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이치는 이런 사람을 꿰뚫어보는 눈을, 이전에도 모니터했던 적이 있다.
아홉살의 소년, 사이조 아키라.
아키라는 부모의 불화를 깨닫기 시작했을때, 필사적으로 두 사람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부모의 생각이 무엇인지 열심히 살피던 모습.
그러나 아사미의 경우, 사람을 꿰뚫어보는 눈은 너무나 날카로워,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로까지 진화하고 있다.
 
아사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봐주기를 바라며,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거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선의에 찬 웃는 얼굴이지만, 감사해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상대를 대하면 굳어져 버린다.
사람들은 경박하고 쉽게 배반한다.
겉모습뿐인 친절은 초조함으로, 분노로, 그리고 아사미를 손가락질하는 비난으로 변화한다.
그래서 아사미는 불안하게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한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상대방의 속마음이 보이기 때문에.
자신의 속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리고 언젠가는 미움을 받을 것이기에.
경계선을 넘어 가까이 다가오는 상대에게는, 불쾌함과 불안을 안겨준다.
일부러 미움받을 짓을 해서, 오히려 상대를 불안에 빠뜨린다.
혐오로 일그러진 상대의 얼굴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거봐. 나에 대한 당신의 호감 따위는, 이런 말 한마디로 무너져 버릴거면서.
친절했던 얼굴은 뭐란 말인가?
인간이 살아가는 이 사회에 순수한 배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인간의 선의에 대한 강렬한 회의가 문제였다.
평범하게 생활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렇지 뭐"하고 웃으며 넘겨버리는 문제에도, 하나하나 시비를 건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유대감도, 열심히 일하는 것도, 이 세상에서 미덕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에도
추악한 이면이 있다고 믿고 있다.
게다가 이런 확신은 그녀를 분노케 하는 것이 아니라, 지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세상과의 적극적인 관계를 포기하게 만든다.
 
이건 고결한 마음이라고 해야할까.
어쩌면 사춘기적 사고방식이 아니냐고 생각했던 유이치는,
아사미만큼 깊에 생각하지 않았던 자신의 부족함이 부끄러웠다.
한편으로는 이래서는 틀림없이 살아가는 데 힘들 것이라는 동정도 들었다.
타인은 어떤 식으로든 그녀를 상처 입히는 존재인 것이다.
 
아사미가 있는 곳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다.
암흑의 공간에 떠 있는 달, 따스한 지구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냉랭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존재.
 
 
-다카노 카즈아키 <유령 인명구조대> 中에서...
 
 


23살의 간호조무사 "아사미".
멀쩡해 보이는 이면 뒤에 냉소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습성,
또 그 속에 담겨진 세상과 사람에 대한 회의,
또 그 속에 또 담겨진, 부모의 안색만으로 부모의 생각을 꿰뚫어보는 어린아이같은 본능적인 통찰력.
양파껍질을 까듯이 까도까도 자꾸만 드러나는 쉽게 변하는 것들에 대한 깊은 허무와 상처.
강해보이는 성격 뒤에 작은 상처도 크게 받아버리는 예민한 감정.
 
그래서 쉽게 변하는 사람의 마음 따위 믿지 않기로 해버리고, 선을 긋는다.
상대방의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 있으니, 이쪽에서도 진지하게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얼핏 쿨 해보이는 이유이다.
무작정 쉽게 받아들이기 보다 분석하기 좋아하는 습성과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강한 자기애 뒷면에 숨겨진 자기 혐오.
그래서 괴로울 땐 손목을 그어서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세상과 사람들은 슬픈 것이 아니라 허무한 것이다.
세상이 싫은 것이 아니라, 회의적인 것이다.
그 냉소적인 시선이 신기해 다가오는 사람은 싫다.
동물원 원숭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동물원 원숭이를 바라보듯,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또 쉽게 질리고 만다.
이런 사람들에게 중간은 없다.
어중간한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완벽주의자적 습성.
세상은 언제나,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보다 대충대충 얼버무리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자살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고들 하지만,
나는 살면서 죽고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다.
하지만 반드시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언제나, 죽고싶지도 않았지만, "살아있지 않아도 상관없어"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책속에서 발견한 나와 똑같은 23살의 여자는 몇번이고 죽으려고 했다.
죽고싶어서가 아니라 살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이 여자가 자살충동에서 구조되었을 때는,
내가 구조된 냥, 진심으로 기뻐서 눈물이 났다.
 
언젠가 깊은 절망과 회의로 어디에도 내가 있을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손바닥 뒤집든 바뀌는 간편한 사람의 마음에 지쳤을 때,
그래서 또, 굳이 살아 있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타인을 그어버리고 나도 그어버렸을 때,
내 옆에도 나를 구해줄 인명구조요원이 잔뜩 웅크린 나를 가슴가득히 끌어안으며
"사랑해, 사랑해, 쥬뗌므"라고 속삭여주었으면 좋겠다.
 
 
그래. 어쩌면 나는, 무언가를 더 노력하지 않아도,
이대로도 충분한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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