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라는 사상 - 근대 일본의 언어 인식
이연숙 지음, 고영진.임경화 옮김 / 소명출판 / 2006년 10월
품절


설상가상으로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1847~1889. 일본의 언어로 영어를 도입할 것을 주장 - 인용자주)는 근대 일본의 언어의식에 있어서 가장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 부분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드러내 버렸다. 모리 아리노리는 일본어가 "결코 우리들의 열도 밖에서는 사용되는 일이 없는 우리들의 빈곤한 언어"라고 무모하게도 단정해 버렸던 것이다. 일본의 지식인이 아무리 허세를 부린다고 해도, 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마음에 걸렸다. 그것을 타나카 카쓰히코(田中克彦, 1934~)는 일본의 지식인에게는 "모어 페시미즘의 전통" 있다고 표현했고, 스즈키 타카오(鈴木孝夫, 1926~)는 "일본인은 심층의식 속에서 일본어를 저주하고 있다"고 서술했다. 단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언할 수 없는 비밀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식인들은 모리 아리노리의 논의에 대해서 거의 신경질적인 대응을 보여 왔다.-36쪽

바바 타쓰이(馬場辰猪, 1850~1888)의 모리 아리노리 비판은 실로 첲저한 것이었다. 그 후의 비판자들이 오로지 모리 아리노리에게 감정적인 저항을 나타내는 데 머물렀던 것에 반해, 바바는 한 권의 일본어 문법을 써냄으로써 모리의 논의의 근간을 이루는 인식, 즉 일본어는 불완전한 언어라는 인식을 뒤집으려고 했다. 그것은 대단한 지적인 치밀함과 역경을 동반하는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는 기술적인 체계성을 가지고 쓰인 문법서는 단 한 권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완성된 것이 <일본어문전(日本語文典)>이라고 통칭되는 영문 저작 이다. (중략)
바바는 '문법'을 쓰는 것이 그 언어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아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공동체의 자립성을 표시하는 최대의 증거가 된다는 사회언어학적 선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바바는 모리 아리노리의 논의에 숨은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바바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중략) "설령 어느 민족이 정복자의 강대한 힘에 굴하여 언어의 채용을 강요당하는 경우에도 (아래에 계속)-37-41쪽

그 민족이 몇 백 년 동안이나 써 왔으며 그 때문에 가장 편리한 자민족의 언어를 버리는 일은 없었다."라고. 따라서 한 민족의 언어를 바꾸려는 모리 아리노리의 시도는 근본적으로 실행 불가능하며 무모한 기도이다.
그러나 바바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강압에 의할 수밖에 없는 외국어의 도입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두 언어 병용(다이글로시아)의 체제는 반드시 국민에게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할 것이다. 거기에는 언어의 벽에 의하여 격리되는 사회 계급의 분열이 생길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국민 중의 부유한 계급은 빈곤한 계급이 끊임없이 묶여있는 일상의 일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므로, 그 결과 전자는 후자보다 많은 시간을 언어의 학습에 쓸 수 있다. 만약 국정이, 나아가 사회의 교류 전부가 영어로 행해지게 되면 하층 계급은 국민 전체와 관련되는 중요 문제로부터 소외당하게 된다."-37-41쪽

메이지 초기의 '국어' 개념은 아직 성숙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다. 세키네 마사나오(關根正直, 1850~1932)의 <국어의 본체 및 그 가치(1888, 메이지21년)>는 국어의식의 변천을 살피는 데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논설로 나중에 다루겠지만, 그 서두에서 세키네는 이렇게 말한다. "근래 소학교 및 중학교에 국어라는 학과가 있음은 내가 아는 바이지만, 이 국어란 어떠한 것인가. 그 본체에 이르러서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고. 요컨대 '국어'는 세상에서 인지되는 버젓한 개녀이 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키네는 "국어란 랭퀴지라는 영어의 번역어로 들린다"고 하며, 그런 것이라면 오히려 국문이라고 하는 편이 알기 쉽지 않겠는냐고 말한다. 왜냐하면 "어(語)라고만 하면 단어로 들리기 때문이다."
(중략) 메이지 20년대 초두가 되어도 여전히 language의 번역어로서의 '국어'와, 단어 차원에서 '한자어(漢語)', '서양어(洋語)'에 대립하는 '국어'라는 두 가지의 층이 '국어'라는 표현 속에 섞이지 않은 채 병존하고 있었던 것이다.-114-115쪽

ㅔ이지 27~28년)을 정점으로 하는 메이지 20년대의 정신 상황을 토대로 하여 태어났다. 개괄적으로 보아, 메이지 10년대가 자유민권운동과 서구화주의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메이지 20년대는 관민(官民)일체에 의한 통일적 '국민'의 창출과 '국가' 의식 고양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모든 사회적 세력이 근대 국가에 걸맞는 '국민'상의 탐구라는 한 점을 향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흡수되어 버렸다.
1885년에 태정관제가 폐지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초대 총리대신으로 하는 내각제가 성립되었을 때, 문부대신(文部大臣)에는 모리 아리노리가 임명되었다. (중략) 그리고 모리는 이듬해인 1886년에 <학교령>을 발포하여,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대학교를 체계적으로 국가의 통제하에 두는 근대적 교육제도를 확립하고자 했다. (중략) '국어'와 관련하여 여기에서 놓칠 수 없는 것은 중학교에서 그때까지 '화한문과(和漢文科)'로 불리던 과목의 명칭이 '국어 및 한문과'로 변경된 것과, 사범학교에 '국어과'가 신설된 것이다. 더욱이 그 여파로 1889년에는 제국대학에서 '화문학과'가 '국문학과'로 개칭되었다. (아래에 계속)-119-120쪽

(위에서 계속) 학과명의 변경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화'에서 '국'으로의 변화는 언어의식에 어떤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119-120쪽

'전독일언어협회'의 결성 계기는 브라운슈바이크의 미술관장이었던 리겔(Hermann Riegel, 1834-1900)이 1883년에 발표한 <우리들의 모어의 근간>이라는 논문이었다. 거기에서 리겔은 외래어가 범람하는 독일어의 실상에 격분하여, 그러한 비독일적인 요소를 독일어에서 배제하기 위하여, 정부가 언어 아카데미를 설립해서 강력히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문이 세상에 호평을 얻고 받아들여지자, 리겔은 외래어를 배제하는 '언어순화운동'을 스스로 일으킬 결심을 했다. (중략)
언어순화운동은 스스로의 언어에서 외래어의 요소를 토착의 요소로 변환하려는 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그 운동은 한편으로는 커뮤니케이션의 원활화와 민중화, 다른 한편으로는 배외적 내셔널리즘과 국수주의라는 두 개의 극 사이에서 그 성격을 다양하게 바꾸어 버린다. 확실히 리겔은 "독일어로 바꿀 수 있는 외래어"의 배제만을 목표로 했으며, '맹목적인 결벽성'이나 '완고한 국수주의'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운동은 점차 '마녀 사냥'과도 닮은 '외국어 사냥'의 경향을 띠기에 이르렀다.
(아래에 계속)-150-153쪽

(위에서 계속)
전독일언어협회의 폭발적인 성공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승리하고 독일 통일을 이룩한 프로이센-독일에서 애국적 내셔널리즘의 파도가 일반 시민 사이에도 깊이 침투하고 있었던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점에서 협회가 먼저 배척해야 할 것으로 간주한 것이 수 세기에 걸쳐 독일어에 대해 우위를 자랑해 온 프랑스어로부터 들어온 외래어였던 것은 상징적이다. 그것은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언어적으로도 독일어의 자립을 추구하는 기운이 높아졌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독일어를 쓸 때는 네가 독일인이라는 것을 상기하라"와 같은 협회의 모토가 나타내고 있듯이, 거기에는 언어와 국민을 곧바로 동일시하는 위험한 동화주의의 맹아도 있었다. 애냐하면 이 협회의 정신은, 후에 제시하듯이 폴란드어를 쓰는 폴란드인의 존재를 말살하고 '독일인화'하려고 한 '게르만화운동'의 이데올로기와 간단히 타협하고 말기 때문이며, 나아가서는 국외의 독일어권까지도 독일의 판도에 넣으려는 영토확장주의까지도 거기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래에 계속)-150-153쪽

(위에서 계속)
우에다(우에다 카즈토시, 上田万年, 1867~1937, 1894년 베를린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의 3년반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제국대학 교수가 되어 국어 이념의 형성을 주도. 도쿄대학 국어학과 초대 주임교수-인용자주)가 독일에 있었을 때 만난 것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소장문법학파이며 흥륭하고 있던 전독일언어협회였던 것은, 우에다의 그 후의 행보에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이 두 가지 운동체는, 전자가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인 것임에 비해 후자가 일반 대중도 포괄하는 결사운동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성격을 달리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운동체 사이에는 대립도 있었다. (중략) 그러나 이 두 가지 운동체의 근간에는 프로이센-독일의 내셔널리즘이 견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실 우에다가 유럽으로부터 가지고 돌아온 것은 바로 언어와 내셔널리즘의 불가분한 관련이라는 인식이었다. 학문으로서의 언어학도 실천적인 어너 정책도 '국가'라는 공통의 무대 위에서 어느 쪽도 뺄 수 없는 두 주역이어야 했다.-150-153쪽

우에다의 문하에서는 신무라 이즈루(新村出, 1876-1967, 역사언어학, 비교언어학, 사전학),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1944, 조선어학), 킨다이치 쿄스케(金田一京助, 1882-1971, 아이누어학), 하시모토 신키치(橋本進吉, 1882-1945, 일본어학), 후지오카 카쓰지(동양어학), 오카쿠라 요시자부로(岡倉由三郞, 1868-1936, 영어학, 영어 교육)등의 많은 어어학자, 국어학자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언어 정책과 언어 교육 면에서 우에다의 작업을 전면적으로, 게다가 충실히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호시나 코이치(保科孝一, 1872-1955)는 지금은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중략)
호시나는 1898년 문부성 촉탁이 되고 난 다음부터, 일관해서 표음식 가나 표기, 한자 폐지를 최종 목표로 하는 한자 제한, 공적 기관에서의 구어문의 채용을 계속해서 주장해 왔다. (중략) 호시나에게는 이른바 국어 개혁의 원형이 전형적으로 제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패전 후의 국어 개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입장에 따라 명확히 두 가지로 나뉜다. (아래에 계속)-201-203쪽

(위에서 계속)개혁 찬성파에게는 "戰前부터 계속 문부성 국어과에 있으면서 국어심의회의 간사장으로 남 모르는 고생을 하셨던 호시나 코이치 씨"는 존경의 念을 담아 상기되지만, "국어 국자의 간이화, 합리화를 민족의 전통을 손상시키는 파괴적 활동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호시나라는 사람은 오랫동안 문부성에 들어앉아서, 국어 개혁이라는 국가적 사업을 일당 일파의 편협한 견해에 의하여 수행하려고 하는 성가신 남자"로 간주되고 만다.-201-203쪽

우에다 카즈퇴와 그 주변의 언어학자들은 현재의 입말이야말로 '국어'의 본체라고 하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어학 잡지>를 활동의 중심으로 하여 언문일치체를 솔선해서 채용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성실하게 언문일치를 실행한 것이 횟나 코이치였다. 그 성실함이 화근이 되어, 호시나의 문체는 언문일치체의 단점이라고 해야 할 장황함과 단조로움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말았다. 호시나의 책을 읽으면 아무리 애써도 졸음이 몰려오는 것은, 내용보다도 그의 문체 탓인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문체로는 아무리 선구적인 사고라도, 박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포섭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호시나는 그의 저작에서 실로 전투적이라고 할 만한 가나표기법도 실천했다. 호시나가 이상으로 삼은 가나표기법은 입말의 음성을 가능한 한 충실히 표상하는 표음적 가나표기법이었다. 호시나가 저작에 사용한 가나표기법은 결코 일관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호시나는 단순히 자신이 최량이라고 믿는 가나표기법을 멋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그가 참여했던 위원회가 정한 새로운 가나표기법을 재빨리 자신의 저작에서 사용했던 것이다.-235쪽

일본어의 '표준어'라는 말에는 특수한 感情 가치가 부착되어 있는 것 같다. 戰前에는 '표준어 제정'이라는 이름 아래 방언이 천시해야 할 말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방언의 화자는 자신의 말에 대한 깊은 열등감을 강요당했다. (중략) '표준어'라는 개념은 메이지 이래의 이러한 방언 박멸 정책의 심벌로서의 표현이었다. 그러자 전후에도 '표준어'라는 말에는 전전의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학문적으로 '표준어'를 논할 때조차도 세상에 침투한 '표준어 알레르기'에 대한 배려가 필요할 정도이다. 그래서 이러한 과거의 기억을 흐리게 하기 위하여, '표준어'에서 '공통어'로의 다소 뻔한 '치환'이 이루어졌다.-261-262쪽

먼저 호시나는 포젠주의 교과 교재의 특수성에 주목한다. 대개 독일의 교과서에는 대 놓고 교훈적이거나 도덕적인 내용을 다룬 부분이 드문데, 포젠주에서는 그렇지 않다. 포젠주에서 사용되는 교과서에는 교훈적인 것, 특히 독일 황제와 황실에 관한 교재가 대단히 많다. (중략) 또한 독일에서는 일반적으로 향토 교육이 성행하였으며 교과서에도 향토 교재가 다수 들어 있는데, 포젠주의 향토 교재는 다른 주와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향토에 대한 애착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폴란드인의 향토가 독일의 영토라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교재이며, 호시나에 의하면, 포젠주에서는 향토 교재가 "폴란드의 아동으로 하여금 독일화시키려고 하는 일대 목적"에 의해 편찬되어 있는 것이다. (중략)
호시나는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교재도 이러한 프로이센의 전례를 따라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제언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조선의 보통학교에서의 국어 독본에도 조선과 일본과의 고대에 있어서의 관계, 교통 상태, 조선이 지나 때문에 학대받은 것, 통치의 제도가 불완전했으므로 항상 苛政에 시달렸던 것, (아래에 계속)-274-276쪽

(위에서 계속) 징세의 제도가 난잡하여 인민이 관리 때문에 고통 받았던 것 등을 서술하고, 이제 일본에 합병되고 나서 국내에 선정을 펼쳐, 인민이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그들의 인권은 善美한 재판제도로 인하여 완전히 보호받으며 능히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성케 하고 교통 기관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인문이 점차 진보하여 조선의 면목이 한층 일신한 것 등을 향토편에서 서루하고, 혹은 그것에 의하여 왕성하게 直觀敎授를 추진하도록 한다면, 그들의 사상을 일본화시켜 점차 悅服하여 반일의 감정을 품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예들로 보면 호시나는 '합방' 직후부터 이후의 '황민화교육'의 모습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호시나가 국내의 표준어 교육에서도 동일한 직관 교육, 향토 교재, 직접 교수법이 유효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인 주목할 만하다. 호시나가 여기에서 찾아 낸 언어 정책과 언어 교육의 원리는 일본 국내에서 이미 그 효과가 확인되어 있었던 것이며, 그 방식이 식민지로 확대되었던 것이다.-274-276쪽

우에다 카즈토시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국어와 국가'의 연결을 열렬히 주장했다. 그러나 그 '국어'는 야마다 요시오가 말하는 '전통'으로부터 단절된 곳, 바로 거기에서 성립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우에다는 일본에서는 '국어'에 대한 의식이 전혀 자라지 않음을 자주 한탄했다. 우에다에게 '국어'란 본래의 일본어의 모습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실현되는 언어의 이상형인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근대언어학이었다.
호시나 코이치는 이러한 우에다 카즈토시의 '국어' 이념을 그대로 계승한다. 그리하여 호시나는 거의 반 세기에 걸쳐 일관해서 일본의 언어 정책, 언어 교육의 확립에 우직하리만큼 헌신해 왔다. (중략) 반복해서 언급한 것처럼, 호시나의 사상은 국내에서의 '표준어' 제정, 식민지와 '대동아공영권'에서의 '동화정책'의 추진 등 국가주의적 제국주의적 측면을 가짐과 동시에, 한자 제한, 표음 가나표기법 채용, 구어문의 보급 등 '국어 민주화'라고 할 만한 측면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360-361쪽

아마도 보수파와 개혁파의 '국어'를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그 싸움 자체가 일본의 '언어적 근대'의 표현을 형성해 왔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보수파와 개혁파의 양자가 싸움을 통하여 서로 보완하며, '국어'의 사상은 공고한 것이 되어 갔던 것이다.
왜냐하면 보수파도 개혁파도 하나의 암묵의 전제를 나눠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제란 일본어의 변함없는 동일성이다. 야마다 요시오와 우에다, 호시나 사이에는 이 동일성이 성립하는 차원이 상당히 달랐고,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본어가 하나의 동일한 실체라는 신념은 양자 모두 다르지 않았다.
즉 일본어의 동일성을 암묵의 전제로 삼는 한, '국어'의 무대 밖으로는 나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국어라는 사상'은 근대 일본의 언어 인식의 세계를 한정짓는 지평선을 이룬다. 그러나 그 지평선의 저편에는 -아이작 도이처(Isaac Deutscher, 1907-1967)의 "비유대적인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빌자면- 다양하고 무정형의 '비일본적 일본어'의 속삭임이 들려 올 것이다. (아래에 계속) -363쪽

(위에서 계속) '국어'의 사상이 '국가어'와 '공영권어' 사상으로 변모할지 어떨지는, 이러한 '비일본적 일본어'의 소리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끝>-363쪽

<역자해설>
또한 한국어의 근대화와 관련한 문제도 지금까지 연구된 것보다는 앞으로 연구해야 할 것들이 훨씬 더 많다. 그 한 예로 1933년에 나온 <한글 마춤법 통일안>의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는 표준어 규정은 아직까지도 막연히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추측만 있었을 뿐, 그것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식민지 조선에 유입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이 책은 이와 관련해서도 상당한 암시를 주고 있다. 예컨대, 통일안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최현배가 쿄토제국대학에서 신무라 이즈루의 언어학 강의를 들었으며, 그 신무라야말로 독일 유학후 일본의 표준에 제정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우에다 카즈토시의 제자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384-385쪽

1895년(메이지 28년)에 우에다는 <표준어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였는데, 거기에서 처음으로 '표준어'라는 개념을 일본에 소개한다. 거기에서 우에다는, 표준어란 영어의 standard language, 독일어의 Gemeinsprache에 해당하며, "이른바 방언이라는 것과는 달리 전국 도처 모든 장소에 통하여 대개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효력을 가지는 것", "일국 내에 모범으로 사용되는 언어"라는 의미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일본에 '표준어'라 부를 만한 것이 있는가 하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에다는 생각했다. 그러나 표준어가 될 수 있는 언어는 있다. 그것은 "일대 제국 首府의 언어"인 "토쿄말"이다. 우에다는 일본에서는 "현금의 토쿄말이 후일 그 명예를 향유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금의 토쿄말"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제1부에서 본 바와 같이, 메이지 20년대 초의 후타바테이 시메이나 야마다 비묘의 언문일치 소설에서 이미 '토쿄말'은 어떤 특권적 지위를 얻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에도말'과의 연속성 아래 형성된 '토쿄말'이었다. (아래에 계속)-173-174쪽

(위에서 계속) 그런데 우에다는 의식적으로 '에도말'과의 연속성을 끊으려 하는 것이다. 우에다는 '표준어'의 기본이 될 만한 '토쿄말'은 '베란메에'투(에도의 직인들 사이에 사용되는 거친 말투-역자주)와 같은 것이 아니라 "교육 있는 토쿄 사람이 쓰는 말"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한다. 표준어가 "토쿄 중류사회의 언어"라는 규정은 1904년(메이지 37년)의 <심상소학독본편찬취의서(尋常小學讀本編纂趣意書)>에서 처음으로 명확해진 것인데, 그 맹아는 이미 이때의 우에다의 강연 안에 있었던 것이다.-173-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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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8-13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며 대학교 때 국어학 선생님이 당신과 우리를 비롯해서 국어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은 전부 주시경 선생의 몇 대째 제자라고 하셨던 것을 떠올렸다. 경성제대 조선어과의 교수로 현대적 한국어 연구의 토대를 놓은 오구라 신페이 교수가 우에다 카즈토시 교수의 제자였음을 생각하면,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역시 우리들의 (억지로 지워진) 몇 대째 스승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당연하게 가르치고 있는 '국어라는 사상'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행이 흥미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