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최근 인기 있는 영화 "놈놈놈"식으로 이 소설의 등장인물 르웰린 모스, 안톤 시거, 보안관 벨을 표현해보자면,
"이기적인 놈, 잔혹한 놈, 걱정하는 놈"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슴사냥중에 우연히 얻게된 돈가방을 들고 달아나 버리는 모스, 그 돈가방에 죽음이 뒤따를 것을 알면서도 무덤덤하게 도피를 준비하고 필사적으로 달아난다. 모스는 해결하기 위해 투입된 시거, 그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죽음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로를 천천히 따라가는 벨, 쫓기는 자와 쫓는 자 누구에게도 악의 이미지를 투영하지 않으며, 단지 이렇게 되어버린 세상을 이해할수 없음에 비통해한다.
원작 소설을 읽어보려고 했던 것은 영화를 보면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의 의미를 알수 없어서였는데, 책을 보고도 완전히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의 제목으로 이 제목이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보안관 벨이 바라보는 이 사태, 그리고 이 세상은 아마도 좋은 놈도 나쁜 놈도 존재하지 않는, 모두가 사이코패스가 되어버린 것 같은 이상한 나라이지 않을까.
 
세상은 겉잡을수 없이 빨리 돌아간다. 한때 정의로운 보안관이기를 바랬던 벨 자신부터가 겉잡을 수 없이 빠른 세상의 소용돌이에 내던져져 어리둥절할 뿐이다. 마음은 여전한데, 몸이 따르지 않는다. 저기 코앞에서 끔찍한 살인사건들이 이어지고, 총격전이 계속되는데도 어찌할수가 없다.
벨은 안타까워 했을테지. 시대의 변함과 인간성의 종말과 그럼에도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시간의 냉혹함을...
그리고 자신에게 예정된 은퇴와 죽음으로 도피하기에는, 이미 많은 좌절감과 후회를 맛보았기 때문에 그 도피가 후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오히려 모든 것이 분명해지지 않을까 싶을 때가 있었다.
어른이 되면 좀더 깊이 생각하고 다양하게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른들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우등생 아니면 열등생, 또는 성공한 자 아니면 폐배자- 이렇게 이분법으로 딱잘라 말하는 것이 어른들의 특성이었다고 생각했다. 그건 드라마에서 바람피운 남자를 연기한 배우를 동네 할머니들이 나쁜놈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분명한 흑백논리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보니 오히려 불분명해지는 것이 더 많아지더라. 이거 아니면 저거의 중간에는 꼭 무언가 존재했다.
완전한 선인도, 악인도 없듯이, 완전한 성공도 폐배도 없었고, 더 어렸던 시절에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던 강렬한 감정들도 흑도 백도 아닌 회색빛이 되어버렸다. 나는 점점 더 불필요한 일에 뛰어드는 일이 없어졌으며, 점점 더 방관자가 되어가고, 점점 더 무기력해져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이 무섭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알수없는 것만큼이나 초조하고 불안한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이 책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지 확실히 이해할수 없었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나는 벨을 연민하고 이해했다.
그저 그것뿐이어도 나는 이 책이 좋아졌다.
 
우리는 회색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온전한 것도 아무것도 없다.
모두들 조금씩 비틀려 순수함같은 것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다.
어쩌면 이것도 진화라면 진화일 지도 모른다.
무서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더 무서운 것은 이렇게 삶은 여전히 지속된다는 점이다.
죽음이 덮쳐올 때까지 계속 무력한 채로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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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8-08-08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를 먼저 읽었는데, <로드>같으면 좋아할 자신 없는데 말이죠. 아무 이유없이, <인 콜드 블러드>와 비슷한 느낌 아닐까. 하고 샀던 책이에요 -저도 읽으려고 꺼내 놓았는데. .. 한 6월부터.

Apple 2008-08-08 16:58   좋아요 0 | URL
앗..그래요? 저도 곧 로드를 읽으려고 하는데...^^흐흐..
인콜드 블러드라...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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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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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자를 위한 마법
켈리 링크 지음, 이은정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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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8월 26일에 저장
절판
악의 주술
막심 샤탕 지음, 이혜정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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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8월 26일에 저장
절판

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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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어 3
후루야 미노루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한없이 0에 가까운 사나이가 여기 있다.
바다 저 깊은 곳에 죽어있는 듯, 살아있는 듯, 서서히 움직여 최소한의 삶만을 영위하는 심해어같은.
수면위로 올라오면 수압차이 때문에 터져 죽고 말아버리는 그 심해어같은 사나이가 여기 있다.
이 남자에게는 커다란 야망이라던가, 소박한 꿈이라던가, 내일 당장 누군가를 만나야할 약속이라던가, 또는 가슴깊숙이 차오르는 우울함이라던가, 미칠듯한 행복이라던가, 가고싶은 여행지라던가, 사고싶은 게임이라던가, 보고싶은 영화라던가, 만나고 싶은 이상형이라던가- 개뿔 그런것 하나 없다.
그저 하루 하루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사람인 것이다.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 똑같은 하루를 똑같이 이어가고-
그저, 그런 안전하고 잔잔한 심해의 생활이 타고나 얻은 본능처럼 붙어있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날 깨달았다. 자고, 자고, 자고, 또 자고나니 어느새 서른이 넘어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나중 탁구부>를 거쳐 <크레이지 군단>, <그린 힐>,<두더지>, <시가테라>를 거쳐 후루야 미노루는 <심해어>를 내놓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회에서 낙오당할대로 낙오당한 폐배자의 인생을 또 이야기하는 것이다.
매번 똑같은 주인공들을 등장시키다보면 독자로써는 지루할 만도 한데, 어째 이 폐배자의 이야기들은 좀처럼 지겨워질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삶에서 주어지는 욕망이 한없이 0에 가까운 이 남자의 이야기는 <두더지>의 폐부를 시침질로 봉해버리는 듯한 갑갑한 우울함도 아니오, <시가테라>의 씁쓸하고도 헤어나올수 없는 독과도 같은 청춘의 상처도 아니지만, 이 세작품은 "덜큰 남자의 성장기"라는 점에서 몹시 닮아있다.
순간 순간, 선연한 칼날에 베어버리는 듯한 섬뜩한 현실의 우연들, 하루 하루 연명해나가는 것뿐인 삶.
100에 가까워지고 싶지만, 사실은 0에 불과한 초라한 인생.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는 늘 이렇게 독기로 가득차있으며, 그 삶의 폐배감을 토닥이려고도 하지 않는다.
단지, 넌 쓰레기야, 그걸 인정해. 라고 냉혹하게 딱 잘라 말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들은 조금도 차갑지가 않다. 오히려 슬프고, 아프고, 끌어안고 싶다는 기분 마저 든다.
왜일까. 작가는 대놓고 주인공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또 그 주인공들에 동화되는 독자를 욕하는데.
아마도 이런 것과 비교해보면 되지 않나 싶다.
욕쟁이 할머니가 몇십년 동안 손님들에게 욕을 하며 음식을 내놓는 음식점 같은 매력.
또는, 나보다 더 못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을 보며 은밀한 위안을 받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듯 조금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품게되는 이중적인 마음.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를 읽으면서 늘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다행히도 후루야 미노루의 새로운 작품 <심해어>는 <두더지>처럼 한없이 암흑에 가까운 냉소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아마도 <시가테라>에서 한번, 그러한 폐배자 주인공들을 끌어안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경비업무를 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삶을 안일하게 연명해나가는 한남자가 친구를 찾고, 그 이상한 친구들이 그 아무것도 없던 허공을 차츰 매워가는 과정은 감동적일 정도로 즐겁고 유쾌해서 마음이 아플 정도였다.
그래. 이것은 후루야 미노루가 내놓은 또하나의 성장기이다.
즐겁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또 성장통이 반드시 수반될수 밖에 없는, 유쾌하지만 슬픈 성장기인 것이다.
전작 <시가테라>를 보면서 나는 울었었는데, 어쩌면 아직 완결되지 않은 <심해어>의 완결을 보고나면 나는 또다시 울게 될지도 모르겠다. 슬픈 눈물이 아니라, 감동을 받아 나도 모르게 흘리는 눈물말이다.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느껴져도, 사람에게 상처받아 마음이 숨어버리더라도,
심장이 뛰고, 숨이 쉬어지면 우리는 또다시 살아갈수 있는 것이다.
겁먹은 발걸음을 한발씩 내딛어 주위를 바라보면, 나와 똑같은 허무함을 가지고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 수면위로 반짝이는 햇빛도 존재하며, 그 수면위로 올라와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얼토당토 않을지도 모르는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주 작은 발걸음부터 시작.
한번 더 걷고, 걷는게 익숙해지면 뛰어볼 용기도 조금씩 생기는 것.
<심해어>가 내게 준 소중한 희망.
한없이 0에 가까워도 좋으니, 적어도 50은 꿈꿔봐야지.
현실이 마음같지 않아도, 꿈을 꾸는 동안에는 행복할지도 모르니까.
 
"좋아하는 만화가가 누구세요?"라고 물어보면 좋아하는 만화는 많은데, 좋아하는 작가는 흔치 않아서 늘 대답할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말할수 있다. 바로 그 사람이 후루야 미노루라고.
그리고 그는 누가뭐래도 천재이고, 누가 뭐래도 나만의 영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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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2-26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일본의 대사상가 후루야 미노루님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시는 분을 만나 너무나 반갑네요. 저는 심해어 리뷰를 쓰고 다른 사람은 누가 썼나해서 둘러 보던 중에 이 작품을 제대로 깊이 있게 감상하시고 글을 쓴 것을 보고 들어와서 보고 갑니다. ^^ 너무나 감동적으로 쓰셨네요. 정말 가슴에 팍팍 와닿네요. 정말 좋은 리뷰 읽고 갑니다. 후루야 미노루 화이팅!!!
 
텐더니스 밀리언셀러 클럽 85
로버트 코마이어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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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하는 척하는 성장소설이 하나 있다.
에릭은 잘생긴 외모에 반듯한 행동거지로 주위에서 사랑을 받는 소년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는 여자애들이 주는 부드러움에 취해버렸다. 그 욕망은 너무도 강렬해서, 그저 여자아이들을 만지고 끌어안는 것으로는 부족해 그 부드러움에 취한 순간을 죽음으로 영원히 봉해놓아야만 했다. 그런 과정에서 그들은 죽어버리고, 그는 이런 식의 부드러움을 가장한 살인을 몇건 저지른 연쇄살인범이 되어버린다. 평소 마음에 들지 않던 엄마와 계부까지 죽여버리고, 그는 평소 미리 혼자서 준비해왔던 몸의 흉터들을 세상에 내보이며, "잘못된 가정에서 자라 심리적으로 삐뚤어진" 살인범의 이미지를 스스로가 만든다. 이 잘생기고 영리한 연쇄살인 용의자에게 세상은 열광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소녀 로리는 열다섯의 나이에 걸맞는 순진한 얼굴과 어른같은 몸을 가진 여자아이이다. 어디를 가나 나이 든 남자들의 표적이 되었던 로리는 계부가 자신을 건드려도 딱히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계부의 유혹을 거부하는 이유는 엄마가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세상에 별다른 뜻도 없고, 별다른 분노도 없는 소녀 로리는 친구집에 간다는 쪽지를 하나 남기고 가출을 해버린다. 10달라도 안되는 돈만 가지고.
거리에서 히치하이킹을 해, 순진해보이는 평범한 가장과도 같았던 운전자를 유혹하고, 거리의 소녀와 잤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죄책감에 우는 남자를 뒤로 하고, 그의 돈도 훔쳐서 나온다.
어느 날 연쇄살인 용의자 에릭을 보고, 로리에게는 에릭과 키스를 해야겠다는 집착이 생긴다.
 
그렇게 만난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 <텐더니스>. 거리를 나딩구는 소녀 로리와 부드러움에 매혹당한 소년 에릭의 이야기는 그들의 프로필이 그러하듯이 밝고 희망적이지는 않다.
로리와 에릭이 부드러움에 집착하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부모의 사랑을 적게 받았기 때문이리라 생각할수 있겠지만, 어쩌면 그건 원초적인 외로움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낳아준 부모조차 부드럽게 대해주는 아이들이 아니었던 로리와 에릭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것은, 특히 목격자에 가까운 로리를 의심하면서도 끝내 버리지 못하는 에릭에게는, 그 두사람이 서로에게 도플갱어같은 존재였기 때문이 아닐까. 비슷한 성장과정과 그로인해 어쩔수 없이 나오는 행동들, 그들은 많이 닮았고, 은연중에 서로를 알아보았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래전, 저도 모르게 자신을 구해준 에릭에 대한 로리의 무한한 사랑, 그 맹목적인 부드러움은 에릭에게는 필요치 않은 것이었다. 에릭은 검은 머리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여자들에게만 끌리기 때문이다.
아마도 에릭의 어머니가 그러했기 때문이겠지. 자신의 얼굴을 검은 머리카락으로 뒤덮으며 부드럽게 말을 걸어주던 어머니의 이미지, 그 사랑스럽고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럽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그를 검은 머리카락과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여자들을 사랑하다 죽여버리게 만들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로리가 아무리 에릭에게 구애를 해도, 그들의 마음은 이런 식으로, 사랑의 완결도 아니고, 그렇다고해서 에릭이 그렇게나 욕망하던 "부드러운" 살인도 아닌, 우연에 가까운 식으로 비극적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를 일이다.

 
스릴러를 기대하고 읽었다가는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는 책이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 소설이 참 좋다.
유년 시절이 마냥 밝고 아름답기만 한 사람들의 이야기보다는 에릭과 로리처럼 희미한 악몽처럼 남아버리는 유년 시절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나는 더 끌리게 된다.
제목처럼 이 책은 부드럽다. 그 말랑말랑해서 상처입기 쉬운 부드러움이 이 책을 맥빠지게, 슬프게 느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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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악몽
가엘 노앙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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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시무시한 카드는 타로카드 중 Death-죽음 카드이다. 이름처럼 당연히 죽음을 의미하는 카드라 타로점을 보는 도중 이 카드를 맞딱뜨리면 마음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사실은 완전히 나쁜 의미만은 가지고 있지 않다. 끝이 난다는 것이 모두 나쁜 의미이기만 한 것은 아닌지라, 죽음, 그리고 이전의 고통이 제거된 또다른 시작을 뜻하기도 한다.
가엘 노앙의 데뷔작 "백년의 악몽"을 다 덮고 났을때 이 책이 주는 가장 명료한 주제의식이 바로 이 카드에 있지 않았나 싶었다. 죽음과 새로운 시작. 게렝델집안의 네 아이들이 꾸는 꿈이 깨어지는 순간은 죽음과 맞딱뜨리는 순간이었고, 그 죽음후에 그들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저마다 다른 나이의 네 소년이 살고 있는 집안이 하나 있다.
나이답게 반항적인 첫째아들 브누아, 섬세하고 호기심많고 어딘지 고독한 둘째 뤼네르, 형들에게 언제나 겁장이라 놀림받는 엄마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셋째 기누, 그리고 젖먹이 상송.
이렇게 아이들이 많은 가정에는 시끄러운 일도 많을 법한데, 게렝델 집안은 어찌된 일인지 조용하다 못해 이상스럽기마저 하다. 이유는 모든 가족들이 비밀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자식들을 과잉보호하는 어머니는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바닷가에 살면서도 아이들을 바다로 내보내려 하지 않으며, 언제나 실체없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고, 네 아들들은 어머니에게도 말하지 못할 기묘한 악몽에 매일밤 시달린다.
세살짜리 딸을 익사시키는 미친여자의 꿈을 꾸는 브누아, 망망대해에 떠있는 범선 갑판에 갖히는 꿈을 꾸는 뤼네르, 기누를 괴롭히는 흙말의 환상, 그리고 젖먹이 상송에게까지 악몽은 확대되어 간다.
 
이 악몽들을 서로에게 조금도 털어놓지 못한 채 형제는 형제끼리, 부모와 자식은 부모와 자식끼리 서먹서먹해져가는 가정이 바로 게렝델 집안이다. 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똑같은 꿈에 밤마다 시달리게 되었을까.
누구도 선뜻 얘기하지도, 밝혀내지도 못하지만, 둘째 뤼네르만은 이 꿈의 실체를 쫓기 시작한다.
뤼네르는 꿈속에 등장하는 선원의 실체를 찾기 시작하고, 꿈에 끼어들어 꿈의 패턴을 조금씩 바꾸기도 하는 용감한 아이이다. 그리고 그의 앞에 드러나는 것은 거의 백년에 걸친 비극적인 가족사였다.

어린 시절과 작별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원래는 한몸이었던 부모와의 감정적인 이별을 하기도 하고, 어린시절의 순수함 또한 잃어버리게 된다. 책속에 등장하는 네 소년이 어린 시절과 작별하고, 어른이 되어가는 도중에 잃어버리는 것은 바로 "백년의 악몽"이었던 것이다.
태생적으로 주어진 핏줄의 업보-악몽처럼, 또는 환상처럼 주어져있지만, 사실은 부모로부터 은연중에 주입당한 이 핏줄의 이야기들을 잃어버리고, 극복하며 아이들은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 매개체는 죽음- 뤼네르에게 비밀을 알려주는 아르델리아의 죽음과 흙말의 환상을 못이겨 저도 모르게 창문에서 떨어져버린 기누의 죽음에 가까운 무엇, 그리고 그 기누를 죽일뻔했다는 자책감에 휩쌓이게 되는 브누아.
이 모든 죽음의 형태가 소년들을 또다른 차원의 누군가로 성장하게 만든다.
장르소설로 읽었다가는 휘청할만큼 만만치만은 않은 책 <백년의 악몽>에 등장하는 모든 죽음들이 의미하는 것은 인생의 한 시절을 끝내고 또다른 시절로 넘어갈 때 누구나 겪는 "죽음과도 같은" 성장통인 것은 아닐지.
그래서 귀신 얘기처럼 보이거나, 또는 악몽에 얽힌 공포소설처럼 보이는 이 소설이 사실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핏줄에 얽매인 어린 시절의 죽음과 그후에 이어지는 핏줄과는 관계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생의 한 단계의 이야기가 아닐지 모르겠다.
 
먼저 말했듯이, 추리소설이나 공포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집어들었다가 중반부에서 잠시 휘청댔던 소설이다. 소설이 은연중에 상징하는 바가 무척 커서, 머리속으로 이 소설을 어떻게 생각해야할 것인가 책을 읽고 한참을 정리해보았다. 뤼네르가 가족의 비밀을 밝혀나가는 부분에서 난항없이 너무도 쉽게 관련자를 찾아내는 점이 조금 아쉬운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했다가는 더더욱 머리가 터져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신인이 이토록 더없이 철학적인 소설을 장르소설의 형태로 내놓을수 있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부러워지게 되었던 소설이다. 더불어, 문학동네의 우아한 책표지, 번역자 임호경씨의 애정에 겨운 해석과 역자후기가 이 책의 진가를 더더욱 빛내주었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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