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멀 크래커스
한나 틴티 지음, 권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기, 마음속의 어둡고 위험한 욕망,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으로 휘둘러지는 폭력으로 일그러진
11가지의 이야기 <애니멀 크래커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읽는 내내 무언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이 근질근질해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아내와 헤어진 남자의 이야기-표제작인 <애니멀 크래커스>가
시작될 때부터 그랬다.
남자는 코끼리 발 아래 슬그머니 자기 머리를 들이밀고, 코끼리가 머리를 땅바닥에 슬며시 굴린다.
차가운 시멘트에 뺨을 대고 뱅골보리수를 상상하고, 그제서야 슬픔이 조금 가신다.
 
왜일까. 무슨 뜻으로 이런 엔딩을 해버렸을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렇게도 이성에서 멀어져 마음속의 어두운 마음에 귀기울인 사람들로 가득찬 기이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뭔가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것은 대다수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쩌면 기이하거나 특이한 사람들-주위에 있다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은 모두 마음속의 어둠에 쩔어있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상실감을 시달리고 있다.
마음속에 구멍이 나버려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구멍난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 뭔가를 저지르는 것처럼 말이다.
떠나간 남자친구의 뱀을 해부하고 삶아 자신의 뱀을 찾으러 돌아온 남자친구에게
식사로 뱀튀김을 대접하는 여자의 이야기도 그렇고,
선대부터 이어진 폭력성향을 여지없이 드러내지만, 결국은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이 너무도 부족해
이 악순환을 또 되풀이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사람을를 무한 반복으로
양산해낼지 모르는 꼬마아이의 이야기도 그렇고,
자신이 잘못해 폭력을 저질러 아내를 떠나보냈고 멈춰진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같은 남자도 그렇고,
첫사랑을 실패로 끝내고 청부살인자의 길을 걷던 남자가
다시 만난 첫사랑 여자를 멀찌감치서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느낄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도 그렇다.
 
엽기적이거나 비상식적인 행위의 이유를 알수없어서 머리로는 이해할수는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감정적인 동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잃어버린 느낌이 계속 들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린, 정체를 알수 없는 어떤 것을 그리면서 살아가는
어쩌면 아주 비슷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도 없고 눈물도 없는 감정없이 메마르기만 한 문체덕인지,
모든 이야기가 건조하고, 섬뜩하며 한편으로는 서글프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건조한 문체의 가장 큰 장점은 종이짝같은 문장들의 나열속에서
"나는 외롭다"같은 솔직하고 감정적인 표현이 매우 단순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버리면
순간 마음이 젖는 것같은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요즘은 이렇게 글을 쓰는 작가를 그다지 만나보지 못해서인지 참신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이 책은 어렵다.
두서없이 풀어놓은 이야기처럼 느껴져서이기도 하고,
무언가 구멍나 메꿔지지 않는 듯한 정체를 알수없는 느낌을 계속 받게 되어서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낯설고 정체가 모호하다.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나보다.
 
이해력이 부족해서인지 이 병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가가
어떻게 동물세계와 연결지어 상징해놓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몇몇 이야기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확실히 파악조차 되지 않았는데도,
희한하게도 재밌게 읽었다.
개인적으로는 <애니멀 크래커스>, <홈 스위트 홈>, <그해의 히트맨>, <토크터키>
<당신 삶의 뱀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방법>, <폭력의 집>이 인상적이었는데,
마음을 설명하지 않는 무의미해보이는 행위를 보면서 마음속에서 뭔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위험하고, 쓸쓸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꿈을 꾸다가 베아트리체를 만나다
박누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림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특히 시각적인 효과에 종종 현혹되곤 하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보는 것, 사진을 보는 것, 영상물을 보는 것은
너무나도 즐거운 일이다.
학교다닐 때, 교과서를 배정받고 제일 먼저 펴드는 것은 미술책이었는데,
이유는 아주 단순히 그림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들려주는 미술이야기들은 왜 그렇게 재미없던지.
인상파이니, 야수파이니 하는 일종의 그림의 장르를 외워야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미술은 언제나 감상하기 이전에 이론적으로 접근해야하는 느낌이었고,
나는 항상 그런 점이 싫었다.
 
나는 모든 예술에 있어서 가장 처음으로 해야하는 일은 이론이나 전문적인 의견이 아니라
보고 듣고 감상하고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술에세이나 미술 평론서를 좋아한다.
내가 보았던 것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또는 내가 갸우뚱하며 무슨 그림인지 모르겠던 그림을 타인의 관점으로 훔쳐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내가 눈으로 보고 감상하는 것과는 별개로,
하나의 작품을 다른 사람이 느끼고 소화한 것을 내가 다시 소화해내는,
3단계를 걸친 조금 특별한 감상법이라고 생각한다.
 
박누리의 <꿈을 꾸다가 베아트리체를 만나다>라는 책은 박누리의 미술에세이로,
전문적인 의견없이, 좀더 편하고 즐겁게 그림을 감상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실은 귀도레니의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이 인쇄된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사게된 책인데,
이런 종류의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그다지 독특할 점도,매력적일 점도 없었다.
다른 책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훨씬 일상적이고 개인적이라는 점인데,
일상적인 이야기들과 섞여져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 뿐, 그다지 독특한 감상법을 보여주지도 못했고,
소개되어있듯 그다지 감각적인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해서 실망하려는 찰나에,
반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를 소개하며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고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마추어 그림 애호가로서 고흐의 매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행복하지 않아.하지만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이다.(p202)
 
 
아, 이 책을 읽는 이유는 이 문장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고흐의 그림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음울하다거나 우울한 것과는 조금 다른,
눅룩하고 어눌하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느낌같은 것이 저 문장에서 너무나 잘 표현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볼때, 조금더 성의를 들여서 찬찬히 뜯어볼 때, 문득 스치고 지나갈지 모르는 생각들-
아주 특별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흘려버릴 정도로 하찮지도 않은 감상들을 적어놓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미술서로서 아주 훌륭하다고 말할수는 없다.
미술+에세이 이지만, 가끔은 이런 얘기까지는 하지 않아도 될텐데....싶을 정도로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개인사에 치중되어있어 미술보다는 에세이쪽에 비중을 더 두게될 때도 있다.
그러니까 이 책에 있는 것은 그림속의 "베아트리체"보다 "박누리" 본인이 있을 때가 더 많다고나 할까.
어쩌면 이 책의 근본이 박누리의 싸이월드 페이퍼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속에도 있지만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것들을 남이 대신 정확히 표현해줄 때같은
소소한 공감을 느낄수 있는 책이지만, 조금만 더 미술이야기를 해주었더라면 좋았을 것같다.
 
p.s 저자 본인의 취향을 솔직하게 드러낸 점은 좋은데,
별로 좋아하지 않는 화가의 이야기는 굳이 쓰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특히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클림트의 이야기를 쓴 챕터는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이 정도 인기있는 화가 얘기는 안하고 넘어갈수 없지."같은 마음으로 쓴 것처럼,
감상이 매우 뻔하고 성의없어져 버린다.
 


빈센트 반고흐
 밤의 테라스 Cafeterras aan het Place du Foru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간혹 이런 사람을 볼때가 있다.
저녁에 일어난 인상적인 사건 하나를 말하기 위해서, 그날 자신이 왜 기분이 좋지 않았는가부터 설명하려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그 사건이 일어난 순간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한후에
말하고자한 한가지 사건을 그제서야 얘기하는 사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거추장스러운 표현력을 싫어하는 나로써는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무척 지루하고 피곤한 일이다.
이 책이 딱 그런 느낌의 책이었다.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필요한 것 불필요한 것 온갖 것들을 쭈욱 늘어놓고,
확실한 표현으로 상대방이 현상을 붙잡도록 하기 보다는 상대방이 그 늘어놓은 것중 하나를 골라야하는
불편함을 준다.
책의 표현대로 하자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수 없게 "산만하다".

지나치게 노숙해서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 주인공 오스카(오스카가 적어도 10대초반쯤은 되겠지 생각하면서 봤는데, 겨우 여덟살이다.)를 비롯해 모든 주인공에게 연민의 감정은 커녕 정도 가지 않았고,
엄청난 타이포그라피의 홍수와 중간중간 삽입된 사진마저 군더더기처럼 느껴졌으니
내가 책을 "엄청나게" 대충 읽은게 아닌가 모르겠다.
가끔 책을 읽을 때 이런 이런 장면은 눈에 보여진다면 좋겠다, 또는 이런 이런 장면의 냄새를 맡을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때가 있는데
이 책은 지나치게 디테일을 강조한 나머지, 상상력의 빛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 책은 꼭, 말은 많으나, 재밌고 효과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같은 느낌이 들었다.
군더더기, 지나치게 친절한 그래서 불친절해지는 감정의 설명과 숨기려 애를 쓸 뿐인 자기연민들,
중요한 사실 하나를 얘기하기까지가 비효율적이었던 책.
사실 읽는 내내 다 읽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지만, 결국 겨우겨우 다 읽고 말았다.
소설속의 엄청난 소음속에서 믿을수 없이 지루하게-.

p.s 특히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존재와 무 놀이(?)는 전위예술을 보는것처럼 정말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생각과느낌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잊을수 없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잊혀지지가 않아서 괴로워하면서도, 스스로 잊지 말아야한다고 은연중에 각인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잊을수 없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겨우 잊혀졌다고 생각하게 되어서야 알게된다.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 얼굴이 기억나지 않고, 이름이 가물가물하고,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기억 자체라는 것을 알게되고,
잊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잊을수가 없었던 거라고.
어떤 사람들은 기억을 하나씩 새로 써 내려가며 하루하루, 한 사람 한사람에 충실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잊혀지지 않음을 괴로워하면서도 사실은 늘 과거에 충실하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닮은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과 반대인 사람들을 좋아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닮은 사람들을 좋아했다.
서로 거울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
상처가 너무나 닮아서 그 사람의 외로움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내가 안아주고 나를 안아줄수 있는 사람.
나는 언제나 그런 사람을 좋아했고, 언제나 함께 있고 싶었고,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사실은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을.
내가 바라본 것은 바라보고자 했던 것임을.
나는 바보였고, 집착했고, 다를 바 없이 상대방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정도의
구차하고 유치한 사람밖에 되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근본적으로 아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그래서 내가 갈기 갈기 찢겨나가는 것같은 아픔을 느끼고,
그제서야 그것은 사랑과 아주 닮은 다른 어떤 것이었음을 시인할수 없게 되어버릴 때,
나는 집착했고 착각했다는 것을 알게될 때,
사실 이 세상에 나와 온전히 닮은 사람은 없고, 내가 느끼는 것을 상대방도 똑같이 느낄리도 없으며,
사람의 다름에 지치고 마음이 아파질 때,
세상이 변하듯 사람도 변하고, 결국은 나도 변해가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피를 나누고 영원한 우정을 약속해도 그 굳은 약속도 슬프게도 아주 사소한 계기로 깨어지고 말고,
"마법의 콩"을 나눌 관계 따위란 세상에 있을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될때,
이제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고, 나의 의지가 아니라 나의 욕심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몸을 맡기는 법을 알게 되었을때,
그 깨달음의 아픔을 우리는 "성장통"이라고 부른다.

에이단 체임버스의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는,
열정적이고, 또 순수해서 마음 한켠이 아려오는 청춘의 성장통에 대한 이야기이다.
죽음에 관심이 많은 소년이 어딘지 엉뚱하고 건강한 다른 소년을 만나 첫눈에 그를 알아보고,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약속하고, 짧은 7주간 수많은 시,분,초, 낮과 밤을 함께 보내고,
키스를 하다가, 얘기하다가 웃다가 싸우다가,
그리고 어느날 한 소년이 죽어버리는 이야기.

누군가를 잃어버린다는 것. 한 시절을 함께 했던 아주 아주 중요한 사람을 잃어버린다는 것.
책속에서 핼이 배리를 잃었듯이 반드시 죽음의 형태로 사라지지는 않아도,
언제나 곁에 있는 또다른 나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쓸쓸하고 그리운 감정이던지
나는 그 성장통으로 한참을 많이 아팠었다.
소설속의 핼처럼 큰소리로 울거나, 죽어갈듯이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그건 내 속에서 나를 병들게 해가고 있는 것 같았고, 기억해내면 낼수록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잊으려고 노력하면서 잊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바보같은 짓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런 감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느꼈고,
기억해내려고 해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고, 결국 내가 잊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기억 그 자체였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고, 모두 인정하고 나자 내 안에서 무언가 쑥 빠져나간 것 같았고,
그리고 이제 나는 어른이 되었구나-하고 알게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사랑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더욱 그렇다.
만약 그때 좋아했던 사람과 아주 흡사한 사람이 다시 나타나 내가 다시 사랑에 빠진다고 해도,
그때처럼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미친듯이 아파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랑을 하기에 나는 이미 생각이 너무 많아졌고, 이기적이게 되어버렸으니.
그리고 그때 나는 한창 청춘이었으니까-
아마 이후의 사랑은 다른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아픔을 알고 정도껏 몸사리는 조금은 영리한 사랑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끔은 그 옛날의 목숨도 내놓을 것 같았던 철없던 사랑을 기억하며 그리워하겠지.
그때 그 사람 보다도, 바보같이 순진해서 어쩔줄 몰랐던 나 자신을 말이다.

예민한 사람의 바보같은 청춘이야기.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늘 그리워하는 바보같고, 철없고, 쓸쓸한 사랑과 성장의 이야기.
핼의 이야기이며, 또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이며, 내 이야기이기도 했던 이야기.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에이단 체임버스의 책이라고 하는데, 시리즈로 출판할 생각인가보다.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가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읽어볼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스틱 리버 - 상 밀리언셀러 클럽 11
데니스 루헤인 지음, 최필원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우울하다"는 상태와 "우울증"은 다른 말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우울할 때의 자신의 상태를 "우울증"으로 규정짓는다.
왜일까. 우울증이란 것은 보통 가벼운 정신질환이나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감정변화가 아닌데 말이다.
우울증은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병이고, 흔히 생각하는 멜랑꼴리한 감정과는 엄연히 다른데다가
합병증도 유발하며, 치료받지 않으면 큰일 나는 아주 큰 병인데 말이다.
어쩌면 모두들 자신의 상태를 조금 더 오버함으로써,
거기서 나타나는 드라마틱한 감정변화를 원하는 것이 아닐지.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을 읽을 때
늘 '우울증'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더 우울한 소설도 많고, 더 심각한 소설도 많은데 왜 일까.
단지 작품 전체적인 분위기가 침울하게 가라앉아있다는 것만으로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텐데...
나는 "우울하다"와 "우울증"을 구분하는 기준은 "죄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잘못 태어난 기분. 괜히 살아있는 기분. 내 존재자체가 죄가 되는 기분-
또는 모든 것이 나의 잘못으로 인해 틀어졌다고 느끼는 자책감같은 것-
이런 기분이 들어서야 "우울하다"는 "우울증"으로 불뤼우는 것이라고-나는 생각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나로써는, 보통의 우울한 기분을 느낄 때와
견딜수없이 극도로 우울해져 살아있는 의미조차 희미할때의 상태를 비교해 볼 때 보통 그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이 "우울증"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언제나 이 작가의 주인공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죄의식"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희미한 사과냄새로 기억은 떠오른다.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친구들, 착하고 배경좋은 숀, 거칠고 정의감 넘치는 지미,
그리고 가진 것이 없어서 나약한 데이브-
함께 논다기 보다 늘 "따라다니게" 되어버리는 나약한 친구 데이브가 두 남자에게 유괴가 되고,
몇일후 데이브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지만, 과연 그것이 다일까.
어찌된 일인지, 매일같이 붙어다니던 세녀석들은 데이브가 돌아온 날 이후로 서로 어색해지고 만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게된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그들의 내면에 아무일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로부터 25년 후, 일찍 결혼한 지미의 딸이 시체가 되어 나타나고,
어린 시절 두 남자에게 납치당했던 데이브의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어딘지 불안해보이는 정신세계를 가진 데이브.
사실은 지미의 딸과는 먼 친척관계로 아주 좋은 사이였음에도 데이브의 행동에는 미심쩍은 데가 있고,
결국 모두가 의심하기 시작한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짐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 그러나 자살해버리기에는 삶의 집착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버리는 데이브의 죄의식과 우울.
그때 데이브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에 가끔씩 마음이 아파져버리는 착한 숀.
그리고 결국은 자신이 죄를 만들어버리는 지미.
<미스틱 리버>속의 세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이 죄책감들은 굴레를 돌듯이 한명 한명에게 옮겨 붙는다.
책속의 말처럼, "그건 한번 몸속으로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종류의 데미지를 가진 심각한 정신의 상처인 것이다.
다들 괜찮은 듯이 살고 있어도, 결국은 모두가 인간이라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일그러지고, 깨어진다.
 
 
데니스 루헤인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어쩌면 마음속에 담아두고 평생을 시달리면서 살지 모르는 마음의 상처들과 
그것이 유발하는 아픈 감정을 비교적 효과적인 방식으로 잘 표현해낸다는 데 있다.
만약에 그의 소설에 충격적인 범인이라던지, 반전이라든지 하는 자극적인 부분이 없었다면,
데니스 루헤인이 그저그런 소설가가 될수 있었을까.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말로 꺼내어 보면 아무것도 안될지도 모르는 감정을 독자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것은 아무나 할수 있는 글쓰기는 아니다.
불쌍해도 동정하고 싶지 않은, 나약하면서도 동시에 이기적인, 착해보여도 결국은 자기밖에 모르는
누구나에게나 존재하는 빛과 어둠의 이중성을 현실적으로 표현하는 점 역시,
데니스 루헤인의 캐릭터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간혹, 상상할수 있는 가장 최악의 결론을 내려버리는 소설들이 있는데 이 소설이 그런 부류에 속하겠다.
사실 몇년전 영화도 보았고, 책도 보아서 새삼스러울 것 없는데도,
소설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마음속에 스미는 어둠을 어쩔수가 없더라.
 
 
p.s 데니스 루헤인은 제목을 정말 잘짓는다.
소설 자체의 제목 뿐만이 아니라, 챕터의 제목마저도 마음에 잔향이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