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우리 문화재를 대하면서 의문이 가는점이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학설을 따르기에는 무언가 조금 석연치 않는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문화재와 관련된 학설은 실증사료와 문헌사료가 일치 될 경우에는 그대로 누구나가 인정을 하는 편입니다만,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학파(학파라고 해야 특별한 것이 아니고 출신 학교에 따라 약간의 특색이 나타나는데 이런 경향은 주로 스승의 주장을 대체로 수용하기 때문입니다)에 따라 다소 다른 의견을 내기도 합니다. "알쏭달쏭 문화재 이야기"에서는 기존의 정설로 알려진 학설에 대한 의문으로 출발하는 조금은 엉뚱한 접근 방법으로 접하는 문화재에 관한 이론(異論)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첫번째가 '정림사 5층탑이 먼저냐? 미륵사지 탑이 먼저냐?' 입니다.  정림사지 5층탑은 국보 제 9호로 부여의 정림사지에 있는 탑으로 일반적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재료가 변한 첫 번째의 탑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미륵사지 석탑은 익산에 있는 탑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하는 과도기적 탑으로 알려져 있는 탑입니다. 이 두 탑을 두고 학자들의 의견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돌을 나무처럼 다듬어서 만든 탑이 미륵사지 석탑이며, 정림사지 석탑은 이런 과정을 거쳐 확실하게 돌로 만들어진 탑이라는데 대체로 동의를 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의 건립년대는 사비성으로 백제가 천도를 하면서 왕사(王寺)에 지은 석탑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시기적으로 7세기 초반에 해당이 됩니다. 그러나 미륵사지 석탑은 무왕이 건립하였는데 무왕은 서동왕자의 전설을 낳은 왕이며 그의 아내인 선화공주와 이곳을 지나다가 나타난 미륵사존을 보고 공주가 절을 세울것을 간청하여 절을 세우고 조성한 탑으로써 시기적으로는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인 7세기 중반에 건립 되었습니다.  우선 건립 시기를 놓고 봐도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보다 조금 앞서는 시기 입니다.  또 정림사지 오층탑은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정벌당하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탑으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 탑에 백제를 평했다는 글(大唐平濟國碑銘)을 새겼기에 한동안은 이 탑이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이 세운 탑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이미 건립된 탑에 명문만 새긴 것입니다.

  이 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번안한 첫 번째 탑이라는 주장은 우리 나라 미술사학의 태두라고 일컬어지는 又玄 高裕燮 선생의 연구에 의해서 입니다.  8.3m의 거대한 이 5층탑은 백제탑의 기본이 되는 탑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 11호로 남아있는 층수는 6층인데 그 높이만 14.25m나 되는 우리 나라 최고의 탑입니다. 미륵사탑을 정림사지 석탑보다 앞 선 탑으로 보는 견해는 석재의 형태로 구분을 해서입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석재를 나무와 같은 판석으로 만들어 탑을 조성하였고, 정림사지 석탑은 완전한 석탑의 형태로 조성을 하였기에 당연히 양식적으로는 목탑---->나무판 처럼 다듬은 석재로 만든 석탑--->완전한 석재로 만든 석탑의 순서이기에 미륵사지 석탑이 앞선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비 천도와 동시에 만들어진 정림사지 석탑이 그 후에 만들어진 미륵사지 석탑보다 후대의 양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모순이 되는 셈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부분에 의심을 가지면서도 뚜렷한 해답을 내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는 제가 보기에는 양식적인 측면을 무시하여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분명,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앞선 시기에 건립이 되었으면서도 양식적인 면에서 후대의 양식이라고 나중에 건립된 탑으로 보는것은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는 견해는 두 탑은 그 용도에 따라 달리 만들어진것이지 결코 양식에 의해 건립시기를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단지 탑내에 사리만을 안치한 탑이라는 것이며, 미륵지사지 석탑은 분명 탑에 사람이 들어가거나 올라갈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미륵사지 석탑은 가운데 기둥으로 삼는 심주(芯柱)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이는 법주사의 팔상전 처럼 가운데 부처를 모신다거나 또는 상층으로 오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건립 시기가 앞서는 정림사 5층석탑은 분명 후대 양식인것이 분명함에도 먼저 만들어 졌고, 나무판처럼 석재를 다듬어 만든 미륵사지 석탑은 양식으로 보아서는 분명 정림사지5층 석탑보다 앞서는 양식임에도 건립 시기는 정림사지 5층석탑보다 나중에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단지 양식만을 가지고 따질 수는 없다고 봅니다. 지금 미륵사터에는 기존에 서 있던 서탑의 반대편에 서탑을 모방한 동탑이 나무를 다듬은 것 처럼 석재를 다듬어서 최근에 건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세월이 흘러 1천년이 지난 후, 단지 양식적으로 앞선다고 해서 새로 지은 석탑이 통일신라의 석가탑보다 앞선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양식만을 따진다면 새로지은 동탑이 지금보다 1400여년전에 만들어진 탑으로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처음 정림사5층 석탑을 연구한 우현 선생의 연구결과에 너무 심취하여 자칫 건립 목적을 망각하여 양식에만 치우친 판단으로 시기적으로 앞 선 탑을 발전 양식이 아니라고 하여 후대의 탑이라고 하는것은 마땅치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이론은 정확한 문헌적 근거가 없는 정림사지의 건립연대에 의문을 가질수도 있지만 정림사지 5층석탑이 사비 천도와 동시에 건립되었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를 하는 편이기에 두 탑의 건립 시기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는 않지만 양식적으로만 학계에서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이 후대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더 많이 이루어져 정확한 건립 순서를 밝혀야 하겠지만, 선학이 연구한 결과를 생각없이 받아들여 현재까지도 그 이론에 대해 다소 의문이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이론을 펴지 못하는것은 아까 말씀드린 학파의 이해 관계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은 다소 엉뚱한것 같지만 용도에 따른 건립이라는 문제도 좀 더 깊이 있게 받아들여 연구를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외에도 익산의 왕궁리에 있는 5층탑은 고려시대에 백제탑을 모방하여 만든 탑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 역시 일부에서는 백제탑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서로간의 이해 관계를 떠나 정확하게 학문적으로 판단을 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如       村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물만두 2004-06-07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한 마음에 선물 드립니다.



비로그인 2004-06-07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수수께끼가 빠지면 어때요? 정말...누구라도 이곳을 찾는 알라디너의 별명으로 그런 멋진 소설은 쓰지 못할것입니다. 사실...눈이 빠져라 "수수께끼"라는 4 글자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아 조금은 서운하고, 역시 알라딘의 찬밥(?)이구나...라며 자조하고 있었는데, *^^* 수수께끼는 끝까지 수수께끼여야 더 재미있고 좋은것 같더군요. 그리고 절대 섭섭한 마음은 없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자주 찾는 서재가 아니라면 당연히 존재도 쉽게 떠 오르지 않게 되는데 그런 경우에 해당이 된다고 봅니다. 저도 이곳의 수많은 서재를 다 돌아다니지는 못하거든요. 겨우 100여개만 알방구리 드나들듯 돌아다닐 따름이랍니다. 님의 멋진 "알라딘 이야기"....정말 많은 노력을 하신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