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스의 산 2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정다유 옮김 / 손안의책 / 2010년 3월
품절


러시아워라기에는 아직 조금 이른 오전 7시, 도쿄 역 야마노테 선 플랫폼에는 부쩍 낮아진 가을 햇빛이 비쳤다. 한손에는 서류 가방, 한손에는 조간신문을 든 가노 유스케가 막 문을 연 가판대 옆에 서 있었다. 얼핏 보면 평범한 회사원의 모습이다. 가노는 고무 밑창의 스니커를 신은 발이 옆으로 다가오자 조간신문을 향하고 있던 눈길을 한 번 들어 올린 뒤 다시 신문으로 떨어뜨리며 말했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
고다도 답하자 바로 가노가 말을 받았다.
(아래에 계속)-6-7쪽

(위에서 계속)
"이상한데. 왜 이런 식인 걸까?"
고다는 그건 이쪽이 할 말이라고 생각하며 "아아"라고만 답했다. 둘 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 하며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공사 현안을 함께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공공장소에서 얼굴을 맞댄 뒤 하는 첫마디가 ‘좋은 아침’이라니, 그리고 그 말에 이어진 것은 당면한 일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생각해보면 이 남자와는 옛날부터 추상적인 논의는 산더미처럼 했으면서도 일상 대화는 대체로 빈약하고 어색했다. 그것을 기요코는 항상 비웃었다. 게다가 길지 않은 결혼 생활의 끝이 보일 무렵에는 말없는 남자 둘이 모였으니 입 다물고 산이라도 탈 수밖에 없겠네 하고 냉랭하게 조소했다.-6-7쪽

다마카와를 포함한 각 서에서의 보고가 끊기자 고다는 한두 시간 선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동안 계속 뭔가가 가슴에 걸린 듯이 숨이 박혔다. 꿈속의 얕은 안개는 헤쳐도 헤쳐도 그대로였다. 어떤 순간에는 조사 중인 인간을 죽게 한 특수부 검사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있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전 4시 무렵, 다마카와 서의 정찰에서 돌아온 마타사부로가 문밖에서 날아든 냉기와 함께 코앞을 지나가고, 이어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기 시작한 그 목소리가 고다의 귀와 잠을 한동안 침식한 탓이었다.
아무래도 사에키는 자살로 결정난 것 같아, 하고 마타사부로의 목소리는 말했다. "어젯밤은 감시하고 잇던 오지 사람들에게 지검의 강제 진입 지시가 있었던 것 같아. 경찰이 발이 닳도록 사에키를 찾고 있는 동안 지검 놈들은 계산기를 두들기면서 사에키가 자살할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는 거야.
(아래에 계속)-138-140쪽

(위에서 계속)
그놈들은 오지에게 진입 이유도 말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실컷 경찰 수사를 방해해 놓고 사망자가 나오면 난 모른다는 얼굴은 놈들의 전형이지. 사에키건설은 몇 달 전부터 지검의 조사 대상이었다고 하는데 어차피 우리 쪽 사건에 자살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도망칠 작정이겠지. 어쩌면 아직 수사 착수 전이었던 사안이니까 검찰은 관여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하겠지. ....아, 주임님. 일어났어요? 주임님이 아는 사람 얘기가 아니에요. 혹시 몰라 하는 얘기지만."
고다는 깨어 있지는 않았다. 정확하게는 신경은 깨어 있었지만, 신체는 반쯤 잠든 채 꿈의 입구인가 출구에서 이 녀석을 때려눕혀 버릴까, 두 번 다시 입을 열지 못하도록 해줄까 하고 외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래에 계속)-138-140쪽

(위에서 계속)
지검에는 지검만의, 밖에서는 알지 못하는 내부 분쟁이 있다. 사에키의 가정부 여성이 사에키에게 ‘근간 수사 당국의 사정청취가 있을 거니까’ 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것은 특수부 내에서 가노 쪽 팀의 조사를 뭉개는 힘이 움직여 사에키를 궁지에 밀어 넣기 위한 정보가 고의로 유출되었다는 것이리라. 신경을 짓누르는 긴장과 압력을 받아가면서 특수부 검사는 계산기를 두들기고, 형사는 발이 닳도록 돌아다닌다. 어느 쪽이든 짓눌릴 때는 짓눌리고, 외부를 향해서 침묵하며 각자 자신의 흉중에 담아두는 것도 똑같다. 도망치는 것은 상층부고 현장 요원들이 대신 골탕을 먹는 것은 똑같은 것이다.
"어이, 마타사부로. 내가 아는 사람이 어쨌다고?"
"듣고 계셨습니까. 지검 놈들이 너무 열 받게 해서요."
"한번 소개시켜 줄게. 이름은 가노다. 느긋하고 반듯한 괜찮은 남자야."
"그거 고맙군요."
마타사부로는 현장에 있던 10계의 데라시마 주임에게 받았다는 메모 한 장을 눈앞에 내려놓고 그대로 나가버렸다.-138-140쪽

형식적인 1과 과장의 지령이 끝난 후, 예상대로 충신 다케우치가 "그리고, 고다 경부보는 나중에 서장실로"라고 한마디 덧붙였다. 고다는 올 게 왔다고 생각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그때 아즈마의 손이 재빨리 팩스 용지 한 장을 내밀어 왔다. 방금 전 히몬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용지에 자동적으로 기록되는 발신원에 아카사카의 편의점 이름이 있는 팩스에는 대외비의 표시와 함께 ‘다이칸야마에 대해서’하고 손으로 쓴 짧은 제목이 있었다. 발신자는 도쿄변호사협회이고 수신자는 도쿄 지검 형사부장. 일자는 헤이세이 원년 7월 29일.

다이카야마 건, 지난 28일 경시청 시부야 서에서 송치된 피의자 미즈사와 히로유키에 대해서 귀청 담당자의 수사 방법이 부적절하고, 경미한 절도사건 및 초범임에도 불구하고 강도죄로 기소가 검토되고 있는 점에 대해 피해자 아사노 츠요시 씨의 인권침해라는 제기가 있었기에 본 협회는 즉각 선처하도록 요청드립니다.

(아래에 계속)-185-187쪽

(위에서 계속)
고다는 신중하게 쓰인 내용을 읽었다.
"즉, 피해자인 아사노 츠요시가 미즈사와의 기소를 부당하다고 신청했다는 겁니까, 이건....."
"그런 모양이야. 어쨌든 헤이세이 원년 다이칸야마의 사건에서도 위에서는 이런저런 압력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거야. 그 아사노 츠요시도 교세이 대학 OB지? 다섯 번째 인물이 등장한 걸지도."
아즈마가 조용히 말했다.
아카사카의 편의점에서 팩스가 전송된 시각은 오후 2시 52분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고다는 경찰 내부에서 퍼진 신발 자국의 일치라는 소식이 그 단순한 사실 이상의 어떤 비밀과 이어져 순식간에 하지만 은밀히 가스미가세키로 흘러든 상황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들은 가노 유스케가 가지고 있던 정보를 이렇게 팩스로 흘린 상황을.
(아래에 계속)-185-187쪽

(위에서 계속)
"어쨌건 그것과 똑같은 팩스는 사쿠라다몬에도 도착했을 테니까."
아즈마는 전에 없이 의욕적인 어조로 그렇게만 말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편 아즈마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것 같은 하야시지만 슬쪽 눈길을 건넸을 뿐 마찬가지로 먼저 나갔다. 과거에 체포했던 적이 있는 인간의 허실을 형사로서 꿰뚫어보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중대한 범행을 용인했다는 사실에는 보신을 위한 변명은 통용되지 않는다. 또한 그런 변명을 허락할 만한 아즈마나 가노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좀처럼 없는 동정이나 援護의 손길이 슬며시 자신에게 뻗어 있는 것을 느끼자 고다는 새삼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또한 그 이상으로, 예전의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던 자신이 몸담고 있는 경찰 조직의 현실에 대한 불쾌감이 겹쳐졌다.-185-187쪽

5년 전, 28세의 가을 기요코가 집을 나갈 예정이었던 날도 지금은 기억이 안 나는 어떤 사건의 수사본부가 만들어져 있었다. 한밤중 본부에서 빠져 나와 근처의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갔을 때였다. 기요코는 이미 집을 나갔을 테지만 혹시 하는 생각이 들어 망설이기 시작하니 수화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부스 안에서 유리에 번지는 빛을 계속 바라만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가, 그날도 비가 내렸던가. 고다는 그렇게 사소한 사실을 다시 떠올렸던 것이지만 당시에는 있었을 심신의 진동은 따라오지 않아, 어쩐지 모르는 남자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아래에 계속)-224-245쪽

(위에서 계속)
잠깐 든 옛 생각 때문인지 고다의 기분은 조금 진정되었다. 고다는 전화카드를 다시 넣고 또 한 통의 전화를 걸었다. 요가의 마사공원 옆 공무원주택에 사는 특수부 검사는 아직 귀가하지 않아 부재중 전화가 응답했다. 이번에는 말을 골라 천천히 말했다.
"오늘, 팩스 봤다. 뭐랄까..... 뭐라 표현하기 어렵지만 처음에는 좀 곰곰이 생각했어.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은 게 분하다고 할까, 뭐 그렇다. 실은 오늘 사건에 변동이 있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 조금 무섭다. 진실을 앞에 두고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내가 다른 사람 같아. 그래도 어쩌면 너는 훨씬 전부터 조직 속에서 이러한 공포를 경험해 왔던 걸까.....? 자네를 안 지도 오래 됐는데 이해가 부족했던 게 부끄럽다. ......밤중에 미안. 사람이 붐비고 있어서 오늘밤은 이만."-224-245쪽

아카바네다이 단지 38동에 도착했을 때, 1층 우편함에 흘러넘칠 터인 신문이 보이지 않아 전 처남이 또 들렀다 갔나 생각하면서 5층에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와는 다르게 가노가 안에 있었다. 스웨터에 바지라는 평상복으로 가노 유스케는 바닥에 흩어진 산더미 같은 책을 정리하고 있었고, 부엌 테이블에는 마시다만 위스키가 있었다.
"오늘은 관사의 가을 축제라서 말이야. 시끄러워서 있을 수 없어서 왔어."
그래, 오늘은 일요일이었던가 하고 떠올리면서 한낮에 전 처암의 모습을 이렇게 보는 것은 꽤나 오랜만이라고 고다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건 그렇다 해도 일요일에 관사를 빠져나와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전 매부의 아파트라는 것은, 이 남자에게도 집은 집이 아니고, 생활은 생활이 아니다.
(아래에 계속)-390-394쪽

(위에서 계속)
똑같이 서른도 넘어서 남들만큼의 인생을 여전히 가지지 못하고 있는 원인이 자신과 기요코의 이혼에 있다는 것은 싫을 정도로 알면서, 개선하려고 하지 않는 태만함은 서로 마찬가지이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곤혹스러움도 서로 마찬가지였다.
"지난 번 자네가 남긴 부재중 전화를 들었어."
가노는 말했다.
"일이 힘들면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는 거야, 아마도. 그건 이제 잊어줘. 그것보다 나는 지금부터 고후 행이야. 실은 범인이 기타다케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면 가노는 상황의 혹독함을 즉각 판단할 수 있을 터였다. 살짝 검사로서의 얼굴을 보였지만, "시간이 있다면 잠깐 좀 씻겠어? 바로 물 데우지"라는 말만 하고 욕실로 자취를 감췄다.
(아래에 계속)-390-394쪽

(위에서 계속)
그다지 서두르는 것도 아니었다. 서둘러봤자 어떻게 되지도 않았다. 고다는 식탁 의자에 잠깐 앉아서 품에 들어 있던 복사용지 뭉치를 테이블에 두었다. 욕실에서 돌아온 가노에게 "이거, 너도 흥미가 있을 거야. 읽어도 돼"하고 말했다.
가노는 입수 경위는 묻지 않고 노무라 히사시를 기타다케 산에 묻은 남자의 유서를 한동안 쳐다보다 읽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고다는 벽장에 잠들어 있던 배낭이나 방한구 상하, 우비, 아이젠 등을 준비한 뒤 부엌의 가노에게는 말을 걸지 않은 채 먼저 목욕을 했다. 어느 쪽이나 유달리 키가 큰 성인 남성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기에는 오래된 공단주택은 너무 좁아 지나치게 숨이 막히는 것을 오랜만에 느끼고 그게 새삼스럽게 갑자기 겸연쩍어진 탓도 있었다.
그러나 가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래에 계속)-390-394쪽

(위에서 계속)
(중략)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전 매부에게 넌지시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사건의 배경을 알려온 남자의 진의는 일관되게 진실을 추구하는 것에 있었다고 고다는 믿었다. 현장 형사와 비교도 되지 않는 파벌 투쟁 가운데에 몸을 두면서 직접적으로 사건과 관련이 없는 부서에서 어떻게 해서 개인의 양심이나 사회정의를 지킬까, 자신의 직업과 인생을 지킬까 가노는 가노 나름대로 고군분투했던 것이라고. 그리고 그건 그렇지만 이미 각자 학생 시절과는 다른 얼굴을 하고, 다른 지붕 아래 있으면서 이렇게 지금도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 한 남자를 보고 있는 자신은 ‘마크스’ 다섯 사람과 어디가 다른 걸가도 생각했다.
(아래에 계속)-390-394쪽

(위에서 계속)
고다가 목욕을 끝내고 나왔을 때, 가노는 부엌 마루귀틀에 앉아서 전 매부의 등산화를 닦고 있었다. 오랫동안 신지 않아서 가죽에 조금 곰팡이가 피어 있었던 놈이었다. 가노는 거기에 크림을 문질러 바르면서 등을 돌린 채, "산이란 건 뭘까...."하고 한 마디 중얼거렸다.
"그러게. 뭘까....."
고다는 똑같은 말로 답하면서 문득 자신의 가슴을 스치고 가는 게 있다는 걸 깨닫고서는, 잠깐 동안이지만 전 처남의 등을 보고 있었다. 결혼 생활이 점점 위태로워졌을 무렵, 사건의 계속으로 좀처럼 돌아갈 수 없었던 집에 가끔 돌아가면 기요코가 똑같이 마루귀틀에 앉아 남편의 신발을 닦고 있었다. 기요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다도 기요코에게 건넬 말이 없었다. 그때, 그 한마디가 나오지 않았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지 한순간 생각하다 결국 서로 입에 담으면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그런 어떤 덩어리였던 것만 다시 떠올리고 나서, 고다는 전 처남의 어깨를 두드리며 "어이!" 하고 말을 걸고 있었다.
(아래에 계속)-390-394쪽

(위에서 계속)
"정월까지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까, 한잔 하자고."
"허어. 등산 약속 기억하고 있었나."
"잊을 리가 없잖아."
오후 3시 가노가 마시던 스카치위스키를 가볍게 한 잔씩 비웠다.
"무리만은 하지 마."
가노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방을 나섰을 때, 고다는 이유 없이 자신의 심신이 조금 진정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390-3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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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3-01-28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렁각시 유스케 씨.... 사랑스러워라. ㅋㅋㅋ
 
마크스의 산 1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정다유 옮김 / 손안의책 / 2010년 3월
품절


공장 정문 앞에는 경찰차 한 대가 서 있었고 젊은 남자 한 사람이 보닛에 엉덩이를 걸치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남자는 하얀색 반팔 노타이셔츠에 하얀색 스니커라는 시원해 보이는 가벼운 옷차림이어서 설마 동업자는 아니겠지 하고 생각한 그 때, 스모그 낀 하늘을 보며 담배를 피던 그는 손끝으로 담뱃재를 가볍게 튕겨 날려 보내자마자 "어이" 하고 사노 일행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여기는 출입금지다."
(아래에 계속)-87-88쪽

(위에서 계속)
남자는 돌연 기계가 말했나싶을 정도의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간사이 사투리인가? 사노는 귀에 닿은 그 어두컴컴한 울림에 순간 거슬리는 기분을 느끼며 노타이셔츠를 입은 목소리의 주인공 쪽으로 새삼스레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이는 서른 전후이리라. 아직 청년의 냄새가 남아 있는 청량한 얼굴 생김에 비해 무기질적인 돌을 연상시키는 안광도, 그 목소리도 항간의 동년배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노는 30년도 더 전에 경찰학교에서 몸에 밴 어떤 냄새, 어떤 견고함, 어떤 고양을 순간적으로 되살리면서 역시 동업자인가 하고 생각을 달리했지만 이미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나간 지 오래인 무언가의 기백에 약간 압도당하는 동시에 위화감도 느꼈다.-87-88쪽

그날 밤에는 나흘분의 신문과 함께 밀봉된 편지가 한 통 도착해 있었다. 벌써 몇 년간이나 가까운 친척도 없는 일개 형사 앞으로 사적인 편지를 보낼 법한 기특한 인간은 한 사람밖에 없어, 보낸 사람의 이름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편지를 보낸 가노 유스케(加納祐介)는 대학 시절부터 지기였고 한때 그의 친누이와 결혼해 호적상으로 처남이 되었다가 그 후 고다가 이혼함으로써 다시 타인이 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간의 경위도, 다양하게 뒤틀린 감정도 최근에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어 1년에 몇 번 상대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는 이유도 지금에 와서는 깊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거의 2년마다 지방 전근을 되풀이하는 검사이며 지금은 교토에 있다. 지난달인가 그 전달에는 ‘사가 두부’ 운운하며 속세에서 벗어난 유유자적한 이야기를 써 보냈다.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할까 하는 생각에 편지를 열면서 고다는 자신이 변한 것일까 하고 한순간 생각했다. 몇 년 전이었으면 열어 보지도 않고 버렸을 텐데 최근에는 내용에 따라서는 답장을 쓰자는 마음마저 드는 것은 스스로도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래에 계속)-113-115쪽

(위에서 계속)
그날, 전 처남의 편지는 ‘허례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게을러서 그만 연하장을 보내지 못하고 실례했네’라는 달필로 적힌 첫머리에 ‘얼마 전 두개골에서 복원된 얼굴 사진이란 것을 볼 기회가 있었어’라고 이어졌다.

...그것은 실로 추악했어.애당초 흙으로 돌아간 육체의 복원이라는 것은 몽타주 사진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 생생한 요철이 있는 점토로 된 얼굴을 눈앞에 두면 누구든 스스로의 知力에 위기감을 느낄 거야. 눈앞에 형태를 이루고 있을 뿐, 닮았지만 다른 물건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은 그야말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혜의 한계라는 것이지. 그러나 항간에는 더욱 추악한 이야기가 있네. 내가 들은 바로는 그 청년이 행방불명이 된 직후 이쪽 공안 당국은 청년이 미나미알프스 방면으로 나갔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거야. 하지만 당시에는 그것에 대해서 각 관련 경찰에 연락은 고사하고 본격적인 수사도 행해지지 않았네.
(아래에 계속)-113-115쪽

(위에서 계속)
이것은 명백히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혜의 한계 안의 이야기야. 사정 여하에 관계없이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나서는 안 돼. 어찌되었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의 흰머리는 또다시 느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자네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신년 벽두부터 뭔 소리를 써 보내는 거냐’ 하는 생각을 하며 고다는 가노의 젊디젊은 미모를 떠올렸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된 국가기관인 검찰관의 원칙이 가노라는 남자 안에서는 명실상부하게 존속하고 있다. 그 결과가 흰머리지만 앞으로 십여 년만 참으면 그것도 아름다운 ‘로맨스그레이’가 될 것이리라. 똑같이 사생활은 최저지만, 아직 자네 쪽이 낫다고 생각하며 고다는 나흘 분의 위스키를 한꺼번에 들이킨 김에 서툰 답변을 적었다.-113-115쪽

오전 6시 20분. 창밖의 흐릿하게 밝은 하늘에서는 내리다 말다 하는 비가 내렸다. ‘발자국의 흙이나 부착물은 떠내려갔겠군.’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고다 유이치로(合田雄一郎)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일어섰다. 33세 6개월. 일단 일을 시작하면 마치 경찰관 직무집행법이 옷을 입고 걸어 다니는 것 같은 규율과 인내의 덩어리가 된다. 관할서와 본청을 오가면서 수사를 해온 지 10년, 수사 1과 230명 중 누구보다도 말수와 잡음이 적으면서, 누구보다도 단단한 시선을 지닌, 그늘 속에 숨은 돌 중 하나였다.-149쪽

차 안에서 사건 이야기는 할 수 없는 탓에 고다는 수첩에 휘갈겨 적은 피해자의 이름, 나이, 조직의 이름을 양 옆의 부하에게 보여주었다. 올해 30세의 순사부장 모리 요시타카(森義孝)는 지병인 아토피가 그날 아침에도 기승을 부리는 듯한 무뚝뚝한 얼굴로 ‘알 리가 없죠’하고 답했고 7계의 베테랑 부실장인 히고 가즈미(肥後和巳) 순사부장도 무뚝뚝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그렇고 당신들 오늘 아침엔 어떤 일이야. 우연히 만났나?"
"역에서. 아침부터 음침하게 등을 웅크리고 걷는 놈이 있어서 얼굴을 봤더니 오란이어서..."
히고는 자기 일은 제쳐두고 실실 웃어보였다.
(아래에 계속)-151-153쪽

(위에서 계속)
‘란마루’라는 별명을 가진 모리를 7계 사람들은 농담 삼아 ‘오란’ 등으로 부르곤 했는데, 부임한 지 5년 만에 순사부장 승진 시험에 합격한 그의 우수함을 동료들이 싫어한다기보다는 마치 너무나 간단해 거푸집에조차 담을 수 없는 쓸모없는 콘크리트를 처치 곤란해 한다는 것이 진심에 가까웠다. 그런 돌출된 자존심과 강렬한 권력 지향을 뱃속에 감추고 매일 아침 고다 다음으로 일찍 출근하는 모습은 히고를 비롯한 본청의 고참들에게는 절호의 먹잇감이었지만 전혀 신경 쓰는 기색도 없는 것이 바로 모리라는 남자였다.
(아래에 계속)-151-153쪽

(위에서 계속)
한편 히고 쪽은 모습을 드러낸 시간이 유난히 빨랐던 것을 보면 그날 아침도 다마의 자택이 아닌 오기쿠보의 애인 집에서 출근한 것이 틀림없었다. ‘어차피 뻔히 아시면서’ 하는 두꺼운 낯짝에 자조를 섞으며 히고는 고다가 담배를 물자 재빨리 자신의 라이터 불을 내밀었다. 고다가 거절하자 살짝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43세가 되는 히고에게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경부보에게 아첨을 빼트리지 않는 세상 물정에 밝은 샐러리맨 근성과 좋든 나쁘든 고참다운 오만함이 동거하고 있어, 꽤나 얕볼 수 없는 다마의 늙은 너구리였다.-151-153쪽

그 혼란 옆으로 드디어 7계의 동료 중 한 명인 아리사와 사부로(有沢三郎) 순사부장이 뛰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일단 사건이 일어났다 하면 밤중이라 해도 하치오지의 집에서 지갑 사정도 돌아보지 않은 채 택시를 타고 어떻게든 현장에 첫 번째나 두 번째로 달려온다. 그 모습이 문자 그대로 질풍같은 느낌이어서 바람의 마타사부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35세. 수사1과 제일 미남자라고 거리낌 없이 자칭하는 두꺼운 얼굴과 탁월한 말솜씨, 뛰어난 수완, 젊음과 체력 등이 있는 만큼 어떤 의미로는 히고 이상의 강자였다.-161-162쪽

그 사이 시체가 있는 천막에는 7계의 나머지 사람들이 차례차례 달려오고 있었다. 7계 중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제대로 된 차림을 한, 유도 7단의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조용조용 움직이는 히로타 요시노리(広田義則) 순사부장. 올해 35세로 더스터코트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이 교양 시사 책 아니면 시부사와 다츠히코라는 기묘한 조합도 물론 그렇지만, 아키타 출신의 뽀얗고 탱탱한 피부를 놀린 ‘유키노조’라는 별명에는 개인적인 깊은 사정도 있었다.
(아래에 계속)-163-165쪽

(위에서 계속)
이어서 유일한 20대인 십자매 마츠오카 유즈루(松岡譲) 순사. 요즘 젊은 세대는 형사 생활을 3년이나 해도 볼도 전혀 패이지 않고 위도 망가지지 않는다. 붙임성도 많고 배려도 잊지 않으며 대답도 명량하게 한다. 금색 버튼이 달린 블레이저를 입고 짹짹 날아다니는 얼빠진 건강우량아는 모리 요시타카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고다 세대로서는 다루기 어려운 신인류였다.
(아래에 계속)-163-165쪽

(위에서 계속)
그리고 36세의 아즈마 테츠로(吾妻哲郎) 경부보. 통칭 ‘페코’라 한다. 그 이름처럼 밀키라는 과자 상자에 붙어 있는 인형 그림을 빼닮은 가히 두렵기까지 한 동안과는 대조적으로 도쿄대를 졸업한 복잡기괴하게 비틀린 두뇌는 1년 내내 그야말로 사방팔방으로 이채를 내뿜고 있었다. 학생이던 20세에 결혼을 해 21세에 아이를 낳았다. 사법시험보다 밤중에 기저귀를 가는 생활을 우선시하며 아내는 학업을 계속하게 하고 자신은 졸업과 동시에 생활이 안정된 공무원의 길을 선택했다고 하는데, 권력 중에서도 신체와 직결된 가학적인 희열로 가득한 경찰이라는 조직의 분위기가 의외로 본인과 맞았던 것은 틀림없었다. 그날 아침도 역시 무신경과 자신과잉의 상징 같은, 여전히 번들거리고 있는 비단벌레 색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벌서 아랫배가 나오기 시작한 자그마한 체구를 분주하게 흔들며 천막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자, 예상대로 현장은 30초도 되지 않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아즈마의 독무대가 되었다.
(아래에 계속)-163-165쪽

(위에서 계속)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천히 살금살금 기척 없이 나타난 7계의 계장, 하야시 쇼조(林省三) 경부. (중략) 수사 1과에 있는 열여덟 명의 경부 중 최고령인 53세로 말단부터 기어 올라온 전형적인 형사다. 하지만 정년까지 이제 승진은 없다. 2년 전 위를 절제하고 3개월간 휴직해, 모두가 1과로 복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돌아온 터프함과 강운은 7계의 부적 같은 존재였지만 부적은 때로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마는 법이다. 그만큼 존재감이 희미하고 목소리도 작은데다 흉중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잘 알수가 없다. 본명을 비튼 ‘모야시(콩나물)’라는 별명은 병에 걸리기 전부터 붙어 있었지만, 정말로 콩나물 같은 남자인지 어떤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에는 매일의 업무가 지나치게 많고 과격해, 그 별명의 진의를 찬찬히 헤아릴 만한 여유는 누구에게도 없었다.-163-165쪽

흔한 의문들을 생각한 것도 잠시, 마타사부로가 다시 살짝 ‘저기’ 하고 턱으로 가리킨 뒷문에서 한눈에 봐도 형사와는 행동거지가 다른 남자들 세 명이 나오는 게 보였다. 그중 가장 뒤에 있는 한 사람은 자신의 몸 하나를 주체하지 못하는 듯한 무료한 모습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고 키가 큰 몸을 새벽 바람에 표표히 나부끼고 있었다. 어라 싶었더니 그쪽도 느껴지는 게 있었는지 고다 쪽으로 시선을 향하자마자 씨익 웃어보였다. 그는 봄의 인사발령에 따라 도쿄 지검으로 옮겨온 가노 유스케였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얼굴을 마주친 당혹감을 이렇게 먼저 한발 앞서 웃음으로 흘려보내고 마는 구석이 실로 노회한 전 손위처남다웠지만 고다는 당신까지 뭘 하러 왔냐고 무의식중에 소리를 낼 뻔 했다.
(아래에 계속)-244-247쪽

(위에서 계속)
즉시 눈치 빠른 마타사부로가 ‘호오, 지검에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하는 눈빛을 건넨다. 고다는 몸에 새겨져 있었을 철저한 공사 구분이라는 불문율이 한순간이라도 자신의 안에서 사라졌던 것에 남몰래 당황해하고 초조해 했다. 잰 걸음으로 등을 돌리고 사라지는 가노의 담담한 뒷모습은 전 매부의 당혹감 따윈 상관없다는 듯해, 검찰이 경찰 앞마당을 밟을 때는 이유가 있는 거라고 내뱉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것은 단순히 검사와 형사라는 유사하지만 다른 입장에서 오는 갈등인 걸까, 그렇지 않으면 학생 시절부터 이어진 개인적인 인간관계가 꼬이고 꼬인 끝에 오는 감정인 걸까. 고다는 잠시 생각하다 자신도 휙 등을 돌리고 ‘철수한다’ 하고 마타사부로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중략) 시발 열차가 출발하기 전의 인적이 없는 플랫폼에는 독특한 냄새가 있다. 고다는 오사카의 보잘것없는 외근경찰관 집에서 태어나고 자라 중학 시절에는 공부를 하면서 신문배달을 했다.
(아래에 계속)-244-247쪽

(위에서 계속)
동트기 전의 거리를 자전거로 달리면서, 제방 위를 달리는 긴테쓰 전철의 시발 열차 불빛을 올려다보며 자신은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겠다고, 양복을 입고 전철로 출근하는 직업을 갖겠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술을 뒤집어쓰듯이 마셔댄 아버지가 재직 중에 간경변증으로 사망한 날, 밤을 샐 준비를 하기 위해서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베노 역에서 어머니와 둘이서 시발 열차를 기다리면서 이대로 어머니를 데리고 어딘가 멀리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 뒤 어머니의 고향인 도쿄로 이사한 지 15년, 예전에 시발 열차를 바라보던 때의 마음은 이미 어렴풋한 형태밖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희미하게 코 안을 죄어오는 듯한 무언가의 냄새를 들이마시며, 잠깐 전 처남의 얼굴을 다시 떠올리기도 했다. 미토(水戶)의 유서 깊은 집안 출신으로, 좌절과는 인연이 없는 수재 남자와 우연히 대학 세미나에서 알게 되어 한때는 서로 처남, 매부까지 되었던 시간도, 정말로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모든 것이 몹시 불확실하다고 느꼈다.-244-247쪽

집이 있는 38동 5층에 다다르니 현관 문 손잡이에 ‘청소 당번’ 표찰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을 벗기고 혼자 사는 방의 불을 켜자 신문에 끼어오는 광고지 한 장이 부엌 테이블에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올 봄에 도쿄 지검으로 발령받은 이후, 항상 집을 비울 때 찾아와 대수롭지 않은 자료 정리나 필기를 위해 광고지를 사용하고, 그때마다 간단한 메모와 희미한 정발제의 냄새를 남기고 가는 남자가 그날 밤도 들렀다 간 것이다. 5년 전 고다가 가노 기요코(加納貴代子)와 이혼한 이해 거북한 마음도 있어 가노와의 사이도 소원해졌지만 굳이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현재의 관계를, 늘 방에 남기고 떠난 그 향기 하나가 조금 엉클어트린다. 그러한 가노도, 그에게 이렇게 여벌 열쇠를 건네준 자기 자신도 둘 다 뭔가 필요이상으로 은밀하다는 생각을 하며 고다는 메모를 대충 훑었다.
(아래에 계속)-269-274쪽

(위에서 계속)
유이치로,.
내 다리미가 불을 뿜어서 자네 것을 빌리러 왔어. 관사에서는 이런 생활도구를 빌리는 짓은 하고 싶지 않거든. 빌리는 김에 검은 넥타이도 하나 빌렸네.
눈치 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오늘밤의 고 마쓰이 모씨의 장례식장에서 철야를 하고 내일은 본 장례식이 있이서 나는 하루 종일 아오야마 장례식장에 대기하고 있을 걸세. 고인과 관련 있는 부서만으로 200명 정도의 조문객이 온다고 해. 나는 장내 정리 담당이야.
어젯밤 오지 서를 찾아갔기에 사건에 대해서 다소의 이야기를 들었어. 내가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말해주게. 사족이지만 그저께 오랜만에 기요코가 전화를 했어. 보스턴의 물이 맞는다는 것 같아. 자네도 건강하다고 전했어.
가노 유스케
(아래에 계속)-269-274쪽

(위에서 계속)
(중략) 수첩을 칭겨 넣고 반짝반짝하게 닦인 바로 옆의 식탁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 옷을 갈아입으러 돌아왔을 때 자신이 내던졌을 신문이나 찻잔을 정리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정리하고 덧붙여 테이블을 닦고 간 남자는 걸레를 짜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기 시작하니 가노의 얼굴은 기요코와 겹쳐졌고 대학 시절부터의 남자 두 사람과 여자 한 사람의 미묘하기도 하고 단순하기도 했던 세월과 겹쳐졌다. 고다는 지난 세월과 달라진 지금의 모습에 스스로를 침울하게 만드는 탈력감과 함께 언제나처럼 정처 없는 기분에 이르렀다. ‘이미 헤어진 여자에 대한 집착은 없었지만, 한편으로 그 쌍둥이 오빠인 남자의 잔향을 자신의 거처에서 맡으면서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가노도 그렇지, 아무리 15년이나 된 친구라 해도 친여동생과 이혼한 남자의 집에 발걸음을 옮기다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어느 쪽이고 마치 상처가 낫는 것을 두려워하듯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떨어지지도 않으면서, 이해관계는 없지만 명확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래에 계속)-269-274쪽

(위에서 계속)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건지 모를, 별반 의미도 없는 다른 사람의 정발제 냄새 하나가 신경에 거슬렸다. 그리고 애달팠다.
그러나 봄 이후, 생각은 항상 거기서 멎었다. 고다는 술에서 깨기 위해 물을 마시고 하루의 끝 무렵에 속옷 한 장 차림으로 욕실에서 스니커를 빨았다. (중략) 말할 필요도 없이 장례식에는 피해자의 유족 일동, 직장 동료, 동창생, 친구 및 지인 등 거의 대부분의 연고자가 모인다. 법무성이나 검찰까지 재빨리 수사에 개입한 현 상황에서는 오지의 수사본부에서조차 접근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조문객 명부를 확인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일 장례식에서 자신은 장내 정리를 담당한다고 일부러 적어놓고 간 남자의 의도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때마다 어떻게 해도 기요코와 하나가 되는 가노 유스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고다는 스니커를 닦던 손을 멈추었다. -269-274쪽

이케부쿠로 역을 나오니 눈은 비로 바뀌어 있었다. 요즘은 역 앞도 지하도도 정비되어 깨끗해졌지만 그래도 아직 이 주변에서는 어둠에 흩어지는 네온의 색이 혼탁하고 짙게 보였다. 메이지도리에 늘어선 영화관 옆 골목을 조금 배회하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작은 재개봉관의 간판을 발견하고 지하로 내려가 입장권을 샀다. 제목도 들어본 적 없는 오래된 외국 영화의 스틸 사진이 동시상영 중이라며 붙어 있었다.
20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상영관 안에는 검은 머리가 기껏해야 대여섯 개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중에서 깊게 숙인 머리 하나를 발견하자마자 고다는 서둘러 뒷좌석에 앉아 앞좌석의 어깨를 흔들고 "어이" 하고 목소리를 죽여 말을 걸었다.
"이런 데서 자지마."
"아아, 왔어...."
가노 유스케는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우선 지갑부터 확인해."
"지갑은....." 하며 더스터코트 앞가슴을 만져본 가노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무사해."
(아래에 계속)-286-293쪽

(위에서 계속)
인적 없는 어둠에 무조건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암흑 속에 흩어져 있는 몇 개의 머리가 전부 소매치기나 치한으로 보이는 자신이 이상한 걸까. 옛날에 가노 남매와 함께 자주 왔던 영화관이었지만 이전에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스크린도 밝았고 상영물은 기요코가 좋아하는 코미디가 많았는데 지금 스크린에 비치고 있는 것은 모노크롬의 울적한 겨울 화면이었다.
"여기도 변했군."
가노는 태평하게 중얼거렸다.
"아아......"
"넥타이 고마웠어. 세탁해서 돌려줄게."
"장례식, 어땠어?"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은 슬퍼지지 않아서 곤란해."
그런 소리를 하며 앞좌석에 앉은 가노는 불쑥 장례식 식순을 인쇄한 카드를 뒤로 내밀었다. (중략) 가노는 참고만 하라고 말하더니 참석한 관료의 주된 면면들의 신분을 담담히 읊었다. 고다는 뒷좌석에서 재빨리 메모했다. "고인의 평판은 어떻지?"
(아래에 계속)-286-293쪽

(위에서 계속)
(중략) 고다는 어디까지나 고요한 가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옛날부터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반추하고는 하나하나 신중히 판단을 보류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짧은 한순간은 항상 일에 쫓기는 나날 속에 뚫린 공백이었다. 그러고 보면 가노 남매와 지낸 떠들썩한 세월들의 기저에 있던 것은 이처럼 조용하게 충족되어 가는 시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면서도 무언가 여러 가지가 혼연일체가 되어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런 게 싫어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인데 막상 일이 터지면 정보를 원하는 마음 하나로 다가가는 자신이 애달팠다. 혹은 한창 중요한 정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문득 탈선해 무턱대고 한 남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거나 하는 자신이.
(아래에 계속)-286-293쪽

(위에서 계속)
(중략) "마쓰이 코지가 등산을 했나..... 시체는 햇볕에 그을리지 않았는데."
"옛날 얘기겠지. 너도 그렇잖아. 지금은 뭐야 이 손은...."
가노는 자신의 자리 등받이에 올려 있는 고다의 손을 찌르며 미소 지었다. 그러는 가노의 손도 하얗다. 함께 산을 돌아다니며 새까매졌던 시절, 밤에 만난 대학 수위가 도둑으로 착각하기에 학생 수첩을 보여줬더니 사진과 얼굴이 다르다고 했던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유이치로, 올 여름엔 산에 가지 않았나?"
"산은 무슨. 신주쿠와 우에노에서 외국끼리의 상해 사건이 다섯 건. 오봉 휴가도 못 갔다."
"아, 오사카 사투리..... 오래간만에 듣는걸."
"피곤해서 그렇겠지. 무심코 그만 나오고 말아."
"유이치로의 오사카 사투리, 좋아. 좀더 쓰라구."
"그만해, 멍청아."
(아래에 계속)-286-293쪽

(위에서 계속)
"책은 읽고 있어?"
"아아. 드문드문....."
"있잖아, 정월에는 호타카에 가지 않겠어? 둘이서......"
"호타카 어디....."
"기타가마 능선에서 야리가타케. 마에호키타 능선도 괜찮아."
가노는 스크린 쪽을 향한 얼굴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조금 톤이 높아진 그 목소리에서 살작 안색이 누그러진 것이 느껴졌다. 학생 시절부터 늘 1년에 몇 번은 가노와 둘이서 산에 올랐던 시간도 자신의 이혼과 함께 끝났고 두 번 다시 함께 걸을 일은 없으리라 고다는 생각했지만, 닫혀 있던 문을 또다시 가볍게 열어 보인 것은 이번에도 역시 가노 쪽이었다. 봄부터 넌지시 용의주도하게 기회를 살펴보고 있었던 건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 막 생각해낸 건지, 아무튼 이 남자는 자신의 벌거벗은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자기 자신도 그것을 허용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은걸..... 기타가마라...." 하고 고다는 중얼거렸다.
"나는 3월에 올랐지. 눈이 단단하게 뭉쳐 있어 무너지지 않았어. 좋았다구."
"나는 2년 만인 걸..... 자일이 썩었겠어."
(아래에 계속)-286-293쪽

(위에서 계속)
"12월의 주말에 미나미알프스에서 워밍업을 하자구. 신년 휴가 꼭 받아."
"아아."
"그리고 참석자 방명록 말인데, 경찰은 최소한 유족과 교섭할 권리는 있어. 유족들에게는 여기저기서 매스컴이 야단법석 떨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놨을 거라 생각하지만, 내심은 복잡할 거야. 나라면 어떻게든 해서 조사해볼 거야."
"그럴 작정이야."
"조심해. 너무 깊게 들어가지는 말고."
"아아."
앞좌석에서 가노는 뒤를 향해 손만 내밀었다. 고다는 그것을 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졸지 마" 하고 말하자 "걱정 마" 하는 가노의 대답이 돌아왔다.
돌아가던 길에 고다는 문득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아까보다 별로 나아보이는 건 없었지만 개인 생활의 범주에 속한 한 남자와 만나는 짧은 한 때는, 분명 덮여 있던 뭔가가 하나 벗겨져가는 듯한 낯간지러운 기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286-293쪽

고다에게 ‘적색분자’라는 딱지가 붙은 것은 쇼와59년(19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순사부장으로 승진해 경찰학교에서 소정의 훈련을 받기 위해 합숙하고 있던 어느날, 교관에게 호출당해 아내 기요코에게 원자력발전소 반대 운동에서 손을 떼게 하든지, 자네가 경찰을 그만두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말을 들었다. (중략)기요코는 쌍둥이 오빠 유스케와 이상주의의 정수를 나눠 가지고 태어난 듯한 그런 여자였는데, 그 두뇌는 오빠 이상으로 세속에 초연해 당시에는 도쿄대 이학부 연구실에서 양자론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였다. (중략)나중에 판명된 것이지만 기요코 본인은 원전반대운동에 관여한 사실이 없었다. 다만 같은 이학부에 있는 어떤 조교수가 과학적 신념에 의해 혁신계 노동단체가 주도하는 운동에 관여하고 있었는데, 조금씩 밝혀진 사태의 진상은 한마디로 그 연구자와 기요코의 불륜이었다. (중략) 사태는 결굮 기요코가 떠나는 형태로 수습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다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아래에 계속)-322-324쪽

(위에서 계속)
기요코는 서적 이외의 짐을 전부 남기고 집을 나갔고 이혼은 쇼와62년(1987년)에 성립되었다. 그 이후 고다에게는 경찰과 ‘적색분자’라는 딱지만에 남았다. 오빠인 가노 유스케도 쇼와60년 봄의 인사이동으로 오사카 지검에서 후쿠이로 전출당한 이후, 지방을 전전한 끝에 도쿄로 돌아오는데 7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본인은 한번도 언급하지는 않았고, 고다 앞으로 쓴 편지에는 그저 기요코를 책망하지 말아달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탁할 뿐이었다. 누가 잘못했던 것인지 무엇이 진짜 원인이었는지 하는 자문은 그렇게 해서 지금도 각자의 흉중에 간직된 채로 남아 있다. -322-324쪽

"그러고 보니 주임님도 산에 오르셨죠.... 산에 오르는 사람의 세계라는 건 어떻습니까. 좁습니까, 넓습니까?"
"글세......"
고다는 잠시 생각해 본다. 19세의 여름, 대학 도서관에서 알게 된 가노 유스케의 권유로 시작하게 된 산행. 그해 여름 호타카를 시작으로, 작년 여름 혼자서 종주한 오쿠치치부 산까지, 기요코와 이혼하기 전까지 여름도 겨울도 항상 가노와 둘이서 산을 오르던 나날에 대해서는 그저 유유저ㅏ적하게 세속에 대해 초연했던 그런 기억만이 남아 있지만, 그 세계는 좁았던가, 넓었던가? 혹은 가노 남매와 소원해지고 나서 혼자서 근방의 산을 걸었던 나날은 대체 닫혀 있었나, 열려 있었나?
"나는 산악부는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다른 스포츠와 달리 목숨이 걸려 있으니까 그런 만큼 무언가 특별한 동료의식 같은 게 있다는 것은 느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말이야. 의외로 폐쇄된 좁은 세계일지도 모르겠군."
"저희들 같네요."
모리는 한마디하더니 허공을 향해서 가볍게 웃었다.-390-391쪽

택시를 잡을 수 있는 교차점까지 나왔을 때, 고다는 재빨리 왼쪽으로 다시 몇 걸음 나아가 발걸음을 멈췄다. 처음으로 사회부 기자라고 이름을 댄 그의 얼굴을 보았지만, 조용한 옛날 서생 풍의 얼굴은 본청 9층에 있는 칠사회 클럽에서는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담당은 어디십니까?"
"지검 쪽입니다. 맞다 맞다, 가노 유스케 검사님께는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할 것 같은 단정한 얼굴이지만 마치 육법전서가 옷을 입고 걸어 다니는 것과 같은 검사님의 세밀함은 꽤나 시원시원하죠. 지금은 마침 국세청에서 고소를 한 어떤 법인의 회계처리 해석으로 분쟁 중입니다. 가노 검사님은 60개 이상이나 되는 관련 회사의 장부를 전부 보기 전까지는 기소에 신중해서 저희들 신문도 보류를 먹은 상황이어서요. ......자, 잠깐 걸을까요."
(아래에 계속)-406-414쪽

(위에서 계속)
서서 이야기하는 것은 눈에 띈다는 듯이 네고로라는 기자는 훌쩍 앞으로 걸어 나갔는데, 그 주의 깊게 살피는 행동은 지시하고 지시당하는 검찰 사회의 암투를 오랫동안 들여다 본 인간은 이렇게 된다는 견본 같았다. 한편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낯선 사람에게 전 처남의 이름을 들은 당혹스러움과 이 지검 출입기자에게 무언가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사이에서 일단은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후자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중략)
"그러고 보니 요즘, 어딘가에서 가노 검사님과 만나셨습니까?"
"아니오." 고다는 바로 답했다.
"그렇습니까. 가노 검사님은 경찰에 친척이 있으니까 유출은 그 부근일 거라고 하는 소리도 귀에 들어왔어요. 어디까지나 그런 소리도 있다는 것뿐이지만요. 본인께 그런 이야기를 하면, 자기라면 좀더 나은 이야기를 꾸며낼 거라고 웃으시지만요."
(아래에 계속)-406-414쪽

(위에서 계속)
(중략) 이케부쿠로의 영화관에서 가노 유스케가 한 수사 요원에게 건넨 장례식의 식순은 9일 밤의 시점에서는 분명 일종의 정보 유출이었다. 하지만 가노는 형설산악회라는 키워드가 가지고 있는 어떤 의미를 단순히 경찰 수사를 부당하게 방해하기 위해 유출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검의 일부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정보 유출을 정보 유출로 견제해, 경찰에게 정보를 쥐어줌으로써 경찰 수사에 대한 부당한 압력을 배제하려 했을 뿐일 것이다. 그리고 가노는 당연히 오늘과 같은 사태에 이르게 한 흉한 煞이 그곳에 숨어 있는 것을 오늘까지 몰랐던 것이다. 새삼 그렇게 생각을 다시 하면서 고다는 "지금까지 하신 이야기는 마음에 담아두겠습니다." 하고만 대답해두었다.-406-4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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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3-01-28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계 사람들 캐릭터 하나하나가 너무 좋다. 위키피디아에서 한자 찾아서 같이 적어 뒀다. 같은 한자문화권인데, 일본 소설들 번역할 거면, 이름 한자 정도는 좀 적어 놓으라고! -_-
제일 분위기 있는 이름은 역시 加納남매. 특히 오빠쪽이 너무 좋아서 <마크스의 산>과 <테리가키> 네 권을 뒤져가며 나오는 장면마다 열심히 타이핑했다. <레이디 조커>나오면 꼭 산다!

gothicromance 2013-03-29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타이핑 해주신거 잘 읽고 갑니다. 사실 저는 [리오우]를 읽고 다카무라 카오루 여사의 팬이 되었어요. 그래서 고다 3부작인 마크스의 산, 조시, 레디 죠커를 쏴라 이렇게 3권울 샀거든요. 마크스의 산을 읽고 있는데 7계 동료들의 이름을 어떻게 읽는지 몰라서 정보를 찾다가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책에 한자 읽는 법이 안나와서요...;; 고다와 카노의 관계가 동성이라고는 하지만 뭔가 미묘하지 않습니까? ㅋㅋㅋ 이 두 사람의 관계 때문에 읽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리오우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mizuaki 2013-03-31 07:11   좋아요 0 | URL
오, 일본어로 <레이디 조커>를 읽으실 수 있는 능력자이시군요. 부럽습니다. 전 그저 번역본 나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요.
카노와 코다의 관계는 제가 보기엔 '뭔가 미묘' 정도가 아닌 것 같아요. 누가 뭐래도 타카무라 선생님은 저와 같은 취향의 사람(그 뇌가 썩은 뭐라는...^^;;;)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요ㅋ. 제가 보는 커플링은 코다->카노. 카노 아저씨의 매력에 푹 빠져 있는 저로서는 리버스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ㅋ.
관련 검색을 하다가 발견한 (모르는 분의) 블로그에 요런 번역글도 하나 있었는데 괜찮으시면 읽어 주셔요. 덧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http://jiujiu.egloos.com/1824908
 
메타볼라 밀리언셀러 클럽 107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2월
절판


"나는 나하에 오기 전까진 세계를 떠돌아 다녔어. 10년 가까이 제대로 된 직장도 주소도 없었지. 어느 나라에도 주민등록을 한 적이 없고, 세금도 내지 않았어. 힘든 일보다 즐거운 일이 많았지. 하지만 난 깨달았어. 결국 주민들은 그런 녀석들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쪽도 계속 떠돌아다니게 돼. 그러는 사이에 아아, 이건 여행이 아니구나 하고 알게 되는 거야. 여행이라는 건 돌아갈 곳이 있는 녀석들이 하는 일이잖아. 하지만 나는 어느 새 돌아갈 곳이 없는 진짜 방랑자가 되어 있었어.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내 담배는 옛날에 다 탔다. 나는 손가락에 든 꽁초를 쳐다보면서 가마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화가 나지 않게 돼. 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질 사람인데 어떠냐 하고 생각하면 화가 나지 않는 거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화가 나지 않게 돼. 왜?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렇잖아."
"부럽네요."
나는 무심결에 말했다. 가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계속)-222-223쪽

(앞에서 계속)
"응, 나도 편하다고 생각했어. 아, 이제 겨우 사는 게 편해졌다 하고. 하지만, 작년부터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어째서요?"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거든."
가마다는 그렇게 말하며 수줍게 웃었으나 나는 웃지 않았다.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22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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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3-01-06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내 얘기 같아서 섬뜩했다.
응, 나도 아무한테도 화가 안 나. 나 자신한테도 화가 안 나고.;;;;
그리고, 난 좋아하는 여자가 생겨서 수렁으로 들어간 가마다처럼은 안 될래.
평생 방랑하면서 편하게 살아야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개정2판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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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민주주의란 한 사회의 중심을 다원화하는 경향을 발전시키는 힘이어야 한다. 권위주의, 절대주의, 전체주의 등 비민주적 사회의 특징은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 권력과 영향력이 단일일 중심으로 응집되어 있다는 것이다. 민주화는 이들 응집된 힘의 요소들을 해체하고 다원화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2쪽

냉전반공주의가 헤게모니적 영향력을 갖는 정치적 대표체제에서 서민의 이익은 대표되지 못한다. 서민층이 정치 수준에서 대표되지 못한 결과, 사회 수준에서 서민층에 대한 상층계급의 오만과 차별은 강화되고, 못사는 사람에 대한 공공연한 비하가 가능해진다. 이런 조건에서 계층구조의 상향 이동에 대한 열망과 상층계급의 문화적 표지를 갖고자 하는 노력은 필사적이게 된다. 이른바 ‘명품’에 대한 맹목적 선호는 그 한 예이다. 이런 조건에서 생존경쟁의 가열화, 처절한 출세지향적 행태가 일반화되어 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계층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으면 한 인간으로 대우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외양을 중시여기고 획일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를 만드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러한 현상의 다른 한편은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이 부재한 상황, 인간내면의 황폐화로 나타난다.-34쪽

정치는 정당에 의해 주도되기 이전에 언론에 의해 틀이 짜인다. 정책 아젠다와 이슈를 설정하는 것도 언론이다. 대통령에서부터 국회의원, 장관에서부터 정치참모와 고급관료의 일이란 심하게 말하면 언론의 보도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맞춰 가는 것이다. 기껏 이들이 내리는 결정이란 언론이 그 결정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예상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만큼 정부의 업적, 정당의 업적, 정치인과 관료 개개인의 업적을 평가하는 언론의 정치적 기능은 막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언론은 준사법적 기능을 한다. 정치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의 도덕성과 불법성에 대한 판단은 언론에서 먼저 내려진다. 정당과 의회 자체의 정화기능이나 검찰과 사법부의 결정은 그 이후의 일이며, 대체로 그것은 사건을 정리하는 단계에서의 절차일 뿐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언론은 한 개인의 정신과 내면의 영역까지 임의적으로 개입하고 판단하여 ‘좌파’니, ‘사사이 의심’스러우니 하는 일제식민체제나 전체주의체제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사상검증’을 자유롭게 해 댄다.-36쪽

현재 한국정치의 최대의 균열은 사회적 기반이 없는 정치적 대표체제와 이에 대표되지 못하고 저항하고 있는 비투표 유권자 사이의 균열이다.-41쪽

대학교수를 중심으로 하는 지식사회 역시 우리 사회의 보수적인 집단 가운데 하나일 뿐 그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문해 보게 된다. 신문에 기고된 우리 사회 지식인의 칼럼을 보면서 나는 언론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정치만이 아니라 지식사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정치인과 정부, 정당에 대한 이들의 경멸과는 대조적으로 이들은 언론과 재벌을 비판하지 않으며 심화되는 계급구조화 과정에서 희생되고 있는 계층과 집단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43쪽

한국에서의 중앙집중화는 정치권력이 서울에 집중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사회의 모든 주요 영역에서 자원이 지리적 공간적으로 서울이라는 한 곳으로 집중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지리적 공간적 자원의 집중화가 곧, 사회 제 분야에서의 기능적 집중화를 동반함으로써 집중화와 집적화가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단순한 집중화가 아니라 초집중화hypercentralization로 보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이해가 된다. 그 결과 한국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영역에서의 엘리트 집중이 서로 중첩되는 동심원cocentric 구조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엘리트구조의 안정성을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엘리트로 상승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만들어 냈다.-59쪽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이 주도했던 분단국가 형성 과정에서 하나의 제도적 세트로 도입되었다. 즉, 민주주의는 분단국가의 제도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토착적 기반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그 제도적 형식만 들여온 필연적 결과, 그 내용을 채울 역사적 정신적 이념적 면을 결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71쪽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를 통하여 새로이 성장하기 시작한 사회의 두 중요 집단이 있었다. 하나는 4.19의 주역이라 할 학생이었고, 다른 하나는 5.16 군사쿠데타의 주역인 군부 엘리트였다. 민주화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이 두 그룹은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래에 계속)-93쪽

(위에서 계속)
군부 엘리트들이 자립경제의 달성과 민간정부들이 보여준 부패를 척결하겠다는 개혁 이슈를 행동의 대의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문제의식은 ‘민중적 성격’을 갖는다. 이들은 스스로 군부 엘리트가 중심이 되어 국가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20세기 초 청년터키당이나 1950년대 중반 이집트 쿠데타의 주역 가말 압델 나세르를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모델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민주화와 산업화가 통일되지 못하고 각기 대립적인 관계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군부 엘리트들은 학생과 교육받은 지식인집단이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충분히 제기하지 못했던 경제발전 문제를 그들의 중심적 이슈로 삼았다. 군부 엘리트들이 집권했을 때 그들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경제성장을 위한 모든 사회적 자원을 동원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가져올 수 있는 잠재적 자원의 동원가능성을 봉쇄하려고 시도했다.
-93쪽

국가권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율적이었던 언론의 역할은 유신체제에 이르러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유신체제는 권위주의적 억압과 배제를 강화했지만 일상적인 법률체계와 경찰력을 통해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매우 취약한 체제였다. 한마디로 유신체제는 대통령이 발령하는 긴급조치와 그에 따른 군대조직의 동원을 통해 유지되었던 체제였다. 비상체제로서의 유신체제는 약간의 반대라도 허용하면 존립이 위협하는 매우 허약한 체제로서, 미세한 병균의 침투만 있어도 생존을 위협받는 면역능력이 결핍된 인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왜 1979년 중반 200명 남짓한 YH무역의 여성노동자들의 농성이 정치 사회적 연쇄반응을 통해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는가 하는 문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아래에 계속)-113쪽

(위에서 계속)
요컨대 이런 조건 때문에 언론매체가 체제를 비판하는 것은 절대로 허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언론의 비판적 기능은 유신체제를 거치면서 완전히 봉쇄되었다. 오늘날 보게 되는 한국언론의 기본적인 구조와 성격은 1980년대에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언론과 국가권력의 유착이 심화되면서 언론이 권위주의 국가의 정당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동원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언론과 국가의 유착이 강화된 결과는 심대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결과로 일부의 언론기업은 거대 언론자본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는 억압과 특혜의 교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13쪽

앞에서 우리는 한국정당체제의 기원이랄까, 어떻게 1950년대를 통해 여당과 야당이 형성되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본 바 있다. 그것은 냉전반공체제의 산물이고 그렇기 때문에 정당간 경쟁이 극히 협애한 이념적 스펙트럼 내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여야당을 포함한 한국정치의 대표체계가 사회의 이익과 요구를 광범위하게 대변하지 못하고 사회의 가장 기득적인 보수층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래에 계속)
-128쪽

(위에서 계속)
이러한 체제가 가져온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은 권위주의 집권당이 야당보다 더 개혁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그러한데, 여당과 야당은 다같이 대중정당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명사정당과 같은 엘리트 정당적 성격이 크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당은 집권 정부로서 많든 적든 국민의 지지와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민적 요구에 일정하게 부응해야 할 인센티브를 갖는다. 이것은 집권 엘리트들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의 동인이다. 다른 한편 야당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제약과 조직구조의 전근대성으로 인하여 사회경제적 요구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지지를 동원하고자 하는 의지도 능력도 인센티브도 갖지 않았다.
-128쪽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운동권이 지녔던 이념은 대체로 사회주의나 급진적 민족주의처럼 도식적이고, 낭만적이고, 교리적이고, 비경험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강력한 군부독재와의 투쟁 속에서 그들은 가장 급진적이고 강력한 이론에서 투쟁의 무기를 발견하려고 했다. 운동권의 이러한 이념적 급진성은 선거경쟁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함께 선거불참여주의적 경향 또는 선거에 소극적인 태도를 갖게 했다. 이러한 이념적 급진성은 운동권 내에서의 분파주의를 강화하고,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현실을 경험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문제를 낳았으며, 무엇보다도 정치 세력화에 장애요인이 되어 기존의 보수적 정당들과는 다른 대안적 이념과 비전을 발전시키지 못하게 했다. 다시 말해 운동권의 이념적 급진성은 운동권의 강함의 반영이 아니라 약함의 반영이었다. 그 결과 대통령선거가 다가오게 되자 운동권은 독립적 위치를 상실하고 기존의 제도권 야당의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해체되고 말았다.-144쪽

만약 우리가 갈등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사회의 어떤 집단이 경쟁에서 배제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정당을 강조하는 까닭은, 정당이 시민 사회의 영역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시민사회를 국가에 매개하는 역할을 갖기 때문이다. 신생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이 약한 것, 즉 민주주의가 약한 것은 서구 민주주의 정당의 제도화와는 달리 정당이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균열에 뿌리를 두지 않기 때문에 선거경쟁에서 정당간의 차이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정당과 사회적 균열 사이의 연계가 약하기 때문에 선출된 공직자는 투표자에 대해 책임성을 갖지 않는다. 책임성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인의 말은 유권자와의 약속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인들은 수사와 공약을 수 없이 토해내지만 그 말에 책임을 지도록 사회와 투표자에 의해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에 계속)-183쪽

(위에서 계속)
정당이 엘리트 이익과 사인적 보스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이러한 상황은 곧 기득 이익의 헤게모니를 보장해 주는 상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냉전 반공주의와 접맥되어 있는 낡은 정당체제를 해체하는 것, 다시 말해 정당의 기반과 구조 자체를 급속하고도 광범위한 사회변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갈등구조에 뿌리내리도록 변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83쪽

한국의 시장이 서구의 시장과 근본적으로 상이한 경로를 거쳐 형성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시장이 먼저 민간부문에서 생성 발전한 것이 아니라, 주요 정치적 계기들을 통해 국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시장은 그 이전에 존재하던 시장적 요소가 발전하고 변화되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사실상 국가에 의한 권위주의 산업화 과정에서 창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략) 권위주의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된 시장은 크게 세 가지 특성을 갖는다. 첫째는 국가가 경제의 성장 목표를 설정하고 여기에 민간기업을 동원하여 자원의 할당과 분배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한 국가주도성이다. 둘째는 이 과정에서 국가에 의해 육성된 소수의 거대 기업이 국가의 거시경제정책이 성장목표를 대리 추진하면서 국민경제를 지배하는 재벌 경제체제이다. 셋째는 노동의 배제이다. 이는 생산적 자원의 할당과 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서나 보수독점의 정치적 대표체제에서 사회의 대표적인 생산자 집단인 노동의 참여와 대표가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191쪽

무엇보다도 재벌 중심의 시장경제구조는 정치의 민주주의 틀과 상충하는 것이다. 권위주의정권과 재벌 간의 연합은 지난날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것은 동시에 권위주의 구가의 핵심적 기반이었다. 그러므로 이 체제가 유지된다는 사실은 사회의 한 집단에게는 기득 이익과 특권을, 다른 집단에게는 소외와 배제를 되풀이함으로써 권위주의하에서의 사회 분열과 균열을 그대로 유지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재벌 중심 체제의 다른 모습인 정경유착은 부패, 부정, 비리, 탈법, 비정상, 비효율의 발원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재벌기업에게 시장에서의 특권적, 독점적 지위를 보장했고 여타 경제 주체들의 발전과 창발성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민주화 이후에도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를 그대로 둔다는 것은 거대한 부패구조를 지속시킨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193쪽

민주주의의 정치적 틀에 조응하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없다면 한 사회에서 시장의 부정적 역할을 제어할 힘은 없다. 효율성을 중심 원리로 하는 시장은 한 사회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하위 체제의 하나일 뿐이며, 그것이 전 사회의 운영원리가 될 수는 없다. 만약 한 사회가 신자유주의의 교리처럼 효율성에 기초하여 생산적 부의 축적만을 목적으로 운영된다면, 가난한 사람의 복지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과 같이 삶의 질을 풍요롭게 하는 영역 역시 부자들의 자선에 의존하게 될 뿐이다. 역사를 통해 인류가 합의에 이르게 된 사회운영의 원리는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에 기초를 둔 국가만이 어느 한 하위체제의 과도함을 제어하며 하위 체계간의 자율성과 균형을 유지하면서 전체 사회의 복리와 벌전을 도모할 수 있다. 계급구조화의 심화, 소득불평등, 하층 집단의 광범위한 소외와 정치적 배제 등 오늘의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유능한 민주주의 국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214쪽

정당이든 대통령후보든 그것은 일종의 대안 정부로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현재의 정부가 실패했을 때는 현재와는 다른 대안이 존재하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정책적 대안이나 이념이 먼저 제시되고 이를 둘러싼 경쟁을 통해 후보가 되고 대통령이 되기보다는, 아무 정책적 대안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후보가 되고 대통령이 되고, 그리고 나서야 정책대안을 만들고 새로 통치이념을 만든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정치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도, 안정적이 되기도 힘들다. 어느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후보가 되고 총리도 되고 장관도 되는 등 의외성이 일상화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가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49쪽

정당이란, 갈등을 동원함으로써 갈등의 범위를 넓히는 역할을 할 때 민주주의에 기여한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은 갈등을 동원하고 사회하기는커녕 있는 갈등도 무시한다. 그저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에 유리한 갈등만 동원하고 대표하려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정치인들이 즐겨 동원하는 지역감정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250쪽

최근 삼성의 급성장은 지금까지의 재벌문제와는 다른 특별한 문제임에 분명하다. 10대 그룹 내에서 1/3에 달하는 매출 비중과 순이익 비중, 국가 전체 수출의 1/5을 넘는 수출기여도, 8~10%에 이르는 세수 비중, 1/4에 가까운 시가총액 등으로 나타나듯, 단순히 재벌의 성장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른바 ‘슈퍼재벌의 등장’이 아닐 수 없다. 삼성의 성장은, 5대 그룹 내에서 자산, 부채, 자본, 이익이 2001년의 30~40%에서 2004년 모두 50%를 넘어서는 등 지난 수년 동안 가속화되었다. 세계에서 한국 정도의 경제 규모를 갖는 나라에서 한 기업이 이렇듯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는 없다. (중략)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거대한 경제권력의 출현이 민주주의를 변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거시적인 사회구조의 차원에서 볼 때, 슈퍼재벌을 정점으로 하는 생산체제의 구조화는 민주주의 발전의 조건이라고 할 다원주의 즉, 사회의 구조적 힘을 배분함에 있어 분산적이고 수평적인 체계의 발전을 어렵게 한다.-271쪽

경제권력의 집중화를 상징하는 슈퍼재벌의 등장은 여러 형태로 민주주의의 작동을 저해하고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 먼저 돈의 힘 그 자체와 이들의 대변기구인 언론매체들이 선거과정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이 있다. 다음으로 민주정부가 성립된 이후 정부정책의 중요 결정과정은 거대기업들의 강력한 로비에 영향을 받는다. 슈퍼재벌이 발휘하는 영향력의 핵심 중의 핵심은 국가의 세 부서, 즉 행정 입법 사법부 모두에 걸쳐 인적 네트워크를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능력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국가와 사적 이익영역 간의 경계를 가로질러 광범한 삼투적 영향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와 민간 기업부문, 공적영여과 사적 여역 간의 경계는 이 슈퍼재벌이 가진 권력자원을 통해 쉽게 허물어졌다.-272쪽

슈퍼재벌의 이익 실현에 필요하다면 국가는 법을 바꾸거나 법의 침묵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정책에 능동적으로 포섭되기에 이르렀다. 법 앞의 평등과 법의 지배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조건이며, 자유주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하이예크가 강조하고 있듯이 시장의 작동을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의 상황에서 민주정부는 적어도 슈퍼재벌과 관련해서는 법의 지배를 관철하지 못하고 있다. 법의 지배가 강력하게 관철되는 영역은 지극히 선별적이다. 정부-삼성의 연합 혹은 삼성 공화국이라는 말은 이러한 현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출범 초기 개혁적일 것으로 기대되었던 민주정부가 슈퍼재벌과 연대하는 모습만큼 한국민주주의의 변형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패러독스는 없을 것이다.-273쪽

정치를 둘러싼 규칙과 제도가 아무리 민주화되었다 하더라도, 구질서하에서 국가를 만들고 작동시켰던 권위주의적 정향, 가치, 관행과 실천들,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인식들 그리고 인적구조가 자동적으로 민주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국가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민주정부의 능력이 필요하고, 선출된 민주정부를 대표하면서 그 중심에 위치하는 최고지도자의 능력과 리더십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느냐의 문제는 능력 있는 민주적 리더십이 발휘되고 있느냐 하는 문제와 높은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고려할 때 우리는 간단한 도식을 그려볼 수 있다. ‘맨 왼편에 선출된 민주정부’(G) - '중간에 행정관료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S)' - 오른편에 시민사회 기득이익의 헤게모니’(H)가 있다고 가정하자.
(아래에 계속)-281쪽

(위에서 계속)
민주주의의 힘은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움직이고, 현상 유지를 원하는 기득이익의 힘은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움직인다고 가정할 때, 국가는 이 양자의 힘이 미치는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국가를 충분히 민주화하기 위해서는 선출된 리더십의 힘이 강하게 작용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헤게모니의 힘이 국가에 큰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선출된 정부에까지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앞서 슈퍼재벌에 관한 논의에서 이러한 구조를 말한 바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선출된 정부가 유능한 정부가 되기 위한 조건을 갖추는 문제이다. 그것은 선출된 정부가 어떻게 사회로부터 민주적 동력을 끌어내고 사회적 요구를 얼마나 잘 대변하여 넓은 지지기반을 형성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281쪽

현대 민주주의에서 민주 정부의 유능함이 엘리트주의 내지 전문가주의가 아닌 민중적 동력과지지 기반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게 만드는 결절점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 끊임없이 강조하였듯이 그것은 정당이 중심이 되는 정치체제이다. 민주 정치란 정당을 중심적 메커니즘으로 하여 사회의 갈등과 균열을 폭넓게 표출하고 대표하는 방법을 통해 다수의 힘을 동원하고,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하고, 이 과정에서 형성된 정책적 대안을 실현하고, 그 실현을 위해 필요한 사회적 지지를 동원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집단적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284쪽

(노무현 정부의) 문제 중의 하나는 대통령 스스로가 정치의 경계를 좁히고, 탈정치화를 앞장서 실천하면서 이를 민주적 개혁이라고 주장해 왔다는 것이다. 3김정치를 극복한 탈권위적 리더십이니, 정치는 당에 맡기고 정책은 책임총리에게 맡기고 대통령은 국가 전체적 과제에 집중하겠다는 등의 논리나 당정분리, 원내정당화, 정책정당화 등 현 정부에 들어와 자주 사용되는 개념들은 정치논리를 부정적으로 보는 反정치의 정치관을 집약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치관은, 정치란 파당적 자기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갈등과 대립을 일삼고 당리당략의 추구에 몰두하는 영역이라는 인식, 다시 말해 민주화 이후 강화되어 왔던 지배적인 정치관이랄까 헤게모니와 내용적으로 궤를 같이 한다.당정분리라는 말이 표현하듯, 대통령은 정부와 사회를 매개할 수 있는 정당과의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거리를 두었다.
(아래에 계속)-285쪽

(위에서 계속)
대통령은 정당을 기반으로 선거에서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당이 갖는 특정의 정치적 관점 내지 이념을 발전시키거나 그에 기초하여 사회의 갈등과 균열에 접근하는 정당의 지도자로서 행위하기보다, 사기업 조직의 CEO와 같이 정부조직의 혁신과 생산성을 높이는 관리자 혹은 파당적 쟁투로부터 벗어난 국가 전체의 지도자로서 행위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주주의에서 대통령의 권력과 권위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뒤얽혀 있는 사회로부터 발생하며, 그의 리더십과 수행능력은 일차적으로 그를 선출한 다수투표자들의 이잉꽈 요구를 대표하고 반영하되 그것이 사회 전체이익과 병행할 수 있도록 조정하고 조하시키는 데서 발휘된다. 이를 위해 정당은 필수적이다. 따라서 정당정치를 부정하는 인식을 공공연히 드러내거나, 이를 우회 혹은 초월하여 국가 전체의 발전을 위한 지도자의 결단을 강조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병행하기 어렵다. 이러한 정치에 대한 이해의 방법, 리더십 스타일은 결국 정당정치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그럼으로써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할 것임이 분명하다.
-285쪽

이 책의 중심적 테마는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정치를 활성화하고 바로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중심적 메커니즘이 정당과 정당체제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힘은 정치의 내부로부터 창출되는 것이지 정치 바깥의 어떤 제3의 제도 또는 힘에 의한 것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밖의 자유주의나 공화주의와 같은 어떤 외부의 이념에서 이를 보강할 자원을 찾기보다, 그 내부로부터 이념적, 제도적, 실천적 자원을 발전시키고 풍부하게 하고 강화시키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념이나 제도를 따라 그 모델이 외부로부터 발견되고 계도된 경로를 따라가기보다 스스로 발전시켰던 요소가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정치에 대한 현실적 접근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아래에 계속)-299쪽

(위에서 계속)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희구하고 투쟁했던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실망하고, 이를 비판하는 ‘소극적 시민’으로 머물 것이 아니라, 스스로 민주주의를 만드는 과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적극적 시민’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정치와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의 영역을 구축하는 데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개선하려는 노력과 함께 민주파로서의 집합적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일이 절실하다.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투쟁과 민주주의를 만드는 과업은 다른 성격의 문제라는 전제 위에서, 정부가 된 민주주의가 강한 사회적 기반을 가지면서 유능하게 작동할 수 있는 조건들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아직도 민주주의를 말해야 하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실질적인 내용을 갖고 발전할 수 있는 경로를 찾는 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여전히 한국사회는 민주화의 과제를 안고 있다.-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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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2-12-05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우리 나라는 이렇지? 라는 오랜 의문에 대한 꽤 그럴듯한 대답.
 
엄청나게 시끄러운 폴레케 이야기 1 - 오늘 나는 그냥 슬프다 일공일삼 69
휘스 카위어 지음, 김영진 옮김 / 비룡소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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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에 진짜 네덜란드 사람은 카로와 나, 둘밖에 없다. 나머지는 모두 외국인이다. 카로의 아빠는 ‘아이아(아주 이상한 아빠)’이고, 우리 아빠는 ‘이아(이상한 아빠)’이다. 내 생각에 네덜란드 아빠들은 모두 이상한 아빠들인 것 같다. 엄마 말로는, 네덜란드에도 옛날에는 정상적인 아빠들이 더러 있었단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는 아빠들 말이다. 하지만 그런 아빠들은 이제 더 이상 없는 것 같다.
요즘 아빠들은
아빠가 아닌 사람이 아빠이거나,
아빠는 아빠인데 다른 집에 살거나,
아빠가 있기는 하지만 어디 사는지 모르거나,
시험관 아빠라 누가 우리 아빠인지 모르거나,
시험관 아빠가 누구인지 알지만, 엄마의 남편을 아빠라고 불러야 해서 시험관 아빠를 아빠라고 부를 수 없다거나,
시험관 아빠가 엄마의 남편은 아니지만 시험관 아빠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거나,
아빠가 누구고 어디 사는지 알지만 찾아가면 안 된다거나,
아빠가 남자를 좋아해서 졸지에 아빠만 둘이라거나,
엄마가 레즈비언이라서 여자 아빠만 둘인 경우이다.
다들 자기 아빠는 어디에 속하는지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27-28쪽

아빠가 엄마와 결혼했을 때 아빠한테는 벌써 자식이 둘이나 있었다. 이름은 디륵과 엘케, 그러니까 내 오빠와 언니다. 그러나 아빠와 엄마는 내가 세 살 때 이혼했고, 아빠는 지금 지나 아줌마네 집에서 산다. 디륵 오빠와 엘케 언니 그리고 지나 아줌마의 아이들인 피케와 하이스와 함께. 그리고 아빠와 지나 아줌마 사이에는 태어난 지 삼 년 육 개월 된 딸, 힐레트가 있다.
정리하자면 힐레트는 내 이복동생이지만 피케와 하이스는 아니다. 그 애들은 지나 아줌마의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났으니까. 디륵 오빠와 엘케 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 이복형제들이다. 이만하면 다들 알아들었겠지?
(아래에 계속)-28-29쪽

(위에서 계속)
처음에 나는 우리 아빠를 빼앗아 간 지나 아줌마가 무지 싫었다.
엄마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내게 이런 질무을 던지곤 했다.
"너, 아빠가 왜 그 여자랑 같이 사는지 아니?"
그러면 나는 순진하게도 번번히 되물었다.
"왜 같이 사는데? 말해 줘."
"그건 그 여자가 엉덩이를 잘 흔들기 때문이야. 남자들은 다 그래. 내 말 믿어."
나는 엄마 말을 믿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지나 아줌마는 엉덩이가 별로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기로 치면 도리어 엄마 엉덩이가 더 컸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그 이유를 모른다.
언젠가 내가 할머니에게 물었을 때,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남자랑 여자가 싸우면 그냥 남자가 잘못했다고 해야 해. 그래야 일이 복잡해지지 않거든."
할머니의 말에 할아버지가 웃음보를 터뜨렸다. 할아버지가 숨을 못 쉴 정도로 웃어 대는 바람에 할머니는 할아버지 등을 세게 두드려 줘야 했다.-28-29쪽

우리 아빠는 비록 ‘이아’지만 아주 멋진 사람이다. 정말이다. 아빠도 나처럼 시인이다. 나와 아빠의 차이라면, 나는 시를 쓰지만, 아빠는 쓰지 않는다는 정도다. 아빠는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다. 하지만 아빠는 시인 그 자체다. 생김새나 걷는 모습, 말투만 봐도 누구나 대번에 ‘아, 이 사람 시인이군.’하고 알아챌 수 있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하지만 그런 아빠가 딱 한 번 시를 쓴 적이 있다. 내 시집에, 나를 위해 쓴 시였다.

열쇠를 꽂으라고
열쇠 구멍이 늘 비어 있듯
내 마음 한구석에도
우리 폴레케를 위한 자리가
늘 비어 있다네.

정말 멋진 시 아닌가! 나는 이 시를 읽고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왜냐고? 폴레케 앞에 적힌 ‘우리’라는 단어 때문이다. 듣기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말이다.
(아래에 계속)-38-40쪽

(위에서 계속)
아빠가 멋진 이유는 또 있다. 누가 아빠에게 ‘뭐하세요?’ 하고 물으면 아빠는 "장군이에요.", "시인입니다.", "소방수예요." 따위의 케케묵은 대답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전 지금 숨 쉬는 중인데요!"
사실 아빠는 숨 쉬는 일 말고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러는 게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아빠는 왼손만 두 개 달린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이다. 아빠가 만지는 물건은 뭐든 죄다 망가졌다. 아빠가 물기를 훔치려고 접시를 집어 들면 그 접시는 어느새 "쨍그랑"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창문을 닦으려고 걸레를 갖다 대면 창틀이 벌써 삐걱거렸다.
-38-40쪽

방과 후, 엄마한테 아빠가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아빠가 체포되었다고 한다. 경찰 말로는 아빠가 마약 거래를 했단다. 맞는 말이다. 아빠는 대마초를 팔았고, 지금은 경찰 조사를 받기 위해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
나는 당장 자전거를 타고 구치소로 향했다. 내가 설명해야 한다. 경찰은 아빠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나는 일분일초라도 빨리 아빠를 구치소에서 나오게 하려고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았다. 십오 분 만에 구치소에 다다랐다. 초인종을 누르자 다행히 금방 문이 열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유리방 안에 아저씨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수위 아저씨였다.
"우리 아빠 때문에 왔어요. 이름은 스픽이에요. 여기 갇혀 계신데, 경찰이 완전히 실수하는 거예요."
수위 아저씨가 대답했다.
"그래? 거참 안됐구나. 이름이 뭐라고?"
"스픽이요. 진짜 이름은 헤리트예요."
"경찰이 실수로 네 아빠를 여기 가뒀다고? 너한텐 참 안된 일이구나."
"그래서 제가 아빠를 데리러 온 거예요. 아빠가 마약 거래를 하는 건 사실이지만 다 좋은 일을 위해서거든요."
(아래에 계속)-64-66쪽

(위에서 계속)
내가 설명했다.
"마약 거래를 안 하면 아빠는 대마초를 살 돈이 없고, 대마초를 못 사면 아빠는 시를 못 지어요. 아빠는 시인이에요. 그러니까 좋은 일을 위해서 그런 거예요. 아빠는 갇혀 있는 걸 못 견딜 거예요. 그래서 제가 데리고 나가려고요. 여기 갇혀 있으면 속병이 날 거예요. 그럼 다시는 시를 짓지 못할 거라고요."
나는 수위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수위 아저씨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제야 나도 내가 내뱉은 말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말았다.
여덟 살 때는 좋은 일을 위해 마약 거래를 한다는 아빠의 말을 정말로 믿었다. 아홉 살 때도, 열 살 때도. 하지만 나는 이제 열한 살이고 더 이상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수위 아저씨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빠를 그곳에서 꺼내야 했다.
나는 복도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빠! 스픽! 어디 있어요? 어서 집으로 가!"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허약한 모습을 보이는 나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 바보 멍청이 울보 같으니라고.
(아래에 계속)-64-66쪽

(위에서 계속)
수위 아저씨가 유리방에서 나오더니 내 어깨에 팔을 올렸다.
나는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아, 내 자신이 얼마나 싫던지. 조금만 대차게 행동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제 내가 엉엉 우는 소리는 거의 그레트예 수준이었다.
수위 아저씨가 물었다.
"너, 이름이 뭐니?"
내가 코를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폴레케요."
"그래, 폴레케. 넌 참 착한 아이구나. 잠시 아빠를 만날 수 있는지 내가 가서 한번 물어봐 줄까?"
나는 여전히 흑흑거리면서 "네에, 네에." 하고 소처럼 울부짖었다.
수위 아저씨는 허락을 받지 못했다. 아빠를 만나려면 면회 시간에 다시 와야 했다. -64-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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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2-11-13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한 살 폴레케의 '이아(이상한 아빠)' 이야기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적어 둔다. 숨쉬는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노숙자들과 어울리고 마약 거래를 하다가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하는 이 '이아'는 세 명의 여자에게서 네 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들은 네덜란드의 훌륭한 복지정책 덕으로 제법 잘들 자라고 있다. 아이는 엄마와 국가가 키우니 아빠는 자유롭게 숨만 쉬고 살아도 되는 나라라... 이걸 부럽다고 해야할지 한심하다고 해야할지...;; 깔깔 웃으며 즐겁게 읽었지만 덮고 나서 조금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