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와 알렉스 : 두자매 이야기 - The Uninv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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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보고온 공포영화. 헐리우드 리메이크작은 왠만하면 보고싶지 않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장화, 홍련> 리메이크작인지라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극장을 들어서기전에는 <장화, 홍련>을 떠올리며 그 정도의 공포가 존재하는 영화라면, 혼자서 텅텅빈 극장에서 보려면 조금 후덜덜이겠다 싶었는데, 영화가 거의 스릴러 정도밖에 되지 않더라. 이걸 공포라고 어떻게 불러야할지...
귀신이 나온다는 점이 그렇다면 또 그렇겠지만...

원작을 뛰어넘는 리메이크작은 존재하기 힘들어서, 원작 <장화, 홍련>과 비교하지 말고 영화로써 평가해야할텐데 그래도 사람인지라 비교가 될수밖에. 이번에도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자체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는 어디가고, 미국영화 어디에서나 볼수 있을 법한 중산층 가정이 배경으로 되는 바람에, 소품과 배경에서 오는 미장셴은 찾아볼래야 찾아볼수 없고, 약 1시간동안 느릿한 진행을 보이다가 한꺼번에 모두 털어놓는 헐리우드식 빤한 반전만 계속된다. (게다가 누가 이 반전 예상하지 못한대? 이미 많이 봐온 반전 아닌가.)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동양의 공포물을 헐리우드가 리메이크하려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었다.
동양의 정서와 서양의 정서는 뛰어넘을수 없는 벽이 존재하고, 동양의 폐쇄적이고 고지식한 감성이 주는 긴장감이 서양의 개방적인 감성에 씌워지면 이도저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원작에서, 문근영이나 임수정이 남자친구와 열렬히 뽀뽀하는 장면이 등장했더라면 영화가 그리 폐쇄적일수 있었을까.
속을 알수 없는 말없는 가장이었던 김갑수가 딸을 다정하게 안아주는 서양식의 다정한 아버지였더라면 <장화,홍련>이 내가 기억하는 그 <장화,홍련>이었을까.
새엄마로 등장했던 염정아가 표독스러운 새엄마처럼 보였던 것은 그녀가 노출도있는 옷을 입고 등장해 색기 좔좔 흘리면서 아버지와 밤마다 러브러브질했기 때문일까.
폐쇄적이고 신경질적인 동양의 감성을 서양에서 고대로 따라하기란 힘들었을 터.
어쩌면 그네들에게는 말없고 무관심한 중산층 아버지란 상상할수 없는 존재이고, 10대 나이에 관심없는 남자친구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비정상적일지도 모르리라.

원작의 머리를 따라가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전체적으로 아무생각 없이 스토리를 따라가다보면 시간이 어느새 다 흘러버리는 영화였다. 그렇다고 시간이 아까울 정도는 아니지만, 여러모로 기대이하.
저들 구미에 맞춰 이리굽고 저리굽고 하다보니 신선도 떨어지고 자기색깔없는 공산품밖에 나오지 않는구나...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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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6-02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Apple님.
공포영화를 어떻게 혼자 보셨어요? 저는 공포영화는 혼자 못보러 가는데 말이죠. orz

Apple 2009-06-02 19:09   좋아요 0 | URL
푸히히히..저는 공포영화도 혼자서 잘봐요.^^; 그리고 이영화는 특히나 정말 무섭지가 않다는...^^
 
슬럼독 밀리어네어 - Slumdog Milliona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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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대변하는 색채는 카레색이라고나 해야할까. 강렬한 카레향, 강렬한 카레색, 그와 더불어 강렬한 음악 선곡.
그리고 대니보일의 거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 뛰고 뛰고 또 뛰는 미친듯한 속도감과 청춘.
정리해보자면,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딱 그런 영화이다.

빈민가 출신의 자말이 퀴즈쇼에서 최대상금이 걸려있는 상태에서 최종라운드까지 오르게 되고, 제대로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빈민가 소년이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도 풀지 못했던 문제들을 척척 맞추어버리니 온 인도가 뒤집혀버린다.
그리고 그저 퀴즈를 잘맞추었다는 이유만으로, 자말은 경찰서에 끌려가게 된다.
왜? 부정행위가 분명하다고 생각하니까.

영화의 얼개를 맞추는 진짜 내용으로 치자면야 진부하고 또 진부한 이야기임이 분명하지만, 대니보일 특유의 몽상적이고 청춘스러운 스타일때문인지 지루한지 전혀 모르고 보았던 영화이다. 또 읽고 있던 책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서 나로써는 무척 신기한 일이기도 했고...
아아...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감독은 역시 대니보일인가보다.
닥치고 뜀박질부터 시작하는 대니보일의 스타일은 여전히 나를 두근두근 하게 만든다.
<쉘로우 그레이브>, <트레인스포팅>, <인질>, <비치>, <28일후>, <밀리언즈>, <선샤인>, <슬럼독>까지...
어느 영화 하나 사랑하지 않는 영화가 없다. 으흑...
그나저나 개인적으로 <선샤인>은 눈물 철철 나는 아름다운 초현실주의 SF 공포영화라고 생각하는데, 의외로 볼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들 너무 많더라.....(이글이글한 태양이 내려오는 장면은 내 인생의 장면중 하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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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 The Rea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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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러갔던 친구는, 이 책을 순수하게 책을 읽어주는 내용인줄 알았나보다.
책읽고 응응 하는건지 몰랐는지, 베드씬나올라고 하니까 옆에서 이런 영화였냐며 놀라고 있더라. (이런 영화라 더 좋아했을지도!!!)
간단히 말하자면, 책 읽어주는 남자와 남자가 읽어주는 책을 감명깊게 들어주는 여자의 이야기 되겠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단순히 간단히 책읽어주는 이야기가 아닌 것은, 일단 여자가 문맹이라는 사실 때문이고, 그 사실을 극복하려고 하기보다는 숨기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글자를 모른다는 것은 그녀에게 치명적인 비밀이다. 살을 맞댄 연인에게도 말하지 못할....
일거리 있는 곳을 찾아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던 여자, 다소 투박할지도 모르지만, 배운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

어느 아픈 날 자신을 도와준 여자, 엄마뻘은 되는 그 여자에게 빠져버렸던 10대 소년.
여자는 소년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한다. 그리고 소년이 읽어주는 소설에서 웃다가 운다.
세월이 지나고, 생활력이 전부인 여자는 직장 때문에 소년과 헤어지게 되고, 몇년이 흘러 법대생이 된 소년 앞에 여자가 나타난다. 범죄자의 모습으로....
단순히 한가지 사실,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만 말해버린다면 큰 죄를 뒤집어쓰지 않을 상황에서, 여자는 굳이 묵묵하게 입을 다물어버리고, 뒤늦게나마 어른이 된 소년은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리게 된다.
거의 종신형을 받은 여자. 그여자의 컴플렉스를 존중하기 때문에 같이 입을 다물어버린 남자.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여자 앞에서, 남자는 무슨 얘기를 했을까.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 추억들이 여전히 마음속에 있다고...그렇게 말했더라면, 어쩌면 그녀는 조금은 더 이 세상을 견뎠을지도 모를 터.

아련하게 간직한 어린 시절의 사랑의 불치병같은 향수같은 거-처음으로 부딪힌 강렬한 사랑의 느낌 같은 거-
모두 잊고 살고 있지만, 로망처럼 간직하고 있던 것들을 건드리는 영화이다.
결국 슬프지만, 우리 모두 인간인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버림받아지는 것에 초연해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케이트윈슬렛이 연기한 한나의 묘한 캐릭터. 무식하고 투박하지만 그만큼 순수한 백치.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침부터 성묘후에 영화를 보느라 문득문득 10초씩 졸아버리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지만,=_=;
그럼에도 모두 이해할수 있었던 것이 신기하다;;
나는 유독 어린시절의 사랑이 나이 들어서까지 향수처럼 지속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첫사랑의 아련한 느낌. 아프지만 달콤하고 강렬한 충돌같은, 그런 느낌을 나 역시 지금 이 나이에도 로망처럼 간직하고 있으니....
어찌보면 시네마 천국+타인의 삶 같은 느낌의 영화이고, 두 영화를 좋아한다면 즐겁게 볼수 있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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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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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연쇄살인범 얘기나 폭력에 찌든 스릴러를 찍을 것만 같았던 데이빗 핀처가 "나도 아카데미 탈수 있다규!!!"라고 절규하듯이 내놓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을 "소재"로 이용한 영화로, 소설에서는 느낄수 없는 잔잔하고 소소하게 아름다운 느낌을 덧대어놓은 영리한 영화이다.
노인으로 태어나 아기가 되며 끝이 나는 이야기. 굳이 이 이야기를 말로 풀어내는 것은 바보짓이리라.
그래. 이쯤되면 데이빗 핀처도 상한번 받을만 하다. 영화는 딱 그만큼 훌륭하다.
따뜻하고 감동있고 어느 정도 수준도 갖추고 있으면서, 아카데미가 좋아할만한 분위기이다.
어쩐지 상을 노리고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영화 자체는 무척 긴 런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볼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감독의 역량보다 각본가의 역량이 더 돋보이는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그 유명한 <포레스트 검프>의 각본가이기는 한데, 아마도 모르고 보았더라도 작품자체의 무게와 대사발을 보면서 <포레스트 검프>를 떠올렸을 사람도 있을런지 모르겠다. 이 사람 각본 어떤 면에서는 참 특이하다.
뭔가 굉장히 독특하고 남들이 생각치 못한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아닌데, (이 영화 역시 원작이 따로 있으니 소재를 각본가가 창조해낸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박진감 넘치게 만들거나, 눈물 펑펑 쏟게 신파로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면서, 묘하게 따뜻하고 잔잔하면서도 이야기의 구조부터 풀어나가는 솜씨가 몹시 안정적이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비범한 능력이 아닐까.

어쨌거나 딱 명성만큼 즐겁게 보았던 영화이고, 영화속의 소품이라던가 씬 하나하나가 어른을 위한 동화처럼 아름답다.
 

 

특히 이 포스터에 나오는 이 장면은 이 엄청난 아이러니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아련하고 예쁘던지...
게다가 후반부에 등장하는 브래드 피트의 10대 후반 20대 초반쯤 되는 얼굴 어쩔거야.ㅠ ㅠ 완전 자체발광 초미소년. 아..이 모성본능 자극하는 촉촉한 눈빛.....끌어안고 토닥이고 싶다.하악하악...예뻐...귀여워...하악..

그런데 왠지 모르게 케이트 블란쳇은 영화를 보는 내내 장면 자체의 아름다움은 제외하고, 그 여자 자체가 예쁘다고 생각되는 씬이 하나도 없었다. 이 여자, 원래 이렇게 기계 같이 생긴 여자였구나. 그동안 이 여자가 다른 영화에서 나오는 걸 볼때마다 그냥 "여자"캐릭터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항상 철의 여인같은 강렬한 이미지 였던 것 같은데, 그냥 "예쁜 여자"로 등장하는 케이트 블란쳇은 뭐랄까. 포토샵으로 3중 블러 처리를 하고 눈 코 확대 마술을 부리고 볼터치까지 해주었는데도 정떨어지는 느낌이었달까. 귀염성이 전혀 없는 얼굴이라 그런지 얼굴 자체의 균형이라던지 아름다움같은 것을 떠나서 뭔가 모르게 전혀 호감가지 않았다. 그냥 마네킹이 연기한다는 느낌이었달까. 아윽..얼굴 부담스러웠다. 벤자민 버튼 잡아먹을 것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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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 Old Part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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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40년간 아버지의 지휘 아래 일하면서, 가끔은 욕설을 듣고, 가끔은 매질도 당하고, 아파죽겠는 날에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을 시킨다. 아들이 병이 들자 아버지는 힘좋은 새 일꾼을 집에 들이고, 아들의 방을 빼서 일꾼에게 주어버렸기 때문에 아들은 찬바람이 불어도 비가 와도 밖에서 잘수밖에 없다. 밥은 준다. 정성껏 아버지가 차려서 밥은 준다.
만약 내가 이 죽어가는 아들이라면, 죽는 순간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에게 의지할수 밖에 없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이 아팠을까.
이제 곧 소멸해 버릴 내 존재와 함께 소멸해갈 아버지와의 기억에 대한 회한으로 죽는 순간까지 마음이 아팠을까.
인간과 소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바보같은 짓이지만, 한번 영화에 등장하는 소가 인간이었다면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랬더니, 이런 무자비한 생각이 들더라. 아, 그렇다면 아들은 재산이었구나.하고...

<워낭소리>에 등장하는 할아버지와 소의 정을 왜곡시킬 생각은 없다.
40년간 매일같이 일을 나가고, 집으로 돌아왔던 동행자들에게 전혀 정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 또한 말도 안되리라.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괴로웠던 것은 소멸해가는 존재들에 대한 아련한 향수때문도 아니었고, 일평생 일하며 죽어가는 두 존재들에 대한 연민때문도 아니었고, "그저 지켜보는" 다큐멘터리 영화로써 이 영화를 볼것이냐, 아니면 내가 느끼는 감정대로 이 영화를 볼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다큐멘터리 영화로써는 충분히 훌륭했지만, 감정적으로 보았을 때는 너무도 괴로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예전에 어떤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메마른 사막에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아이가 숨을 고르며 앉아있고, 그 뒤에서 까마귀는 아이가 죽기만을 바라며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진. 사진작가는 유명한 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세상의 비난 또한 피하지 못했다고 한다.
예술적으로는 훌륭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아이에게 물한방울 주지 않고 그 순간만을 포착하기를 기다린 사진작가가 인간적으로는 잔인했던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어떤 쪽인가 싶었다.
자신의 본분을 다한 사진작가의 예술로 평가해야 했을지, 아니면 타인의 불행을 포착한 인간의 잔인성으로 평가해야했을지, 나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어느 쪽의 이야기도 틀린 얘기는 아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바라보는데 그 얘기가 내내 떠올랐다.
인간과 소의 40년 우정도 틀린 말이 아니고, 죽을 날을 받아놓고도 일하다가 죽어간 소에 대한 연민 또한 틀린 말이 아니다.
아직도 어느 관점을 택해야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관점이 덜 괴로운지는 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극장을 나오면서 여러모로 마음이 불편해져서 나왔다.
동물이 나오는 영화는 이래서 괴롭다. 꼭 제대로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이면의 다른 걸 생각하게 되니까...
내가 삐뚤어진 탓도 분명 있을 것이다.
댓가없이 무조건적으로 희생하고 싶은 사람이 아무도 없듯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만약 내가 이런 아버지를 가졌더라면, 또는 이런 남편을 가졌더라면, 나라면 견디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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