼 웃지 않는 위압적인 느낌. 이 냉혹한 권력자를 상대로 사쿠마는 일생일대의 두뇌 게임을 시작한다.

잘 만든 영화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인물 설정도 사건도 쿨~하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일상이 버겁게 느껴질 때, 그 끈적끈적한 시간을 가볍고 유쾌하게 후루룩 넘겨 줄 소설로 추천한다. 사건 전개와 반전에 박진감이 있고, 세부 내용에 오밀조밀한 잔재미가 넘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재미 있는 추리 소설>의 전범이다.

단지, "인생은 게임이다. 게임에서는 이겨야 한다."라는 생각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하는 찜찜함만은 어쩔 수 없이 남는다. 그러나 뭐랄까, 나같은 <싸움에 진 개>에게도 가끔은 쿨한 척 하고 싶은 때가 있는 법. 더 이상 깊이 생각하는 것은 그만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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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2 09: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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