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 임진왜란부터 태평양전쟁까지 동아시아 오백년사 메디치 WEA 총서 4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김시덕은 왜 '역사학자'가 아니라 '문헌학자'일까? 역사 문헌을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자가 하는 일이 아닌가? 일어일문과 출신으로 일본에 가서 역사 공부를 하고 온 김시덕이 '역사학자'를 자처하지 못하는 것이 교조적 반일민족주의에 갇힌 한국사 학계의 배타성를 보여주는 사례는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82-84
한반도 문제를 해결한 청나라는 조선으로 하여금 홍타이지를 칭송하는 비석을 세우게 했다. 현재 서울 잠실의 석촌호숫가에 자리한 ‘大淸皇帝功德碑’, 일명 ‘三田渡碑’가 그것이다. 청나라의 공식 언어인 만주어, 몽골어, 중국어 세 개 언어로 새긴 이 비석은 청의 요구로 세워지고 비문의 세세한 부분까지 청에서 지정했다. 그러나 비석의 내용을 읽어보면, 조선의 신하들이 국왕 인조의 어리석음을 사죄하고, 홍타이지가 패전한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음에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세운 것처럼 돼 있다. 비문의 첫머리에는 "인자하고 관대하고 온화하고 신성한 한han께서 ‘화친을 깨뜨린 것이 우리 조선으로부터 시작됐다’며 병자호란을 일으키셨다"라고 선언한다. 이어서 "작은 나라가 윗나라에 죄를 얻음이 오뢔됐다"라고 하여 1619년 사르후 전투, 정묘호란 등의 사례를 든다. 그러나 조선이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듯하자 "신성한 홍타이지는 여전히 관대하게 즉시 군대를 보내오지 않고, 분명한 칙령을 내려 거듭 거듭 조선 조정을 깨닫게 하는 것이 마치 귀를 잡고 가르치는 것보다 또한 더했다." 그럼에도 조선은 여전히 깨닫지 못했으니 병자호란의 원인은 하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조선에 있다는 것이다. 비문에는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가 다음과 같이 말하며 항복을 결심했다고 적는다. "내가 정묘호란 이래 큰 나라와 화친한 지 10년이다. 내가 무능하고 우매하여 하늘이 정복함을 서둘렀고 만민 백성이 재난을 만났으니 이 죄는 오로지 내게 있다. 그러나 신성한 한은 차마 조선의 관민을 죽이지 못하여 이처럼 깨닫게 하시니, 내가 어찌 감히 나의 조상들의 道를 온전케 하고 백성을 보호하지 않기 위해 칙령을 받지 않겠는가?"

85
적반하장 격으로 청은 도리어 청이 조선을 다시 일으켰다고 하여 조선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풀었다고까지 주장했다. 원래 재조지은이란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낸 명나라가 조선에 대해 주장한 개념이었다. 이 개념을 홍타이지의 청나라가 차용한 것이다. 1716년에 도쿠가와 막부의 실권자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도 "조선빙사후의(朝鮮聘使後議)"라는 책에서 재조지은을 주장한다.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멸망시켜서 조선의 원수를 갚아주고 재침 위협에서 구해준 것이니, 재조지은이 있는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괘씸하다는 것이다. 조선의 주변 국가가 모두 재조지은을 주장하니, 참으로 동네북과 같은 처지의 한반도였다.

279-281
이번에는 한반도를 청나라에 병합하자는 논의가 청나라 정부에서 이루어졌다. 이홍장은 조선의 주권을 부정하는 이러한 방침을 택하지 않았지만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대원군을 납치하는 등 강경책을 구사하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수당이 고구려 및 신라와 충돌했던 경험을 통해 중원 세력은 한반도를 완전히 병합한다는 야망을 포기하고 한반도 세력은 중원의 국가를 上國으로서 존중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도출하여 이를 천 년 이상 유지해왔다. (중략)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중원 세력이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자, 한반도 세력은 이에 반발하여 일본 세력을 끌어들임으로써 중원 세력을 축출하고자 했다. 이것이 1884년 12월 4일에 김옥균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3일간 정권을 차지한 갑신정변이다. 이들은 베트남의 지배권을 두고 프랑스와 청나라가 충돌하면서 청나라가 조선에서 군대를 일부 빼간 틈을 타서, 일본 세력을 끌어들여 청나라를 축출하고 대원군을 귀국시키는 등 조선의 자주권을 확보하려 했다. (중략) 이처럼 갑신정변 세력은 통설과 달리 단순히 ‘친일파’로 치부할 수 없다. 최근 한국 학계는 이러한 관점에서 갑신정변 연구를 심화하는데, 재평가가 이뤄지기 전의 분위기도 한번 눈여겨볼 만하다. 김용구 교수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1967년이라고 기억된다. 필자는 ‘갑신일록’의 판본과 갑신정변에 관한 의견을 듣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를 찾은 적이 있다. (중략) 두 분의 연구원이 필자를 만나자 친일파의 문제를 왜 연구하느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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