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생각과느낌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잊을수 없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잊혀지지가 않아서 괴로워하면서도, 스스로 잊지 말아야한다고 은연중에 각인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잊을수 없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겨우 잊혀졌다고 생각하게 되어서야 알게된다.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 얼굴이 기억나지 않고, 이름이 가물가물하고,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기억 자체라는 것을 알게되고,
잊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잊을수가 없었던 거라고.
어떤 사람들은 기억을 하나씩 새로 써 내려가며 하루하루, 한 사람 한사람에 충실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잊혀지지 않음을 괴로워하면서도 사실은 늘 과거에 충실하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닮은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과 반대인 사람들을 좋아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닮은 사람들을 좋아했다.
서로 거울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
상처가 너무나 닮아서 그 사람의 외로움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내가 안아주고 나를 안아줄수 있는 사람.
나는 언제나 그런 사람을 좋아했고, 언제나 함께 있고 싶었고,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사실은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을.
내가 바라본 것은 바라보고자 했던 것임을.
나는 바보였고, 집착했고, 다를 바 없이 상대방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정도의
구차하고 유치한 사람밖에 되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근본적으로 아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그래서 내가 갈기 갈기 찢겨나가는 것같은 아픔을 느끼고,
그제서야 그것은 사랑과 아주 닮은 다른 어떤 것이었음을 시인할수 없게 되어버릴 때,
나는 집착했고 착각했다는 것을 알게될 때,
사실 이 세상에 나와 온전히 닮은 사람은 없고, 내가 느끼는 것을 상대방도 똑같이 느낄리도 없으며,
사람의 다름에 지치고 마음이 아파질 때,
세상이 변하듯 사람도 변하고, 결국은 나도 변해가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피를 나누고 영원한 우정을 약속해도 그 굳은 약속도 슬프게도 아주 사소한 계기로 깨어지고 말고,
"마법의 콩"을 나눌 관계 따위란 세상에 있을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될때,
이제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고, 나의 의지가 아니라 나의 욕심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몸을 맡기는 법을 알게 되었을때,
그 깨달음의 아픔을 우리는 "성장통"이라고 부른다.

에이단 체임버스의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는,
열정적이고, 또 순수해서 마음 한켠이 아려오는 청춘의 성장통에 대한 이야기이다.
죽음에 관심이 많은 소년이 어딘지 엉뚱하고 건강한 다른 소년을 만나 첫눈에 그를 알아보고,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약속하고, 짧은 7주간 수많은 시,분,초, 낮과 밤을 함께 보내고,
키스를 하다가, 얘기하다가 웃다가 싸우다가,
그리고 어느날 한 소년이 죽어버리는 이야기.

누군가를 잃어버린다는 것. 한 시절을 함께 했던 아주 아주 중요한 사람을 잃어버린다는 것.
책속에서 핼이 배리를 잃었듯이 반드시 죽음의 형태로 사라지지는 않아도,
언제나 곁에 있는 또다른 나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쓸쓸하고 그리운 감정이던지
나는 그 성장통으로 한참을 많이 아팠었다.
소설속의 핼처럼 큰소리로 울거나, 죽어갈듯이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그건 내 속에서 나를 병들게 해가고 있는 것 같았고, 기억해내면 낼수록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잊으려고 노력하면서 잊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바보같은 짓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런 감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느꼈고,
기억해내려고 해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고, 결국 내가 잊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기억 그 자체였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고, 모두 인정하고 나자 내 안에서 무언가 쑥 빠져나간 것 같았고,
그리고 이제 나는 어른이 되었구나-하고 알게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사랑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더욱 그렇다.
만약 그때 좋아했던 사람과 아주 흡사한 사람이 다시 나타나 내가 다시 사랑에 빠진다고 해도,
그때처럼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미친듯이 아파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랑을 하기에 나는 이미 생각이 너무 많아졌고, 이기적이게 되어버렸으니.
그리고 그때 나는 한창 청춘이었으니까-
아마 이후의 사랑은 다른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아픔을 알고 정도껏 몸사리는 조금은 영리한 사랑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끔은 그 옛날의 목숨도 내놓을 것 같았던 철없던 사랑을 기억하며 그리워하겠지.
그때 그 사람 보다도, 바보같이 순진해서 어쩔줄 몰랐던 나 자신을 말이다.

예민한 사람의 바보같은 청춘이야기.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늘 그리워하는 바보같고, 철없고, 쓸쓸한 사랑과 성장의 이야기.
핼의 이야기이며, 또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이며, 내 이야기이기도 했던 이야기.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에이단 체임버스의 책이라고 하는데, 시리즈로 출판할 생각인가보다.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가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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