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눈으로 산책 - 고양이 스토커의 사뿐사뿐 도쿄 산책
아사오 하루밍 지음, 이수미 옮김 / 북노마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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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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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매화를 볼 땐 벚꽃을 볼 때처럼 마음이 확 열리면서 즐기워지지는 않는다. 매화는 서서히 즐거워진다. 정원 북쪽으로는 아무도 오지 않는데, 그래도 매화는 차분하게 하얀 꽃을 포동포동 피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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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 임진왜란부터 태평양전쟁까지 동아시아 오백년사 메디치 WEA 총서 4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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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시덕은 왜 '역사학자'가 아니라 '문헌학자'일까? 역사 문헌을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자가 하는 일이 아닌가? 일어일문과 출신으로 일본에 가서 역사 공부를 하고 온 김시덕이 '역사학자'를 자처하지 못하는 것이 교조적 반일민족주의에 갇힌 한국사 학계의 배타성를 보여주는 사례는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82-84
한반도 문제를 해결한 청나라는 조선으로 하여금 홍타이지를 칭송하는 비석을 세우게 했다. 현재 서울 잠실의 석촌호숫가에 자리한 ‘大淸皇帝功德碑’, 일명 ‘三田渡碑’가 그것이다. 청나라의 공식 언어인 만주어, 몽골어, 중국어 세 개 언어로 새긴 이 비석은 청의 요구로 세워지고 비문의 세세한 부분까지 청에서 지정했다. 그러나 비석의 내용을 읽어보면, 조선의 신하들이 국왕 인조의 어리석음을 사죄하고, 홍타이지가 패전한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음에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세운 것처럼 돼 있다. 비문의 첫머리에는 "인자하고 관대하고 온화하고 신성한 한han께서 ‘화친을 깨뜨린 것이 우리 조선으로부터 시작됐다’며 병자호란을 일으키셨다"라고 선언한다. 이어서 "작은 나라가 윗나라에 죄를 얻음이 오뢔됐다"라고 하여 1619년 사르후 전투, 정묘호란 등의 사례를 든다. 그러나 조선이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듯하자 "신성한 홍타이지는 여전히 관대하게 즉시 군대를 보내오지 않고, 분명한 칙령을 내려 거듭 거듭 조선 조정을 깨닫게 하는 것이 마치 귀를 잡고 가르치는 것보다 또한 더했다." 그럼에도 조선은 여전히 깨닫지 못했으니 병자호란의 원인은 하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조선에 있다는 것이다. 비문에는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가 다음과 같이 말하며 항복을 결심했다고 적는다. "내가 정묘호란 이래 큰 나라와 화친한 지 10년이다. 내가 무능하고 우매하여 하늘이 정복함을 서둘렀고 만민 백성이 재난을 만났으니 이 죄는 오로지 내게 있다. 그러나 신성한 한은 차마 조선의 관민을 죽이지 못하여 이처럼 깨닫게 하시니, 내가 어찌 감히 나의 조상들의 道를 온전케 하고 백성을 보호하지 않기 위해 칙령을 받지 않겠는가?"

85
적반하장 격으로 청은 도리어 청이 조선을 다시 일으켰다고 하여 조선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풀었다고까지 주장했다. 원래 재조지은이란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낸 명나라가 조선에 대해 주장한 개념이었다. 이 개념을 홍타이지의 청나라가 차용한 것이다. 1716년에 도쿠가와 막부의 실권자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도 "조선빙사후의(朝鮮聘使後議)"라는 책에서 재조지은을 주장한다.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멸망시켜서 조선의 원수를 갚아주고 재침 위협에서 구해준 것이니, 재조지은이 있는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괘씸하다는 것이다. 조선의 주변 국가가 모두 재조지은을 주장하니, 참으로 동네북과 같은 처지의 한반도였다.

279-281
이번에는 한반도를 청나라에 병합하자는 논의가 청나라 정부에서 이루어졌다. 이홍장은 조선의 주권을 부정하는 이러한 방침을 택하지 않았지만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대원군을 납치하는 등 강경책을 구사하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수당이 고구려 및 신라와 충돌했던 경험을 통해 중원 세력은 한반도를 완전히 병합한다는 야망을 포기하고 한반도 세력은 중원의 국가를 上國으로서 존중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도출하여 이를 천 년 이상 유지해왔다. (중략)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중원 세력이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자, 한반도 세력은 이에 반발하여 일본 세력을 끌어들임으로써 중원 세력을 축출하고자 했다. 이것이 1884년 12월 4일에 김옥균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3일간 정권을 차지한 갑신정변이다. 이들은 베트남의 지배권을 두고 프랑스와 청나라가 충돌하면서 청나라가 조선에서 군대를 일부 빼간 틈을 타서, 일본 세력을 끌어들여 청나라를 축출하고 대원군을 귀국시키는 등 조선의 자주권을 확보하려 했다. (중략) 이처럼 갑신정변 세력은 통설과 달리 단순히 ‘친일파’로 치부할 수 없다. 최근 한국 학계는 이러한 관점에서 갑신정변 연구를 심화하는데, 재평가가 이뤄지기 전의 분위기도 한번 눈여겨볼 만하다. 김용구 교수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1967년이라고 기억된다. 필자는 ‘갑신일록’의 판본과 갑신정변에 관한 의견을 듣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를 찾은 적이 있다. (중략) 두 분의 연구원이 필자를 만나자 친일파의 문제를 왜 연구하느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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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스!
햐쿠타 나오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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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부분에 스포일러 있음.

51-54
"이나무라라는 선수는 몇 학년인데?"
"2학년이요. 하지만 작년 1학년 때 인터하이와 국체 그리고 선발대회까지 3관왕을 했대요. 아직 무패인 거죠."
요코는 링 위에 있는 이나무라를 보았다. 헤드기어를 쓴 얼굴은 도저히 열여섯, 열일곱으로 보이지 않았다. 몬스터라는 별명이 이해가 갔다. 눈매가 보통이 아니었다. (중략)
"정말 지루한 시합이야." 가부라야가 말했다. (중략) 얘는 방금 녹아웃 장면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네. 둔감해서 공포심도 덜한 모양이지. 상상력이란 게 없는지도. 요코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왠지 가부라야가 믿음직스러웠다. 그때 링에서 내려온 이나무라가 가부라야와 요코 바로 앞을 지나갔다.
헤드기어를 벗은 이나무라는 단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빈틈이 전혀 없고, 꽤 잘생겼음에도 상당히 무섭게 느껴졌다. 키는 가부라야보다 머리 반쯤 더 컸다. 이나무라는 가부라야를 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말없이 가부라야를 쏘아보았다. 눈빛에서 소리가 나는 듯했다. 가부라야도 이나무라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중략) 이나무라가 먼저 시선을 거두고 가부라야에게 등을 보이며 멀어졌다. 가부라야가 가볍게 숨을 토해냈다.

223-224
"그애는 지금까지 진 적이 없나요?"
"없습니다." 사와키가 바로 대답했다. "무패죠." (중략)
"그 애가 싸우는 걸 보니 패배의 무서움을 잘 아는 것 같아서요."
사와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사와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 아버지가 프로 복서였다고 합닏. 하지만 후유증으로 지금은 매우 심한 펀치 드렁커라고 하더군요."
펀치 드렁커라는 말은 요코도 알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전에 펀치가 뇌를 흔든다는 이야기 했죠? 오랫동안 펀치를 계속 맞다보면 뇌에 충격이 누적되어 펀치 드렁크 증세가 나타납니다. 상대의 주먹을 맞으면서도 파곧ㄹ어 공격하는 선수들에게 많이 나타나죠. 심한 경우에는 건망증이 생기거나 간단한 계산도 못하게 됩니다. 운동기능이 손상되어 손발이 떨리기도 하고, 똑바로 걷지 못하게 되기도 하고요. 더 심한 경우에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밤에 자다가 누운 채로 소변을 보기도 합니다."

239
"고교 권투가 수준 미달이라는 말씀이신가요?"
"뭐, 좋은 선수가 전혀 없으니까."
소가베는 그렇게 말한 뒤 바로 덧붙였다. "한 명만 빼고."
"그게 누구죠?"
"라이트급 선수. 그 녀석은 진짜 물건이더군."
"이나무라 말인가요?"
"이름은 기억 못하지만 그 선수는 대단하더이다."
요코는 역시 하고 생각했다. 이나무라를 한눈에 알아본 소가베도 대단하다 싶었지만 그런 소가베에게서 인정받은 이나무라는 역시 굉장한 선수가 틀림없었다.
"카를로스 오르티스 같은 녀석이었어."

336-338
그때 학생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보니 선수들끼리 멱살을 잡기 일보 직전이었다. 요코는 깜짝 놀랐다. 혹시 가부라야 때문인가. (중략)
"무슨 일인가요?"
요코가 김 감독에게 물었다.
"가부라야 녀석이 어떻게 조선인이 국민체육대회에 나올 수 있느냐고 한 모양이에요."
김 감독의 설명을 듣고 요코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가부라야에게 물었다. "너 그런 소릴 했어?"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고 물었을 뿐인데요."
김 감독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오사카 대표인데 그런 기분 나쁜 소리를 뭐하러 해."
사와키가 말했다.
"저는 왜 나오냐는 소리가 아니었다니까요."
"나오지 말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잖아." 사와키가 말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나무라가 불쑥 끼어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이나무라를 향했다.
"가부라야에게 악의는 없었던 것 같아요. 표현이 좀 거칠었지만요. ‘조선인인데.’라고 필요 없는 말을 더 해서요." (중략)
"네가 미국에서 생활하는데 미국인이 너더러 일본 국적을 버리라고 하면 기분이 어떻겠냐?"
"그야 싫죠."
"마찬가지야."
"하지만 난 미국 국민체육대회에 나갈 생각은 안 할 건데요." 김 감독이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가부라야,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의 관계는 좀 복잡한 면이 있어. 다음에 쉽게 설명해 줄게." 요코가 말했다.
"됐어요." 가부라야가 말했다. "별로 신경 안 써요. 인터하이는 고등학생만 참가하는 대회인 것처럼 국체는 국민만 참가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물어본 것뿐인데."

489-490
그때 누가 "사와키 감독님."하고 불렀다. 이나무라였다. 조금 전에는 저지를 입고 세컨드에 붙어 있더니 어느새 교복 차림이었다.
"그 동안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국체 때 감사했습니다."
"뭘 그런 걸로. 전일본 출전 축하한다." 사와키가 말했다.
이나무라는 "감사합니다." 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차분하면서도 품위가 있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180센티의 장신에서는 위압감이 풍겨나왔다. 이나무라가 기타루를 보았다.
"기타루, 우승 축하한다."
이나무라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기타루는 그 손을 맞즙으며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우리 도요타에게 완승을 거뒀네. 훌륭한 시합이었다."
"별말씀을요."
"뭐야?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는."
가부라야가 시비를 걸듯 말했다. 하지만 이나무라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기타루에게 말했다.
"올봄 인터하이 때 어쩌면 만날 수도 있겠다. 기대되네."
그러더니 이나무라는 빙긋 웃었다. 기타루의 얼굴이 굳었다. 이나무라는 사와키 감독에게 "실례했습니다."라며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뭐야, 저 멍청이. 잘난 척은...."
가부라야가 내뱉듯이 말했다.

653
"기타루는 권투뿐만 아니라 공부도 잘했어."
부원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금은 뭘 하시나요?"
"검사가 되었지."
부원들이 모호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요코는 이 아이들이 검사라는 직업이 어떤 건지 잘 모르는구나 싶었다. 요코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더니 다른 부원들도 하나둘 모여 들었다. 에다 감독도 왔다.
"고등학교 때 기타루 선배를 이긴 유일한 선수가 이나무라 카즈아키(稻村和明)라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이시모토가 물었다. "그래, 맞아." 몇몇 부원이 "대단하다."라고 소리쳤다.
이나무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로 전향해 삼 년 뒤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삼 년 반 동안 일곱 차례 방어전을 치른 뒤 타이틀을 반납하고 은퇴했다. 권투를 하는 소년치고 이나무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패 전적으로 은퇴하다니 굉장해." 누군가가 말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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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8-11-04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혈 스포츠 만화 같은 캐릭터와 심하다 싶은 결말을 가진, 약점이 분명한 소설인데, 두 번을 반복해서 빠져 들듯이 읽었다. 재미있다. 구입해서 곁에 두고 싶은 정도의 책은 아니지만, 출연도 적은 稻村和明의 캐릭터가 마음에 남아서 밑줄긋기로 보관한다. 제일 흥미진진했던 건 권투에 대한 설명 부분이었는데, 그건 머릿속에만 남겨두는 걸로.
 
한국인만 모르는 일본과 중국 - 32년간 한국과 중국을 지켜본 일본 외교관의 쓴소리
미치가미 히사시 지음, 윤현희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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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3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전후 50주년을 맞아 담화를 발표했다. 총리는 담화문에서 "우리나라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큰 손해가 고통을 주었습니다. 나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또 이 역사로 인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바칩니다"라고 밝혔다.
이후 일본의 역대 정권도 그 취지를 계승하고 있다. 2015년 아베 신조 총리 담화도 마찬가지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또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일본국 총리로서... 진심으로 사과와 반성을 표합니다’라는 사과의 편지를 보냈다. 위안부 문제는 ‘많은 여성들의 명예와 존엄성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라고도 썼다. 매우 기초적인 사실이다. 또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부와 민간이 협조해 마련한 ‘아시아 여성기금’으로 할머니들에 대해 여러 사업을 벌였다.
이상 모두가 공개된 사실이고, 일본 정부가 누차 강조해온 바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한국인에게는 ‘불편한 진실’이란 말인가. 그렇더라도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과하지 않았다’, ‘민간인의 돈뿐이다’라는 말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일본 측이 전부터 알려왔고, 많은 일본인들이 알고 있는 이 사실에 대해 한국 전문가들은 알고 있을 텐데, 사람들에게 말하거나 글로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80-82
2014년 1월 24일 한국 외교부에서 발표한 성명이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공허한 주장과 헛된 시도를 계속하는 것은 일본이 아직도 제국주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스스로 만천하에 증명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망령’, ‘공허한 주장과 헛된 시도’. 이것이 주간지나 신문 혹은 북한의 선동 기사도 아닌 한국 정부의 공식 코멘트인 것에 경악한다. 별로 놀랍지 않다면 이것이 과연 괜찮은 것인지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중략) 일본에 있어서의 한국의 이미지는 ‘한류’ 붐으로 조성된 친근한 이미지에서 최근 4-5년 사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일본인을 화나게 하는 한국의 말과 행동이 연이어 나왔다. 한국에서 지칭하는 일본의 ‘양심파’, ‘시민파’를 포함해 많은, 아니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이 "한국은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왜 그렇게 모르는 거냐?" 라고 분개하며, "한국은 합리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는 나라가 돼버렸다. 한국을 내버려 두자." 라고 말하고 있지만. 하지만, 그런 여론조차 ‘우경화’로 볼 뿐, 한국에는 제대로 소개, 분석되지 않는다. (중략) 이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측이 이 같은 발언, 일본이 ‘대체 이것은 어느 나라의 말인가?’ 라고 놀랄 만한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한 데 있다. 전후의 일본이 어떤 나라였는지에 대한 한국의 인식이 실제와 큰 차이가 있음을 보통 일본인들이 알게 되었다.

108-109
스시를 좋아한다고 해서 전후 일본의 정치, 외교의 핵심을 오해한 채 비난을 해도 좋다거나, 비난을 절반 정도 허용해 달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략)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지 않는다’, ‘역사를 직시하지 않는다’ 등 중요한 핵심 사안에서는 일본인이 헉! 하고 놀랄 만한 엉뚱한 일본관을 유지하면서, ‘일본의 먹거리나 문화를 좋아한다’고 하면 솔직히 곤혹스럽다. 어려운 주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중략) 한일의 현안을 ‘선과 악’으로 구분해 두고는, ‘한국의 주장이 정의’라는 식의 자세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생활 문화에 대한 호의가 실은 ‘자신은 무조건적인 반일이 아니다’라고 보는 구실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치 일본에 대해서는 ‘균형 잡힌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심리적으로 자기 정당화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125-127
미국 역사학회상을 수상한 컬럼비아 대학의 캐롤 글럭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종료 50주년인 1995년에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략)
"기억은 개인의 기억이든 국가적인 기억이든 단순한 이야기를 원합니다.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라는 흑백 논리를 좋아합니다. (중략) 하지만 역사는 단순한 줄거리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역사는 복잡한 이야기, 맥락이 닿지 않는 듯한 사정이나 사실을 가능한 한 다양한 각도, 여러 가지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중략)
모두들 ‘단순하고 알기 쉬운 스토리’를 바라며, ‘자국은 백, 상대국은 흑’으로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역사에 반하는 일이다. ‘역사’가 ‘민족의 기억’에 밀려나서는 안 된다. (중략) 중국의 역사 연구자 왕정(汪錚) 박사도 또한 ‘역사’와 ‘(역사적)기억’의 구별을 강조한다. (중략)
"기억(역사적 기억)은 역사상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고, 중국인이 역사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 그리고 정치적 지배층이 역사를 어떻게 만들어 왔는가 하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역사적 기억은 국민을 동원하고 대중적 지지를 결집하기 위한 특별한 수단이었다. 또한 일당독재를 용인하고 시민 권리의 제약을 정당화하는 최대의 근거이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국민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 속에 역사상의 일들을 전략적으로 배합해 넣고 있다. 1992년부터 시행된 애국주의 교육 캠페인을 기점으로, 이전 마오쩌뚱 류의 ‘승자 이야기’는 ‘피해자로서의 중국’으로 핵심이 바뀌었다. 그것은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 공산당이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압박을 느낀 결과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 박사는 내셔널리즘이 역사적 기억을 일깨우고 역사적 기억이 내셔널리즘을 부추기는 피드백 사이클을 중국이 단절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역사인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동양경제>, 2014)

200-201
2-3년 전, 정부의 중견 간부가 일본 특파원과의 간담회에서 빈번히 ‘여론의 부담’, ‘국민 정서’를 입에 올리며 특파원의 이해를 구한 적이 있었다. ‘위안부 문제로 화제가 된 특정 유력단체의 주장을 정부도 따를 수밖에 없다. 달리 판단하고 움직일 여지가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특파원들은 "공산주의 체제라면 모를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기 마련이고, 정부는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조정을 추진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강한 비판을 받으며 악당으로 몰리기도 한다. 그것이 정부다. 조정을 하거나 땀을 흘리지 않는다면 정부의 역할을 포기하는 셈이다", "여론의 비판이나 압력으로 정부가 힘든 것은 일본이 한국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다. 그것도 모르는가? 일본과 중국을 구별 못 하나?"라며 어이없어 했다고 한다.

202
‘진정성이 없다’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직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진실)이 아니다’라는 데까지는 가지 않았으니까,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정하고 평가하려니 심기가 불편해서 부정적인 감정만을 표시하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지만 그래서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 사회는 벌써 이 점을 알아차리고 있다.

230-231
중국 근대혁명의 아버지인 쑨원이 1924년 고베에서 가진 ‘대아시아주의’ 강연. 강연록을 보면 쑨원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러일전쟁(1904-1905년)이 끝날 무렵. 쑨원은 파리에서 귀국하던 중에 수에즈 운하를 통과했다. 그때 아라비아인들이 그에게 "당신은 일본인인가?"라고 물었다. 쑨원은 중국인이라고 대답했다. 아라비아인들은 "우리들은 지금 아주 기쁜 사실을 알았다. 부상당한 러시아 군대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유럽으로 가고 있다. 아시아 동방의 국가가 유럽 국가를 이겼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마치 우리나라가 전쟁에 이긴 것처럼 기뻐하고 있다"라고 쑨원에게 말했다.
강연에서 쑨원은 말했다. 그때부터 이집트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었고 페르시아, 터키, 아프가니스탄, 인도까지 독립운동에 불이 붙어, 그 후 20년간 활발히 전개되었다고. 일본이 러시아와 싸워 이긴 사실이 전 아시아 민족의 독립운동의 시발점이라고. 러일전쟁에 대해 한국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서강 열강의 지배에 괴로워하는 세계의 많은 나라가 일본의 승리에 용기를 얻었다는 사실, 그 세계사적 의의는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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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역사
리처드 파이프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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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것은 2001년에 나온 같은 출판사의 구판이므로, 인용의 내용은 2014년판과는 다를 수 있다.

64-66
역사의 관점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사건을 보면 그들의 무모함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볼셰비키의 지도자들 중에서 국가경영의 경험을 쌓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처지에서 가장 광대한 국가를 통치하는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기업을 경영해본 적도 없으면서 신속하게 국유화를 진행하는 것과, 그에 따라 세계에서 다섯째로 큰 경제를 운영하는 책임을 맡은 것 등에 겁먹거나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한편 공산주의의 이념상으로는 러시아 인민의 압도겆 다수가 부르주아와 지주들이었으나 실제상으로는 대개가 농민들과 지식인들이었다. 이처럼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을 볼셰비티는 자신들의 대변하는 산업노동자계급의 적들로 보았다. (중략) 이것은 새 정권이 독재정치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음을 뜻한다. (중략) 레닌은 이것을 깨닫고 무자비한 독재를 자행하는 데 하등의 거리낌이 없었다. (중략) 그는 반대자들을 물리치거나 주민들을 위협하기 위하여 무제한의 테러를 즐겨 사용했다. 그렇게 한 까닭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생명에 대하여 무관심한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의 연구를 통해 과거의 모든 사회혁명이 실패한 것은 중도에서 멈췄거나 적대계급을 관용하여 생존 후 재편성할 수 있도록 놓아둔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잘 쓰는 형용사인 총체적이고 무자비한 폭력을 사용하여 새로운 질서의 터를 닦아놓아야 했다.

135
북유럽과 미국에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이곳에서 모스크바 당국은 진보주의자들과 길동무(fellow travellers, 주로 지식인들로 구성)들 가운데서 유용한 제휴세력을 얻었다. 길동무란 공산당에 입당하지는 않은 채 당의 목표들을 널리 선전하고 장려하는 자를 말한다. 그들은 공산당의 입장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당의 명령에 따라 말한다는 의심을 사는 당원들과 달리 그들은 개인적 확신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155-156
공산주의는 어느 곳에서나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태어났다(중략). 한 가지 방식은 소련군이 강제로 강요하는 것이다(동부 유럽의 경우). 다른 것은 통상적으로 소련의 도움으로 정치문화는 물론 사회구조가 1917년 이전의 러시아를 닮은 나라들에서 일어나는 방식이다. 이들 국가의 정치문화는 사유재산 및 법치주의 등의 확립된 기존 전통이 없고, 독재체제를 대물림하는 특징을 띠었다.

171
차르 시대의 유산인 소련의 독재체제는 국민들이 순종하거나 순종하는 척하는 한 국민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대하여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반면에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지적이고 정신적인 순종을 백성으로부터 얻으리라고 요구했다. 이런 갈망은 유교에서 발원한다.

193-194
마르크스주의는 잘못된 역사철학과 비현실적인 심리학적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적 주장에 따르면, 그들이 폐기하려고 하는 사유재산제도는 일시적인 역사적 현상으로 원시공산주의와 선진공산주의 사이에 위치하는 말하자면 간주곡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명백히 거짓으로 밝혀졌다. (중략) 이에 못지않게 잘못된 마르크스주의의 원리가 하나 있다. 바로 인간성은 쇠를 두들겨 펴듯 얼마든지 마음먹은 대로 만들 수 있으며 따라서 억압과 교육을 합친 방법을 사용하면 욕심과 의지가 깨끗이 없어져 일반사회 속에 용해되는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이론이다. (중략) 공산주의 정권들은 통치의 일상적인 수단으로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들에게 가진 것들을 몽땅 포기하고 개인적 이익을 국가에 바치라고 강요하려면 공권력은 무한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야 했다. (중략) 경험에 의하면 그러한 정권은 실제로 실현될 수 있다. 러시아, 러시아의 속국들, 중국, 쿠바, 베트남, 캄보디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에 모두 그러한 정권들이 들어섰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엄청난 인명의 손상뿐만 아니라 그러한 정권들의 수립목적인 평등이 파괴되는 데까지 미쳤다.

206
욕심은 타고난다. 다른 사람의 욕심에 대한 존중은 태어난 후 배운다. (중략) 만약 개인의 재산권을 정부 혹은 일반사회의 타인들이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그 개인은 타인의 소유물에 대한 배려를 잃을 뿐만 아니라 매우 탐욕스러운 본능을 발달시키게 된다.

206
마르크스의 학설은 자본주의가 해결할 수 없는 내부모순을 겪으며 그것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파괴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자본주의는 현실에 민감하고 스스로 조절할 능력이 있었고 또 경험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모든 위기들을 용케도 극복할 수 있었다. 그 반면에 공산주의는 엄격한 원리이고, 유사종교로 바뀐 유사과학이며, 정치적으로 경직된 정권 속에서 구현되어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자체의 잘못된 개념들을 밝혀낼 수 없다는 게 증명되었고 결국 도깨비(공산주의가 가져온다고 하는 허구의 이상적 세계)를 스스로 포기했다. 만일의 경우지만 공산주의가 다시 소생한다는 것은 역사에 반항하는 일이 될 것이고 확실히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실패할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를 부활시키는 일은 미친 짓이다. ‘미친 짓’을 정의하자면,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면서 상이한 결과를 기대하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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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8-10-09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0년대에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되었던 사람들이 정치와 언론 권력의 핵심에 올라섰으니, 이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쪽 지식들이 필요할 것 같다. 너무 짧고 간결하다는 것이 약점이지만, 전체상을 머리에 넣는 데에는 무척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