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등 이펙트 - 지금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
로빈 스턴 지음, 신준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심리상담가인 작가는 샤를르 보와이에,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 <가스등>을 빌어
이상적인 배우자(혹은 부모, 친구)가 무의식적으로 한 사람에게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신의 관점에서보다 타인의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보게 되는 현상을 "가스등 이펙트"라 명명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지만, 게중에는 심각할 정도로(영화에서처럼 자의식이 사라질 정도로) 타인에게 조종당하는 사례도 있기 마련이다.
작가는 이것은 '가해자'와 '피해자'로 규정하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손발이 쿵쩍 맞아야 이 가스등 이펙트가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가스등 이펙트가 무엇인지 책속에서처럼 쉽게 예를 들어보자.
어떤 여자에게 새로 사귄 남자친구가 있다. 살짝 속이 좁고 질투심이 강하기 때문에,
거리에서 마주친 남자와 몇마디 건내는 여자를 보고 남자친구는 여자의 행동이 경박하다고 비난한다. 처음에 화를 내던 여자는 남자친구와의 싸움 끝에 진지하게 자신의 행동이 경박한 것이었는지 자문하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의 경박함 때문에 남자친구에게 마음고생을 시킨게 아닐지 걱정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여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남자친구가 자신을 비난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문제의 근원은 자기자신에게 있으며, 자기자신의 문제때문에 남자친구를 불쾌하게 했다는 사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점점 여자는 남자친구가 화내지 않는 행동을 하려 고심하게 된다.
주체가 자기가 아니라 타인이 되는 현상, 어떤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거나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가 지나치게 타인지향성이 되어버려서 자기자신 자체를 잃는 현상을 작가는 "가스등 이펙트"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추스릴수 없다는 것은 몹시 무서운 일이다.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타인이 되게 된다는 것, 나의 감정이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고,
내 모든 행동의 근원이 타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심리에서 나온다는 것 또한 몹시 무서운 일이다.
작가는 가스등 이펙트가 이루어지는 3단계와 가해자의 3가지 분류(선량한 가해자, 낭만적인 가해자, 폭력적인 가해자)로 나누어 설명하고, 차츰 자신을 잃어가는 사람들을 소개해가며 그들이 잊지 말아야할 것, 타인에게 조종당하는 사태를 진정시키고 관계를 더 낫게 만들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론부터 말해,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돈이 아깝다'였다.
가스등 이펙트라는 새로운 개념을 들고나온 것은 좋다 이말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개념을 만들고, 책을 내기 전에 모든 이야기에 있어 제 3자는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들어봐야 그나마 정확한 의견을 낼수 있다는 것을 생각은 해본 것일까.
책속의 모든 사례는 작가가 '피해자'라고 명명한 한쪽방향에서만 설명되어, 선량하고 순진무구한 '피해자'를 가학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듯 매도해버린다.
마치 제일 친한 친구에게 내가 어디선가 받았던 부당한 대우를 토로하고, 친구가 무조건적으로 내 편에 서서 내 입장을 옹호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물론 인간관계에서 그런 것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 맺고 끊는 것이 지나치게 정확한 인간관계는 참 매정하지 않은가. 또 그런 편들어주기가 상당히 위로되는 상황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심리분석책에서 그럴 필요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책속에 등장하는 자기 의견만 고수하며 학대에 가깝도록 타인을 억누르기를 일삼는 폭력적인 가해자가 분명 존재하긴 하고 그들에게는 더욱 강경하게 대하거나 회피해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외의 낭만적인 가해자, 선량한 가해자같은 경우에는 사람일이니 만큼 여러가지 변수가 있다는 것과 서로의 입장 차이가 있다는 것은 왜 고려해보지 않았는가 모르겠다.
애초에 (그것이 범죄인 것은 아닌데)'가해자'이니 '피해자'이니 하는 분류부터가 사실 불쾌하기 짝이 없으며,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친밀한 관계에 있어서 나쁜 일이 생겼을 경우에는 누구나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또, 사람들 중에서는 다소 자기의지가 나약한 사람이 있어서 타인에게 끌려다니는 것을 오히려 편히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 역시 불쌍한 '피해자'로 만들어버리니 보는 내내 작가의 비약이 얼마나 거슬리던지.
좀 더 쉽고 일상적인 사례를 찾아서 개념을 쉽게 이해시키려는 것까지는 좋은데, 인간관계에 있어 존재하는 수많은 변수를 줄일수 있을 만큼 일반적으로 사용할수 있는 개념도 아닌데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비슷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 같아서 상당히 지루하기도 했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아존재감을 찾는 것.
당연히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지만, 말은 누가 못하나. 그런 생각은 누구들 안해보나. 말은 쉽다. 행동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지.
책에서 말한대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에게 선을 긋는 행동을 하다보면 생기는 단점은 왜 없을까. 누구나 타인에게 영향을 받고, 누구나 타인에게 영향을 주고 싶어한다.
작가가 분류한대로 따져보면, 누구나 피해자이며 가해자가 되는 것이 인간관계란 말이다.
자기 의견만 옳다고 고수하는 '가해자'집단을 상대하기 위해서 "누가 뭐래도 내게는 내 의견은 옳으니 난 내 입장을 고수할거야"라고 말하면서, 그 '피해자'였던 사람이 '가해자'로 변하기도 한다는 것은 왜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또, 자신의 행동이 옳든 그르든 간에, 자신의 의견이기 때문에 무조건 믿고 의견 차이에 선을 그어놓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 일일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수도 하고, 잘못된 생각을 할수도 있다. 가끔씩은 내 의견이, 내 생각이 삐뚤어지고, 타인에게 폐를 입히는 것이 아닐지 한번쯤은 생각해보고 행동하는 것을 "배려"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지. 그런 배려마저 '타인에게 조종되는' 마음이라니.
참, 인간관계 각박하다.

자, 이런 상황은 어떨지 책에서처럼 예시로 설명해보며 글을 마치겠다.
예시로 들 상황은 책속에서 '낭만적인 가해자'와 '피해자'라 명명한 경우의 이야기이다.
과연 누가 완전히 피해자이고 가해자란 말인가. 둘중의 누가 자기자신만 아는 이기주의자란 말인가. 누구나 자신의 감정이 더 중요하게 앞서는 법이고, 누구나 가해자이며 피해자가 되는 것이
인간관계의 현실이 아닐까.

여자(피해자): 어젯밤에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봤더니 남자친구가 집앞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겠어요. 그는 매력적으로 웃으면서 내게 꽃다발을 내밀었고, 차 트렁크를 열었어요.
차 트렁크에서 수백개의 풍선이 날아올랐고, 그가 준비한 선물상자를 내밀었어요.
상자를 열어보니 반지가 들어있지 않겠어요!! 그것도 다이아몬드 였어요~
그는 분명 낭만적인 사람임이 분명해요. 나를 위해 이런 이벤트를 벌이다니...
하지만 기분이 조금도 좋지 않았어요. 기대에 가득차서 웃는 그를 보면서 나는 사실 불편한 마음만 들었어요. 나는 이렇게 요란한 이벤트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고, 그런 것은 부담스러울 뿐이며, 사실 동네 창피하다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사람은 그렇지 않았어요. 자신의 행동이 도취된 듯 내 생각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것 같았죠. 꼭 자기자신이 만족하려고 이런 이벤트를 벌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남자(가해자): 여자친구 몰래 이 이벤트를 한달을 준비했어요.
꼭 좋아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언젠가 한번쯤 이런 낭만적인 이벤트를 벌여보고 싶기도 했고,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얼굴을 상상하면 이 이벤트를 구상하면서 보냈던 시간, 돈, 노력 아무것도 아깝지 않았어요.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그녀는 좋아하는 얼굴이 아니더라고요. 불쾌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제 생각이 짧았던 건 아닌가, 내가 너무 거창하게 일을 벌였나 생각해보게 되었지요.
그보다 무척 실망스러웠어요. 그래도 나 나름대로는 애쓴다고 한건데 조금도 좋아하지 않으니 많이 민망하기도 했고.... 제가 원하는 건 그저 그녀의 웃는 얼굴이었을 뿐인데 조금도 보답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니 서운하기도 했고요.
앞으로는 이러지 말아야 겠지요? 내 이런 애정표현이 그녀를 불편하게 할 뿐이니...
어떻게 해야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표현을 그녀가 불쾌해하지 않을 방법으로 할수 있을지 정말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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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3-24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놀랐어요. 근래 이렇게 안좋게 평하시는걸 못본지라^^
사실 저도 약간 이해되지 않는 점이 많았지만, 최대한 악평을 자제했어요.
초반부에 공감가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리고 공짜로 책을 받았거든요ㅋㅋㅋ)

(시즈님 평은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저도 약간 의아했던...)

Apple 2008-03-24 21:04   좋아요 0 | URL
헷...^^;; 이 책을 보면서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이 있더라고요..음..
 
악의 심연 뫼비우스 서재
막심 샤탕 지음, 이혜정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작가 이름이 재밌었기 때문에(사탕과 사탄을 동시에 연상케하는 아이러니한 느낌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악의 심연>을 최근에 들려오는 끔찍하기 그지 없는 살인사건 소식을 매일같이 접하면서 보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요 몇일간은 악의 심연을 허우적거리다가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정신적으로 무척 피곤하다.
말 그대로, 악의 심연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듯이, 이 책은 무척 잔인하다. 그리고 현실적이다.
작가후기에서 작가가 말하듯, 책에 묘사된 범죄들이 실현가능하고, 실제로도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더더욱 무섭고 잔혹하고 씁쓸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책의 결말이 허무맹랑하다거나, 말도 안되는 뜬 구름잡는 소리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책이 조금만 더 미숙하고 허무맹랑했더라면,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란, 특히 인간의 광기란, 광기의 심연이란,
이렇듯 뜬 구름잡 듯, 올바른 이성과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날 갑자기 남편이 실종되고 1년을 외로움과 절망에서 살아오던 여형사 애너벨은
한밤중의 전화를 받고 사건 현장으로 뛰어나오게 된다.
눈내리는 어느 추운 겨울밤, 알몸으로 공원을 뛰어다니는 여자, 머리가죽이 일부 벗겨진 채 잔혹한 고문을 당한듯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어디선가, 또는 무엇으론가 도망치는 여자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발견된 여자의 몸에 세겨진 알수없는 숫자 문신을 근거로, 애너벨은 범인을 쫓던 중 범인을 사살하게 된다.
그리고 범인의 집에서 발견된 지옥도,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살육의 현장에서 그들은 알게된다. 고문을 당한 채 공포과 무기력으로 고통받는 수십명의 사진을.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님을, 이것이 연쇄살인이며, 배후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이비종파가 관련되어 있음을....

이 분야에서는 최고로 인정받는다는 막심 샤탕의 두번째 소설은 무척 강렬하게도 이렇게 시작된다. 단지 두번째 소설에서 독자를 이렇듯 완벽히 몰입시킬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작가의 나이가 아직은 어리다는 점 또한 놀랍다. (76년생, 우리나이로는 33살이다.)
또 이렇듯 아직 젊은 작가가 단순히 잔혹한 묘사로 이루어진 흥미위주의 연쇄살인극이 아닌
철학과 비판을 담고 있는 꽤 묵직한 소설을 써냈다는 것 또한 놀랍다.
책을 읽는 내내, 여기까지만 읽고 자야지-하는 순간을 얼마나 많이 놓쳤던가.
무서울 정도의 속도감과 몰입도, 작품전체에 흐르는 끈적하고 기분나쁜 악의 심연.
오랜만에 만나는 롤러코스터같은 작품으로, 잠드는 순간마저 빼앗가버린 훌륭한 범죄스릴러 작이었지만, 소 뒷걸음치다가 쥐잡은 격으로 우연이 계속되어 실마리는 잡는 점은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단점을 상쇄할수 있을 정도로 작품 자체가 매력적이기 때문에 그 점은 넘어가도록 하자.
그런 단점이 있음에도, 나는 이 책이 세계 최고의 범죄스릴러 소설 중 하나라고 느꼈으니.
 
자칫 생각을 삐뚤게 먹기 시작하면 인간의 악은 얼마나 깊은 심연속으로 치닫을수 있을까.
그리고 그 악이 넘쳐나는 심연속에, 얼마나 잔혹한 지옥도를 만들어 버릴까.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악인지...
소설속의 범죄자들이 저지른 악만이 악인지, 아니면 선의의 목적으로라는 변명을 달고 많은 현대인들이 저지르는 행동 역시 악인지, 인간이 정해놓은 선과 악의 기준이라는 것 자체가 모호하고, 또 거기에는 수많은 변수와 수많은 변명이 존재할수 있다는 것은 참 혼란스러운 일이다.
최근에 벌어진 흉흉한 살인사건들을 바라보면서, 이 책에 묘사된 지옥같은 인간의 악의 심연이란 것이 단지 소설속에서 벌어지는 범죄 환타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매우 무섭다.
'밤이 되길 기다렸다, 어두워지면 스탠드를 켜고 이 책을 읽으라'
막심 샤탕은 책 서두부분에서 이렇게 말했지만, 책을 다 읽고, "아쉽게도 책속의 범죄들과 수법들은 사실에서 기인해있다."는 말이 더더욱 무서웠던 것은 나뿐만일까.
천사에서 악마까지, 어떤 모습으로든 변할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기묘한 동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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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3-22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시즈님도 저렇게 생각하셨군요
[소 뒷걸음치다가 쥐잡은 격으로 우연이 계속되어 실마리는 잡는 점은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이 부분이요^^ 저도 그랬는데ㅋㅋㅋ 우연이 좀 심하죠ㅋㅋㅋ
그래도, 좋은 작품이에요^^ 샤탕도 멋지고ㅋㅋ

Apple 2008-03-23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정말 재밌더라고요.^^ 우연으로 밝혀지는 실마리가 너무 많기는 하지만...흐흐..
 
이와 손톱
빌 밸린저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초판 한정 결말 봉인본!!!!
추리소설에 로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혹할만한 낚시질 아닌가?
이 소설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이런 방식-결말부분을 검은 종이로 덧대어 뜯어야 볼수 있는 봉인방식으로 출판되었다고 하고, 우리나라 번역본을 출간한 북스피어에서는 한정본으로 그런 방식을 빌려왔다. 나 역시 혹하지 않을수 없기에, 부랴부랴 주문을 했는데, 일단은 특별한 옵션에서부터 마음에 들었달까.
(하지만, 막상 봉인해제 하고나니 이거 상당히 지저분해진다.
책은 깔끔히 보전하고는 싶은데, 그렇다고 세세히 신경써써 뜯을 만한 섬세한 정신구조를 가지지 않은 나같은 독자를 위해 절취선을 좀 만들어주는게 그렇게 힘들었을까?????????????????????)

어쨌거나 당시에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는 "이와 손톱"을 보게 되었는데,
지금으로 오면 이 얘기가 그렇게 충격적일 건 없고, 게다가 어떤 (꽤 중요한) 부분들에서는 독자를 공감하게 하거나 이해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상당히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나온지 꽤 오래 된 소설이다보니 어느 정도 촌스러움에 대한 애정으로 극복했다.
"이와 손톱" Tooth and nail-영어에서는 이빨로 물어뜯고 손톱으로 긁어서라도 필사적으로-하는 느낌으로 쓰여지는 단어를 말그대로 차용해 와 제목으로 넣었고, 이야기는 어느 지하실에서 발견된 이와 손가락으로 시작된다.

마술사인 루 마운틴은 어느 날 핸드백을 도둑맞아 택시비가 없어 쩔쩔매고 있는 여자를 만난다.
갓 상경한 듯한 이 여자를 도와주다보니, 어느새 여자를 더 돕고 있고, 어느새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에 빠져 결혼한 두 남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숨기는 비밀스러운 아내는 어느날 협박전화를 받게 되고, 자신의 비밀-유일한 혈육인 삼촌과 순진한 삼촌을 이용해먹은 위조지폐사기꾼에 대해-을 남편에게 털어놓게 된다.
불안에 떠는 아내는 어느날 루가 외출하던 날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옷장안에 숨겨두었던 아내의 비밀의 물건이 사라진 것을 알게된 루는 아내가 살해당했다고 확신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치열한 공방전과 더불어 진행이 되고,
두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합쳐지면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이 된다.
 
지금에서는 그다지 특별하거나 충격적인 반전은 아니지만, 이 소설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옛날 추리소설에서만 느낄수 있는 흑백영화같은 이미지같은 느낌이 간직되어있어서 일것이다.
어딘지 아련하고, 낭만적인, 희뿌연 안개속의 이야기같은 그리운 분위기.
호텔을 전전하는 생활, 택시, 친한 사람은 별로 없는 쓸쓸한 대도시에서의 생활.
어디서 나타난지 모르겠는 비밀스러운 여자와의 조우와 사랑, 그리고 이별.
이런 것들은 언제 읽어도 왜 이리 쓸쓸하고 아련하던지....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윌리엄 아이리쉬 소설을 생각해버렸는데, <환상의 여인>과 비견된다는 광고문구 때문은 아니었고, 실제로 윌리엄 아이리쉬의 소설에서 풍겨져 나오는 아련하고 우울한 낭만이 이 소설에서도 느껴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만족스럽다.

추리소설을 많이 읽다보니 어느새 나 자신의 수준이 꽤 영악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내가 바라는 것은 완벽한 플롯이나, 대단히 충격적인 반전이라기보다는
마음에 드는 분위기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온 소설이라면 상당히 미숙할 법한 이야기인데도 꽤 마음에 들었던 것을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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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역사 뫼비우스 서재
케이트 앳킨슨 지음, 임정희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사라진 딸들은 어디로 갔을까. 모두, 사랑받던 아이들인데...
딸만 넷인 집, 가장 사랑받던 세살짜리 막내 꼬맹이 올리비아는 어느 더운 여름밤,
언니 아멜리아와 마당에 텐트를 쳐놓고 자다가 다음날 아침 실종이 된다.
홀아버지와 함께 사는 로라는 변호사인 아버지 테오가 금이야 옥이야 키운 둘째딸인데, 대학입학을 앞두고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별안간 나타난 괴한에 의해 살해 당한다.
어린 나이에 아무 것도 모른 채 시집왔던 미쉘은 생활고와 산후우울증으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다가 아기를 깨우며 부산하게 나타난 남편을 도끼로 찍어 살해해버리고, 자신의 동생에게 딸 탄야를 맡긴다.
사라진 여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세상이 이렇게 넓고 혼란스러운데, 가장 사랑받는 딸이었고, 가련한 어린 아이였던 여자들은, 또는 그녀들의 영혼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거나 누군가의 마음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일까.

케이트 앳킨슨의 <살인의 역사>는 시대도, 배경도 다른 세가지 사건을 역시 자신도 누이를 잃어본 경험이 있으며 여덟살짜리 철부지 딸을 가진 잭슨 브로디라는 탐정을 매개로 묶어놓고 있다.
오래전 세살짜리 동생을 잃어버린 아멜리아와 줄리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물건을 정리하던 중, 올리비아의 블루 마우스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아 올리비아 사건을 추적하고자 잭슨 브로디를 찾아오고, 딸 로라를 잃은 테오는 범인을 찾다 찾다 지쳐, 잭슨 브로디에게 의뢰를 하게 되고,
남편을 도끼로 살해한 미쉘의 동생 셜리는 잃어버린 탄야를 찾기 위해 잭슨 브로디를 찾아온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아이들, 행방을 알수도 없고, 살아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알수 없다.
그들의 시간은 그들이 아이들을 잃어버린 순간 멈추고, 상실감으로, 또는 상실감으로 인한 집착으로 겨우 겨우 살아왔던 사람들. 그들은 잃어버린 아이들을 찾을수 있을까.
잃어버린 자신들의 시간이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두툼한 분량,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 덕에 쉽게 읽히지는 않는 소설이지만,
또 스티븐 킹의 "근 10년간 발표된 미스테리중 최고의 작품이다"라는 격찬만큼은 아니지만,
이 소설은 다른 측면에서 나를 매혹시키는 작품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를, 무언가를 갈구하며 찾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이 범인과 사건의 정황을 찾는다기 보다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아주 소중한 사람으로 인해, 자신조차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테오는 딸을 잃어버리고, 직업도, 정상적인 생활도 포기한 채 범인 색출에만 집착하고 있고,
아멜리아는 동생을 잃어버리고, 뚱뚱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몇십년을 살아온 자신을, 그리고 이런 세상을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며 채울수 없는 욕구불만에 시달린다.
한 때, 누군가였던 사람들.
누군가의 아버지 였고, 어머니였고, 언니였던 사람들.
그리고 이제 그 타이틀이 사라지고 나니 자신을 잃어가는 사람들.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은 잃어버린 아이들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아니었을지....
 
잃어버린 아이, 잃어버린 세월, 잃어버린 무언가.
모두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잃어가는 것은 더더욱 많아지지만,
그들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자신과 일상의 행복을 찾아간다.
겨자처럼 노란머리를 가진 노숙자 소녀, 첫번째 오르가즘, 뱃속의 아이.
완전히 치유할수 있다고는 결코 말하지 못하겠지만, 또다른 행복은 의외로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법인가보다. 좋은 일은 잊혀지고, 나쁜 일은 오래 기억되는 것은, 아주 작은 기쁨에서 오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이 아닐까. 아주 작기 때문에, 항상 사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훗날 지나서야 그것이 행복이라고 알게되는 것은 아닐까.
 
작가가 담담하게 풀이해 나가는 비극적인 가족사에서는 결국 눈물이 날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은 어찌나 불공평 하던지. 시간이란 얼마나 무심하게도 담담하던지. 또 사람은 어찌나 나약한 존재던지. 인간에 대한 혐오감 만큼이나, 인간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이라는 것은 또 얼마나 애매모호한 존재이던가. 그래서 애증이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고 또 증오도 할수 있는 것이 인간이니...
깊은 상실감으로 가득차서, 글자속에서 한참을 헤매이다가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다. 마음이 먹먹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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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3-22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읽고 싶어요~
노블마인 '뫼비우스의 서재'시리즈 좋아해서 전부 모을려고 생각중인데...
시즈님 서평을 읽으니, 기대가 한층 더해졌답니다^^
저도 얼른 사서, 상실감을 안고 글자속을 해메보렵니다ㅋㅋㅋ

Apple 2008-03-23 01:51   좋아요 0 | URL
참 전체적으로 맥빠지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무게감도 있고, 글도 잘썼고, 순간순간 엄청 마음이 아파지기도 하고...
좋은 소설이예요. 쥬베이님에게도 추천!!^^
 
개를 돌봐줘
J.M. 에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고양이를 부탁한다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개를 돌봐달라는 소설도 있다.
프랑스에서 날라온 독특한 이 소설 "개를 돌봐줘"는 아이러니하게도 개를 돌봐주는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고, 시작부터 개 한마리가 무참히 살해당하면서 시작된다.
 
라디오 드라마 작가인 막스는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가게 되는데, 책을 나르다가 책상자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하필이면 그 아래 있던 개가 책상자에 깔려 쥐포가 되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황한 나머지 어쩌지도 못하고, 납작해진 개의 시체를 혼자 처리하게 되는데,
이 개를 자식처럼 키우고 있던 이웃 아줌마는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로 개를 찾아해메이고,
막스는 죄책감에 아줌마에게 실짝 선의의 거짓말(늘 지붕위로 헤메이고 있던 고양이가 개의 환생체라는...)을 하게되는데, 이 아줌마, 그 말을 진짜 믿어버리고 고양이를 자신의 집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지붕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한편, 막스의 아파트 맞은편, 똑같이 생긴 아파트에 창문을 마주보는 집에는 으젠이라는 계란예술가(?)가 사는데, 막스도,으젠도 서로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어쩌다 시선이 마주치게 되면 서로 은근히 의식하게 될테고,
아직도 자신을 염탐하고 있나 처다보다가 또 눈이 마주치게 될테니, 서로 그렇게 의심하는 수밖에.
이 비공식적인 염탐전으로 급기야 서로 상대방이 자신을 음해하려 한다는 생각까지 하게되고,
두 사람은 서로의 뒷통수를 까기위한 은밀한 작전에 돌입한다.


마주 보는 쌍둥이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연속적인 살인사건 이야기는 일기, 편지, 공문등을 이용한 메타픽션으로 진행되는데, 내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 상대방이 나를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또 그외 제 3자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은 너무도 다를 것이 분명해서, 의식의 차이에서 오는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들이 꽤 흥미진진하니 재밌다.
게다가 거의 광인에 가까울 정도로 개념이 살짝 나간 주인공들의 행동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그 미치광이스러운 유쾌함을 시종일관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소설 전체에서 주인공들이 서로를 깍아내리기 안달일지라도 유쾌하고 즐겁고 웃음이 난다. (나는 개인적으로 에로소설가인 뚱뚱보노인의 소설이 소개되는 부분이 제일 웃겼는데, 중요한 부분에서 항상 말줄임표로 끝나버려서 책을 보면서 많이 웃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뭔가 이야기가 부합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마도 후반부에 밝혀지는 비밀들 때문일 것이다.
커다란 한가지 이야기가 작은 에피소드들을 감싸고 있는 형식인데,
우선은 살인자의 살해동기가 설득력을 잃어 납득이 가기 힘들고,
한가지 일을 풀기위해 너무 많은 일을 벌려놓은데다가 하나를 이루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이 더 피해를 입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덧데어 놓은 설명부분은 벌려놓은 사건을 뒤늦게 수습하는 것처럼 보여서 치밀하게 서로를 음해하고 염탐하는 이 이웃집 사람들의 서스펜스가 다소 성의없이 마무리 된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이야기 자체보다는 캐릭터들의 독특함에 많이 기대고 있는 소설인지라,
추리소설처럼 살인사건 이야기를 끼어들여서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후반부에 대한 불만은 조금 있지만, 읽기에 꽤 유쾌하니 괜찮긴 했다.


읽으면서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프랑스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자신에 대한 자의식이 무척 강한 사람들, 그래서 프라이드도 강하고, 개인주의도 찬양한다.
그러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남들이 사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타인이라면 왠만하면 깍아내리고 보는 나쁜 버릇도 함께 가지고 있는 어쩔수 없는 인간들.
유럽인이라면 (왠지 모르게 선입견인지는 몰라도) 사는 것이 어느정도 풍족한 만큼 마음도 여유로우리라 생각하게 되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나보다.
이들도 남의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을수 없는 어쩔수 없는 인간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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