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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 Old Partn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40년간 아버지의 지휘 아래 일하면서, 가끔은 욕설을 듣고, 가끔은 매질도 당하고, 아파죽겠는 날에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을 시킨다. 아들이 병이 들자 아버지는 힘좋은 새 일꾼을 집에 들이고, 아들의 방을 빼서 일꾼에게 주어버렸기 때문에 아들은 찬바람이 불어도 비가 와도 밖에서 잘수밖에 없다. 밥은 준다. 정성껏 아버지가 차려서 밥은 준다.
만약 내가 이 죽어가는 아들이라면, 죽는 순간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에게 의지할수 밖에 없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이 아팠을까.
이제 곧 소멸해 버릴 내 존재와 함께 소멸해갈 아버지와의 기억에 대한 회한으로 죽는 순간까지 마음이 아팠을까.
인간과 소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바보같은 짓이지만, 한번 영화에 등장하는 소가 인간이었다면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랬더니, 이런 무자비한 생각이 들더라. 아, 그렇다면 아들은 재산이었구나.하고...
<워낭소리>에 등장하는 할아버지와 소의 정을 왜곡시킬 생각은 없다.
40년간 매일같이 일을 나가고, 집으로 돌아왔던 동행자들에게 전혀 정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 또한 말도 안되리라.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괴로웠던 것은 소멸해가는 존재들에 대한 아련한 향수때문도 아니었고, 일평생 일하며 죽어가는 두 존재들에 대한 연민때문도 아니었고, "그저 지켜보는" 다큐멘터리 영화로써 이 영화를 볼것이냐, 아니면 내가 느끼는 감정대로 이 영화를 볼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다큐멘터리 영화로써는 충분히 훌륭했지만, 감정적으로 보았을 때는 너무도 괴로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예전에 어떤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메마른 사막에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아이가 숨을 고르며 앉아있고, 그 뒤에서 까마귀는 아이가 죽기만을 바라며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진. 사진작가는 유명한 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세상의 비난 또한 피하지 못했다고 한다.
예술적으로는 훌륭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아이에게 물한방울 주지 않고 그 순간만을 포착하기를 기다린 사진작가가 인간적으로는 잔인했던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어떤 쪽인가 싶었다.
자신의 본분을 다한 사진작가의 예술로 평가해야 했을지, 아니면 타인의 불행을 포착한 인간의 잔인성으로 평가해야했을지, 나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어느 쪽의 이야기도 틀린 얘기는 아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바라보는데 그 얘기가 내내 떠올랐다.
인간과 소의 40년 우정도 틀린 말이 아니고, 죽을 날을 받아놓고도 일하다가 죽어간 소에 대한 연민 또한 틀린 말이 아니다.
아직도 어느 관점을 택해야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관점이 덜 괴로운지는 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극장을 나오면서 여러모로 마음이 불편해져서 나왔다.
동물이 나오는 영화는 이래서 괴롭다. 꼭 제대로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이면의 다른 걸 생각하게 되니까...
내가 삐뚤어진 탓도 분명 있을 것이다.
댓가없이 무조건적으로 희생하고 싶은 사람이 아무도 없듯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만약 내가 이런 아버지를 가졌더라면, 또는 이런 남편을 가졌더라면, 나라면 견디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