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5월
구판절판


<메데이아> 230-237행, 메데이아
생명과 분별력을 가진 만물 중에 우리 여자들이 가장 비참한 존재예요.
첫째, 우리는 거금을 주고 남편을 사서 우리 자신의 상전으로 모셔야 해요. 이 가운데 두 번째 불행이 첫 번째 불행보다 더 비참해요. 다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얻는 남자가 놓으냐 나쁘냐 하는 거예요. 헤어진다는 것은 여자들에게 불명예스럽고 남편을 거절하기도 불가능하니까요.-38쪽

<메데이아> 1078행, 메데이아
내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는지 나는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내 격분이 내 이성보다 더 강력하니, 격분이야말로 인간들에게 가장 큰 재앙을 안겨주는 법.-71쪽

<메데이아> 1097-1115행, 메데이아
자식을 한 번도 낳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자식을 낳아본 사람조다 더 행복하다는 거예요. 자식 없는 사람은 자식이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지 슬픔이 될지 알 바 아니니, 수많은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히 살아가지요. 하지만 집 안에 자식의 달콤한 무리가 있는 사람은 평생 동안 근심에 시달리는 것을 나는 보아요. 첫째, 어떻게 해야 자식들을 잘 양육할 수 있을까, 다음은 어떻게 해야 자식들에게 생계 수단을 물려줄 수 있을까 하고. 게다가 이렇게 애써도 자식들이 나쁜 사람이 될지 착한 사람이 될지 알지 못해요.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모든 인간들에게 닥치는 가혹한 고통을 말하겠어요. 그들이 재산을 넉넉하게 모으고, 자식들이 무럭무럭 자라나 유능한 인물이 된다 하더라도, 신께서 그러기를 원하시면 죽음이 자식들을 저승으로 채어 가버리지요. 하거늘 신들께서 인간들에게 다른 고통들에다 자식들로 인한 이 가장 쓰라린 고통을 덧붙이는 것이 인간들에게 대체 무슨 덕이 되겠어요?-72-73쪽

<메데이아> 1224-1230, 사자
필멸의 존재들이 그림자에 지나지 않음을 오늘 처음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내 거리낌 없이 말하겠소. 스스로 현인이요 사색가라고 자부하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重罰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이오. 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오. 富가 흘러들어가는 사람도 남들보다 행운아라고는 할 수 있으나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77쪽

<헤카베> 306-308행. 오뒷세우스
대부분의 국가들이 위기에 처하는 것은 사실 고귀하고 용감한 사람이 더 못한 자들보다 더 많은 보답을 받지 못하는 데 있기 때문이오.-221쪽

<안드로마케> 693-702행. 펠레우스
아아, 얼마나 잘못된 관습이 헬라스를 지배하고 있는가! 군대가 적군을 이겨 전승기념비를 세우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수고한 자들의 업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장군이 명성을 차지하도록 하니 말이오. 장군은 수천 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창을 휘두르고 한 사람 이상으로 한 일도 없건만 더 큰 명성을 차지하지요. 높은 관직에 있는 자들은 백성들보다 더 잘난 체 거드름을 피우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오. 자신감과 함께 의지만 갖고 있다면 백성들이야말로 그들보다 천 배는 더 지혜로울 것이오.-292-293쪽

<탄원하는 여인들> 238-245행, 테세우스
시민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오. 그중 부자들은 아무 쓸모 없고, 재산을 늘리는 데만 관심이 있지요. 그리고 생필품이 부족한 빈민들이 이는데, 그들은 위험한 존재들이오. 그들은 시기심이 너무 많아 가진 자들에게 가시 독친 독설을 퍼부어대고 사악한 선동가들의 혀에 쉬이 농락당하기 때문이오. 세 부류 가운데 도시를 지키고 어떤 것이든 도시가 정한 규범을 수호하는 것은 중산층뿐이오.-378쪽

<탄원하는 여인들> 399-441행, 전령과 테세우스
전령:
누가 이 나라의 독재자(인용자주-tyranos,참주)요? 대체 누구에게 크레온의 전언을 전해야 하지요? 일곱 성문 앞에서 에테오클레스가 아우 폴뤼네이케스의 손에 죽은 뒤로 지금은 크레온이 테바이를 통치하고 있으니까요.
테세우스:
이방인이여, 자네는 첫머리부터 틀린 말을 하는군. 여기서 독재자를 찾다니 말일세. 도시는 어느 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우니 말일세. 매년 번갈아가며 백성들이 관직이 취임한다네. 우리는 부자라고 해서 특권을 주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도 똑같은 권리를 누린다네.
전령:
그렇게 나오신다면 내가 오히려 더 유리해질 텐데요. 왜냐하면 나를 보낸 도시에서는 군중이 아니라 단 한 사람에 의해 통치권이 행사되며, 허튼 소리로 우롱하며 순전히 제 이익을 위해 도시를 때로는 이리로 때로는 저리로 끌고 다니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요. 그런 자는 당장은 달콤하고 인기가 있겠지만 나중에는 해코지를 하게 되는데, 그 때는 다시 남들을 모함하여 제 허물을 감추고 訴追를 피해 가지요. (아래에 계속)-385-386쪽

(위에서 계속) 그리고 제대로 연설도 할 줄 모르는 주제에 백성들이 어떻게 도시를 바르게 다스릴 수 있겠어요? 지식이란 단기간이 아니라 오랜 경험(시간-인용자주)에서 얻어지는 것이지요. 설사 가나나한 농부가 멍청한 바보는 아니라 하더라도 일에 쫓기다 보면 정치에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지요.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못난 자가 존경을 독차지하고 웅변으로 백성들을 좌지우지한다면 그것은 상류층(더 나은 사람들-인용자주)에게는 疫病과 같은 일이지요.
테세우스:
전령이 재치도 있고, 게다가 달변이로구먼. 자네가 먼저 이 문제를 제기했으니 내 답변도 들어보게나. 논쟁은 자네가 시작했네그려. 도시에 독재자보다 더 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네. 무엇보다도 그런 도시에서는 공공의 법이 없고, 한 사람이 법을 독차지하여 자신을 위해 통치를 하기 때문일세. 그리고 그것은 이미 평등이 아닐세. 하지만 일단 법이 성문화되면 힘없는 자나 부자나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된다네. 그러면 부유한 시민이 나쁜 짓을 할 경우 힘없는 자가 비판을 할 수 있으며, 약자도 옳으면 강자를 이길 수 있다네. 자유란 이런 것일세. (아래에 계속)-385-386쪽

(위에서 계속)"누가 도시에 유익한 안건을 갖고 있어 公論에 부치기를 원하십니까?"(민회에서 사용하는 공식 어구-인용자주) 원하는 자는 이름을 날리고, 원치 않는 자는 침묵하면 된다네. 도시에 이보다 더한 평등이 어디 있겠는가?-385-386쪽

<탄원하는 여인들> 478-493행, 테바이의 전령
인간들에게 희망만큼 고약한 것은 없어요. 희망은 수많은 도시들을 미치게 하여 전쟁으로 내몰았으니까요. 전쟁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백성들이 투표로 정할 경우, 아무도 자신이 죽을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고 모두들 불운은 다른 사람들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투표할 때 각자가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떠올린다면, 헬라스가 전쟁의 광기로 망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우리 모두 전쟁과 평화라는 두 가지 말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나은지, 어느 쪽이 선이고 어느 쪽이 악인지, 평화가 전쟁보다 얼마나 더 유익한지 알고 있어요. 무엇보다도 평화는 무사 여신들에게 더없이 소중하지만 복수의 악령에게는 적대적이지요. 평화는 또 착한 아이들을 좋아하고부를 사랑하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사악하게도 전쟁을 선택해 약자를 핍박하고 인간이 인간을, 도시가 도시를 노예로 삼고 있어요.-388-389쪽

<탄원하는 여인들> 909-917, 아드라스토스
테세우스여, 그대는 이제 내 말을 들었으니, 이들이 성탑들 앞에서 과감히 죽으려 한 것에 놀라지 마시오. 좋은 교육은 명예심을 낳고 용기에 익숙한 사람은 누구나 겁쟁이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니까요. 용기도 배울 수 있는 것이오. 마치 어린아이가 그때까지 알지 못하던 것들을 말하고 듣는 법을 배우듯 말이오. 그리고 일단 배운 것은 늙을 때까지 간직되오. 그러니 그대들은 자식들을 잘 교육하시오.-406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zuaki 2009-09-01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edeia, Hippolytos, Alkestis, Hekabe, Andromache, Herakleidai, Hiketides, Herakles, Troiades, Elektra의 열 편 수록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월터 J. 옹 지음, 이기우 외 옮김 / 문예출판사 / 1995년 2월
절판


'인민의 적'이라든가 '전쟁상인의 자본주의자들'가 같은, 기술 수준이 낮은 발전 도상에 있는 많은 문화에서 정치 고발에 쓰이는 진부한 상투구는 고도로 문자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야비한 인상을 주겠지만, 이것들은 구술문화의 특징적인 사고 과정에서 생겨난 정형구화된 본질적 요소의 잔존이다. 소련 문화에서 비록 그러한 것은 줄어들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도 여전히 많은 구술문화가 잔존해 있다. 이것을 보여 주는 많은 증후의 하나는 소련에는 언제나 '10월 26일의 영광스런 혁명'과 같은 말씨를 고집스럽게 쓰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적어도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러한 경우를 보았었다.) 이 형용구적인 정형구는 의무적으로 고정화되어 있다. 이것은 '현명한 네스토르'라든가 '지모가 풍부한 오디세우스'와 같은 호머의 형용구적인 정형구가 역시 일반적으로 고정화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혹은 또 20세기 초엽 미국에서조차도 아직 구술문화의 영향을 지니고 있었던 일부 고립지대에서 '영광스런 7월 4일'이라는 말투가 역시 일반적으로 고정화되었었다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63-64쪽

속담이나 수수께끼는 지식을 쌓기 위해서 사용하는 게 아니고 언어로 상대방과 지적인 대결을 하기 위해서이다. 즉 속담이나 수수께끼 하나를 말하는 것은 상대에게 그 이상으로 더욱 딱 들어맞거나 혹은 그것과 정반대되는 다른 속담이나 수수께끼를 내 놓으라고 하는 도전인 것이다.(Abrahams 1968:1972).-71쪽

지식의 사용 방식에서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행위에 대한 상찬에서도 구술문화는 논쟁적으로 만들어져 있음을 스스로 노정한다. 물리적인 폭력에 대한 열광적인 서술이 종종 구전설화의 특징이 된다. 예컨대, <일리아스>의 제8서와 제10서는 그 뚜렷한 폭력의 측면에서 적어도 오늘날 가장 센세이셔널한 TV나 영화 프로에 필적될 만하며,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장면의 세세한 묘사에 이르러서는 훨씬 그것들을 능가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장면은 말로 구술될 때가 시각적으로 제시될 때보다 혐오를 덜 느끼게 한다.-72쪽

두번째 예는 구술 이야기를 축어적인 방식으로 고정하기 위한 제약으로서 음악이 어떠한 방식으로 작용하는가를 보여 준다. Eric Rutledge 는 일본에서 행한 집중적인 현장조사를 토대로, 아직은 현존하고 있으나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어 버린 일본의 전통적인 구술 이야기인 <헤이케 모노가타리(The Tale of the Heike)>에 관해서 보고하였다. (Rutledge 1981). 그 이야기는 음악에 맞춰서 노래로 불리워지나, 그 중에서는 적지만 악기의 반주가 없는 '흰 소리(white voice)'로 된 부분이나 악기 연주만으로 이루어진 간주곡도 있다. 그 애야기와 음악반주는 도제들에 의해서 기억된다. 도제들은 어렸을 때부터 구두로 가르쳐 주는 스승과 함께 곡을 읊기 시작한다. 스승들(이미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은 도제를 훈련시키는데, 수년에 걸쳐서 엄격한 수업을 통해서 도제들이 노래를 축어적으로 암송할 수 있도록 힘쓴다. 그리고 그것이 용케도 성공한다. 하기야 스승 자신이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암송의 방식을 바꿔 버리는 수도 있다. 이야기 중에는 잘못을 일으키기 쉬운 부분이 있다. (아래에 계속)-101쪽

(위에서 계속) 어느 점에서는 음악은 텍스트를 완벽하게 고정해 주는 것이지만, 다른 점에서는 음악은 필사본을 베낄 때 일어나는 잘못과 마찬가지의 잘못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를테면 '유사 결말'에 의한 잘못이다. 즉 구술하는 공연자는, 같은 구절이 문말에 몇 번이고 사용되고 있을 때, 앞의 구절에서 뒤의 구절로 뛰어 버리고 그 사이의 부분을 완전히 넘어가버리는 그런 일이 생긴다. 어떻든 간에 여기서도 역시 일종의 세련된 축어적인 재현을, 즉 완전하게 불변하는 재현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주목할 만한 재현을 볼 수 있다.-101쪽

구술문화의 특유한 기억형성에 관해서는 특히 의례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한층 면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중략) 의례의 언어는 '일상어에는 없는 영속성을 갖는다'라는 점에서 일상어에 비해서 쓰기에 가깝다고, 체이프는 특히 Semeca의 언어를 논하면서 제시하였다. (Chafe 1982). 또 그는 '구술로 행하는 동일한 의례는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데, 확실히 축어적으로 똑같이 행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 행해지더라도 일정한 내용, 문체, 정형구적인 구조에는 변함이 없다'고 언급하였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ㅓ의 의심할 여지 없이 구술문화에 있어 구술적인 암송의 압도적인 다수가, 상기의 연속성이 지니는 융통성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 점은 의례적인 암송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쓰기를 이미 알고 그것에 의지하고 있지만 아직 소박하게 구술성과도 생생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는 문화, 즉 아직 구술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 문화에서도, 의례상의 발화가 전형적으로 축어적이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래에 계속)-102-103쪽

(위에서 계속) "나를 기념하기 위해 이를 행하라"고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말했다.(루가복음 22:19) 기독교도가 성체예배를 예배식의 중심적 행위로 행하는 것은 이 예수의 지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도가 이 지시에 충실하기 위해 예수의 말씀대로 되풀이하는 이 긴요한 말(즉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것은 나의 계약의 피이다'라는 말)은, 신약성서에 들어 있는 어느 대목과 비교하더라도 엄밀히 같지는 않다. 초기 기독교회는 이미 텍스트화된 의식에서조차 텍스트 이전의 구술적 형태로 기억하였던 것이다. 교회가 전심전력을 자해서 기억하도록 엄명하였던 바로 그 점에 있어서조차도 구술적 형태로 기억했던 것이다.-102-103쪽

일차적인 구술문화의 성격구조는, 문자에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 보통으로 보이는 성격구조에 비하면, 어느 정도 한층 더 공유적이고 외면적이며 덜 내성적이다. 구술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사람들을 집단으로 연결시킨다. 읽고 쓰는 것은 마음(psyche)을 자신에게 되던지는 고독한 활동이다. 교사가 학급 전체에게 말을 걸 때에는 학급을 하나의 통합된 단체로서 느끼며, 학급 학생 전체도 자기네들을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교과서를 꺼내서 그 일부를 읽도록 교사가 명하면, 학생 개개인은 자기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학급의 통일은 사라지고 만다.-109쪽

고대 셈인에 의해서 발명되고 고대 희랍인에 의해 완성된 표음 알파벳(phonetic alphabet)은 소리를 시각적인 모습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모든 쓰기체계 중에서 월등히 뛰어난 융통성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알파벳이 모둔 주요한 쓰기체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니리라. 아름답게 도안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한자만큼 정교하게 할 수는 없다. 알파벳은 민주주의적인 스크립트로 누구나가 간단히 배울 수 있다. 한자 쓰기는 그 밖의 많은 쓰기체계와 마찬가지로 엘리트주의적이다. 즉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기 위해서는 오랜 동안의 여유로움을 필요로 한다. 알파벳의 민주주의적인 성격은 한국에서 제시되었다. 한국의 책이나 신문에는 알파벳[한글 자모:옮긴이]으로 철자화된 단어와 몇 백 개의 갖가지 한자가 혼합되어 쓰인다. 그러나 모든 공공적인 표기는 알파벳으로만 씌어지고, 알파벳은 국민학교 저학년에서 완전히 습득되므로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러한 표기를 읽을 수 있다. 다만 한국의 대부분의 문헌을 읽기 위해서는 알파벳 이외에 1800개의 '한자'가 최소한 필요하며 그것들을 전부 터득하는 데는 중학교 수료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142-143쪽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 문체의 대부분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학문적인 수사학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현저한 예외가 하나 있다. 그것은 여성 작가의 문체이다. 16세기 이래 단행본의 저자로서 많은 여성이 등장했으나 그러한 여성 가운데 학문적인 수사학의 훈련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중세 이래로 여자 교육은 종종 상당한 힘을 들여서 행해졌고, 그 결과로 유능한 가사 경영자를 낳았다. 가사라 하더라도 때로는 50명에서 80명의 식구를 뒷바라지하는 상당한 큰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자 교육은 라틴어로 수사학을 비롯한 그 밖의 모든 학과를 가르치고 있었던 학문적인 시설을 통해서 행해지지는 않았다. 17세기에 들어서자 소수이지만 여성도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러나 그녀들이 입학한 곳은 주요 교육기관인 라틴어 학교가 아니라 새로 생긴 일상어 학교(vernacular schools)였다. 이러한 일상어 학교는 장사나 가사에 유용한 실용적인 것을 가르쳤음에 반하여, 라틴어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종래의 학교는 성직자, 법률가, 의사, 외교관 그밖에 관리를 겨냥하는 사람들을 가르쳤다. (아래에 계속)-171쪽

(위에서 계속) 그러나 확실히 여성 작가들도 그들이 읽은 저작에서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저작들은 라틴어에 입각한, 그리고 학문적이고도 수사적인 전통에 젖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 자신은 보통 다른 목소리로, 즉 연설적인 목소리에서 훨씬 떨어진 목소리로 스스로를 표현했으며, 이것이 소설의 발생에 크게 연결되었던 것이다.-171쪽

인쇄는 말의사적인 소유라는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냈다. 1차적인 구술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이라도 시에 대한 소유권의 감각을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감각은 드물며, 보통은 누구나가 꺼내서 말하는 전승이나 정형구나 이야기의 주제가 공유되기 때문에, 그러한 감각은 약해지고 만다. 그러나 쓰기와 더불어 표절에 대한 분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중략) 인쇄가 시작되자, 그 초기부터 이미 최초의 출판자 이외의 사람이 그 인쇄본을 다시 찍는 것을 금하는 '특허'가 종종 설립되게 되었다.(중략)
활동적인 인간끼리의 교제 속에서 말이 처음 가지고 있었던 소리의 세계로부터, 인쇄는 말을 떼어내어, 그것을 시각적인 평면으로 한정적으로 귀속시켰고, 지식의 관리를 위해서 시각적인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쇄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내면 의식과 무의식적인 자원을 갈수록 점점 사물과 같은 것, 비인격적인 것,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생각하도록 촉발했다. 인쇄는, 인간 정신으로 하여금 갈수록 그 소유물이 타성적인 심적 공간 속에 보관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도록 촉구했다.-198-199쪽

구술문화에 입각한 사고와 표현의 특징들
1) 종속적이라기보다는 첨가적이다
2) 분석적이라기보다는 집합적이다
3) 장황하거나 '다변적'이다
4) 보수적이거나 전토적이다
5) 인간의 생활세계에 밀착된다
6) 논쟁적인 어조가 강하다
7) 객관적 거리 유지보다는 감정이입적 혹은 참여적이다
8) 항상성이 있다
9) 추상적이라기보다는 상황의존적이다-60-91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zuaki 2009-08-18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메로스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인기 있는 책에는 인기의 이유가 있는 거야.
 
언어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미우라 노부타카.가스야 게이스케 엮음, 이연숙.고영진.조태린 옮김 / 돌베개 / 2005년 6월
절판


이연숙 <'국어'와 언어적 공공성> 중에서
'국어=일본 국민의 모어' 라는 등식은 오늘날에도 일말의 의심도 없이 일본 사회에서 통용된다. 마치 '일본인'은 모두 '국어=일본어'가 모어임이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 이런 사고의 틀은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하지 않는'의 오역? -인용자) 정주 외국인이나 학교 교육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강요당하는 외국인의 존재를 은폐한다.'국어'라는 개념 자체가 일본 사회에서 多言語主義를 불가능하게 하는 커다란 장애물이다.
(이후의 인용은 모두 이연숙의 같은 논문.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國語를 모두'고쿠고'라고 표기했으나, 한국에서 사용되는 '국어' 개념과 나란히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인용자가 '국어'로 고쳤음.)-464쪽

나리타 류이치(成田龍一)는 <'고향'이라는 이야기>에서 근대 일본의 국민 형성 과정에서 '고향'의 이미지가 해온 역할을 분석한다. '고향'이란 있는 그대로의 실제가 아니고, 어느 특정 시점과 특정 이야기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비로소 나타나는 표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향'은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하는 '상상의 공동체'지만, 중요한 것은 "'고향'의 역할에 선행하여 nation의 역할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식 안에는 몇 개의 '고향'이 겹쳐져 '국민'이 만들어지지만, '고향'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국민'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치 '국민'이 정 ㅣ 제도 이전의 '자연'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 같은 허구가 성립된다.
나리타에 따르면, '고향'을 말함으로써 '국민'의 이미지를 만드는 담론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 '애향심'과 '애국심'이 '審級性으로 논의된다'. 이렇게 해서 '가정-고향-국가'라는 계열이 각각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같은 논리로 묶인다. (아래에 계속)-467쪽

(위에서 계속) 둘째, '고향'과 국가라는 차원이 다른 대상을 연결하기 위해 비유법이 사용된다. 특히 부분으로 전체를 표현하는 비유인 '시네구도키'(제유)가 큰 역할을 한다. 셋째, "국가와 '고향'을 공공성과 연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의 자발적인 행위조차도 "공공성을 개입시켜 '고향', 국가로 거둬들이는" 회로가 만들어진다.
근대 일본은 다양한 방법으로 '국어'가 '인위'가 아닌 '자연'의 영역에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그것은 '국어'가 결코 법적 규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과 관련이 깊다. 마치 대일본제국에서는 '일본어=국어'가 유일한 합법적인 언어인 것처럼, 일본은 국내뿐만 아니라 식민지 지배에서도 언어법 다운 언어법을 한 번도 제정한 적이 없다.-467쪽

중요한 것은 일본 사회에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일본어가 아닌 언어를 모어로 하는 어린이들의 '언어권'을 지키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 자녀들의 모어 교육은 일본어 교육을 보완하는 역할로 보아서도 안되고, 장래의 귀국을 위한 준비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 문제는 일본 사회 안에서 비일본어가 가능한 한 넓은 범위에서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장기 체제자가 늘어남에 따라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하지 않는? -인용자) 외국인 논동자는 해마다 늘어갈 것이다. 그때 일본은 일본어가 모어인(모어가 아닌? - 인용자) 외국인을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더불어 일본 사회 안에서 비일본어를 사용하고도 살아갈 수 있는 언어 환경을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물론 이는 이른바 '외국인 노동자'에게만 한정되어서는 안 되고, 모든 정주 외국인과 선주민의 권리로서 인정해야 한다.-475-476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zuaki 2009-08-18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의 '일본어'를 '한국어'로 바꾸어 놓고 이같은 주장이 한국의 대학에 재직하는 외국인 교수에 의해 주장되었을 때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상상해 본다. 한국에서도 국어의 신성성에 도전하는 노력들이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
 
국어라는 사상 - 근대 일본의 언어 인식
이연숙 지음, 고영진.임경화 옮김 / 소명출판 / 2006년 10월
품절


설상가상으로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1847~1889. 일본의 언어로 영어를 도입할 것을 주장 - 인용자주)는 근대 일본의 언어의식에 있어서 가장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 부분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드러내 버렸다. 모리 아리노리는 일본어가 "결코 우리들의 열도 밖에서는 사용되는 일이 없는 우리들의 빈곤한 언어"라고 무모하게도 단정해 버렸던 것이다. 일본의 지식인이 아무리 허세를 부린다고 해도, 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마음에 걸렸다. 그것을 타나카 카쓰히코(田中克彦, 1934~)는 일본의 지식인에게는 "모어 페시미즘의 전통" 있다고 표현했고, 스즈키 타카오(鈴木孝夫, 1926~)는 "일본인은 심층의식 속에서 일본어를 저주하고 있다"고 서술했다. 단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언할 수 없는 비밀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식인들은 모리 아리노리의 논의에 대해서 거의 신경질적인 대응을 보여 왔다.-36쪽

바바 타쓰이(馬場辰猪, 1850~1888)의 모리 아리노리 비판은 실로 첲저한 것이었다. 그 후의 비판자들이 오로지 모리 아리노리에게 감정적인 저항을 나타내는 데 머물렀던 것에 반해, 바바는 한 권의 일본어 문법을 써냄으로써 모리의 논의의 근간을 이루는 인식, 즉 일본어는 불완전한 언어라는 인식을 뒤집으려고 했다. 그것은 대단한 지적인 치밀함과 역경을 동반하는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는 기술적인 체계성을 가지고 쓰인 문법서는 단 한 권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완성된 것이 <일본어문전(日本語文典)>이라고 통칭되는 영문 저작 이다. (중략)
바바는 '문법'을 쓰는 것이 그 언어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아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공동체의 자립성을 표시하는 최대의 증거가 된다는 사회언어학적 선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바바는 모리 아리노리의 논의에 숨은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바바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중략) "설령 어느 민족이 정복자의 강대한 힘에 굴하여 언어의 채용을 강요당하는 경우에도 (아래에 계속)-37-41쪽

그 민족이 몇 백 년 동안이나 써 왔으며 그 때문에 가장 편리한 자민족의 언어를 버리는 일은 없었다."라고. 따라서 한 민족의 언어를 바꾸려는 모리 아리노리의 시도는 근본적으로 실행 불가능하며 무모한 기도이다.
그러나 바바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강압에 의할 수밖에 없는 외국어의 도입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두 언어 병용(다이글로시아)의 체제는 반드시 국민에게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할 것이다. 거기에는 언어의 벽에 의하여 격리되는 사회 계급의 분열이 생길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국민 중의 부유한 계급은 빈곤한 계급이 끊임없이 묶여있는 일상의 일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므로, 그 결과 전자는 후자보다 많은 시간을 언어의 학습에 쓸 수 있다. 만약 국정이, 나아가 사회의 교류 전부가 영어로 행해지게 되면 하층 계급은 국민 전체와 관련되는 중요 문제로부터 소외당하게 된다."-37-41쪽

메이지 초기의 '국어' 개념은 아직 성숙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다. 세키네 마사나오(關根正直, 1850~1932)의 <국어의 본체 및 그 가치(1888, 메이지21년)>는 국어의식의 변천을 살피는 데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논설로 나중에 다루겠지만, 그 서두에서 세키네는 이렇게 말한다. "근래 소학교 및 중학교에 국어라는 학과가 있음은 내가 아는 바이지만, 이 국어란 어떠한 것인가. 그 본체에 이르러서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고. 요컨대 '국어'는 세상에서 인지되는 버젓한 개녀이 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키네는 "국어란 랭퀴지라는 영어의 번역어로 들린다"고 하며, 그런 것이라면 오히려 국문이라고 하는 편이 알기 쉽지 않겠는냐고 말한다. 왜냐하면 "어(語)라고만 하면 단어로 들리기 때문이다."
(중략) 메이지 20년대 초두가 되어도 여전히 language의 번역어로서의 '국어'와, 단어 차원에서 '한자어(漢語)', '서양어(洋語)'에 대립하는 '국어'라는 두 가지의 층이 '국어'라는 표현 속에 섞이지 않은 채 병존하고 있었던 것이다.-114-115쪽

ㅔ이지 27~28년)을 정점으로 하는 메이지 20년대의 정신 상황을 토대로 하여 태어났다. 개괄적으로 보아, 메이지 10년대가 자유민권운동과 서구화주의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메이지 20년대는 관민(官民)일체에 의한 통일적 '국민'의 창출과 '국가' 의식 고양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모든 사회적 세력이 근대 국가에 걸맞는 '국민'상의 탐구라는 한 점을 향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흡수되어 버렸다.
1885년에 태정관제가 폐지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초대 총리대신으로 하는 내각제가 성립되었을 때, 문부대신(文部大臣)에는 모리 아리노리가 임명되었다. (중략) 그리고 모리는 이듬해인 1886년에 <학교령>을 발포하여,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대학교를 체계적으로 국가의 통제하에 두는 근대적 교육제도를 확립하고자 했다. (중략) '국어'와 관련하여 여기에서 놓칠 수 없는 것은 중학교에서 그때까지 '화한문과(和漢文科)'로 불리던 과목의 명칭이 '국어 및 한문과'로 변경된 것과, 사범학교에 '국어과'가 신설된 것이다. 더욱이 그 여파로 1889년에는 제국대학에서 '화문학과'가 '국문학과'로 개칭되었다. (아래에 계속)-119-120쪽

(위에서 계속) 학과명의 변경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화'에서 '국'으로의 변화는 언어의식에 어떤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119-120쪽

'전독일언어협회'의 결성 계기는 브라운슈바이크의 미술관장이었던 리겔(Hermann Riegel, 1834-1900)이 1883년에 발표한 <우리들의 모어의 근간>이라는 논문이었다. 거기에서 리겔은 외래어가 범람하는 독일어의 실상에 격분하여, 그러한 비독일적인 요소를 독일어에서 배제하기 위하여, 정부가 언어 아카데미를 설립해서 강력히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문이 세상에 호평을 얻고 받아들여지자, 리겔은 외래어를 배제하는 '언어순화운동'을 스스로 일으킬 결심을 했다. (중략)
언어순화운동은 스스로의 언어에서 외래어의 요소를 토착의 요소로 변환하려는 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그 운동은 한편으로는 커뮤니케이션의 원활화와 민중화, 다른 한편으로는 배외적 내셔널리즘과 국수주의라는 두 개의 극 사이에서 그 성격을 다양하게 바꾸어 버린다. 확실히 리겔은 "독일어로 바꿀 수 있는 외래어"의 배제만을 목표로 했으며, '맹목적인 결벽성'이나 '완고한 국수주의'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운동은 점차 '마녀 사냥'과도 닮은 '외국어 사냥'의 경향을 띠기에 이르렀다.
(아래에 계속)-150-153쪽

(위에서 계속)
전독일언어협회의 폭발적인 성공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승리하고 독일 통일을 이룩한 프로이센-독일에서 애국적 내셔널리즘의 파도가 일반 시민 사이에도 깊이 침투하고 있었던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점에서 협회가 먼저 배척해야 할 것으로 간주한 것이 수 세기에 걸쳐 독일어에 대해 우위를 자랑해 온 프랑스어로부터 들어온 외래어였던 것은 상징적이다. 그것은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언어적으로도 독일어의 자립을 추구하는 기운이 높아졌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독일어를 쓸 때는 네가 독일인이라는 것을 상기하라"와 같은 협회의 모토가 나타내고 있듯이, 거기에는 언어와 국민을 곧바로 동일시하는 위험한 동화주의의 맹아도 있었다. 애냐하면 이 협회의 정신은, 후에 제시하듯이 폴란드어를 쓰는 폴란드인의 존재를 말살하고 '독일인화'하려고 한 '게르만화운동'의 이데올로기와 간단히 타협하고 말기 때문이며, 나아가서는 국외의 독일어권까지도 독일의 판도에 넣으려는 영토확장주의까지도 거기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래에 계속)-150-153쪽

(위에서 계속)
우에다(우에다 카즈토시, 上田万年, 1867~1937, 1894년 베를린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의 3년반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제국대학 교수가 되어 국어 이념의 형성을 주도. 도쿄대학 국어학과 초대 주임교수-인용자주)가 독일에 있었을 때 만난 것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소장문법학파이며 흥륭하고 있던 전독일언어협회였던 것은, 우에다의 그 후의 행보에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이 두 가지 운동체는, 전자가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인 것임에 비해 후자가 일반 대중도 포괄하는 결사운동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성격을 달리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운동체 사이에는 대립도 있었다. (중략) 그러나 이 두 가지 운동체의 근간에는 프로이센-독일의 내셔널리즘이 견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실 우에다가 유럽으로부터 가지고 돌아온 것은 바로 언어와 내셔널리즘의 불가분한 관련이라는 인식이었다. 학문으로서의 언어학도 실천적인 어너 정책도 '국가'라는 공통의 무대 위에서 어느 쪽도 뺄 수 없는 두 주역이어야 했다.-150-153쪽

우에다의 문하에서는 신무라 이즈루(新村出, 1876-1967, 역사언어학, 비교언어학, 사전학),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1944, 조선어학), 킨다이치 쿄스케(金田一京助, 1882-1971, 아이누어학), 하시모토 신키치(橋本進吉, 1882-1945, 일본어학), 후지오카 카쓰지(동양어학), 오카쿠라 요시자부로(岡倉由三郞, 1868-1936, 영어학, 영어 교육)등의 많은 어어학자, 국어학자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언어 정책과 언어 교육 면에서 우에다의 작업을 전면적으로, 게다가 충실히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호시나 코이치(保科孝一, 1872-1955)는 지금은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중략)
호시나는 1898년 문부성 촉탁이 되고 난 다음부터, 일관해서 표음식 가나 표기, 한자 폐지를 최종 목표로 하는 한자 제한, 공적 기관에서의 구어문의 채용을 계속해서 주장해 왔다. (중략) 호시나에게는 이른바 국어 개혁의 원형이 전형적으로 제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패전 후의 국어 개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입장에 따라 명확히 두 가지로 나뉜다. (아래에 계속)-201-203쪽

(위에서 계속)개혁 찬성파에게는 "戰前부터 계속 문부성 국어과에 있으면서 국어심의회의 간사장으로 남 모르는 고생을 하셨던 호시나 코이치 씨"는 존경의 念을 담아 상기되지만, "국어 국자의 간이화, 합리화를 민족의 전통을 손상시키는 파괴적 활동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호시나라는 사람은 오랫동안 문부성에 들어앉아서, 국어 개혁이라는 국가적 사업을 일당 일파의 편협한 견해에 의하여 수행하려고 하는 성가신 남자"로 간주되고 만다.-201-203쪽

우에다 카즈퇴와 그 주변의 언어학자들은 현재의 입말이야말로 '국어'의 본체라고 하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어학 잡지>를 활동의 중심으로 하여 언문일치체를 솔선해서 채용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성실하게 언문일치를 실행한 것이 횟나 코이치였다. 그 성실함이 화근이 되어, 호시나의 문체는 언문일치체의 단점이라고 해야 할 장황함과 단조로움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말았다. 호시나의 책을 읽으면 아무리 애써도 졸음이 몰려오는 것은, 내용보다도 그의 문체 탓인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문체로는 아무리 선구적인 사고라도, 박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포섭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호시나는 그의 저작에서 실로 전투적이라고 할 만한 가나표기법도 실천했다. 호시나가 이상으로 삼은 가나표기법은 입말의 음성을 가능한 한 충실히 표상하는 표음적 가나표기법이었다. 호시나가 저작에 사용한 가나표기법은 결코 일관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호시나는 단순히 자신이 최량이라고 믿는 가나표기법을 멋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그가 참여했던 위원회가 정한 새로운 가나표기법을 재빨리 자신의 저작에서 사용했던 것이다.-235쪽

일본어의 '표준어'라는 말에는 특수한 感情 가치가 부착되어 있는 것 같다. 戰前에는 '표준어 제정'이라는 이름 아래 방언이 천시해야 할 말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방언의 화자는 자신의 말에 대한 깊은 열등감을 강요당했다. (중략) '표준어'라는 개념은 메이지 이래의 이러한 방언 박멸 정책의 심벌로서의 표현이었다. 그러자 전후에도 '표준어'라는 말에는 전전의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학문적으로 '표준어'를 논할 때조차도 세상에 침투한 '표준어 알레르기'에 대한 배려가 필요할 정도이다. 그래서 이러한 과거의 기억을 흐리게 하기 위하여, '표준어'에서 '공통어'로의 다소 뻔한 '치환'이 이루어졌다.-261-262쪽

먼저 호시나는 포젠주의 교과 교재의 특수성에 주목한다. 대개 독일의 교과서에는 대 놓고 교훈적이거나 도덕적인 내용을 다룬 부분이 드문데, 포젠주에서는 그렇지 않다. 포젠주에서 사용되는 교과서에는 교훈적인 것, 특히 독일 황제와 황실에 관한 교재가 대단히 많다. (중략) 또한 독일에서는 일반적으로 향토 교육이 성행하였으며 교과서에도 향토 교재가 다수 들어 있는데, 포젠주의 향토 교재는 다른 주와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향토에 대한 애착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폴란드인의 향토가 독일의 영토라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교재이며, 호시나에 의하면, 포젠주에서는 향토 교재가 "폴란드의 아동으로 하여금 독일화시키려고 하는 일대 목적"에 의해 편찬되어 있는 것이다. (중략)
호시나는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교재도 이러한 프로이센의 전례를 따라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제언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조선의 보통학교에서의 국어 독본에도 조선과 일본과의 고대에 있어서의 관계, 교통 상태, 조선이 지나 때문에 학대받은 것, 통치의 제도가 불완전했으므로 항상 苛政에 시달렸던 것, (아래에 계속)-274-276쪽

(위에서 계속) 징세의 제도가 난잡하여 인민이 관리 때문에 고통 받았던 것 등을 서술하고, 이제 일본에 합병되고 나서 국내에 선정을 펼쳐, 인민이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그들의 인권은 善美한 재판제도로 인하여 완전히 보호받으며 능히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성케 하고 교통 기관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인문이 점차 진보하여 조선의 면목이 한층 일신한 것 등을 향토편에서 서루하고, 혹은 그것에 의하여 왕성하게 直觀敎授를 추진하도록 한다면, 그들의 사상을 일본화시켜 점차 悅服하여 반일의 감정을 품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예들로 보면 호시나는 '합방' 직후부터 이후의 '황민화교육'의 모습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호시나가 국내의 표준어 교육에서도 동일한 직관 교육, 향토 교재, 직접 교수법이 유효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인 주목할 만하다. 호시나가 여기에서 찾아 낸 언어 정책과 언어 교육의 원리는 일본 국내에서 이미 그 효과가 확인되어 있었던 것이며, 그 방식이 식민지로 확대되었던 것이다.-274-276쪽

우에다 카즈토시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국어와 국가'의 연결을 열렬히 주장했다. 그러나 그 '국어'는 야마다 요시오가 말하는 '전통'으로부터 단절된 곳, 바로 거기에서 성립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우에다는 일본에서는 '국어'에 대한 의식이 전혀 자라지 않음을 자주 한탄했다. 우에다에게 '국어'란 본래의 일본어의 모습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실현되는 언어의 이상형인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근대언어학이었다.
호시나 코이치는 이러한 우에다 카즈토시의 '국어' 이념을 그대로 계승한다. 그리하여 호시나는 거의 반 세기에 걸쳐 일관해서 일본의 언어 정책, 언어 교육의 확립에 우직하리만큼 헌신해 왔다. (중략) 반복해서 언급한 것처럼, 호시나의 사상은 국내에서의 '표준어' 제정, 식민지와 '대동아공영권'에서의 '동화정책'의 추진 등 국가주의적 제국주의적 측면을 가짐과 동시에, 한자 제한, 표음 가나표기법 채용, 구어문의 보급 등 '국어 민주화'라고 할 만한 측면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360-361쪽

아마도 보수파와 개혁파의 '국어'를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그 싸움 자체가 일본의 '언어적 근대'의 표현을 형성해 왔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보수파와 개혁파의 양자가 싸움을 통하여 서로 보완하며, '국어'의 사상은 공고한 것이 되어 갔던 것이다.
왜냐하면 보수파도 개혁파도 하나의 암묵의 전제를 나눠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제란 일본어의 변함없는 동일성이다. 야마다 요시오와 우에다, 호시나 사이에는 이 동일성이 성립하는 차원이 상당히 달랐고,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본어가 하나의 동일한 실체라는 신념은 양자 모두 다르지 않았다.
즉 일본어의 동일성을 암묵의 전제로 삼는 한, '국어'의 무대 밖으로는 나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국어라는 사상'은 근대 일본의 언어 인식의 세계를 한정짓는 지평선을 이룬다. 그러나 그 지평선의 저편에는 -아이작 도이처(Isaac Deutscher, 1907-1967)의 "비유대적인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빌자면- 다양하고 무정형의 '비일본적 일본어'의 속삭임이 들려 올 것이다. (아래에 계속) -363쪽

(위에서 계속) '국어'의 사상이 '국가어'와 '공영권어' 사상으로 변모할지 어떨지는, 이러한 '비일본적 일본어'의 소리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끝>-363쪽

<역자해설>
또한 한국어의 근대화와 관련한 문제도 지금까지 연구된 것보다는 앞으로 연구해야 할 것들이 훨씬 더 많다. 그 한 예로 1933년에 나온 <한글 마춤법 통일안>의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는 표준어 규정은 아직까지도 막연히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추측만 있었을 뿐, 그것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식민지 조선에 유입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이 책은 이와 관련해서도 상당한 암시를 주고 있다. 예컨대, 통일안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최현배가 쿄토제국대학에서 신무라 이즈루의 언어학 강의를 들었으며, 그 신무라야말로 독일 유학후 일본의 표준에 제정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우에다 카즈토시의 제자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384-385쪽

1895년(메이지 28년)에 우에다는 <표준어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였는데, 거기에서 처음으로 '표준어'라는 개념을 일본에 소개한다. 거기에서 우에다는, 표준어란 영어의 standard language, 독일어의 Gemeinsprache에 해당하며, "이른바 방언이라는 것과는 달리 전국 도처 모든 장소에 통하여 대개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효력을 가지는 것", "일국 내에 모범으로 사용되는 언어"라는 의미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일본에 '표준어'라 부를 만한 것이 있는가 하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에다는 생각했다. 그러나 표준어가 될 수 있는 언어는 있다. 그것은 "일대 제국 首府의 언어"인 "토쿄말"이다. 우에다는 일본에서는 "현금의 토쿄말이 후일 그 명예를 향유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금의 토쿄말"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제1부에서 본 바와 같이, 메이지 20년대 초의 후타바테이 시메이나 야마다 비묘의 언문일치 소설에서 이미 '토쿄말'은 어떤 특권적 지위를 얻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에도말'과의 연속성 아래 형성된 '토쿄말'이었다. (아래에 계속)-173-174쪽

(위에서 계속) 그런데 우에다는 의식적으로 '에도말'과의 연속성을 끊으려 하는 것이다. 우에다는 '표준어'의 기본이 될 만한 '토쿄말'은 '베란메에'투(에도의 직인들 사이에 사용되는 거친 말투-역자주)와 같은 것이 아니라 "교육 있는 토쿄 사람이 쓰는 말"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한다. 표준어가 "토쿄 중류사회의 언어"라는 규정은 1904년(메이지 37년)의 <심상소학독본편찬취의서(尋常小學讀本編纂趣意書)>에서 처음으로 명확해진 것인데, 그 맹아는 이미 이때의 우에다의 강연 안에 있었던 것이다.-173-174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zuaki 2009-08-13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며 대학교 때 국어학 선생님이 당신과 우리를 비롯해서 국어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은 전부 주시경 선생의 몇 대째 제자라고 하셨던 것을 떠올렸다. 경성제대 조선어과의 교수로 현대적 한국어 연구의 토대를 놓은 오구라 신페이 교수가 우에다 카즈토시 교수의 제자였음을 생각하면,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역시 우리들의 (억지로 지워진) 몇 대째 스승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당연하게 가르치고 있는 '국어라는 사상'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행이 흥미진진했다.
 
로마의 축제일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4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한길사 / 2005년 5월
장바구니담기


(3권 261-273행, 3월 1일)

숲과 호숫가에서 디아나에게 시중드는 요정(Egeria-인용자주)이여, 말해주시오.
누마의 아내인 요정이여, 왛서 그대 자신의 행적의 증인이 되어주시오.
저기 아리키아 계곡에는 우거진 숲에 둘러싸이고
오래된 의식으로 말미암아 신성시되는 호수가 하나 있습니다.
그곳에 제 말들의 고삐에 갈기갈기 찢겨 죽은 힙폴뤼투스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그곳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긴 산울타리들에는 늘어진 실들이 드리워져 있고
그곳에 있는 많은 서판들이 여신에 대한 감사의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가끔 기도가 이루어지면 여인은 이마에 화관을 두르고
시내에서 불타는 횃불들을 가져옵니다.
그곳에서는 손과 발이 강한 도망자들이 왕노릇을 하지만
그들이 전임자들을 죽였듯이 그들도 나중에 죽음을 당합니다.
-136-137쪽

(3뤈 675행-696행. 3월 15일. 안나 페렌나의 축제)

이제 나에게는 소녀들이 외설스런 노래를 부르는 까닭을 말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잡스러운 노래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안나가 최근에 여신이 되었을 때 그라디부스(마르스의 별명. 행진하는 이-인용자주)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옆으로 데려가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내 달에 경배받으니 우리는 계절을 함께하는 셈이오.
내 큰 소망이 이루어지느냐의 여부는 그대의 도움에 달려 있소.
무장한 신인 나는 무장한 여신인 미네르바에게 사랑에 빠져 불타고 있고
내가 이 상처를 키운 지도 벌써 오래되었소.
기능이 비슷한 신들인 우리를 그대가 결합시키시오.
이 역할은 그대에게 어울리오. 그대 붙임성 좋은 노파여."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빈 약속으로 신을 우롱하고
모호하게 지연시킴으로써 어리석은 희망에 매달리게 합니다.
그가 자꾸 졸라대자 그녀가 말합니다. "분부대로 실행했다니까요.
그녀가 졌어요. 그녀는 그대의 간청에 가까스로 손을 들었으니까요."
(아래에 계속)-159-160쪽

(위에서 계속)
사랑에 빠진 그는 그 말을 믿고 新房을 준비하고
신부처럼 베일로 얼굴을 가린 안나가 그곳으로 인도됩니다.
마르스는 막 입 맞추려다가 안나를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수치심이, 다음에는 노여움이 우롱당한 신을 엄습합니다.
세 여신은 사랑스런 미네르바의 구혼자를 보고 웃고 있고,
베누스에게는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옛날의 익살과 외설스런 시구들을 노래하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안나가 위대한 신을 속인 것을 기억하고는 좋아하는 것입니다.-159-160쪽

(3권 809-848행, 3월 19일, 미네르바의 축제, 3/19-3/23)

그 사이 하루가 지나고 나면 미네르바의 축제가 열리는데
그것은 연속되는 다섯 날에서 그 이름을 따왔습니다.(Quinquartus-인용자주)
첫날은 피를 보아서는 안 되는지라 劍鬪는 불법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날에 미네르바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벤티눔 언덕에서 미네르바에게 신전이 봉헌되었기 때문에-인용자주)
이어지는 나흘 동안에는 뿌려진 모래 위에서 축제가 열립니다.
호전적인 여신은 칼집에서 칼을 빼어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소년들과 부드러운 소녀들이여, 이제 팔라스에게 기도하시오.
팔라스의 호감을 사는 이는 유식해질 것입니다.
일단 팔라스의 호감을 산 뒤에 소녀들로 하여금 양모를 빗고
가득 감겨 있는 물레 가락을 푸는 법을 배우게 하십시오.
그녀는 또 수직의 날실 사이를 북으로 통과하는 법과
느슨하게 짜여진 천을 바디로 단단하게 하는 법도 가르쳐줍니다.
그녀를 경배하시오. 더럽혀진 옷에서 얼룩을 지우는 그대는.
그녀를 경배하시오. 청동 가마에서 양모를 염색할 준비를 하는 그대도.
(아래에 계속)-167-169쪽

(위에서 계속)
어느 누구도 팔라스의 뜻을 거슬러서는 발에 맞는 샌들을 만들지 못합니다.
설사 그가 튀키우스(일리아스 7권에 나오는 아이아스의 방배 제작자-인용자주)보다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설사 그가 에페우스(트로이야의 목마 제작자-인용자주)보다 더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팔라스가 그에게 화를 내면 그는 서투른 사람이 될 것입니다.
포이부스의 기술로 질병을 몰아내는 그대들도
수입의 일부를 여신에게 바치십시오.
그리고 사람들에게 종종 수업료를 떼이는 그대들 교사들이여.
그녀를 모욕하지 마시오. 그녀는 새 학생들을 끌어다줍니다.
그리고 그대 글을 쓰는 이도, 그대 蠟畵 화가도. 그대 솜씨 좋은 石手도.
수천가지 일이 여신의 소관입니다.
그녀는 詩歌의 여신이 틀림없습니다.
그녀가 내가 하는 일에 호의를 베풀어주시기를. 내가 만약 그럴 자격이 있다면.
(아래에 계속)-167-169쪽

(위에서 계속)
카일리우스 산이 정상에서 들판으로 내려오고
길이 아직은 판판하지 않아도 거의 판판한 곳에서
그대는 미네르바 캅타의 작은 사당을 볼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여신이 생일날에 처음 받은 것입니다.
캅타라는 이름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명한 재능을 카피탈리스(capitalis)라고 부르는데 여신이야말로 재능이 있습니다.
아니면 전설에 따르면 그녀가 어머니 없이 아버지의 머리(caput)에서 방패를 들고 뛰어나왔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팔레리이가 정복되었을 때 그녀가 포로(captiva)로서 우리에게 왔기 때문일까요?
어떤 초기 銘文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아니면 그 사당에서 물건을 훔치는 것에
死刑(captis poena)을 내리는 법이 있기 때문일까요?
그대의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했든 간에, 팔라스여,
그대는 늘 우리 지도자들의 앞을 아이기스로 가려주소서!-167-169쪽

(5권 215-228행. 5월 2일. 플로라의 축제(4/28-5/3))

서리가 이슬이 되어 잎에서 떨어지고
다채로운 잎들이 햇살에 데워지자마자
호라이 여신들이 와서 알록달록한 옷을 걷어올리고는
가벼운 바구니들에 내(Flora-인용자주) 선물들을 모으지요.
이어사 카리스 여신들이 나타나
자신들의 天上의 모발을 장식할 화관과 화환들을 엮지요.
내가 처음으로 수없이 많은 민족들 사이에 씨를 뿌렸지요.
그전에 대지는 한 가지 색이었어요.
내가 처음으로 테라프네의 피에서 꽃을 만들었지요. (히아신스. 테라프네는 휘아킨토스가 죽은 곳-인용자주)
그 꽃잎에는 아직도 그것의 탄식이 새겨져 있지요.
나르킷수스여, 잘 손질된 내 정원에는 네 이름도 있지. (수선화-인용자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었던 불행한 자여.
그들의 상처에서 내 덕분에 명예가 솟아오르고 있는 크로쿠스와 (사프란. 크로쿠스는 메르쿠리우스의 연인-인용자주)
앗티스와(제비꽃,퀴벨레의 연인-인용자주) 키뉘라스의 아들(아네모네 또는 장미. 베누스의 연인 아도니스-인용자주)에 관해서는 말할 피요도 없겠지요.-244-245쪽

(5권. 379-414행. 5월 3일)

세번째 밤에는 키론이 자신의 별자리를 드러낼 것인데,
그의 몸은 반은 사람이고 반은 구렁말입니다.
펠리온은 하이모니아에 있는 산으로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정상은 소나무로 푸르고 나머지는 참나무들입니다.
그곳은 필뤼라의 아들이 차지했습니다.(Chiron/Cheiron은 사투르누스와 필뤼라의 아들-인용자주)
오래된 바위 동굴이 하나 있는데, 정직한 노인은 바로 그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언젠가 헥토르를 죽음으로 보내게 될 손들(手)에게
뤼라를 연주하는 법을 가르쳐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카이우스의 손자도 그곳에 왔는데,
그는 고역들의 일부를 마치고 얼마 안 되는 명령들만이 그에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대는 트로이야의 두 파멸의 운명이 우연히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되었을 것인즉,
이쪽 소년이 아이아쿠스의 손자고, 저쪽이 제우스의 아들입니다.
필뤼라의 아들인 영웅이 젊은이를 환영하며
찾아온 까닭을 묻자 젊은이가 가르쳐줍니다.
그 사이 그는 몽둥이와 사자 가죽을 보더니 말합니다.
"사람은 무기 못지않고 무기는 사람 못지않구려."
(아래에 계속)-254-256쪽

(위에서 계속)
아킬레스는 센털이 난 털복숭이 모피를
감히 만져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습니다.
한편 노인은 독화살들을 만지작거리다가
화살 하나가 떨어져 왼쪽 발을 찔립니다.
키론이 신음하며 몸에서 무쇠를 뽑았습니다.
알카이우스의 손자도, 하이모니아의 소년도 함께 신음합니다.
키론 자신은 파가사이 언덕들에서 따 모은 약초들을 섞어
여러 가지 치료법으로 자신의 상처를 진정시킵니다.
그러나 게걸스런 독이 치료법들을 이겨
파멸이 뼛속과 전신으로 퍼졌습니다.
레르나의 휘드라의 피가 켄타우루스의 피와
이미 섞인 뒤라 구제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아래에 계속)
-254-256쪽

(위에서 계속)
아킬레스는 눈물범벅이 되어 마치 아버지 앞인 양 그의 앞에 서 있었습니다.
펠레우스가 죽어가고 있다면 그는 그렇게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는 다정한 손들로 힘없는 손들을 가끔 어루만지곤 했으니,
스승은 자신이 형성해준 성품으로 보답받는 것입니다.
아킬레스는 가끔 그에게 입 맞추고 거기 누워 있는 그를 가끔 부르며 말했습니다.
"제발 죽지 마세요. 나를 버리지 마세요. 사랑하는 아버지."
아흐레째가 되자, 가장 정직한 키론이여,
그대는 이칠십사 열네 개의 별들을 그대의 몸에 둘렀소이다.-254-256쪽

(5권 671-692행. 5월 15일, 메르쿠리우스의 축제)

카페나 문 근처에 메르쿠리우스의 샘이 있는데
그 물을 마셔본 사람들의 말을 믿는다면 그것은 효험이 있습니다.
상인은 이곳으로 와서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燻蒸한 항아리에 정성스레 물을 퍼 담아 집으로 가져갑니다.
그는 그 속에 월계수 가지를 담갔다가
곧 새 임자를 만나게 될 모든 것에 이 젖은 월계수 가지로 물을 뿌립니다.
그는 또 물방울이 뚝뚝 듣는 월계수로 자신의 머리에도 물을 뿌리며
속이는 버릇이 있는 입으로 기도합니다.
"지난날의 거짓 맹세들을 씻어주소서" 라고 그는 말합니다.
"어제의 거짓말들도 씻어주소서!
내가 그대를 증인으로 삼았거나,
듣지 않으시리라 믿고 윱피테르의 신성에 걸고 거짓으로 맹세했거나,
또는 내가 알고도 다른 신이나 여신을 속인 적이 있다면
내 염치없는 말들을 재빠른 남풍이 쓸어가게 해주소서.
(아래에 계속)-269-270쪽

(위에서 계속)
하지만 내일 또 거짓 맹세하는 것을 허락해주시고,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신들께서 이를 무시하게 해주소서.
내게는 오직 이익만 주시고, 얻은 이익을 즐기게 해주시고,
손님을 속인 것이 내게 도움이 되게 해주소서!"
메르쿠리우스는 자신이 전에 오르튀기아의 소떼를 훔쳤던 일을 기억하고는
그러한 요구에 높은 곳에서 미소짓습니다.-269-270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zuaki 2009-08-0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인 Fasti는 원래 법정의 개정일(dies fasti)과 휴정일(dies nefasti), 그리고 민회가 열리는 날(dies comitiales) 등을 기록해 놓는 달력을 뜻하는 말이라고.
오비디우스의 삐딱한 유머는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