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동물 공동묘지 - 상 밀리언셀러 클럽 33
스티븐 킹 지음, 황유선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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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킹의 팬이라고 할수는 없지만, 그래서 읽은 거라고는 아주 유명한 소설들 몇개 뿐이지만,
개인적으로 스티븐 킹의 소설들은 재미있게 읽고 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의 매력은 역시 영화처럼 머릿속에 정확히도 그려지는 이미지일텐데,
어떤 장면에서는 슬로우화면으로, 어떤 장면에서는 에코 가득한 독백으로,
또 어떤 장면에서는 흑백처리로, 이런 식으로 마치 영화를 보듯 머릿속에 구체적인 장면이 그려지기 때문에,
아마도 그래서 스티븐킹의 소설들중에 유난히 영화화 된 소설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는 스티븐킹의 "애완동물 공동묘지"는,
아주 간단히 설정만 정리하자면, 에드가 엘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와 좀비물을 바탕에 깐
가족애가 주요 설정이라고 할수 있겠다.
(뒤 쯤에서는 엑소시스트나 사탄의 인형이 생각나기도 했고...-_-;)
 


화목한 네 식구가 아버지의 직장 이전으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건너편에 사는 묘하게 정이가는 저드 부부와 친해지고,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있는 사이, 딸이 무척이나 아끼는 고양이가 죽고만다.
아직 죽음에 대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해서 두려워하는 딸을 위해,
아버지 루이스는 이웃에 사는 저드의 아이디어로 딸의 고양이를 애완동물 공동묘지에 묻게 되고,
다음날, 고양이는 멀쩡히 살아서 돌아온다.
 

겉모습은 다름없으나, 이전같은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좀비 고양이.
다행히 이 일은 루이스와 저드 둘만의 비밀이 되었지만,
죽었다가 살아왔다는 점도 그렇고,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행동들이나,
날이 갈수록 아무리 씻겨도 지워지지 않는 부패의 냄새때문에,
루이스도, 가족들도 암묵하에 그 고양이를 경멸하게 된다. 
 

그리고 아들이 죽는다.
고양이가 그랬듯이, 집앞 도로에서 차에 치여 아버지와 어머니 눈앞에서 두살짜리 아들이 죽은 것이다.
거의 반 미친 상태로 여러번 생각을 고쳐먹어도,
아버지 루이스에게는 한가지 욕망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애완동물 공동묘지에 사람을 묻는다면?
그래도 다시 되살아올까? 
  
 

샤이닝에서 알콜에 대한 그리움(?)때문에 서서히 미쳐가는 아버지가 등장했던 것처럼,
이 소설에서는 부성애로 미쳐가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은 후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아들을 그리워하며,
절대로 오지 않을 아들의 미래를 혼자 꿈꾸며, 그는 서서히 미쳐가며,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질러버리고 만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이 미신적인 악의 기운이 넘치는 애완동물 공동묘지 때문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의아하기 까지 하고,
호의에서 제안했다고 보기에는, 상대방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애완동물 공동묘지로 데려가버린
일방적인 노인네 저드의 행동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애초에 발단이 된 고양이 처치의 이야기는 잊을만 하면 간간히 등장할 뿐이라 슬슬 의미가 좀 모호해 지기도 해서,
보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보게되었다.

또, 묘하게도 군더더기가 많아서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지나치게 자세한 묘사 또한,
서스펜스를 넘어서 좀 지나치게 이야기를 연장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어쩐지 지루하기도 했다.
(<상>권의 중반쯤 가서야 슬슬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아들이 죽고 나서 사흘간의 이야기가 거의 한권분량이 되어서, 더딘 진행에 조금 화가나기도.....)
 
스티븐킹의 아내는 이 소설을 무서워서 끝까지 읽지 못했다고 하던데,
사실 뒤로 가서 루이스가 아들을 되살릴 결심을 하는 부분부터는
으스스한 느낌을 받을수 있다고는 생각되지만, 정확히 어디가 그렇게 무서웠을지는 모르겠다.
스티븐 킹의 아들이 실제로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할 뻔 한 적이 있다던데,
아마 그때를 떠올려서 아내가 무서워했던 것일까.
아니면 서양인과 동양인의 정서상의 차이인가.
하긴, 스티븐킹의 다른 소설들도 진심으로 무서웠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내 취향이 변한 건지, 아니면 원래 이 소설이 이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전의 스티븐 킹의 소설들과 비교하자면, 어딘지 뜨뜻미지근한 소설이었다.
그래도 아주 기본적인 미덕(잘 읽히는 편)은 있기 때문에 읽기 어렵지는 않았지만,
매너리즘이 보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 기분 탓일까.
어떤 장면에서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긴장을 느끼고, 어떻게 해야 불안감을 느끼는 지
작가자체가 아주 잘 알고 있어서, 잘 말하면 노련함이 느껴지고, 나쁘게 말하면 신선하지 않다.
한권정도 분량으로 줄여서 지독히도 자세한 심리묘사와 장면 묘사를 조금만 더 줄이고,
독자에게 생각해본 여운을 남겼더라면,
더 밀도높고 박진감넘치는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p.s 역시 가장 불쌍한 건 고양이....
죄도 없이 죽었는데 죽지도 못하고 되살려놓고 구박당한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인간들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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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멘트 가든
이언 매큐언 지음, 손홍기 옮김 / 열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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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사춘기에 대해 굉장히 흥미를 느꼈다. 그것은 내가 막 거쳐 지나온 바다였다... 나의 소설이 온통 근친상간, 자위행위, 신체적 결함 등만을 묘사한다고 비난하는 독자들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죄와 벌의 문제를 다루는 도덕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문제는 인물들의 무의식 세계이며, 그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구조와 어떻게 갈등을 일으키는가, 그리고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 사이의 괴리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이다.

-저자의 말
 


...라는 저자의 쿨한 소견이 마음에 들어서 보게된 소설 "시멘트 가든".
상당히 묘한 소설이었는데, 다 보고 나서 잠이 들었을 때는 정체모호한 꿈을 꾸었다.
이 책은 내가 가끔씩 꾸는 악몽이라고 말하기 뭣한,
꾸고나면 기분이 아주 이상야릇하고 기분이 안좋아지는 꿈과 아주 흡사한 느낌을 받아서,
보는 내내 그런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생경하고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어느날 집에 시멘트 푸대들이 도착하고, 아버지는 자신만의 정원을 꾸미기 시작한다.
채 다 완성되기 전에,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버리고,
뒤 이어 어머니 역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버려서,
이 커다란 집과 미완성의 시멘트 가든에 네 남매가 남겨진다.
 
어른이 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어린아이들도 아닌, 사춘기의 소년과 소녀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을 무의식중에 정해가기 시작하고, 점점 사회와 벽을 쌓아가기 시작하는데,
그들이 이렇게 고립되는 이유는 자신들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당장 밖으로 나가면, 사람들이 있다.
늘 다니던 학교도 있었고, 정상적인 사회도 그 시멘트 가든 밖에는 존재하지만,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기자신들을 시멘트 가든에 가두고,
그 안락함에 취해버리고 만다.
 
화자인 둘째인 잭은, 거의 어른에 가까운 누나 줄리를 동경과 사랑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보고,
누나는 그런 잭을 모호한 눈길로 응시하며,
셋째인 수는 책의 세상속으로 빠져들며,
막내인 톰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에게 맞는 것이 싫어서 여자가 되기로 한다.
누구도 이것을 비정상적이라 느끼지 않는다.
시멘트가든 안의 네 아이들은 그것이 자신들이 만든 당연한 사회라고 생각하지만,
누나의 남자친구 데릭이 등장하면서, 이 고립된 사회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근친상간과 어머니의 시체를 시멘트로 덮어버린 지하실.
윗층에서는 어린 동생을 앞에 두고, 동생과 누나가 섹스를 하고 있고,
지하실에서는 데릭이 어머니의 시멘트 무덤을 파해치면서 끝이 나는 결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과연 이 아이들이 후에 보통 사회의 정상적인 규범을 따를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네 남매는 어릴때 부모님이 여행을 가고 넷만 남겨졌을 때를 떠올린다.
부모님이 문밖을 떠나는 순간,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부모님이 다시 돌아오기 30분 전에서야
난장판이 된 집을 치우기 시작한다.
어릴 때는 누구나 이렇다.
나 역시 사춘기 시절, 부모님이 집을 떠나고 혼자 남겨지면, 될수 있는 한 최대한 어질러 놓고,
부모님이 돌아오기 전에 재빨리 수습했었다.
이 아이들의 생활은 내게 이런 식으로 비춰졌다.
어른이 없는 생활. 고립된 채, 누구도 어떻게 해야하는지 명령해주지 않는 극한의 자유.
명령을 하는 사람은 단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누나 뿐.
누나 마저 귀찮아져 버리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시멘트 가든 안에서, 어른 흉내를 내면서 대게의 사람들이 옳다 믿고 있는 규범을 어겨버리는 것이
과연 누구의 잘못이며 죄일까.
아버지의 만들다 만 시멘트 가든 처럼,
그들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완성시키지 못하고 떠나버린 미완성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알 듯하면서 알수 없는 비밀스러운 사춘기 소녀다운 누나 줄리를 바라보면서

화자인 잭이 느끼는 감정이 단지 근친상간으로 치부될수 밖에 없는지도 생각해본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를 이기고자 한다.
어린 남자들은 더더욱 그렇다.
자신보다 일찍 커버린 누나를 바라보면서, 자기손으로 그녀의 비밀을 깨부수고 싶고,
자신을 마냥 아기처럼 대하는 누나를 이기고 싶다는 바람은,
보통의 동생들도 가지고 있는 감정이 아닐까.
여자가 되고자 여자옷만 입는 어린 동생 톰의 경우 역시 주위에서 아주 보기힘든 사례는 아니다.
누나들 사이에서 커온 남자들중에서는 간혹 누나들이 여장을 시켜주었다는
경험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어머니의 시체를 지하실에 유기하는 것 역시, 매우 비도덕적인 일이라기 보다는
어머니를 타인의 손에 빼앗기고, 자신들도 뿔뿔히 흩어지는 것이 두려운 어린아이들의 시선에서는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좀 비틀어진 방식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그들의 이런 감정이 전혀 생소한 규범의 타도인 동시에 악이라고 말할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그들은 단지, 미완성일 뿐, 악도, 비정상도 아니지 않나.
 
소설이 꽤 두꺼울 줄알았는데, 몇 시간이면 읽을수 있을 정도로 가뿐한 무게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묘한 꿈에 내버려져서,
시멘트 가든 어딘가에 숨어서 네 남매를 방관하며 지켜볼수 밖에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상당히 묘한 소설. 묘한 결말. 더 충격적인 아주 담담한 태도.
이안 매큐언의 다른 소설도 읽어봐야겠다.
 
 
 
p.s 이안 매큐언의 정보를 찾아보다가, 우연히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가 검색에 걸려서 보게되었는데,
올드보이의 근친상간적인 모티브는 이 소설에서 받았다고 한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이런 사실을 알게되니 사실 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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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인명구조대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재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13계단>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다카노 카즈아키의 다른 소설.
유령인명구조대가 13계단보다 늦게 나온 소설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이 먼저 소개되었다.
똑같은 사람이 쓴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히 반대의 매력을 가진 소설로,
<13계단>의 냉소와 허무는 <유령인명구조대>에서는 뚜렷히 나타나지 않는다.
요즘 들어 읽을 소설들이 줄줄이 사회의 모순에 대한 얘기라서
책을 읽을 때에는 은근히 손을 불끈! 쥐게 된다.
모순과 가식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자살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 소설은 "그래도 살아!!"라고 말하고 있다.
 
원하던 동경대에서 낙방한 후 자살을 한 유이치,
변하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믿을수가 없어져서 자살한 미하루,
말년에 우울증에 걸려 자살한, 마치 김두환의 느낌이 드는 야쿠자 두목 야기,
빚 독촉으로 더이상 살아갈수 없었던 사업가 이치카와.
 
일본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많이 볼수 있는 이 네명의 자살자들은 죽어서
천국도 지옥도 가지 못한 상태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신을 만난다.
신은 이 네명의 자살자들에게 49일 동안 100명의 자살자를 구조하면 천국에 보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래서 다시 인간세상으로 뚝! 떨어진 네명의 주인공.
유령인 그들은 인간을 통과하나 사물은 통과 할수 없다.
무엇도 잡을수 없고, 인간에게 그들의 모습을 보이지도 않으며 목소리 또한 들리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구하란 말인가?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주황색 구조복, 헤드셋, 고글,로프, 핸드폰, 메가폰 등, 정체를 알수 없는 물건들 뿐,
이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자살하는 사람을 구할수 있는지 어리둥절할 뿐이다.
스스로 방법을 깨달아가는 주인공들은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 그들의 마음을 읽고,
메가폰으로 원하는 것을 지시한다.

 
49일 동안 만나는 100명의 자살요망자들의 100가지 이유.
세상에 의지할 가족도 친구도 아무도 없는 홀홀 단신의 남자,
그토록 원하던 대학에 들어왔지만, 향수병에 걸려 철저한 고립감속에 놓여진 대학생.
장애아의 엄마로 사회의 냉대를 견디지 못하고, 딸과 자신의 미래를 위해 동반자살하려는 주부,
지독한 불신으로 삶의 이유가 없어진 여자,
한번도 제대로 되어본적 없는 비틀리고 꼬인 세상을 견디지 못해 타인을 죽이고 자살로 다가가는 범죄자,
회사내 갈등으로, 또는 치명적인 실수로 회사에서 더이상 견딜수 없게된 회사원들,
부모의 이혼과 왕따로 삼각자로 손목을 긋는 초등학생,
낭비, 또는 사업실패로 엄청난 빚더미를 지게된 사람들....
이들의 이유는 수도없이 많지만, 그 어느 것이나 우리사회에도 존재하는 모습이다.

섯부른 위로는 절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참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 "힘내!"라고 말했을 때,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그 말에 담긴 가식적인 느낌을 알고 있다.
생각하기가 귀찮은 것이다.
뭐라고 말해줘야할지 생각하기가 귀찮아서, 구체적인 답도 괜찮은 위로도 찾기 귀찮아서,
"힘내!"라는 말로 떼운다.
과연 그런 말의 효력은 얼마나 될까.
네명의 자살자들은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았고 누구도 진심으로 위로해주지 않아서 성의없는 "힘내!"라는 말이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도록, 성의없는 위로의 말에서 상대방의 무관심에 지쳐버리지 않도록,
경험자의 조언, 조력자의 도움, 타인의 동감, 구체적인 위로등을 통해서
그들을 죽음에서 삶으로 이끌어온다.
 
 
자살외에는 어떤 해결책도 발견할 수 밖에 없는 경우는 이 세상에 없다고, 작가는 말한다.
같은 상황인 사람들 중에는 모든 것을 견디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견디고 어떤 사람들은 죽어버리는 것일까?
문제는 역시 "마음먹기에 따라"이다.
자살한 사람의 정신이 나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살해서 빨리 끊어버려야하는 목숨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살 역시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쉽게 변해버릴 수도 있는 변덕의 일종이거나,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는 행동인지도 모르겠다.
자살요망자들의 대부분은, 일평생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남을 비방하지 않으며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언제나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편이 아니었다.
끝도없이 좌절하게 만들고, 살아갈 의지를 빼앗아 버린다.
그 억울함이 사람들의 자살을 부추긴다.
 
경제적으로 빈곤한 나라에서는 자살율이 높지 않다.
그나마 경제사정이 나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보다 자살율이 높다.
우리보다 경제사정이 더 나은 영국이나 일본같은 선진국에서의 자살율은 더 높다.
무엇이 차이일까.
우울하고 나약한 국민성 하나로 치부하기에는 편차가 이상하게도 크다.
가난한 사람들의 하루하루는 쉽게 변화할수 있다.
오늘은 굶었지만, 내일 열심히 일한다면 밥을 먹을수 있다.
아주 소박한 본능적인 기쁨은 단순하면서도 강하다.
그러나 현실의 일본 사람들의 하루하루는 쉽게 변화하지 않는단다.
오늘도, 어제도, 비슷한 상황이거나 또는 더 나빠질 뿐이다.
단순히 본능적인 기쁨으로 살아가기에는 사회의 모순이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일본 내에 존재하고 있는, "명예롭게 죽어라"라는 사무라이 정신 또한
이런 자살을 부추기는데 일조한다고 한다.
 
 
작가는 인생을 좀더 편하고, 단순하게 살기를 바란다.
자살을 할 것이 아니라,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라고,

지나치게 고정된 성실함 따위 내던지고, 좀더 무책임하고 덜 예민하고 더 즐기며 살아가도 괜찮다고 말한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으니, 현실의 좌절이 평생을 괴롭힌다고 볼수도 없다고 말한다.
네 명의 자살자들이 100명의 자살요망자들을 구하면서 느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조금 더 기다려보았더라면, 조금 더 냉정히 생각해보았더라면,
해결책은 어디에든 있었을텐데...
많은 자살요망자들의 사연과 그들의 자살요망을 설득해가면서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가고,
뒤늦게도 살아갈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깨달음.
그리고, 한사람 한사람의 인생은 영 형편없는 시간때움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한다.
 
 
자살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소설 자체는 코믹하고 귀엽다.
<13계단>의 작가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편차도 있다.
아쉬운 점은 전체적인 속력조절이 부족해서,
이야기가 처음에는 조금 루즈하게, 뒤로 갈수록 급진적으로 흘러간다는데 있다.
또한 100명째 자살요망자를 구하는 설정은 조금 무리다 싶을 정도로 약간 억지스럽기도 하고,
뻔한 결말이지만서도 시시하게 끝나버리는 느낌도 들어서 그런 점은 아쉽다.
 
 
언젠가, 당신이 절망에 빠져 세상과 자신을 단절시키고 있을때,
그들은 고독한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
어느 초등학생의 초인종 누르고 도망치기로....
그 때엔 기쁜 마음으로 반기며 문을 활짝 열어 두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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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치는 이런 사람을 꿰뚫어보는 눈을, 이전에도 모니터했던 적이 있다.
아홉살의 소년, 사이조 아키라.
아키라는 부모의 불화를 깨닫기 시작했을때, 필사적으로 두 사람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부모의 생각이 무엇인지 열심히 살피던 모습.
그러나 아사미의 경우, 사람을 꿰뚫어보는 눈은 너무나 날카로워,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로까지 진화하고 있다.
 
아사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봐주기를 바라며,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거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선의에 찬 웃는 얼굴이지만, 감사해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상대를 대하면 굳어져 버린다.
사람들은 경박하고 쉽게 배반한다.
겉모습뿐인 친절은 초조함으로, 분노로, 그리고 아사미를 손가락질하는 비난으로 변화한다.
그래서 아사미는 불안하게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한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상대방의 속마음이 보이기 때문에.
자신의 속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리고 언젠가는 미움을 받을 것이기에.
경계선을 넘어 가까이 다가오는 상대에게는, 불쾌함과 불안을 안겨준다.
일부러 미움받을 짓을 해서, 오히려 상대를 불안에 빠뜨린다.
혐오로 일그러진 상대의 얼굴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거봐. 나에 대한 당신의 호감 따위는, 이런 말 한마디로 무너져 버릴거면서.
친절했던 얼굴은 뭐란 말인가?
인간이 살아가는 이 사회에 순수한 배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인간의 선의에 대한 강렬한 회의가 문제였다.
평범하게 생활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렇지 뭐"하고 웃으며 넘겨버리는 문제에도, 하나하나 시비를 건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유대감도, 열심히 일하는 것도, 이 세상에서 미덕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에도
추악한 이면이 있다고 믿고 있다.
게다가 이런 확신은 그녀를 분노케 하는 것이 아니라, 지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세상과의 적극적인 관계를 포기하게 만든다.
 
이건 고결한 마음이라고 해야할까.
어쩌면 사춘기적 사고방식이 아니냐고 생각했던 유이치는,
아사미만큼 깊에 생각하지 않았던 자신의 부족함이 부끄러웠다.
한편으로는 이래서는 틀림없이 살아가는 데 힘들 것이라는 동정도 들었다.
타인은 어떤 식으로든 그녀를 상처 입히는 존재인 것이다.
 
아사미가 있는 곳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다.
암흑의 공간에 떠 있는 달, 따스한 지구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냉랭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존재.
 
 
-다카노 카즈아키 <유령 인명구조대> 中에서...
 
 


23살의 간호조무사 "아사미".
멀쩡해 보이는 이면 뒤에 냉소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습성,
또 그 속에 담겨진 세상과 사람에 대한 회의,
또 그 속에 또 담겨진, 부모의 안색만으로 부모의 생각을 꿰뚫어보는 어린아이같은 본능적인 통찰력.
양파껍질을 까듯이 까도까도 자꾸만 드러나는 쉽게 변하는 것들에 대한 깊은 허무와 상처.
강해보이는 성격 뒤에 작은 상처도 크게 받아버리는 예민한 감정.
 
그래서 쉽게 변하는 사람의 마음 따위 믿지 않기로 해버리고, 선을 긋는다.
상대방의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 있으니, 이쪽에서도 진지하게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얼핏 쿨 해보이는 이유이다.
무작정 쉽게 받아들이기 보다 분석하기 좋아하는 습성과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강한 자기애 뒷면에 숨겨진 자기 혐오.
그래서 괴로울 땐 손목을 그어서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세상과 사람들은 슬픈 것이 아니라 허무한 것이다.
세상이 싫은 것이 아니라, 회의적인 것이다.
그 냉소적인 시선이 신기해 다가오는 사람은 싫다.
동물원 원숭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동물원 원숭이를 바라보듯,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또 쉽게 질리고 만다.
이런 사람들에게 중간은 없다.
어중간한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완벽주의자적 습성.
세상은 언제나,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보다 대충대충 얼버무리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자살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고들 하지만,
나는 살면서 죽고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다.
하지만 반드시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언제나, 죽고싶지도 않았지만, "살아있지 않아도 상관없어"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책속에서 발견한 나와 똑같은 23살의 여자는 몇번이고 죽으려고 했다.
죽고싶어서가 아니라 살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이 여자가 자살충동에서 구조되었을 때는,
내가 구조된 냥, 진심으로 기뻐서 눈물이 났다.
 
언젠가 깊은 절망과 회의로 어디에도 내가 있을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손바닥 뒤집든 바뀌는 간편한 사람의 마음에 지쳤을 때,
그래서 또, 굳이 살아 있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타인을 그어버리고 나도 그어버렸을 때,
내 옆에도 나를 구해줄 인명구조요원이 잔뜩 웅크린 나를 가슴가득히 끌어안으며
"사랑해, 사랑해, 쥬뗌므"라고 속삭여주었으면 좋겠다.
 
 
그래. 어쩌면 나는, 무언가를 더 노력하지 않아도,
이대로도 충분한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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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터스틴에 선발된 꽃과 같이 아름다운 소녀 자넬. 그녀는 외모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아름답고 따뜻하다. 그러나 플레이보이 잡지 표지에 여러 모델들과 함께 나온 후 자넬은 미스 터스틴 자격을 박탈당하고, 얼마 후 목이 잘린 채로 살해된다. 그리고 그녀 주변에서 서성였던 수 많은 사람들의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불행해 보인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어두운 분위기가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인물들은 각자 비밀을 지니고 있는데 자넬의 살인범을 쫓는 닉 베커 형사와 그의 신문기자인 앤디도 예외는 아니다. 이 두 사람뿐 아니라 그들 주위에 있는 가족, 형제, 목사,정치인 등 혐의를 두기에는 너무 가깝고도 고매한 사람들의 고민과 죄악, 그리고 그들의 감춰진 비밀이 폭로되고 단죄된다.

영국의 황금단도상과 함께 영미권 양대 추리문학상의 하나로 꼽히는 에드거 앨런 포 상(Winner of the EDGAR AWARD for best novel). 이 상을 생애 두 번 이상 받아 본 작가는 몇 명 되지 않는다. T. 제퍼슨 파커는 2002년 로, 2005년 <캘리포니아 걸>로 에드거 앨런 포 상을 두 번 수상하는 영예를 차지했다.

 

재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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