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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콜드 블러드 ㅣ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알고 보면 나쁜 사람 없다는 얘기가 있다.
어떤 악랄한 인간이라도, 자세히 사정을 알고보면 연민을 품을수 밖에 없는 점이 있다는 얘기겠지.
이책을 읽으면서 그런 얘기가 아주 강하게 생각나는 것은,
고작 얼마 안되는 돈때문에, 선량하고 무고한 한 가족을 몰살해버린 두 살인자 딕과 페리를
무작정 싫어할수만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딕은 비록 타인의 고통을 간접적이나마 느낄수 없고 양심의 가책 또한 느끼지 않는 사이코패스일지라도
사실 그 인간 자체는 허풍을 좀 떨어서 그렇지, 냉정하지만 쾌활하고 가식이 없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언제나 인기있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페리는 비록 환상속에서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도 제대로 잘 모르는 정신분열증 환자이지만,
언제나 쓸쓸하게 길가에 버려진 개처럼 살아와 사람을 믿지 못하고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지만
그러면서도 묘하게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래, 한사람의 인생을 진심의 감정을 가지고 파해쳐 보면,
온전히 자기 잘못때문에 악랄해진 사람은 아마도 없다.
그들의 과거에, 또는 그들의 차가운 피에 새겨진 유전자에, 또는 그들의 운명에
그러한 불행의 기운이 서려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러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그런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처럼,
딕과 페리의 모습은 어딘지 위태로워보여서 책을 읽는 내내 이 사람들을 증오해야하는지 좋아해야하는지
애정도 증오도 아닌 애매모호한 감정을 품으면서 보았다.
그들의 모든 행동(특히 범죄에 있어서는)을 모두 이해할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도 언젠가는 아이였고, 상처받았고,
그리고 모두들 그런 것처럼 죽을 운명을 타고난 보통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는 범죄이다.
그들은 무고한 사람을 네명이나 죽였다.
피맺힌 복수라던가, 아니면 정말로 사람을 죽이는 데에서 쾌락을 느낀다던가 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두 전과자는 돈이 없었고,
그래서 부잣집에 처들어가서 돈을 훔치려고 했지만 집에 현금 따위 놓지 않아서
결국 네명이나 죽이고 4,50달러 밖에 훔치지 못했다.
어릴적부터 무척 많이 봤지만 아직까지 무서운 영화 "엑소시스트"가 정말로 무서웠던 이유는,
귀신들린 아이뿐만이 아니라, 아이가 왜 귀신에 들렀는지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무슨 잘못을 한것도,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도 아닌,
잘 살고 있는 어린아이가, 부모님의 이혼으로 마음이 외로워져 버린 한 평범한 어린아이가
어느날 갑자기 아무 죄 없이 귀신에 들렀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범죄가 무서운 것은, 이 범죄에 그럴듯한 "사연"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날 잘 살고 있다가, 아무 죄 없이 그냥 살해당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몰살당한 클리터씨 가족은 그야말로 선량한 사람들이다.
홀컴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 이후에 클리터가족이 살해를 당하는 세상이라면
살해당하지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 두려움에 떤다.
아무 사연이 없기 때문에, 어쩌면 운이 나빠서 클리터가족이 이런 불행에 걸렸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범죄의 공포는 더더욱 심각하다.
부자에다가 행복하고, 게다가 착하기 까지 한 완벽한 배경이 죄가 된다면 죄가 되었을까.
이렇게 사연없고 이유없는 범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이 무섭다고들 하나보다.
작가 트루먼 카포티는 6년동안 홀컴마을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며 책을 써낼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논픽션.
하지만 완전히 논픽션인 것은 아니고, 딕과 페리의 마음속에 담긴 생각은 어느정도 작가가 창작해놓은 것이라고 봐야겠다.
따라서 이 소설 역시 진실은 아니다.
트루먼 카포티의 시선은 객관적이지 않다.
그는 두 살인자중 페리에게 유독 끌리고 있는 듯, 그를 무척 가련한 영혼으로 그리고 있다.
(그에 비해 딕은 어딘지 비열하게만 그려지고 있다.)
책을 보는 독자가 이 살인자 페리를 싫어할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작가가 진심으로 페리를 동정하고, 또는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트루먼 카포티가 이 소설을 연재할 당시에 페리를 사랑하는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었다고 한다.
책 말미에 역자가 써놓은 해설 글을 보니, 영화 "카포티"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고 한다.
"페리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집에서 자란 것 같았어.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앞문으로 그는 뒷문으로 나간 것 같았지..."
정말로 페리에게 연민을 느꼈던 것일까.
아니면 페리를 또다른 자기자신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처럼 애정에 넘치는 캐릭터를 만들수 있는 걸까.
해설 글을 보고나니, 영화 "카포티"도 무척 보고싶어졌다.
조금 지루할지도 모르겠다는 예상을 깨고, 무척 재밌고 가슴에 와닿는 소설이었다.
보고나니, 잔인함이나 분노보다도, 길가에 버려진 개를 보는 듯한 쓸쓸한 연민이 마음속에 아른거린다.
소설이 한장 한장 넘어갈수록, 계단을 한계단씩 내려가는 것 같은 우울함이 침잠하는 소설이다.
모두 알고 나서 타인으로부터 받을 것이 증오밖에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이 소설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지만,
사실 이렇게 따져서는 범죄 자체에 대한 생각이 흐려지기 때문에 냉정하게 바라보자면, 좀 위험한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그래도, 죄는 죄이니까 감정적으로만 용납해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같은 종류의 일가족 학살극중에서 르포르타쥬 논픽션 엠마뉘엘 카레르의 "적"이나
픽션이지만, 르포르타쥬이며 비슷한 소재의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와 함께 비교해서 읽어보아도 괜찮을 듯 싶다.
아, 물론, 이책이 제일 재밌긴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