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으아!!!!;ㅁ; 드디어 <살인자들의 섬> 개봉일이 다가온다!!!!
밀클 카페에서 퍼온 따끈따끈한 트레일러!!!!
미국에서는 10월 초, 우리나라에서는 10월 중순쯤 개몽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반가운 이야기!
데니스 루헤인 원작이 영화화 되는건 이번이 세번째. 감독이 무려 마틴 스콜세지이니 기대할만도 하겠다. 

데니스 루헤인-살인자들의 섬
이 책을 만나게 된지가 벌써 4년이 흘렀다.
자극적으로 보자면 반전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는 하나, 사실 반전 자체의 힘은 그다지 큰 소설은 아니었다. 이런 식의 반전을 가진 헐리우드 스릴러는 수도 없이 많이 나왔으니까.
다만 이 책을 사랑하게 된 것은 갖힌 기억과 자의식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게 되는 한남자에 대한 나 나름대로의 연민때문이었는데, 이 책을 읽었던 어느 새벽 울컥울컥 감정이 몰아쳤던 기억이 난다.

데니스 루헤인을 사랑할수 밖에 없는 이유.
미워할수 없는 죄인을 만들어내는 것. 이성과 감정이 충돌하며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 그 당혹스럽고 서글픈 모든 절망때문에,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은 언제나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예고편을 보고 이영화가 기다려지는 사람들은 원작을 보고 영화를 보든, 영화를 보고 원작을 보든, 원작을 보는 것도 괜찮겠다. 반전이 있는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진중한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나름 만족할만한 소설이다. 

개봉은 10월. 아직도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겠지만, 열렬히 기다려주겠다. ㅠ_ㅠ
아...정말 오래기다렸다!!ㅠ ㅠ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연 2009-06-12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기대만빵입니다...!

Apple 2009-06-12 16:32   좋아요 0 | URL
저도요!>ㅅ<
 
벨벳 애무하기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고전의 즐거움을 아는지.
별 특별한 사건이이어지지 않아도, 지금같은 세상에서는 식상하기 짝이없는 내용이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뭔가 손에서 놓아버릴수 없는 매력이 있다. (물론 모든 고전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살아보지 않은 시대에 대한 동경이 무럭무럭 생겨나는 것도, 세상 그 어느 소설보다도 주인공에게 환타지를 입히고 싶은 욕망이 드는 것도, 바로 고전의 매력이다. 어린 시절부터 고전소설, 특히 빅토리아조 소설들에 열광해 있던 내게 "빅토리아"라는 단어만으로도 나는 참을수 없이 약해진다. ("빅토리아"에 "고딕"까지 붙는다면 나는 그 소설이 무슨 소설이든 사랑에 빠질수 있다.)
고전이 아니면서도 고전같은 느낌이 드는 소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라 워터스의 <벨벳 애무하기>.
세라워터스의 소설을 읽으면 좀더 방종한 찰스 디킨스가, 좀더 솔직한 샬롯 브론테가 떠오른다.
그녀가 지어낸 책들에 "빅토리안 레즈비언 3부작"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어서만은 아니고,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행동과 관습, 사고방식이 꼭 그 시대의 것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학위를 받기 위해 빅토리안 시대의 동성애자들의 자료를 조사하다가 쓰게되었다는 데뷔작 <벨벳 애무하기>에는 그녀가 공부했던 빅토리안시대의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꼭 어린시절 보던 고전들중 내가 놓치고 읽지 않았던 것을 다시 읽는 기분이 들게 한달까.

어쨌거나 이야기는 윗스터블의 굴소녀 낸시가 남장여자가수 키티에게 반하면서 시작된다.
머리를 남자처럼 짧게 자르고, 바지를 입은 그 모습에, 그럼에도 미소년처럼 아름다운 그 모습에 반해버린 낸시는 열렬히 키티를 짝사랑하게 되고, 급기야 키티와 친해지더니, 결국 그녀와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되더니, 나중에는 그녀의 파트너가 되어 같이 공연하게 된다.
동성애 관계를 지속하며 함께 일하기란 힘든 법. 키티는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낸시와의 관계를 숨기느라 급급하고, 결국 굳건할줄 알았던 사랑을 저버리는 일이 생겨버려서 낸시는 키티에게서 도망쳐 온다.
그리고 낸시는 키티에 대한 복수심으로 남장한채로 거리의 남창이 되어버린다. (여자가 어떻게 남창이 될수 있는가 하겠지만, 낸시가 남장을 하면 너무 남자같아서 모두 남자로 본다.)
그러다가 돈많은 귀부인 다이애나의 눈에 띄게 되서 첩이 되기도 한다. 철저히 그녀에게 종속되어 자기 뜻대로 할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낸시는 그 생활에 만족한다. 왜일까? 윗스터블에서 런던으로 오면서 그녀는 우리가 흔히 말하듯 허파에 바람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낸시는 한때 연예장의 스타였고, 윗스터블에서 굴껍질을 까던 기억은 이미 옛날 옛적에 꾸던 꿈이나 마찬가지로 희미해져버렸고, 좋은 드레스, 편안한 생활에 너무도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낸시가 돈많은 귀부인의 아끼는 개가 되어 살아간다 해도 아무 문제 없었을터. 그러나 나태한 삶은 권태를 불러일으킬뿐이고, 서서히 그 화려하고 방탕한 세계에 질리게 될 때쯤, 낸시는 다시 거리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나는 여자 플로렌스. 사랑스럽지만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키티와도 다르고, 욕망을 위해 모든 것을 돈으로 사는 다이애나 레더비와도 다르다. 그녀는 철저히 독립적이고, 무척 선량하며, 성실하다.
그때문에 낸시는 그런 플로렌스에게 불만을 품지만 결국 서서히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전에 보았던 <핑거스미스>가 추리소설이라면, <벨벳 애무하기>는 성장소설에 가깝다.
바닷가 작은 마을에 살던 촌뜨기 소녀가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고, 그 후에 자존감을 찾아가는 모험같은 이야기.
사람이라면 왠만해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기란 힘들다.
살면서 나를 스쳐지나갔던 모든 사랑들을 떠올려보면서, 나는 그 사랑으로 많은 성장을 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사랑들이 모두 해피엔딩은 아니었고 많은 실패를 했기 때문에 나는 더 성장했다는 것 또한 깨닫는다.
한때 건방지던 내가, 한때 이해심부족하고 나밖에 없던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상처받는 것을 반복하면서 또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참 기묘하고 멋진 일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결국 그런 사랑을 통한 성장의 이야기이다.
소설 전반적으로 걸쳐 타인의존도가 굉장히 높은 이 낸시라는 아가씨가 책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물론 그 홀로서기 역시 자신의 힘만으로 이뤄내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과 얽혀 살게되면서, 오로지 나 혼자만으로 뭔가를 이루어냈다고 자신하는 것 또한 교만일테니. 플로렌스라는 또다른 사랑을 통해, 지금까지의 사랑과는 달리 몹시 현실적이고 냉철하며 성실한 사랑을 통해, 그녀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있어야할 자리를 드디어 찾게 된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을때는 겉돌던 아이가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뿌듯함이 느껴졌다.

<벨벳 애무하기>는 다소 울적했던 <핑거스미스>와는 달리 전체적으로 경쾌하고 쫀득쫀득하고, 제목처럼 깜짝 놀랄 정도로 대담하고 관능적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단어들에 깜짝 깜짝 놀랄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도 함부로 입에 담기 힘든 표현들이 어쩌며 이리도 뻔뻔스럽게 자주 등장하던지... 호모포비아는 보기 힘든 작품일지도 모른다.)
이미 영화로 먼저 보았기 때문에 내용은 거의 모두 알고 봐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재밌었다.
앞서 말했듯이 고전적인 즐거움이 가득하고, 그럼에도 결코 지루하지 않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 소설이다. 내용자체가 무척 독특해서가 아니라, 통속적인 뻔함을 아주 즐겁게 이야기해놓았기 때문에, 꽤 많은 분량과 빽빽한 글씨에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데뷔작부터 이렇게 재밌게 만들어버리다니, 처음부터 작가 세라워터스에게는 뭔가를 조사하고 공부하는 능력보다 소설을 쓰는 능력이 주어졌던 게 아닐까 싶다.
아...기다리던 <벨벳 애무하기>를 야금야금 아껴읽었는데도 다 읽어버렸으니 이제는 어쩌면 좋담?
빅토리안 레즈비언 3부작중의 두번째 작품 <끌림>만 아직 번역되어나오지 않았는데, 나는 또 이런 설렘을 간직하면서 그녀의 또다른 작품 <끌림>과 <나이트 워치>, 그리고 올해 나왔다던 <작은 이방인>까지 즐겁게 기다리게 될 것같다. <끌림>같은 경우는 더 우울하고 어둡다던데 그 편이 내게는 훨씬 좋으니 어서 나와주기만을 기다려본다.

p.s 개인적으로 <끌림>은 보라색으로 나왔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아, <벨벳 애무하기>의 핑크색 책과 핑크색 책실은 너무너무 귀엽고 예뻤다. (보라색 책실!!!보라색 책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방불명자 오리하라 이치의 ○○자 시리즈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기희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작년말,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의 론도>를 보고 무척 깊은 인상을 받은 바, 애타게 도착 시리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같은 작가의 다른 시리즈인 '~자'시리즈가 먼저 나와버렸다. 기대하고 있던 작가라서, 이번 책도 기대를 하면서 읽었고, 도착의 론도와 마찬가지로 현란한 서술 트릭을 보여주는 소설인데,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다소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느낌이 들던 <도착의 론도>와는 달리, 작품이 전체적으로 무겁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거의 마지막까지 어떤 사건이 어떤 경위로 일어나고 있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아니, 읽으면서도 내내 헷갈렸고, 내가 지금 이 책을 제대로 읽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고, 어지러웠다.
그러면서도 어딘가에 끝이 있을거라는 사실, 어딘가에서 이 두가지 사건이 겹쳐질것이 분명하다는 학습된 경험으로 꾹 참고 끝까지 내내 안개속에서 헤메이는 듯한 기분을 이겨낼수 있었던 것 같다.

안개. <행방불명자>의 전체적인 느낌은 꼭 안개같다.
어느날 돌연히 사라진 사람들의 존재가 묘연하듯, 소설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잡힐듯 잡히지 않는다. 한 일가가 돌연 사라져버린다. 한사람의 실종도 아니고, 다키자와 일가족 4명이 한번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어느날 아침식사를 준비하다가 돌연 사라진 듯한 모양새.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여기에 여자 르포라이터 미도리가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어떤 남자가 다른 사람의 범행을 뒤쫓고 있다. 어느날 지하철에서 치한으로 몰리게 되 얻어맞는 남자는 억울한 마음에 자신을 모욕주었던 그 남자를 쫓아가게 된다. 언젠가 나타나서 꼭 사과를 받고 말리라 생각하는데, 뜻밖의 범죄에 휘말리게 된다. 흐린날에 부녀자들을 뒤쫓아 칼로 찔러버리고 사라지는 범인.
범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이 남자 하나. 소설가인 남자는 이 사건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소설 소재도 얻을 겸, 이 파렴치한 남자를 제손으로 응징할 겸, 남자를 뒤쫓게 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방관자 입장인 남자가 범인으로 몰리게 된다.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두 사건. 이 두사건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벌어지는 반전들이 주로 서술 트릭을 가진 소설들에서 자주 보여지는 속임수이다. 간혹 작가가 치사할정도로 꼼수를 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되는 서술 트릭들도 많지만, 다행히 이작품은 그 정도는 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다 읽고나서 머리속이 터지는 듯한 희열감을 주기에도 부족했다.
왜냐면, 서술트릭이 시작되기 전까지 작가가 너무나 뜸을 들이고 있기 때문에, 그 트릭을 만나기전까지는 다소 지루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반전을 극대화 시키기 까지 얼마나 감정을 억제하면서 썼을까 싶기도 한데, 중간중간 그 트릭들의 단서들을 좀 더 많이 흘려서 독자도 추리하게 만들수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식이라면 읽으면서 어쩐지 작가가 결말을 어서 보여주기를 기다리는 듯한 무척 수동적인 자세로 읽을수 밖에 없다.
또 하나, 지나치게 서술 트릭에 의지하고 있는 듯한 작품이라 아쉽다. <도착의 론도>역시 마찬가지이기는 했지만, 그 작품은 어딘지 장난 스러운 느낌이 들어서인지 이런 점이 크게 단점으로 작용하지 않지만, 작품이 무거운 경우에는 "반전"하나만 노리고 승부보기에는 좀 허무한 느낌이 든다.
다각도로 사건을 조명해보는 것또한 좋은데, 1인칭 화자가 너무나 많이 등장하는 점 또한 여러가지로 헷갈리게 만드는 점중 하나이다. 꼼꼼하게 짜여진 트릭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걸 표현하는데 지나치게 힘이 많이 들어간 것은 아닐까. 1인칭 화자가 여러명 등장하고, 텍스트 트릭에 집착한 나머지 결말을 너무 꼬아놓아서 읽는데 상당히 피곤해진다. 그것 외에도, 일가족 실종사건의 배후라던가, 범인이 여자들을 칼로 찌르고 다니는 이유 같은 것이 그닥 잘 납득이 가지도 않고...
여러가지 점들이 아쉬운 소설이라, 다 읽고나서도 내가 제대로 읽은 건지 의구심이 들었고, 기대에는 못미치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래도 오리하라 이치의 다른 소설을 기다리는 것은, 이번 작품이 다소 실망적이었어도 아주 최악까지는 가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 큰 재미를 선사할수 있을 것만 같은 작가가 내게는 오리하라 이치이다.
언젠가 또 즐거운 트릭속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즐거움에 비명을 지를수 있는 작품이 그의 손에서 나오길 바란다.
오리하라 이치의 소설이 나오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출간될 다른 소설들을 기다려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더 - Moth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상하고 기이하고 비틀어지다가, 마침내 만난다. 엄마라는 악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더 - Moth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를 재밌게 보고 나왔으면 기분이 한껏 상큼하고 즐거워야 하거늘, <마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마음이 한없이 불편해졌다.
나는 영화를 보기전 최소한의 정보만으로 영화를 보기 때문에, 그저 살인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된 아들을 빼내는 엄마의 눈물어린 사투-같은 것을 막연하게 생각했었고, 내게 있어 피보다 진한 가족애같은 것은 언제나 낯간지럽고 부담스러운 것중에 하나였으므로 봉준호의 영화를 기다렸으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피보다 진한 모성. 자신이 오로지 자기자신이 되지 못하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한 애정.
그래. 그것에 대한 영화 맞다. 그런데 왜 이리 등골이 서늘하고 마음이 불편하던지.

잔인함을 평가하는 기준 역시 다양하겠지만, 내 기준에서 이 영화는 무척 잔인한 영화였다.
보고싶지 않은 것을 보여준 것 같아서.
극장을 나오면서 내가 저 여인이었다면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 하고 생각해봤는데,
그보다 잔인하고 그보다 더 좋을 것 같은 방법이 없겠더라. 이성은 정의를 택하는데, 감성은 이기심을 택해버린다.
감정과 이성을 마비시켜버리고 이도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로써 이 영화는 아주 잔인해져버렸다.
모든 어머니의 마음속에 들어있을 것. 무한한 모성애가 이렇게 비틀어진 방식으로 보여지다니 정말 무서웠고, 마음이 얼어버리는 것 같더라.
이 영화를 보고 "엄마" 또는 "아줌마"라는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본인의 선택이다.
줘도 줘도 모자란 거대한 모성애에 대한 찬미라면 또 그럴수도 있겠고, (어쩌면 엄마들은 불편하게 바라보기보다는 당연하게 바라볼지도 모르겠다.) 그 거대한 모성애의 지나침이 "악"과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면 또 그럴수도 있겠다.
모든 여자안에, 모든 사람안에 "악"이 있다. 다만 엄마에게는 없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을 따름이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아줌마"라는 존재는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를 넘어선 제 3의 다른 인종이었을런지 모르겠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벌판에서 김혜자 아줌마가 홀로서서 뜻모를 춤을 춘다.
울듯 말듯, 웃을듯 말듯, 애매모호한 표정, 애매모호한 춤.
나도 그랬고, 극장안의 사람들도 모두 그 민망한 춤사위를 보고 키득댔던것 같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서 또다시 김혜자 아줌마는 춤을 춘다. 이번에는 다른 아줌마들과 같이.
이번에는 울듯 말듯한 애매한 표정도 아니고, 그녀가 무슨 표정으로 어떤 몸짓으로 춤추고 있을지 제대로 알아볼수 없다.
영화 시작할때 그랬듯, 영화 마지막의 그 춤을 보고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비슷비슷한 아줌마들에 섞여서, 자신의 표정을 감추고 그저 아줌마 집단이 되는 것.
맹목적 희생의 이름으로, 집착에 가까운 모성의 모습으로.
그렇게 뒤섞여 알수없는 춤추는 것처럼, 모든 아줌마들의 내면에는 이 영화의 주인공 그녀와 똑같은 모성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던건지. 첫장면의 춤보다 마지막 장면의 춤이 더 우스꽝스러운데도 도무지 웃음이 나질 않더라.
그리고 그녀가 오열하면서 "너는 엄마도 없어?"라고 말할 때는 나도 따라 울고 싶었다.
그녀가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듯, 나 역시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으니까...

최근 몇년간 본 영화들중에 가장 인상적인 오프닝과 엔딩이었고, 극장을 나오는 순간부터 무척 무겁고 불편한 감정이 가득하긴 했지만 "이런 맛에 영화본다-"싶을 정도로 멋진 영화였다.
봉준호식의 서민 스릴러는 이제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었구나.

엄마랑 이 영화를 보았더라면, 엄마는 뭐라고 말했을까. 엄마도 불편해 했을까.

최근 개봉하는 우리나라에서 꽤 주목받고 있는 감독들의 영화를 보다보면,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하기보다는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어떤 한가지에 치닫는 감성을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이 "지나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지나침에 우리 모두 미쳐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