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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F가 된다
모리 히로시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컴퓨터가 없는 하루는 365일 중에 거의 없으며, 매일 같이 들고 다니는 핸드폰은 이제 거의 컴퓨터화 되어있는데,
이런 요즘에서도 컴퓨터 지식이라던가, 가상세계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소설을 보면,
그래도 아직도 SF 느낌이라고 느끼는 것은 내가 촌스러워서 일까.
어쨌거나 이제와서는 전혀 새로울게 없는 가상세계에서의 카트 게임이라던가, 메신저라던가, 텔넷이라던가,
컴퓨터 용어가 잔뜩 등장하지만, 지금 와서는 누구나 봐도 전혀 어려울 것이 없는 소설,
거의 주인공 전원이 이공계 계통의 공학도들인 소설 "모든 것이 F가 된다."
약간 스포일러이지만, 제목에서의 F는 15(Fifteen)의 약자.
16진법에서의 가장 큰수인 15와 마가타 시키 여사의 인생이 바뀌는 결정적인 나이인 15살.
그리고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F가 되겠다.
많은 추리소설의 고전적인 살인 수법인 밀실 살인 트릭은 추리소설에서는 흔하지만,
각기 다른 트릭을 조목조목 설명해나가는데에서는 언제봐도 신기하기 이를데 없다.
이 소설은 고전적인 밀실 살인의 이야기이지만, 기계라던가 슈퍼컴퓨터라던가 하는
어쩐지 SF에서나 등장할 법한 느낌으로(아까도 말했듯, 지금와서는 싸이파이도, 공상과학도 되지 않지만,-_-;)
풀이해나가고 있어서 촌스럽다거나 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15살에 부모를 살인하고 해리성 인격 장애로 판명받고 감옥에는 가지 않았으나,
외딴 섬의 외딴 연구소에 틀어박혀 자신이 만들어낸 네트워크안에서만 존재하게된 천재 마가타 시키 박사.
주인공 사이카와와 모에, 두 주인공이 마가타 시키 박사를 만나기 위해 연구소로 찾아갔다가
팔다리가 잘린채 웨딩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마가타 시키 박사와 대면하게 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연구소안에는 200명이나 되는 연구원들이 있지만,
모두 자기 공간에 틀어박혀 일하고 생활하기 때문에 타인과의 접촉은 그닥 없다.
게다가 마가타 시키 박사는 몇년간, 누구도 만나지 않는 은둔 생활을 즐기고 있고,
실제로 같은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거의 7,8년간 누구도 그녀를 실제로 대면하지는 않았다.
창문도 없는 연구소안에서의 이동기록이나 통화내역, 그외 모든 세상과의 접촉은 모두 기록이 되고,
언제나 카메라가 뒤쫓고 있기 문에, 범죄가 있었다면, 어떻게서라든 증거가 카메라에 남기 마련이다.
이런 연구소에서 사람이 죽었다.
누가 들어올 틈도, 나갈 틈도 없는 곳에서 어떤 기록도 하나 없이,
천재 마가타 시키 박사가 살해당했다.
도대체 누가, 어떤 사연으로, 어떻게, 이렇게 철통같은 연구소안에서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까?
스포일러를 뺀 대략의 이야기는 이렇다.
중반까지 읽으면서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었는데,
아마도 첫번째 이유는 문체 자체가 너무나 단조롭고 간결하기 때문이고,
두번째 이유는 주인공인 건축과 교수 사이카와가 가끔 던지는 뜬금없이 철학적인 대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대사들은 어쩐지 주인공을 지적으로 보이게 하는게 아니라 겉멋에 빠져 보이게 한다.)
그러나 중, 후반부부터 등장하는 사건의 전말이라던가, 밀실 트릭이 시원하게 풀어지는데에서부터는
이 소설이 내 생각만큼 유치하고 단순하고 뻔한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느껴서
결국 꽤 재밌게 읽었다.
다 보고 나서 애정이 생기니, 단순한 문체 또한 잘 읽히니 그런대로- 라고 생각하게 된다는...-_-;
단점이 있다면, 역시 문체의 문제가 있겠고,
(추리소설에서 그닥 수려한 문체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정도는 너무 단순하고 심심하다.)
캐릭터들이 별 매력이 없다는 데 있겠다.
시리즈 추리소설의 경우, 오랜 시간동안 책을 고대하며 읽게 만드는데는
주인공의 매력이 50% 이상은 차지한다고 생각하는데,
차갑지는 않지만, 어쩐지 기계적이고 은둔자적인 주인공 사이카와와,
부모님 빼고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천재형 공주님 모에의 캐릭터는
얼핏 요약해서 말하자면 꽤 개성있어 보이지만, 막상 소설에서는 별 매력이 없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이카와는 9천엔 짜리 시계를 죽을 각오를 하고 사는,
현실적인 부나 명성에는 그닥 관심이 없고 자기 세계에 틀어박히는 것으로 만족하는 남자이고,
모에는 20만엔 짜리 시계를 별거 아니라고 느끼는,
모든 것이 풍족해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거의 전혀 모르는 여자이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지만, 모에는 사이카와를 짝사랑하고 있고, 사이카와도 조금은 모에를 여자로 느낀다.
그러나 캐릭터 자체의 통통 튀는 매력이 그닥 없으니 이 연애전선도 조금 시시하다.
차라리 사이카와가 아예 기계처럼 차가웠더라면, 모에가 조금더 공주스러웠더라면,
차라리 매력이 있었을 듯.
성격에 무언가 빠진듯 밍숭맹숭해져버렸다.
그러나 몇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 박사로 나오는 마가타 시키여사의 이야기와 캐릭터는
마치 한니발 박사를 떠올리는 듯 두려우면서도 매력적인, 비현실적인 매력으로 가득하다.
모리 히로시의 소설중에 사이카와와 모에가 나오는 시리즈가 10권,
마가타 시키가 주인공인 시리즈가 4권이라는데,
만약 전부다 출판이 될수 있다면, 마가타 시키 여사 시리즈는 보고싶다.
이 소설에서 가장 재밌는 부분은 역시 마가타 시키 여사의 이야기와 밀실 살인 트릭이 풀어지는데 있지 않을까.
하긴, 많은 추리소설이 그렇지만 말이다.
추리 소설을 여러번 읽다보면, 언제나 초반부에서 범인은 보인다.
무언가 수상해보이고, 어딘지 비밀에 휩쌓인 등장인물이 대게는 범인이다.
그러나 독자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을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추리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가 아니라, "왜"라고 생각한다.
"왜"라는 질문에서 소설이 내놓은 답이 시원치 않다면, 그 추리는 실패이다.
아무리 정교한 트릭을 쓰더라도, 모든 것에는 이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꽤 재밌는 소설이었고, 이공계 계통의 추리소설이라 딱딱하거나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문과 계통의 교고쿠 나츠히코의 "교고쿠도 시리즈"보다 훨씬 쉽고 깔끔하게 읽혔다.
특히 가볍게 읽기에는 참 좋은 소설이지만, 이 쉽고도 빨리 읽히는 장점은
깊이가 얕다는 단점으로도 이어진다.
어쨌거나 일본에서 현재 아주 인기가 많은 소설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서의 인기는 그닥..
하긴, 우리나라에서 언제 추리 소설이 인기있었던 적이 있었나...
아무래도 다음권들은 나오지 않을 듯 싶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왔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
p.s 원래 건축과 교수로 모형 철도를 만들기위해 밤에만 할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다가
소설을 쓰게되었다는 작가 모리 히로시.
이런 식으로 작가가 된 사람들은 꽤 많지만,
역시 자기 재능을 하나에 국한하지않고 넓힐줄 아는 사람들은 부럽기 짝이없다.
하기사 하나라도 제대로 해내는 사람이 세상에 몇%나 될까만은,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참 복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