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벳 애무하기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고전의 즐거움을 아는지.
별 특별한 사건이이어지지 않아도, 지금같은 세상에서는 식상하기 짝이없는 내용이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뭔가 손에서 놓아버릴수 없는 매력이 있다. (물론 모든 고전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살아보지 않은 시대에 대한 동경이 무럭무럭 생겨나는 것도, 세상 그 어느 소설보다도 주인공에게 환타지를 입히고 싶은 욕망이 드는 것도, 바로 고전의 매력이다. 어린 시절부터 고전소설, 특히 빅토리아조 소설들에 열광해 있던 내게 "빅토리아"라는 단어만으로도 나는 참을수 없이 약해진다. ("빅토리아"에 "고딕"까지 붙는다면 나는 그 소설이 무슨 소설이든 사랑에 빠질수 있다.)
고전이 아니면서도 고전같은 느낌이 드는 소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라 워터스의 <벨벳 애무하기>.
세라워터스의 소설을 읽으면 좀더 방종한 찰스 디킨스가, 좀더 솔직한 샬롯 브론테가 떠오른다.
그녀가 지어낸 책들에 "빅토리안 레즈비언 3부작"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어서만은 아니고,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행동과 관습, 사고방식이 꼭 그 시대의 것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학위를 받기 위해 빅토리안 시대의 동성애자들의 자료를 조사하다가 쓰게되었다는 데뷔작 <벨벳 애무하기>에는 그녀가 공부했던 빅토리안시대의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꼭 어린시절 보던 고전들중 내가 놓치고 읽지 않았던 것을 다시 읽는 기분이 들게 한달까.

어쨌거나 이야기는 윗스터블의 굴소녀 낸시가 남장여자가수 키티에게 반하면서 시작된다.
머리를 남자처럼 짧게 자르고, 바지를 입은 그 모습에, 그럼에도 미소년처럼 아름다운 그 모습에 반해버린 낸시는 열렬히 키티를 짝사랑하게 되고, 급기야 키티와 친해지더니, 결국 그녀와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되더니, 나중에는 그녀의 파트너가 되어 같이 공연하게 된다.
동성애 관계를 지속하며 함께 일하기란 힘든 법. 키티는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낸시와의 관계를 숨기느라 급급하고, 결국 굳건할줄 알았던 사랑을 저버리는 일이 생겨버려서 낸시는 키티에게서 도망쳐 온다.
그리고 낸시는 키티에 대한 복수심으로 남장한채로 거리의 남창이 되어버린다. (여자가 어떻게 남창이 될수 있는가 하겠지만, 낸시가 남장을 하면 너무 남자같아서 모두 남자로 본다.)
그러다가 돈많은 귀부인 다이애나의 눈에 띄게 되서 첩이 되기도 한다. 철저히 그녀에게 종속되어 자기 뜻대로 할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낸시는 그 생활에 만족한다. 왜일까? 윗스터블에서 런던으로 오면서 그녀는 우리가 흔히 말하듯 허파에 바람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낸시는 한때 연예장의 스타였고, 윗스터블에서 굴껍질을 까던 기억은 이미 옛날 옛적에 꾸던 꿈이나 마찬가지로 희미해져버렸고, 좋은 드레스, 편안한 생활에 너무도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낸시가 돈많은 귀부인의 아끼는 개가 되어 살아간다 해도 아무 문제 없었을터. 그러나 나태한 삶은 권태를 불러일으킬뿐이고, 서서히 그 화려하고 방탕한 세계에 질리게 될 때쯤, 낸시는 다시 거리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나는 여자 플로렌스. 사랑스럽지만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키티와도 다르고, 욕망을 위해 모든 것을 돈으로 사는 다이애나 레더비와도 다르다. 그녀는 철저히 독립적이고, 무척 선량하며, 성실하다.
그때문에 낸시는 그런 플로렌스에게 불만을 품지만 결국 서서히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전에 보았던 <핑거스미스>가 추리소설이라면, <벨벳 애무하기>는 성장소설에 가깝다.
바닷가 작은 마을에 살던 촌뜨기 소녀가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고, 그 후에 자존감을 찾아가는 모험같은 이야기.
사람이라면 왠만해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기란 힘들다.
살면서 나를 스쳐지나갔던 모든 사랑들을 떠올려보면서, 나는 그 사랑으로 많은 성장을 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사랑들이 모두 해피엔딩은 아니었고 많은 실패를 했기 때문에 나는 더 성장했다는 것 또한 깨닫는다.
한때 건방지던 내가, 한때 이해심부족하고 나밖에 없던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상처받는 것을 반복하면서 또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참 기묘하고 멋진 일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결국 그런 사랑을 통한 성장의 이야기이다.
소설 전반적으로 걸쳐 타인의존도가 굉장히 높은 이 낸시라는 아가씨가 책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물론 그 홀로서기 역시 자신의 힘만으로 이뤄내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과 얽혀 살게되면서, 오로지 나 혼자만으로 뭔가를 이루어냈다고 자신하는 것 또한 교만일테니. 플로렌스라는 또다른 사랑을 통해, 지금까지의 사랑과는 달리 몹시 현실적이고 냉철하며 성실한 사랑을 통해, 그녀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있어야할 자리를 드디어 찾게 된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을때는 겉돌던 아이가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뿌듯함이 느껴졌다.

<벨벳 애무하기>는 다소 울적했던 <핑거스미스>와는 달리 전체적으로 경쾌하고 쫀득쫀득하고, 제목처럼 깜짝 놀랄 정도로 대담하고 관능적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단어들에 깜짝 깜짝 놀랄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도 함부로 입에 담기 힘든 표현들이 어쩌며 이리도 뻔뻔스럽게 자주 등장하던지... 호모포비아는 보기 힘든 작품일지도 모른다.)
이미 영화로 먼저 보았기 때문에 내용은 거의 모두 알고 봐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재밌었다.
앞서 말했듯이 고전적인 즐거움이 가득하고, 그럼에도 결코 지루하지 않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 소설이다. 내용자체가 무척 독특해서가 아니라, 통속적인 뻔함을 아주 즐겁게 이야기해놓았기 때문에, 꽤 많은 분량과 빽빽한 글씨에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데뷔작부터 이렇게 재밌게 만들어버리다니, 처음부터 작가 세라워터스에게는 뭔가를 조사하고 공부하는 능력보다 소설을 쓰는 능력이 주어졌던 게 아닐까 싶다.
아...기다리던 <벨벳 애무하기>를 야금야금 아껴읽었는데도 다 읽어버렸으니 이제는 어쩌면 좋담?
빅토리안 레즈비언 3부작중의 두번째 작품 <끌림>만 아직 번역되어나오지 않았는데, 나는 또 이런 설렘을 간직하면서 그녀의 또다른 작품 <끌림>과 <나이트 워치>, 그리고 올해 나왔다던 <작은 이방인>까지 즐겁게 기다리게 될 것같다. <끌림>같은 경우는 더 우울하고 어둡다던데 그 편이 내게는 훨씬 좋으니 어서 나와주기만을 기다려본다.

p.s 개인적으로 <끌림>은 보라색으로 나왔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아, <벨벳 애무하기>의 핑크색 책과 핑크색 책실은 너무너무 귀엽고 예뻤다. (보라색 책실!!!보라색 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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