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스!
햐쿠타 나오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밑줄긋기 부분에 스포일러 있음.

51-54
"이나무라라는 선수는 몇 학년인데?"
"2학년이요. 하지만 작년 1학년 때 인터하이와 국체 그리고 선발대회까지 3관왕을 했대요. 아직 무패인 거죠."
요코는 링 위에 있는 이나무라를 보았다. 헤드기어를 쓴 얼굴은 도저히 열여섯, 열일곱으로 보이지 않았다. 몬스터라는 별명이 이해가 갔다. 눈매가 보통이 아니었다. (중략)
"정말 지루한 시합이야." 가부라야가 말했다. (중략) 얘는 방금 녹아웃 장면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네. 둔감해서 공포심도 덜한 모양이지. 상상력이란 게 없는지도. 요코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왠지 가부라야가 믿음직스러웠다. 그때 링에서 내려온 이나무라가 가부라야와 요코 바로 앞을 지나갔다.
헤드기어를 벗은 이나무라는 단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빈틈이 전혀 없고, 꽤 잘생겼음에도 상당히 무섭게 느껴졌다. 키는 가부라야보다 머리 반쯤 더 컸다. 이나무라는 가부라야를 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말없이 가부라야를 쏘아보았다. 눈빛에서 소리가 나는 듯했다. 가부라야도 이나무라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중략) 이나무라가 먼저 시선을 거두고 가부라야에게 등을 보이며 멀어졌다. 가부라야가 가볍게 숨을 토해냈다.

223-224
"그애는 지금까지 진 적이 없나요?"
"없습니다." 사와키가 바로 대답했다. "무패죠." (중략)
"그 애가 싸우는 걸 보니 패배의 무서움을 잘 아는 것 같아서요."
사와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사와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 아버지가 프로 복서였다고 합닏. 하지만 후유증으로 지금은 매우 심한 펀치 드렁커라고 하더군요."
펀치 드렁커라는 말은 요코도 알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전에 펀치가 뇌를 흔든다는 이야기 했죠? 오랫동안 펀치를 계속 맞다보면 뇌에 충격이 누적되어 펀치 드렁크 증세가 나타납니다. 상대의 주먹을 맞으면서도 파곧ㄹ어 공격하는 선수들에게 많이 나타나죠. 심한 경우에는 건망증이 생기거나 간단한 계산도 못하게 됩니다. 운동기능이 손상되어 손발이 떨리기도 하고, 똑바로 걷지 못하게 되기도 하고요. 더 심한 경우에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밤에 자다가 누운 채로 소변을 보기도 합니다."

239
"고교 권투가 수준 미달이라는 말씀이신가요?"
"뭐, 좋은 선수가 전혀 없으니까."
소가베는 그렇게 말한 뒤 바로 덧붙였다. "한 명만 빼고."
"그게 누구죠?"
"라이트급 선수. 그 녀석은 진짜 물건이더군."
"이나무라 말인가요?"
"이름은 기억 못하지만 그 선수는 대단하더이다."
요코는 역시 하고 생각했다. 이나무라를 한눈에 알아본 소가베도 대단하다 싶었지만 그런 소가베에게서 인정받은 이나무라는 역시 굉장한 선수가 틀림없었다.
"카를로스 오르티스 같은 녀석이었어."

336-338
그때 학생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보니 선수들끼리 멱살을 잡기 일보 직전이었다. 요코는 깜짝 놀랐다. 혹시 가부라야 때문인가. (중략)
"무슨 일인가요?"
요코가 김 감독에게 물었다.
"가부라야 녀석이 어떻게 조선인이 국민체육대회에 나올 수 있느냐고 한 모양이에요."
김 감독의 설명을 듣고 요코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가부라야에게 물었다. "너 그런 소릴 했어?"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고 물었을 뿐인데요."
김 감독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오사카 대표인데 그런 기분 나쁜 소리를 뭐하러 해."
사와키가 말했다.
"저는 왜 나오냐는 소리가 아니었다니까요."
"나오지 말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잖아." 사와키가 말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나무라가 불쑥 끼어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이나무라를 향했다.
"가부라야에게 악의는 없었던 것 같아요. 표현이 좀 거칠었지만요. ‘조선인인데.’라고 필요 없는 말을 더 해서요." (중략)
"네가 미국에서 생활하는데 미국인이 너더러 일본 국적을 버리라고 하면 기분이 어떻겠냐?"
"그야 싫죠."
"마찬가지야."
"하지만 난 미국 국민체육대회에 나갈 생각은 안 할 건데요." 김 감독이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가부라야,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의 관계는 좀 복잡한 면이 있어. 다음에 쉽게 설명해 줄게." 요코가 말했다.
"됐어요." 가부라야가 말했다. "별로 신경 안 써요. 인터하이는 고등학생만 참가하는 대회인 것처럼 국체는 국민만 참가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물어본 것뿐인데."

489-490
그때 누가 "사와키 감독님."하고 불렀다. 이나무라였다. 조금 전에는 저지를 입고 세컨드에 붙어 있더니 어느새 교복 차림이었다.
"그 동안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국체 때 감사했습니다."
"뭘 그런 걸로. 전일본 출전 축하한다." 사와키가 말했다.
이나무라는 "감사합니다." 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차분하면서도 품위가 있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180센티의 장신에서는 위압감이 풍겨나왔다. 이나무라가 기타루를 보았다.
"기타루, 우승 축하한다."
이나무라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기타루는 그 손을 맞즙으며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우리 도요타에게 완승을 거뒀네. 훌륭한 시합이었다."
"별말씀을요."
"뭐야?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는."
가부라야가 시비를 걸듯 말했다. 하지만 이나무라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기타루에게 말했다.
"올봄 인터하이 때 어쩌면 만날 수도 있겠다. 기대되네."
그러더니 이나무라는 빙긋 웃었다. 기타루의 얼굴이 굳었다. 이나무라는 사와키 감독에게 "실례했습니다."라며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뭐야, 저 멍청이. 잘난 척은...."
가부라야가 내뱉듯이 말했다.

653
"기타루는 권투뿐만 아니라 공부도 잘했어."
부원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금은 뭘 하시나요?"
"검사가 되었지."
부원들이 모호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요코는 이 아이들이 검사라는 직업이 어떤 건지 잘 모르는구나 싶었다. 요코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더니 다른 부원들도 하나둘 모여 들었다. 에다 감독도 왔다.
"고등학교 때 기타루 선배를 이긴 유일한 선수가 이나무라 카즈아키(稻村和明)라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이시모토가 물었다. "그래, 맞아." 몇몇 부원이 "대단하다."라고 소리쳤다.
이나무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로 전향해 삼 년 뒤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삼 년 반 동안 일곱 차례 방어전을 치른 뒤 타이틀을 반납하고 은퇴했다. 권투를 하는 소년치고 이나무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패 전적으로 은퇴하다니 굉장해." 누군가가 말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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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8-11-04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혈 스포츠 만화 같은 캐릭터와 심하다 싶은 결말을 가진, 약점이 분명한 소설인데, 두 번을 반복해서 빠져 들듯이 읽었다. 재미있다. 구입해서 곁에 두고 싶은 정도의 책은 아니지만, 출연도 적은 稻村和明의 캐릭터가 마음에 남아서 밑줄긋기로 보관한다. 제일 흥미진진했던 건 권투에 대한 설명 부분이었는데, 그건 머릿속에만 남겨두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