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읽기 힘들다거나 너무 재미없다거나 어려운 책은 아니었는데,
묘하게도 읽는데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걸린 책이다.
하루키 책은 상실의 시대와 태엽감는새 약간(보다가 때려쳤음)
그리고 해변의 카프카가 세번째이다.
이책 읽기 전에 읽은 정말 그저 그랬던 "암리타"와 고상한 척의 끝을 달려서 재수없는 "반짝반짝 빛나는"보다야
나로써는 훨씬 읽기 편한 느낌이었지만,
소설안에 너무나 널려져 있는 남성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좀 거슬리기도 했다.

그는 소설안에서 여자로 태어나서 남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의 입으로,
패미니즘을 "속이 텅 비어버린 사람들의 자기 증명"이라고 말하며 비꼬고,
일부러 극진파에 생각없이 막무가네로 말하는 패미니스트 여자들을 등장시킴으로써,
그 의견을 정당화 한다.
그다지 중요해보이지 않으나 어쨌거나 많이 등장하는 남근 강조에 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섹스신은 황당할 정도로 남성중심적이며,
소설에서의 여자는 모두 남자에 속해 있어야만 한다.
나는 패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그런 면들이 상당히 거슬린다.

게다가 지나치게 지적으로 보이려는 노력을 너무 하고 있는 느낌도 들었는데,
섹스머신인 여대생 창녀가 왜 하필 철학과 학생이고
섹스하면서 철학을 들먹여야 했을까.
거기에는 어떤 의미도 없는데...
모든 주인공들은 지적이며 차분하고 담담하다.
즉, 주인공들의 성격이 다르지 않다.
15세 소년이 예이츠의 시를 줄줄 외우고,
어떤 사건으로 인해 바보가 되어버린 할아버지도 자기가 머리가 나쁘다고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하는 행동을 보면 계산적인 행동도 많으며,
트럭운전사가 상대적인 관계성에 대해서 논하고,
(트럭운전사라서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 모르는 사람과 철학을 논하면서 얘기한다는 것이 좀 황당했다.)
고양이가 오페라를 듣는다.
어째서 고차원 적인 의미까지는 없어도 되는 부분에서까지
철학을 남발하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다른건 다 그렇다 치더라도 가장 싫은 것은
뜻한대로 모두 이루어지는 전재방식인데,
마치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뜻하고자 하면 하늘이 돕고 도울 사람들이 줄줄 나타나는 긍정적이다못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재수없던 "연금술사"나,
섹스에, 그것도 돈벌고자 몸을 파는 섹스에, 우주 삼라만상의 진리까지 다 넣으려는 "11분"이나,
15세 소년의 가출을 어느누구도 비웃거나 질책하지 않고, 신원도 모르는 사람을 한없이 도와주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해변의 카프카"나,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는 언제나 상실감에 대해서 얘기하고 이책에서도 그런 상실감이나 성장의 고통은 나타나지만,
마음속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현실적으로 주인공이 크게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 있을까.
15세 소년이 몇일 쓸 돈을 가지고 가출을 했다.
몇일은 비지니스 호텔에서 묶으면 되지만, 그후에 돈이 떨어지면 어떨지 걱정하던 차에,
자주 가던 도서관에서 방을 하나 내줄테니 거기서 지내면서 도서관일도 도우라고 하고,
어떤 사건으로 바보가 되어버린 한 노인이 어쩌다 사람을 죽이게 되어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여행을 떠나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먹을 것을 주고 차를 태워주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갑자기 휴가를 내고 그사람을 도와주는 부분까지 나왔을때는
책을 씹어먹고 싶을 정도로 짜증났다.



무엇을 잃었다는 말인가.
뜻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데,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보지 않더라도,
동화도 아니고, 이렇게 원하는대로 흘러가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보기에 짜증스럽다.

그가 말하는 터프한 세상은 이책 어디에 등장하는가?
그저 책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운동을 하다가, 꿈이나 꾸면 모든게 잘만 굴러가는구만.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이며 고생모르는 우아한 부르조아적 취미가 엿보일뿐인데,
어디에 터프한 세상이 있고, 어디에 진짜 인생이 있다는 말인가.

특별히 재미없지는 않았지만, 이것저것 거슬리는 면이 참 많은 소설이었고,
보고나니 웃음이 났다.
소설 자체보다도 책에 써있는 거의 "기쁘다 구주오셨네"스러운 광고문구들도 심히 거슬렸다.
역시 일본 소설답게 끝은 흐지부지 물탄듯....
그렇다고 특별히 재미없거나 의미없어보이지는 않았지만,
여러모로 왠지 대단히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소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평점 :
절판


아주 예전에 보았던 위노나 라이더와 게리올드만 주연의 드라큘라.
나는 이영화를 원작에 충실할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영화 드라큘라는 소설 드라큘라의 일부분을 확대 해석하여
드라큘라백작에게 인간적인 접근을 한것이었고,
원작과 등장인물들만 같을뿐 이렇게 쌩판 다를 줄이야...
소설 드라큘라를 로맨스무비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소설 드라큘라는 드라큘라 백작에 대한 인간적인 접근을 거의 전혀 하지 않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을 혐오스러운 짐승인 동시에,
아기처럼 순수한 영혼을 가진 가련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이 소설의 드라큘라는, 복수심과 잘못된 욕망에 허덕이는 괴물같은 존재로만 이야기 하고 있는데,
제목이 드라큘라일뿐인지, 정작 드라큘라백작은 많이 나오지 않을뿐더러,
그 최후도 상상 이상으로 허무하다.
영화에서 보았던 미나부인(영화에서는 위노나 라이더)과의 러브러브는,
그러니까 원작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영화 초반에 드라큘라의 희생양이 되어 죽었던 미나부인의 친구 "루시"가
흡혈귀가 되어가는 과정과 해결 방법이 책에서는 2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원작에서의 실제 주인공은 미나부인과, 미나부인의 남편 조나선과,

반헬싱 박사, 고다밍경, 수어드박사, 퀸시 모리스인데,
영화에서는 참 그들이 조연같았단 말이지...

청교도적인 결벽에 가까운 순결주의에 입각하여 쓴 소설이라,
보면서 여자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태도등이 현대를 살아가는 나에게는
못마땅하거나, 보기 불편했지만,
120년전 옛날 소설이니 만큼 그런건 어느 정도 이해하고 넘어가야겠다.
소설 초반과 중반부는 매우 재밌었으나,
후반에 드라큘라 백작을 잡으러 가는 부분은 상당히 지루해지는 감이 있고,
특히 드라큘라 백작의 최후는 정말 너무 짧게 끝나서 아쉽지만,
여러모로 재밌는 소설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책을 이끌어가는 서술 방식인데,
작가나, 또는 한사람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의 일기와, 신문, 전보문 등을 이용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설이 아니라 사건 기록파일을 읽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이런 미스테리하고도 흥미진진한 서술 방식에 매우 원츄를 보내는 바이다.
(이렇게 글 쓰기 매우 힘들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쥬베이 2007-12-24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즈님이 원츄를 보내신다니...고민되는데요^^
살까 말까 고민중이에요~ 괜찮을까요??

Apple 2007-12-24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소설도 재밌게 읽으신다면야 좋아하실지도..^^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파울로 코엘료식의 자아성장기를 무척이나 싫어하지만,

유일하게 좋아하는 파울로 코엘료의 책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2년전쯤 읽었는데, 읽자마자 양장본으로 나오더라..쳇!

24살 베로니카는 인생에서 행복도 불행도 느낄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려서 죽기로 결심했지만,
안타깝게도 자살미수에 그쳤다.
그런데 더 문제는 그러고 살아가면 되는데, 수면제 부작용으로 "죽어가고"있는 것이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일주일 남짓.

차라리 결심했을 때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어쩌다 살아남아 몇일 살다보니,
갑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몸은 썩어들어가고 있는데, 자꾸만 살고 싶은 의지가 생겨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녀는 많은 오용을 부렸었다.
가장 뻔하고 쉬운 결단을 내린체, 자신을 결정력있는 독립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를 우러러보는 친구들을 우습게 생각했고, 자신을 따르는 남자들을 도도하게 거절한 후에,
그 잘난 자존심으로 수녀원 방구석이 틀어박혀서 잘 나오지도 않는 TV와 읽고 싶지 않은 책을 읽으며 삶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았고, 그런 생활에서 행복할것도 불행할것도 없었기 때문에,
죽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 죽기로 결심하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입장이되니, 모든것이 후회스럽고 그리워진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은 역시 객관적일수 없다.
어느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왔는데, 딱 한달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무엇을 하게 될까?

죽음을 앞둔 베로니카는 해보지 않은 행동들을 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루마 2005-12-04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 소설이나 드라마로 자주 접하게 되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이야기는 시한부인생에 관한 이야기인데 베로니카...는 참 특이한 설정이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삶이 죽음보다는 가치 있는 선택이기 때문이라는 건지....
사실 죽음이 아니더라도 내가 선택한 것과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집착은 너무도 상반된 것이긴 해요
이 책을 읽으면서는 '죽음을 앞둔 일주일...'에 대한 상념보다는 자꾸 '선택'의 의미에 대해 떠오르게 되더라구요
도대체 작가가 의도한 주제에 맞춰 생각하지를 않게 되네요 ㅎㅎ
청개구리 과인듯;; ㅋ

Apple 2005-12-05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보면 식상하지만,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사람인듯이,
죽음보다는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는 편이 훨씬 쉽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저는 유일하게 괜찮게 읽었던 파울로 코엘료의 책이었던것같아요.허허..^^
 
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전에 읽었던 빠뜨리크 쥐스킨트의 단편집 "깊이에의 강요".


세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매우 얇은 책인데,
다섯장이나 될까말까한 굉장히 짧은 첫번째 단편
"깊이에의 강요"를 보고 울고싶은 기분이 들었다.

젊고 아름답고 장래가 촉망되는 여류화가가 있었다.
어느날 한 평론가가 그녀의 작품에는 깊이가 없다고 무심코 던진말에 처음에는 신경쓰지 않았는데,  그 평론글이 사람들에게 읽혀지면서,  다른 사람들의 반응 역시 그렇게 바뀌어간다.

"다 좋은데 깊이가 없어..."라고...

여자는 여러날 고민하고 연구해봤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화실에 처박혀 있지만 선하나 긋기도 힘들고, 자기에게 다가온 남자가 유혹을 해오자,
"난 깊이가 없으니 알아두는게 좋을거예요."라고 말할 정도로,
병적으로 깊은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결국은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을 꾀하는데,
바람이 매우 많이 부는 날이라, 그녀는 바람에 날려 나무로 떨어졌지만, 죽었다.

여자의 비현실적인 죽음을 신문과 TV에서 특종 보도하고,
피폐해진 화실을 낱낱히 공개하며 비웃음을 짓는다.
그녀를 죽게한 평론가는 그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못한채,
당혹감만 표시해버린다.

이런 이야기를 가진 정말 짧은 단편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평가를 받고 산다.
하지만 예술분야에 있는 사람들만큼 누군가의 평가로 먹고사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만화나 소설이나 그림이나 음악이나,
감상자에게 평가를 받는 순간 가치가 판별된다.
그래서 혹독한 비평을 받기도 쉽다.

일부러 비평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기왕에 평가를 받을거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을 선호하는것은
사람인 이상 당연한거다.
하지만 그건 비현실적인 이상에 불과하다.
그러니 차선책으로는 보다 "정중"하고 보다 내게 도움이 되는 비평을 원한다.
그러나 평가의 글중에서 많은 글들은
너무 자기자신의 취향에 기대있거나, 일방적인 비방에 그치거나,
창작자의 머리꼭대기에 올라서 애매모호한 지성을 강조하는 말로 가르치려고 든다.
가끔은 남을 욕하므로써 쾌감을 얻는 사람들도 있고,
다같이 욕하면 욕해도되는줄 알고 따라서 욕하는 주관없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왜 모를까.
창작자들은 모두 예민하다는 걸.
예민하기 때문에 창작을 할수가 있다는 것을.
누군가의 무심코 던진 단 한마디의 말이
누군가를 죽고싶을 정도로 괴롭게 할수 있다는 것을.

타인의 평가는 사실 부질없다.
그래서 혹독한 비평을 봐도 모르는척 넘어가는게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의 대응책인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런 걸 누가 항상 익숙하게 해낼수 있을까.
아무리 많이 들어도 상처가 되는 것은 상처가 되는건데...
아무렇지도 않다면 너무 지쳐버린게 되는 건데...

아마도 소설속의 여류화가가 듣고 싶었던 말은,
"깊이가 없지만 뭐 어때-"였을지도 모르겠다.
뭐 어떤가. 깊이따위 없어도.
깊이있는 예술이 누군가를 감동시킬수 있는 것처럼,
깊이가 없는 예술도 누군가를 즐겁게 할수 있는 것인데.
사실이 그렇다 해도 정확히 찝어서 "당신에게는 깊이가 없습니다."라고 말해서 상처를 줄 필요는 없지 않나.

어쩌면 저 얘기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저 짧은 소설에서 특종만을 쫓는 잔인무도한 매스미디어의 이야기까지 전부 담고 있으니...
외소하고 내성적이고 누가봐도 외골수 일것같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이야기는
언제나 냉소적이고 삐뚤어져있고 허무하고 잔인하다.
사사로운 감정은 표현하지 않는 문체 또한 한몫한다.
나는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건조하고 냉소적이고 삐뚤어져있는 외골수 주인공들속에서
나를 보니까.

그의 소설에서 항상 가장 환상적인 부분은
누군가 죽을 때를 묘사할때이다.
"향수"의 그루누이나 "좀머씨 이야기"의 좀머씨나,
또는 그 여류소설가처럼, 그는 항상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죽음을 이야기한다.
그의 소설에서 죽음이란 아마도 죽음이라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괴로운 것에 대한 해방인것은 아닐까.

겨우 몇장되는 소설을 읽고, 소설 한권 분량은 될것같은 생각을 하게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빨간 귀걸이를 한 고양이
와타나베 준이치 지음, 홍영의 옮김 / 초록배매직스 / 1998년 1월
평점 :
품절


오래전 친구에게 선물받았던 책이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미모의 여의사 니반초는 사실 레즈비언이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여자들을 유혹해 자기집으로 끌어들여 섹스와 SM을 즐기는데,
이여자는 자신을 레즈비언이라 부르지 않고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자라고 부른다.
그녀는 자신은 여자들의 쉽게 변해버리는 마음같은건 믿지 않고,
솔직한 몸만을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녀에게는 3명의 노예가 있다.
같은 병원 간호사, 먼친척 뻘 되는 여대생, 다리를 잘려버린 병원의환자 무용수...
이렇게 3명...
그들은 니반초에게 영생이라도 약속할 것처럼 굴다가,
마지막에는 모두 떠나버린다.
간호사는 시집을 가버리고, 여대생은 유학을 가버리고,
무용수는 니반초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떠나간다.
니반초는 그녀들이 떠나가기전에, 그녀들을 집에 불러서
메스로 귀에 구멍을 뚫고 루비귀걸이를 달아준다.
한때라도 자신의 노예였다는것을 그녀들이 기억하기를 바라며...


이 소설을 읽고 느낀 점이 참 여러가지 있는데,
일단은 너무 글씨가 없다는 점이다.(한장에 두줄써있는 장도 있다.)

보면서 조금 기분나빴던 것은,
성적으로 자유롭고, 남자에게 절대 굴복당하지 않으며 능력있는 여의사로 혼자 자립한 완벽한 여자처럼 그려지는 니반초에게 어쩔수 없는 여자의 굴레와 상처를 덧씌운것이다.
그녀가 레즈비언이 된 사연이 꼭 필요했을까.
원래도 그런 성향의 사람은 충분히 있는데,
여느 영화나 소설에서 질릴대로 울겨먹듯이 어린 시절이나 학창시절에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후 남자 혐오증이 걸려버렸다는 이유를 꼭 넣어야 했을까.
왜 니반초의 성격와 취향뒤에 굳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놓고
"어떻게 생각하면 불쌍한 여자"라는 느낌을 갖도록 유도했는지 이해할수가 없다.
강간 당한후 남성 혐오에 빠지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결혼해서 잘 살아가는 사람도 많을텐데, 왜 꼭 이런 식으로 영화나 소설에서는  레즈비언과 강간당한 여자를 한데 묶어버리려고 할까.


혹시 남성의 손에 씌여진 소설이라 그럴까.
마치 많은 야오이 소설에서 강간을 당하고 게이가 되듯이,
레즈비언과 강간 역시 그런 환상인 것일까.

재미없지는 않았지만, 여러모로 찝찝한 책이었다.
게다가 많은 일본 소설이 그러하듯 끝이 역시 흐지부지하게 끝난다.
아...이런 엔딩 정말 싫단 말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