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박지향, 김일영, 이영훈 외 지음 / 책세상 / 2006년 2월
품절


민족주의는 본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이념이다. 그것은 자기 민족의 우월함을 주장하고 증명하기 위해 다른 민족들을 깎아내려야 하는데, 이 점에서 민족주의는 굳이 배타적일 필요가 없는 혈육이나 고향에 대한 애정과 구분된다. 우리 역사에서 특히 민족 지상주의가 야기하는 문제점은 첫째, 그것으로는 고난의 우리 현대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민족은 대단히 우수한데 다른 나라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식민 지배와 민족 분단의 비극을 겪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말자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남 탓을 하기 전에 우리 잘못이 무엇이었나를 자성해야 하고, 그럴 때 우리가 참으로 많은 것을 잘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100년 전, 국가의 생존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위정자들은 무엇을 했는지, 사회 지도층은 또 무슨 노력을 했는지에 생각이 미칠 때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지난 100년 전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는 이유는 다시는 그런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서이다.
- 이영훈 <머리말>-13-14쪽

한국의 역사가들은 특히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20세기 전반기에 관한 역사 쓰기에 있어서 실증의 자세를 쉽게 포기한다. 그들은 일제를 비판하기 위히서라면 사료의 뒷받침 없이 어떠한 주장도 펼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태도는 1960년대 중반부터 중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에서 뚜렷이 관찰된다. 예컨대 1964년부터 역사교육연구회라는 역사가 단체가 지은 국사교과서는 어떠한 근거도 없이 일제가 토지조사사업(1910-1918) 과정에서 전국 토지의 절반이나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이 대목은 1967년 다른 역사가에 의해 40퍼센트로 고쳐진 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내가 비판을 제기한 것이 1992년의 일인데도 지금까지 13년이 되도록 그 오류는 방치되고 있다. 또 국사 교과서는 조선과 일본이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된 가운데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수출된 것을 두고, 쌀을 빼앗아 실어 나른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 이영훈 <왜 다시 해방 전후사인가>-39-40쪽

2005년 현재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조선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1912년 0.77석에서 1930년 0.45석으로 42퍼센트나 감소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과장된 것이다. 낙성대 경제 연구소 작업 팀의 추계에 의하면 곡물 소비량은 1912-1939년에 12퍼센트 가량 감소했다.
이러한 곡물 소비량의 감소는 곧바로 식량 소비량의 감소로 해석되어 생활수준 악화의 명백한 증거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여타 식품의 소비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감자, 고구마의 소비 증가를 더하면 1912-1939년 사이에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은 8퍼센트 감소한 것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여타 식품의 소비가 급증했다. 예컨대 1인당 육류 소비는 1.2배로 소채과실은 2.6배로 어패류는 3.3배로 장류는 1.5배로 증가했으며, 기타 가공식품은 1.6배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보강된 칼로리를 더하면 1인당 총 칼로리 섭취량은 거의 감소하지 않았다고 하겠다.
- 주익종 <식민지 시기의 생활 수준>-128-130쪽

일제 사법 제도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과 일어를 사용하는 법정의 높은 문턱, 1930년대에도 전국의 변호사가 400명을 넘지 않았을 정도로 적은 법률 서비스 인력 등을 생각하면 당시 국민들이 법원을 이용한 빈도가 얼마나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1928년과 1937년의 소송 빈도를 보면 각각 인구 330명당 1건과 428명당 1건을 기록하여 오히려 1950년대와 1960년대보다 높았으며, 1970년대 중엽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지방의 최하급 법원 중 하나로 전남 동부 5개 군, 인구로는 40-50만 정도를 관할한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의 예를 보자. 이 법원은 1928년과 1937년 각각 인구 364명당 1건, 380명당 1건의 소송을 수리했다. 이 법원의 소송물 가액 상한은 1000원이었는데, 여기에서 다룬 사건 중 68퍼센트가 100원 이하였고 500원 이상의 사건은 6퍼센트에 불과했다. 이 법원 관할 지역에서 활동한 변호사는 한 시점에 5명을 넘지 않았는데, 전체 판결 사건의 82퍼센트가 원피고 모두 변호사 없이 진행되었다.
- 이철우 <일제하 법치와 권력>-180쪽

북한 지역에는 전력과 화학, 제철 공업이 발달했으며 특히 전시에는 군수공업으로 전용할 수 있는 중화학공업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 결과 북한은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공업 지대로 변모해 있었다. 이 생산 설비는 전쟁 피해를 거의 입지 않고 소련 점령군의 손을 거쳐 김일성 정권으로 이양되었다. 그리고 일본인 기술자를 억류하는 방식으로 생산력을 유지하고 기술의 강제 이전을 시도했다. 이것은 결국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는 데 물적 기반이 되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 제국의 전쟁 준비는 김일성의 전쟁 준비로 직결되었던 것이다.
- 김낙년 <식민지 시기의 공업화 재론>-226쪽

예를 들면 표 5-4에서 '위안업'(아마 위안소 경영을 가리킬 것이다.)으로 소개된 공돈이라는 인물이 해방 후에 취한 행동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1945년 12월 12일자 <상하이대공보>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일본군에게 속아 위안소나 군사 기구 내에서 일했던 조선인 여성이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므로 공돈 등이 한국부녀공제회를 조직하고 그녀들에게 거처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거처에는 처음에 19명이 수용되었지만 지금은 270명으로 늘어났으며, 이제까지 이 공제회가 구제한 자는 800명에 달한다는 것, 머지않아 한커우에서 600명이 찾아오는데 그들 역시 구제할 예정이라는 것, 또 이 공제회가 전날 중국과 조선의 언론인을 초대하여 잔류 일본인을 귀국시킬 때 이들 조선인 여성들도 잊지 않도록 호소한 것 등도 아울러 전하고 있다.
위안소 경여자로 생각되는 인물들의 이러한 행동이 친일파의 낙인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인지, 친일 행위에 대한 속죄 의식 때문인지는 물론 알 수 없다. 그리고 공돈이 해방 후 이와 같이 조선인 '위안부'의 보호나 귀환에 진력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위안소 경영에 종사한 전쟁 협력자로서의 과거까지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돈과 같은 인물의 존재는 친일파 문제의 본질을 확인하는 데 '성악설'적인발상으로 그들을 지탄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 후지나가 다케시 <상하이의 일본군 위안소와 조선인>-355쪽

그렇지만 같은 연설에서 윤정옥은 다음과 같은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성문제와는 아무런 관계 없이 근로만 했던 정신대가 있었다. 이들은 대구 근처에 있던 방직 공장, 큐슈의 오무타와 나가사키에 있던 탄광에서, 나고야에 있던 미쓰비시 비행기 공장 등에서 일을 했다. 우리가 종군위안부라는 뜻으로 정신대라고 할 때, 이들에게 상당한 폐를 끼친다."
주목할 것은 위안부 여성들을 정신대와 동일시하는 한국의 관례에도 불구하고 오직 네 경우들 -60개 이상의 출판된 증언구술들 중에서-만이 처음에 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위안부로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주로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한국정신대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정신대를 위안부를 가리키는 말로 남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그것을 정당화하는 완벅한 증거를 밝혀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정신대를 위안부로, 즉 '강요된 매춘부'로 보는 인식과 용례가 한국사회에서 보편시되고 있다. (중략)
생존하는 옛 정신대 여성들이 이중으로 고통받는 것은 일제 식민 통치 아래에서 창출된 전시의 사회적 범주인 정신대를 잘못 표상하여 위안부 운동을 위해 주물화하는 정체성의 정치라는 사회정치적 맥락에서이다. 1990년대에 모습을 드러낸 소수의 옛 정신대 여성들은 자신들이 성노동이 아니라 오직 육체노동만을 수행했음을 간곡하게 강조했다. 1999년 3월 1일에 다섯 명의 옛 정신대 여성들이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중공업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을 때, 일부는 가명을 사용했고 다른 일부는 얼굴 공개를 거부함으로써 자신들이 위안부로 오해받는 일을 피하려고 했다.
- 소정희 <교육받고 자립된 자아 실현을 열망했건만: 조선인 '위안부'와 정신대에 관한 '개인 중심'의 비판인류학적 고찰>-449-452쪽

제2세대 조선의 근대 여성 노동자로 특징지을 수도 있을 정신대의 경우를 보면서, 역사가 재니스 김은 근대적인 산업부문에서 임노동에 종사한 전시 경험이야말로 그들이 인생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새로운 사항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 도움을 주었고, 나아가 이는 광복 이후에 그들로 하여금 더 진전된 자기계발 노력을 경주하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정신대로 고용된 여성들에게 제공된 다양한 작업들은 '광산, 전기, 통신, 기계, 항공기 생산, 조선, 화학, 도기, 목공, 건설' 부문의 산업체들의 필요로부터 나왔다. 젊은 정신대 노동자가 어떤 종류의 작업을 수행하는가는 그녀의 배경과 교육 수주에 달려 있었다. 물론 구직 광고들에 따르면, 일본어 어학 능력을 비롯하여 기타 숙련 기능들이 필요했지만, 국내의 기업들이나 조선 밖의 공장들에서 필요한 견습 작업과 기타 '비숙련' 직업들에는 특별한 경험이 없어도 아주 초보적인 교육만 마쳤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일본 토야마 소재 후지코시 강철 회사에서 일하기 위해 12세의 나이로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간 김정남은 전후에도 공부를 계속하여 결국 교사가 되었다. 또 다른 옛 정신대 김정민은 후지코시 공장에서 일했을 때 받은 노임으로 광복 이후에 국립서울대학교엣 학위를 취득했다. 정신대의 생활이 자기 인생에서 득보다 실이 더 컸다고 회상한 강복점 조차도 60년 넘게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살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얻었는데, 이는 "그 자체 굉장한 재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 소정희 <교육받고 자립된 자아 실현을 열망했건만: 조선인 '위안부'와 정신대에 관한 '개인 중심'의 비판인류학적 고찰>-459-460쪽

당시의 기사를 검토해볼 때 눈에 띄는 것은 이 사건[완바오산 사건. 1931년 4월-7월, 만주 완바오산에서 수로를 둘러싸고 중국 농민과 일본 경찰의 보호를 받는 한국 농민이 충돌한 사건. 위협 사격이 있었을 뿐 사상자는 없었다. 정작 문제는 만주가 아닌 조선에서 일어났다. 7월 3 일 조선일보의 선동적인 오보가 시작되며 조선은 반중국 감정으로 들끓었고, 인천, 평양 등지에서중국인들에 대한 폭행 사건이 빈발했다. 7월 2일부터 30까지 전국적으로 30여 군데가 넘는 곳에서 폭행 사건이 벌어져 중국인 127명이 사망, 393명이 부상당했다.-인용자 주]이 처음부터 '민족적 수난 의식'에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주에 이주한 조선 농민들이 중국 당국으로부터 이러저러한 압박을 겪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당시의 신문과 잡지는 '중국 당국에 의한 재만 동포의 구축 사건'을 일상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피식민지인의 '수난자', '파해자' 의식을 강하게 자극하는 이러한 사건들은 완바오산 사건의 허위 보도로 인하여 순식간에 '동포애'로 무장한 가학적 폭력으로 전화하였던 것이다. (중략)
<조선일보>의 허위 보도로 촉발된 중국인 화교에 대한 살상 행위는 제국주의 피지배 집단의 정신분열적 가학성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사례였다. 더불어, 이 사건의 책임을 일제의 간교한 음모로 돌리는 것 역시 사건을 은폐하는 것 못지않게 떳떳하지 못한 행위다. 이른바 '식민 잔재 청산'의 근본 취지가 식민지 범죄의 책임을 가리고 유사한 사건들의 재발 방지를 보장하자는 것이라면, 한국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이 사건을 공론화하였어야 한다. 그러나 9월 18일 관동군의 군사 행동으로 시작된 만주사변의 발발과 그 이듬해의이른바 '만주국'의 건국 등으로 이어지는 긴박한 사회 정세의 변화에 따라 이 사건은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 김철 <몰락하는 신생-'만주'의 꿈과 ,<농군>의 오독>-491-493쪽

이처럼 민족의 이익에 회수되는 참전의 논리는 미국의 반공 선전에 협력하여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이 한국 경제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심판이 공정한 것이라면, 미국의 패권주의에서 민족 생존의 이익을 얻은 한국 내셔널리즘을 어떠한 범주에서 해명하고 심판할 수 있겠는가? 베트남전 협력은 국가 주권의 결정이고 자유의사가 반영된 선택이었다. 그 참전자는 호국 영령으로서 기념되며, 베트남에 대한 사죄는 호국 영령에 대한 모독으로 호도된다.
- 조관자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551쪽

이광수가 추구한 힘과 행복도 절대로 '민족'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의 이름으로 친일한 것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민족'의 이름으로 친일을 심판할 수도 없다. 민족해방운동사에서 '민족'이라는 하나의 통일체는 없었으며, 식민지 시대를 살던 조선인들도 남북 분단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그들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고통을 함께 나누어/ㅆ다고 해서 일심일체가 되어 행복을 똑같이 나누어 가진 적은 한 번도 없다.
'민족'을 신화화하는 권력 운동이 위험한 것은 파시즘의 운동에서 증명되듯이 민족주의가 대중의 혼을 사로잡는 절대 신앙을 구축함으로써 대중의 권력 비판 능력을 차단하고 상실하게 만드는 정치 신학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전망하기 위하여 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모든 내셔널리즘이 '민족'의 이름으로 행사하는 권력 운동의 성격을 분해하고 그 권력이 '민족'의 이름으로 은폐하고 회수해버린 문제들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해명하는 일이다. (중략)
민족주의가 개개인의 권력 의지를 하나로 통일하는 날은 '민족'을 '주체=신민'으로 통일하는 날이다. 그러나 권력을 욕망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대립과 타협, 연대 속에서 역사는 변해가는 것이 아닐까? 모두가 권력을 욕망하는 사회에서는 권력의 신민이 아니라 권력의 주체로서 권력의 횡포에 대하여 '아니요'를 말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 어떤 주의가 없어도, 오로지 권력 운동의 부당함에 저항할 수 있는 힘. 그것은 '동조동근'의 동포애나 자기 생존의 이익에 얽매이기 전에 우러나오는 타자에 대한 배려이며, 자타의 이해관계를 공정하게 직시하는 자유로운 사고의 합리적인 힘이라고 생각한다.
- 조관자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553-555쪽

전통적인 견해와는 달리, 조선인들에게 (관리직 진출의) 문호가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으며, 제국적인 환경에서 안정된 임기와 상대적인 고임금, 그리고 상당한 위신까지 따라오는 일본 기업과 관계의 고위직들이 조선의 교육받은 엘리트들을 많이 유인했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지위는 1960년대 남한의 공업화를 계획하고 추진한 많은 이들에게 중요한 훈련의 토대가 되었다. (중략)
조선인들은 합방 당시부터 이러한 조직들, 특히 총독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이미 다른 영역들에서 살표본 바와 같이, 대개의 경우 조선인의 채용과 승진이 급증하게 되었다. 가령 경성의 총독부 본부의 경우, 1931년에서 1942년 사이에 조선인은 일정하게 고위직(칙임관)의 18-25퍼센트, 하위직(판임관)의 30-36퍼센트를 차지했다. 일본인 관료에 대한 조선인 관료의 비율은 이 시기에 6퍼센트 감소하지만, 조선인 관료의 수는 고위직과 하위직 모두에서 각각 22퍼센트와 52퍼센트 증가하여 1942년 경에는 거의 1만 6000명에 달하는 조선인 관리들이 총독부 본부에 있게 되었다.
지방에서는 조선인 관리의 증가가 훨씬 더 큰 폭으로 이루어졌다. 같은 기간 동안 조선인 칙임관이 네 배 증가하고, 판임관은 약 1.5배 증가하는데, 가장 극적인 증가는 만주국 건국 직후와 중일전쟁 기간 중에 발생했다.
- 카터 J. 에커트, <식민지 말기 조선의 총력전, 공업화, 사회 변화>-634-635쪽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총 141명의 조선인들이 사관학교[도쿄의 육군 사관학교-인용자주]를 졸업했고, 이중 절반 이상이 1933년 이후 졸업생이었다. (중략) 사관학교 입학은 일본인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하물며 조선인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신체검사와 학과 시험을 통과한 후에, 조선인 사관후보생은 일본어가 모국어이고, 조선에서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수준보다 더 나은 여건에서 일본인 지원자들과 경쟁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1930-1940년대에 배경과 재력에 의존해서 육사에 들어가고자 했던 조선인들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한 방법을 선택했다. 약 60퍼센트는 4년 과정인 도쿄의 육군사관학교에 직접 지원했는데, 이는 2년 과정의 예과와 2년 과정의 본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본에서의 시험 통과 가능성이 희박했던 다른 사람들은 만주를 거치는 간접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중략) 우수한 학생들을 일본의 본과로 보내던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와 그 전신인 중앙 육군 훈련처는 가난하지만 명석한 조선인들에게 일본군 엘리트로 진입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다. 비록 입학 후에 조선인 생도들은 일본인 동급생들과 동등한 학업 기준을 적용받았지만, 만계와 일계의 입학시험은 분리되어 실시되었고, 조선인 지원자는 자신보다 일본어 교육을 더 많이 받지 않았거나 종종 매우 적게 받은 중국인이나 몽골인들과 입학을 놓고 경쟁하였다.
1950년대에 한국 육군의 참모장이 된 백선엽과 정일권을 포함하여 만주 국군 출신 한국 군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게 된 사람은 물론 박정희다. 그는 이후의 정치 경력 때문만이 아니라, 예외적인 지능을 소유했지만 빈궁한 농촌 소년이 식민지 말기 조선에서 체계화된 기회를 이용해서 일본군 장교로 진출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경우이다.
- 카터 J. 에커트 <식민지 말기 조선의 총력전, 공업화, 사회 변화>
-640-642쪽

(북한의) 공산 정권은 농업의 집단화를 추진함과 더불어 소규모 공업과 상업을 구축하고 그들을 협동 조합이나 국유 기업으로 재조직했다. 이 계획은 1960년까지 완료되어 개인의 경제적, 사회적 활동에 대한 엄격한 국가 통제 체제가 수립되었다. 그러한 성과는 이전에 급신적 '혁신 관료' 진영의 일본 우익들이 달성하고자 노력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 북한은 일본의 경제정책을 물려받아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셈이다. 이러한 연속성과 발전은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상 그것은 1930년대 이래 북한을 지배한 집산주의 철학, 곧 일제의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와, 최종적으로는 마오쩌둥주의에 영향을 받은 철학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1960년 이후 소비에트와 중국의 원조에 힘입은 북한 내 경제 여건의 개선은 국가 통제의 완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지도자 김일성은 국가 통제를 오히려 강화함으로써 경제의 군국주의화를 추구했다. 결국 최근의 북한 체제는 보다 노골적인 군국적 속성에서나 경제에 대한 국가 관리의 방식에서 전시 일본 체제와 더욱 닮아 있다.
- 기무라 미쓰히코 <파시즘에서 공산주의로-북한 집산주의 경제정책의 연속성과 발전>-763-7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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