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므 파탈 - 치명적 유혹, 매혹당한 영혼들
이명옥 지음 / 다빈치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자극적인 제목에다가, 휘향찬란한 클림트 그림까지 곁들인 이 책은,
세계의 팜므파탈들과 그녀들을 그린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비단 역사속의 인물뿐만이 아니라 신화나 성경, 아니면 그냥 그림에 속해있는 팜므파탈들의 얘기다.
잔혹, 신비, 음탕, 매혹 4파트로 나뉘어져 있는 책인데,
워낙 팜므파탈들의 얘기는 누구에게나 호기심 갈만할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하지만,
이 책의 작가가 글을 참 선정적이고 극단적으로 쓴 것같기도 하다.
(보다보면 "아니..이사람까지 팜므파탈로...?"라고 생각될정도의 사람도 나온다.
약간 비약이 심하달까.
모델이 누군지도 확실치 않은 모나리자까지 팜므파탈로 만들어놓고 있다.)

또, 워낙 자극적인 소재에다가 작가가 자극적으로 쓰려고 노력을 했는지는 몰라도,
"팜므파탈"을 남자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고가는 악녀라고만 칭하려는 면도 이 책에는 상당하다고 생각한다.
아예 책속에 글에,
"팜므 파탈은 게걸스럽게 색을 탐하는 여성이나 냉혹하고 잔인한 요부.
흡혈귀처럼 남성의 정액과 피를 빨아 생명을 이어가는 사악한 여자를 의미한다.
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성을 유혹해 파멸시키고 지옥으로 빠뜨리는 탕녀가 바로 팜므 파탈이다."
...라고 써놓을 정도이니 꽤나 작정했나보다.
팜므파탈의 본래 정의는 그럴지 몰라도,
우리가 가끔 볼수 있는 팜므파탈들이 전부다 저렇게
남자를 이용해서 권력과 야심을 채우려는 것만은 아닐텐데..
너무 극단적인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점을 빼면, 재미있는 책이었다.
이책에 나오는 얘기들 중에 많은 부분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 것도 있지만,
이러한 여자들의 삶을 그림을 통해 자가 해석했던 화가들의 심리라던가, 그 화가들의 삶이라던가...
그런 것들이 잼있었던 책이었다.
(애초에 팜므파탈과 그림을 엮어보려고 했던 시도에도 박수를...)

금색의 화려한 클림트의 그림으로 시작해서,
책속안에 그림과 내지가 깔끔하고 예쁘게 정돈 되어있는 느낌이라,
소장하기에 적합한 책같다.

팜므파탈.
그 뇌쇄적이고 관능적인 이름...
참 멋진 소재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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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추하오. 여자보다 더 추한 게 어디 있소?
젖가슴이니 엉덩이니 기타 등등 같은 것들을
어떻게 달고 다닐 수가 있느냐고?

또 내가 여자들을 미워하는 건 희생자들을 미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요.

희생자들이란 비열한 족속들이지.
그 족속들을 몰살하고 난 다음에야 이 세상이 평화로워질 거요.
또 그래야 희생자들도 원하던 바를 이루게 될 거고.
즉 희생당하게 될 거란 소리요.

여자들은 별나게 사악한 희생자들이오.
그 누구보다도 그네들 자신에 의해,
그러니까 다른 여자들에 의해 희생되기 때문이지.

인간감정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고 싶거들랑 여자들이
다른 여자들에 대해 품고있는 감정에 대해 관찰해보시오.
그 지독한 위선과 질투와 악의와 비열함에 몸서리를 치게 될 거요.
여자들 둘이서 건강하게 주먹질을 해대며 싸우거나 억세게
욕지거리를 퍼부어대는 걸 본 적은 별로 없을거요.
여자들의 주무기는 비겁함이오.
야비한 말을 쏘아대는데 그게 턱에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리는
것보다 훨씬 나쁘지.
별 새삼스럽지도 않은 얘기를 한다고,
여자들의 세계는 아담과 이브 적부터
쭉 그래왔노라고 말하고 싶으실 거요.
난 말이오, 여자들의 운명이 지금처럼
최악이었던 적은 없다고
말하려는 거요... 자기네들의 잘못이긴 하지.
인정하오.
여성들의 처지는 허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진절머리 나게 보여주는 한 편의 연극이라오.

 

-아멜리 노통 "살인자의 건강법"중에서..

 

아멜리에 노통의  "살인자의 건강법"중에서 따온 글인데,

아멜리에 노통의 여자에 대한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생각하는 여자는 저런, 한없이 간교하고 야비한 존재이고,

나는 저글에 동감한다.

 

확실히, 여자는 남자보다 악하다.

만약 정말 악마가 있다면 악마의 성별은 여자일것이다.

특히, 다 크지 않은, 중성적이며 기민하고 비열한 소녀의 모습일 것이다.

 

비열하고 저급하고 유치하지만 민첩한 여자의 두뇌속.

나는 여자들의 악마성과 비열함을 증오하며, 또한 사랑한다.

나 또한 말로 표현하지 못할 그녀들의 머릿속의 생각을 읽고 나면,

한없이 씁쓸해지거나,역겹거나,

 나도 모르게 비웃거나, 가끔은 죽여버리고 싶은 열망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자들의 조잡한 악함이 좋다.

스릴과 긴장은 언제나 재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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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3
유일한 지음 / 청어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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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책을 사기전에 많이 망설여졌다.
저 삼류소설같은 제목때문이었는지,  왠지 애들 읽는 괴담 소설이 아닐까...싶어서
(게다가 저 위에 써있는 "초특급 공포소설"이라는 진정 삼류스러운 제목도 한몫했고)
살까말까 꺼려졌는데,
본 사람들 말에 따르면 보고 잠을 못잘정도라나...뭐 그래서,
일말의 기대를 해보고 1권만 우선 샀는데...
 
젠장.
정정한다.
정말 초특급 공포소설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다.
 
이렇게 숨통을 죄여오는 소설은 처음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도 어떤 면에서는 공포스럽지만,
쓰여진 말이 다르고, 사는 나라도 달라서인지 확실히 와닿는 느낌은 아닌데,
이 책에 비하면 스티븐킹 소설은 연애소설이다.-_-;;
왜 사람의 가장 큰 문제점은 호기심이지 않나.
"아..끔찍해..." "아...뭐야.. 놀랐잖아..."라고 말하면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고 한큐에 읽어버렸다.
끝이 궁금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정말 뻔한 삼류소설일것같아보였다.
치렁치렁하게 머리를 기르고 동네를 활보하는 미친 여자의 괴담과 같은 얘기가 나왔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그저 시작일뿐이었다.
 
그러나 끝에서는 실망을 감출수 없었다.
"버려진 집"편이 2권 정도의 분량이었다면,
좀더 디테일한 설명을 할수 있지 않을까.
거의 마지막까지 피튀기는 살육전과 정체를 알수 없는 공포를 실감나게 표현해놓았고,
그 연쇄살인의 뒷면에는 뭔가 상상도 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것만 같았는데,
 
뭐야..끝에는 이렇게 부실한 설명문만 써놓고 끝날수 있는건가..-_-;
이정도라면 앞에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추리할수 있게 할만한 분량 그대로가 되어버리잖아.
(게다가 그게 어딘가 석연치 않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빙의라던가, 다중인격이라던가, 영혼의 부활이라던가...하는 것의 이면에
더욱 현실적인 반전이나 살육의 이유가 있을줄 알았는데,
(아니뭐.. 그런 이유라면 이유가 될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원한살인이라고 치기에는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다 죽여버리니까
뭔가 뒤가 찜찜한...)
뭔가 끝에서는 핀트가 나가버렸지만,
마지막 단락인 "에피소드"전까지는
숨막힐정도로 스피디하게 무섭게 달린다.
 
사건은 주인공 일한(주인공이 작가이다.)에게 친구가 보내온 편지로 부터 시작된다.
의료조사차 경기도 연천으로 간 친구는 그곳에서 버려진 폐가를 맞딱들이고,
어떤 이유인지 모르게 미쳐버린 모습으로 돌아온다.
어느날 그 미쳐버린 친구가 병원에서 탈출해서 행방이 모호해지고,
주인공 일한과 친구의 여자친구가 연천으로 친구를 찾으러 가게 된다.
 
그 폐가에서는 예전 끔찍한 살인이 있었다.
미친 아버지가 중학생되는 아들과 사위감을 죽이고,
자기도 죽어버린 것이다.
유일한 목격자인 딸은 한동안 정신나가 미친채로 있다가,
결국은 자살을 하고 마는데,
 
더 황당한 것은
수십년전 이 집에서 한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후로 그 집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시체가 되어 발견이 되었는데,
왠지 모르게 이번에는 정말 본격적으로,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낫에 의해 끔찍하게 살인당한채 발견되는 것이다.
이 이면에 드리워져 있는 이 타인을 경계하는 씨족사회의 뿌리깊은 원한과
마을 사람들이 숨기려고 애쓰는 그것은 무엇일까.
 
이 소설에는 귀신도 나오고 연쇄살인범도 나오지만,
역시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이었다.
바로 옆집 사람이 죽어가도 도와주기는 커녕 자기 안위만 생각할 뿐인
그 잘난 "씨족 사회"와,
겉모습만 판단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무조건 적으로 증오하는 인간들이
재일 무섭다.
가장 친한 친구 인줄 알았던 사람은 내가 죽은 후에 내 딸을 강간하고,
그 알량한 자존심과 컴플렉스때문에 이유없이 무조건적인 증오를 퍼부어
결국은 이유없는 군중심리에 휘몰려 한가족을 몰살해버리는게 현실이라면,
차라리 평생 귀신과 동거하는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스피디 하게 진행되는 이책은
읽는데는 막힘없이 쭉~ 읽어나갈수 있었다.
연쇄살인범의 살인 역시 빈도도 잦을뿐더러 끔찍하기 때문에
그것은 정말 공포스러웠다.
 
아...
마지막만 괜찮았다면 정말 무서웠을텐데,
솔직히 책을 보면서 느꼈던 공포감이 결말보고 싹 사라졌다.
하지만 정말 무서웠던 책...
너무 많은 살육을 지켜본 것같은 느낌이 들어서
왠지 잠자리가 뒤숭숭할것같다.
 
 
p.s 1. 그런데 엄마의 무덤은 왜 파해쳐진거지?
p. s 2.  역시 총이나 둔기 살인보다 칼이나 낫같은 것이 훨씬 끔찍.
p.s 3. 주인공 이름이 작가 이름과 똑같으니 왠지 실존 이야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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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만차스 통신 - 제16회 일본판타지소설대상 대상수상작
히라야마 미즈호 지음, 김동희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아니면 정말 내 취향이 아닌 소설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다 읽고나서도 작가가 무슨 얘기를 하고자 했는지 전혀 모르겠다.
주인공이 소년이 아닌, 이미 성년이 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성장기적인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데,
이 남자의 인생은 기묘하게 뒤틀리고 모든 게 악몽처럼 몽환적이기만 하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끝이다.


현실을 초월하는 존재들, 이를테면, 소설속에 나오는 아이를 먹는 남자라던가,
거미같이 사람을 빨아먹고 사는 알수없는 생물체라던가,
민달팽이처럼 나체로 기어다니기만 하는 주인공의 형이라던가,
식물화를 꿈꾸는 사람이라던가,
그런 존재들은 주인공의 인생에서 그저 충격적인 모험담정도로만 보일 정도 일뿐,
더이상의 의미를 느낄수가 없었다.
너무 초현실인데다가 거기에는 어떤 연결고리도 없기 때문에 몽환적으로 느껴질지는 몰라도
너무 느닷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주인공의 누나가 이혼후에 아이를 먹는 남자를 만나 동거하는 이야기가 나왔을때는
너무 쌩뚱맞아 실소를 감출수가 없었다.


주인공은 나약하기 짝이없고 초의지박약한 인간으로, 타인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그때에는 자기비하로 넘어가 세상에 나처럼 쓸모없는 인간도 없을거라고 말하며
그대로 내버려두고 도망치면 끝이다.
후에, 종적도 알수 없게 된 가족에 대한 사랑도 누나에 대한 애착말고는 그다지 느낄수 없다.
다시는 만날수 없게 되어도, 그저 그런대로 끝인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죽어가는 누나의 유골을 가지고 어디론가 떠나면서,
다시 돌아가자, 라고 말해도,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론가의 회귀를 바라는 주인공이 이런 기괴한 사건들로 인해 무언가 변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의 변화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있다.
부모님이 소개해준 일은 맘에 안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결국은 끌려가듯 하고 말고,
끝에도 멋지게 박차고 나사 잘 모르는 누군가와 함께 떠난다.
지나치게 타인을 의지한다. 결국 타인을 믿지도 못하고 또다시 앞에 나서서 말하지 못하고 투덜거릴게 뻔하면서도.
어떤 일을 당해도 원인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힘으로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지도 않는 무기력함이
모든 일이 꼬이게하는 원인이라는 걸 왜 모를까.

라스만차스는 "라 만차"에서 유래된 말로, 소설속에 등장하는 영화의 이야기이다.
라 만차의 저주받은 혈통을 복수로 표현해 라스만차스.

풀이해서 말하자면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가족이 라스만차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이것을 저주받았다고 할수 있을까.
전 가족이 불행에 무덤덤하고 무기력하며 도망치기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어떤 운명적인 저주가 있었단 말일지.


모든 것이 꿈처럼 몽환적이고 너무 멀다.
그래서 이 소설도 너무 멀어서, 주인공의 이상한 여정에서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수가 없다.
그저 경험담일 뿐인가.
그다지 임팩트도 없고,  사건의 연결고리도 약해서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그래서?"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읽기 힘들정도로 짜증스럽지는 않았으나, 다소 지루하고 쌩뚱맞다.
초반부에는 레슬리 글레이스터의 "네번째아이"나 이언 뱅크스의 "말벌공장"을 생각하게 했으나,
뒤로 갈수록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상상하게 된다.
물론 해변의 카프카처럼 하는 일마다 잘되지는 않아서 차라리 나았다

그래도 극찬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소설이 별로 내 취향은 아닌가보다.


p.s 책내용과는 별 상관없는 얘기이지만, 나는 특이한 디자인의 책을 좋아하지만서도,
이 책의 표지 디자인은 읽기에 상당히 거추장 스럽다.
앞표지가 뒷표지까지 덮어씌우는 듯한 디자인인데, 책 자체는 예쁘지만 불편하다.
그래서 책을 보는 내내, 표지를 빼놓고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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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때 토니는 일기를 썼었다.

매년 1월이 되면 일기장 맨 앞에 활자체로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이다.

'토니 프레몬트'.

그리고 그 밑에는 자신의 다른 이름을 썼다.

'트몬레프 니토'

그 이름에는 어쩐지 러시아어나 화성의 언어같은 느낌이 있었고, 그녀는 그것이 기뻤다.

그것은 외계인이나 스파이의 이름이었다.

때로는 쌍동이의 이름, 즉 보이지 않는 쌍동이 자매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리고 토니가 더 성장해서 왼손잡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을때,

그녀는 자기가 실제로 쌍동이 였을지도 모른다는가능성과 마주치게 되었다.

 

즉, 그녀는 갈라진 수정란에서 왼손잡이 쪽의 절반에 해당하고 나머지 절반은 죽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어렸을때는 그 쌍둥이 자매라는 생각도 하나의 허구에 불과했으며,

자신의 일부가 없어진 듯 하다는 막연한 느낌이 구체화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둘은 쌍둥이였지만, 트몬레프 니토는 토니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더 강하고 더 대담했다.

 

토니는 자신의 외면의 이름은 오른손으로 썼고

또다른 이름, 즉 내면의 이름은 왼손으로 썼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 밖의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가 찾아낼 수 있었던 설명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것은

앤시아가-즉 그녀의 어머니가-해준 이야기에서 나왔는데,

그것은 세상이 왼손잡이들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토니가 어른이 되면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말도 했었는데,

그것은 앤시아가 약속했던 말 중에서 나중에 이루어지지 않은 수 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토니가 더 어렸을때 학교에서 교사들은 마치 그녀가 왼손으로 코를 후비다가 들킨 것처럼

그녀의 왼손을 손으로 철썩 치거나 잣대로 때리곤 했다.

어느 교사는 그 손을 책상 옆에 묶어두기도 했다.

그 일에 대해 다른 아이들이 그녀를 놀렸을 법도 한데, 그런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이유를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학교에서 토니는 금방 나오게 되었다.

대개 앤시아가 한 학교에 대해 넌더리를 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8개월 남짓이었다.

토니가 철자를 별로 잘 쓰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어쨌든 교사들의 주장은 그러했다.

그들은 그녀가 철자를 꺼꾸로 쓰며 숫자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때마다 앤시아는 토니가 천재라고 대꾸했고, 그때마다 토니는 곧 변화가 생기리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쯤 되었다면 앤시아가 화가 나서 교사들을 모욕하기 시작하는 것도 시간 문제니까.

'얼간이'정도는 그녀가 교사들에게 퍼붓는 욕설 중에서도 비교적 점잖은 편에 속했다.

그녀는 토니가 변화되고 고쳐져서 올바르게 되기를 바랐으며,

그것도 하룻밤 사이에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토니는 오른손으로 잘하지 못하는 일도 왼손으로는 쉽게 해낼 수 있었다.

오른손을 쓰는 생활에서는 늘 서툴었으며 글씨도 삐뚤삐뚤해서 볼품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아무 상관도 없었다.

왼손은 아무리 일을 잘해도 멸시되었으며, 반면에 오른손에게는 뇌물과 격려가 주어졌다.

물론 공평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앤시아는 인생자체가 공평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남몰래 토니는 계속 왼손으로 글씨를 썼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왼손에 뭔가 수치스러운 점이 있을거라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까지 모욕을 받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녀가 더 사랑한 것은 왼손이었다.

 

 

-마가렛 애트우드 <도둑 신부>

 

토니가 억압받는 왼손을 숨기듯이,

누구나 내면에 존재하는 자신보다 더 당당하고 공정하고 올바른 자기자신을 숨기면서 살아간다.

 

누구나 마음속에는 외면의 자기자신과 다른 모습의 자신이 살고 있다.

그러나 내면에 존재하는 더 당당하고 대담한 나의 왼손이 나타나는 순간,

타인들은 그것을 "인간의 악마성"이라고 매도하거나, 사람이 변했다고 하기도 한다.

오른손은 사람들에게 강요받고 권장받는 모습.

누구나가 기대하고 원하는 모습.

그리고 왼손은 타인에게 숨겨야 하는 수치심.

내면의 이기성과 대담성.

사실, 권장받는 오른손이든, 지탄받는 왼손이든,

둘다 내가 가진 손이라는 것은 마찬가지 인데도 말이다.

 

아무도 응원하지 않고 사랑해주지 않을,  누구나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왼손.

그러나 자기자신만은 오른손보다 왼손을 더 사랑한다.

그것이 좀더 솔직한 자기자신이며 진정한 자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왼손을 원하는 사람은,

자기자신 뿐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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