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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전에 읽었던 빠뜨리크 쥐스킨트의 단편집 "깊이에의 강요".
세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매우 얇은 책인데,
다섯장이나 될까말까한 굉장히 짧은 첫번째 단편
"깊이에의 강요"를 보고 울고싶은 기분이 들었다.
젊고 아름답고 장래가 촉망되는 여류화가가 있었다.
어느날 한 평론가가 그녀의 작품에는 깊이가 없다고 무심코 던진말에 처음에는 신경쓰지 않았는데, 그 평론글이 사람들에게 읽혀지면서, 다른 사람들의 반응 역시 그렇게 바뀌어간다.
"다 좋은데 깊이가 없어..."라고...
여자는 여러날 고민하고 연구해봤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화실에 처박혀 있지만 선하나 긋기도 힘들고, 자기에게 다가온 남자가 유혹을 해오자,
"난 깊이가 없으니 알아두는게 좋을거예요."라고 말할 정도로,
병적으로 깊은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결국은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을 꾀하는데,
바람이 매우 많이 부는 날이라, 그녀는 바람에 날려 나무로 떨어졌지만, 죽었다.
여자의 비현실적인 죽음을 신문과 TV에서 특종 보도하고,
피폐해진 화실을 낱낱히 공개하며 비웃음을 짓는다.
그녀를 죽게한 평론가는 그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못한채,
당혹감만 표시해버린다.
이런 이야기를 가진 정말 짧은 단편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평가를 받고 산다.
하지만 예술분야에 있는 사람들만큼 누군가의 평가로 먹고사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만화나 소설이나 그림이나 음악이나,
감상자에게 평가를 받는 순간 가치가 판별된다.
그래서 혹독한 비평을 받기도 쉽다.
일부러 비평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기왕에 평가를 받을거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을 선호하는것은
사람인 이상 당연한거다.
하지만 그건 비현실적인 이상에 불과하다.
그러니 차선책으로는 보다 "정중"하고 보다 내게 도움이 되는 비평을 원한다.
그러나 평가의 글중에서 많은 글들은
너무 자기자신의 취향에 기대있거나, 일방적인 비방에 그치거나,
창작자의 머리꼭대기에 올라서 애매모호한 지성을 강조하는 말로 가르치려고 든다.
가끔은 남을 욕하므로써 쾌감을 얻는 사람들도 있고,
다같이 욕하면 욕해도되는줄 알고 따라서 욕하는 주관없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왜 모를까.
창작자들은 모두 예민하다는 걸.
예민하기 때문에 창작을 할수가 있다는 것을.
누군가의 무심코 던진 단 한마디의 말이
누군가를 죽고싶을 정도로 괴롭게 할수 있다는 것을.
타인의 평가는 사실 부질없다.
그래서 혹독한 비평을 봐도 모르는척 넘어가는게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의 대응책인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런 걸 누가 항상 익숙하게 해낼수 있을까.
아무리 많이 들어도 상처가 되는 것은 상처가 되는건데...
아무렇지도 않다면 너무 지쳐버린게 되는 건데...
아마도 소설속의 여류화가가 듣고 싶었던 말은,
"깊이가 없지만 뭐 어때-"였을지도 모르겠다.
뭐 어떤가. 깊이따위 없어도.
깊이있는 예술이 누군가를 감동시킬수 있는 것처럼,
깊이가 없는 예술도 누군가를 즐겁게 할수 있는 것인데.
사실이 그렇다 해도 정확히 찝어서 "당신에게는 깊이가 없습니다."라고 말해서 상처를 줄 필요는 없지 않나.
어쩌면 저 얘기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저 짧은 소설에서 특종만을 쫓는 잔인무도한 매스미디어의 이야기까지 전부 담고 있으니...
외소하고 내성적이고 누가봐도 외골수 일것같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이야기는
언제나 냉소적이고 삐뚤어져있고 허무하고 잔인하다.
사사로운 감정은 표현하지 않는 문체 또한 한몫한다.
나는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건조하고 냉소적이고 삐뚤어져있는 외골수 주인공들속에서
나를 보니까.
그의 소설에서 항상 가장 환상적인 부분은
누군가 죽을 때를 묘사할때이다.
"향수"의 그루누이나 "좀머씨 이야기"의 좀머씨나,
또는 그 여류소설가처럼, 그는 항상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죽음을 이야기한다.
그의 소설에서 죽음이란 아마도 죽음이라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괴로운 것에 대한 해방인것은 아닐까.
겨우 몇장되는 소설을 읽고, 소설 한권 분량은 될것같은 생각을 하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