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인형 - Air Dol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겉보기와 다르고, 초반과 후반이 다른 <공기인형>.
배두나는 공기로 가득찬 섹스돌-그것도 세일에 판매되었던-을 연기하고, 인형같은 얼굴이라 보기는 힘들지만, 참으로 인형같은 인체를 지녔다는 생각은 들면서도 막상 디테일은 참 아쉬웠다. 인형일 때의 모습에 버젓이 숨을 쉬고 있다거나, 바람이 빠져가는 모습이 보기에 어색하다 싶을 정도로 부족하긴 했으나, 어차피 이게 SF환타지 영화도 아니고 이런 아쉬운 점을 건너뛰도록 하자.

대인기피증을 가진 어느 아저씨의 공기인형으로 살아가는 노조미는 어느 순간부터 낮에는 인간이 되어 세상을 돌아다니고, 밤에는 아저씨를 기다리는 인형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시간,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비디오가게 아르바이트생에게 마음을 빼앗기면서, 인형이면서 마음을 가지게 되는 아이러니한 사태가 벌어지고, 지금까지 남아있던 인형으로써의 삶에 조금씩 염증이 생기게 된다.
검은 그림자가 갖고 싶고, 누군가의 옛 여친도 되어보고 싶은 노조미가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는 동시에, 대도시에서 공기인형처럼 텅비어가는 현대인들의 각양각색의 모습도 보여주는 영화이다.

영화가 전해주려는 전체적인 메시지는 영화를 보기도 전에 포스터만 봐도 대충은 알수 있고, 영화를 보다보면 누구나 캐치할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다. (포스터의 달달한 느낌과 색다른 러브스토리가 찾아온다는 둥의 카피같은 것은 무시하고 영화를 보는게 정신건강에는 좋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분명하게 알겠는데 불필요할 정도로 적나라하고 불편한 느낌으로 그 메시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이 영화 최대의 실수이다.
개인적으로 일본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일상을 소재로 그린 많은 일본 영화(라고 말하기에는 우리나라에 출시된 영화들도 다 보지는 못했지만...)들에 공통적으로 깔려있는 감상주의가 내게는 참으로 낯간지럽고 교과적인 허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이 영화 역시 초반부터 그렇게 흘러간다. 일본 특유의 영상들, 초 순정만화에나 나올 법한 감상적인 대사들.
다소 낯간지럽긴 했지만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았는데, 중반을 넘어서면서 무리수를 던진 것이 이 영화를 마냥 재밌고 감동적으로 볼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였다.
다소 잔잔한 와중에 단순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가운데, 인간의 공허함이나 역겨움같은 것을 지나치게 비약해버리는 바람에 갑자기 영화는 호러 영화로 빠져버리는데, 이것 또한 공허하구나-라고 말하기에는 주인공들의 움직임에서 행위의 이유를 찾을수가 없는 것들이 상당히 많아서 오히려 잔잔한 초반부보다 설득력이 더 떨어져버렸다.
그렇다고 최악의 작품이라고 말하긴 뭣하지만,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너무 오버해버린 느낌이다.

아무리 가까운 나라라고 해도, 일본과 우리나라의 정서는 분명 다르고, 그렇기때문에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본 영화들에서 딱 좋은 선에서 멈추지 못하고 오버하는 바람에 망해버리는 느낌을 받을때가 많은 건지 모르겠다.
또, 상냥하고 감상적인 감정보다는 차갑거나 비틀어져있거나 다소 불편할 정도의 감정쪽이 내 개인적인 취향에는 더 잘 맞는 편인데도, 일본영화에서는 이런 나도 극복할 수 없는 어떤 불쾌할 정도로 가학적인 지점들이 있다.
그것 역시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이라면 또 그럴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런 이해할 수 없는 기행들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막연하게 나마 깨닫게 할수 있어야 기본은 되어있는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잘 못 생각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는 단순명쾌한 메시지를 가지고, 감상주의에 빠진듯 싶다가도, 어느 순간 불필요할 정도로 불편해지고, 쓸데없이 엽기적인 샛길로 새버린다. 종잡을수 없이 변덕스럽고 괴팍한 여자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대화법은 솔직히 납득하기 힘들다.
누군가 내게 이런 식으로 말를 걸어온다면 한 대 후려갈길 듯.

p.s 배두나가 필요 이상으로 벗는 것도 조금 짜증. 장르가 에로도 아니고, 그렇다고 배두나 몸을 보라고 만든 영화도 아닌데, 필요하지 않는 부분에서도 너무 벗긴다 싶더라. 이런 불필요한 부분들이 영화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찾을수가 있어서, 메시지가 단순한데 비해서 런닝타임이 좀 쓸데없이 늘어난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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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코담배케이스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9
존 딕슨 카 지음, 강호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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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실에서 읽기 시작해서, 미용실을 나올때 다 읽은 책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
빠르고 드라마틱한 전개가 눈길을 사고잡는 추리소설이다.

남편의 외도에 지쳐 이혼을 한 젊은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로 하는데, 모든 것이 다 잘되어가고 있던 순간, 전남편이 침실로 찾아와 폐악을 부리게 되고, 두 사람은 건너편 집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이 건너편 집이란 주인공 여자가 결혼하기로 한 남자의 집인데, 약혼자의 아버지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것을 목격하고도 자신이 목격자라고 말할수 없는 상황. 왜냐면 상황을 설명하자면 자신이 전남편과 그시간 함께 있었다는 것도 함꼐 설명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의 오해가 생기는 바람에, 자신이 살인자로 몰리는 상황에 처하고 마는데....

존 딕슨 카의 책은 몇권 더 읽어보았던 것 같다. <화형법정>에서부터, <벨벳의 악마>, <구부러진 경첩>, 그리고 그의 대표작이라는 <황제의 코담배케이스>까지 읽었는데... 뭐랄까. 정도의 차이는 다르겠지만 결말부분에 가면 나는 똑같은 감상을 얻게 된다.
초반부와 중반부까지는 상당히 설득력있고 흥미진진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데, 후반부에 가면 다소 어이 없어지거나, 시시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화형법정>같은 책은 내 인생에서 가장 황당했던 추리소설중 하나였다.)
섬세하고 즐겁게 표현된 캐릭터 묘사도 좋고,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해서 드라마틱한 연출이 자유자제로 이루어지는 느낌이라서 읽어내려가기는 참 재밌긴 한데, 항상 내가 납득되지 않는 결말이 나와버려서,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
<황제의 코담배케이스>같은 경우는 결말이 납득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고, 어느 정도 설득력도 있었고, 그럴 만도 하다...싶은 면도 있긴 했지만, 예상외로 심심한 결말에 또 맥이 빠져버렸다.
하긴 추리소설에서 뭘 얻어가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긴 하면서도, 항상 막판에 다르면 그간 책을 읽어온 시간에 대한 허무함과 책을 읽는 도중 고민했던 것들에 대한 일종의 배신감같은 것이 느껴진다.
나와는 잘 맞지 않는 작가. 그럼에도 계속 읽고 있었던 이유는 존 딕슨 카의 책을 더 읽어보면 그 매력을 알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 마음에서 였는데, 여전히 실패. 그래서 앞으로는 읽지 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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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방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0
앤절라 카터 지음, 이귀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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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동화를 각색한 잔혹동화들이 인기있었던 적이 있었다. 이미 있는 이야기를 전복시키는 스타일의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터라, 한때 꽤 많이 쏟아져나오는 바람에 삼류로 흘러가던 잔혹동화 이야기들도 꽤 재밌게 봤었는데, 이 책 <피로 물든 방>을 그런 류의 잔혹동화로 치부할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은 이미 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시 지어낸 새로운 이야기이거나, 색다른 해석, 잔혹동화라고 치기에는 다소 난해한 점도 많고, 이야기를 완전히 전복시켜 사람 깜놀하게 만드는 재주는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원래 있는 동화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도 볼 수 있다-정도로 조금 더 현실적인 해석으로 풀이해놓았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들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있는 동화 이야기를 오래전에 들었을 때 막연하게 느꼈던 찝찝한 느낌, 막연하게 야했던 것만 같은 느낌, 막연하게 무서웠던 느낌이 어디에서 근거했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준달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린 시절 <푸른 수염>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린 아이들이 무서워했던 부분은 푸른 수염이 자신의 옛 아내들을 죽여서 아무도 모르는 방에 전시해놓았다는 사실 뿐이었을까?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몸집이 커다란 푸른수염을 가진 남자가 "알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숨기는 척 하면서, 한편으로는 어린 아내에게 열쇄를 쥐어주며 절대로 열어보지 말라 당부하며 묘하게 훔쳐보기 욕망을 자극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으스스하기도 하다.
또는, 돈많은 이 과묵한 푸른 수염이 하필이면 어린 신부를 데려다 놓았다는 사실 또한 꽤 기묘하고 에로틱 하지 않았을까.
표제인 <피로 물든 방>은 이 <푸른 수염>의 이야기를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로 풀어놓은 이야기로써, 동화로 읽을 때 막연히 기묘하고 으스스했던 분위기가 어디에서 근거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푸른 수염> 뿐만이 아니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라던가 <빨간 모자>, <미녀와 야수>, <장화신은 고양이>, <백설공주>같은 동화들도 이런 식으로 해석해 놓고, 조금더 노골적인 장르들을 원작의 으스스함에 더해낸다.
그렇게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서는 기묘한 날 것의 냄새가 난다.
향긋하지만은 않은, 조금 더 동물적인 살냄새라던가, 소녀의 생리혈같은 불안정하고 기묘한 기운이 모든 단편에 깔려있어, 전체적으로 몽환저이고 에로틱하면서도 으스스하고, 귀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꼭 기묘한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하면 딱 좋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의 단편들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요점을 확실히 알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편이고,(뒤에 해설보고나 조금 알수 있을 정도.) 분위기와 개성이 넘치다 못해 독자를 압도시켜버리는 필력 또한 인정하지만, 해설자의 말처럼 이것을 패미니즘과 연관지어 볼수 있을런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이 단편들이 오히려 소녀가 처녀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 아닐까 싶다.
모든 동화들의 여주인공들이 "순수"와 "무지"에서 출발했으나, 환경에 의해, 아니 그보다는 자기자신의 변화에 의해, 욕망이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순간, 더이상 순수한 소녀가 아니라 욕망을 가진 한 여자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이 단편집에서 그러한 과정들을 겪은 여자들은 기묘하게도 마녀같은 느낌을 풍긴다.
이 책의 작가 앤절라 카터는 "영문학의 마녀"라고도 불린다는데, 책을 읽다보면 왜 그녀에게 그런 별명이 주어졌는지 막연하게 동감하게 된다.
꽤 강렬한 소설이라서, 다소 난해한데도 불구하고 참 매력적이어서, 지루하게 읽히지는 않았다.
기회가 닿으면 이 작가의 다른 책들도 언젠가 읽어봐야겠다.

p.s.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은 반양장본보다는 양장본이 느낌이 훨씬 좋은듯 싶다.
앞으로는 양장본으로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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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녀 펭귄클래식 56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곽명단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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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고아에 대한 환상을 가진 어린이가 하나 살고 있었으니, 바로 나다.
고아에 대한 터무니 없는 환상을 길러준 것은 바로 이 소설 <소공녀> 그리고 <소공자>, <비밀의 화원>, 또는 내 인생 최고의 소설인 <제인에어>를 비롯해 <빨강머리 앤>, <올리버 트위스트>, 심지어 <캔디캔디>까지 이어지는 여러 소설들과 만화들이었다.
이런 소설들과 만화를 보고 자란 나는 "너 다리 밑에서 줏어왔어."식의 짓꿎은 농담에 눈도 꿈쩍하지 않는 맹랑하고 시크한 어린 아이였던 것 같다. 오히려 나는 누군가 진지하게 내게 줏어온 자식이라 말하면, 이불에 누워 내 진짜 부모님은 어디 계실까 상상하다가 잠들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상상들은 내가 책속에서 보아온 소년, 소녀들의 모험과 다름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줏어온 자식 내지는 고아라 해도 그닥 무섭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순진한 어린 아이의 망상속의 고아들에게 드라마틱한 모험이 필수 요소였던 것처럼, 현실의 나는 그 상상이 어쩌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진짜라고 생각했다. (덧붙여 그들은 항상 마지막에는 공주 내지는 왕자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고보니 프랜시스 버넷의 소설에는 유독 고아가 많이 등장한다.
고아는 아니지만, 미국에서 살고 있는 어머니를 떠나 냉랭하고 완고한 노인곁에서 살아가는 <소공자>의 세드릭이라던가, 인도에서 사는 영국귀족의 딸이었으나,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그로 인한 죽음으로 인해 고아가 되어 다락방 하녀로 전락하는 <소공녀>의 사라, 역시 인도에서 살다가 부모님의 죽음으로 영국의 친척집에 얹혀 살게되는 까칠하기 그지 없는 <비밀의 화원>의 메리까지, 프랜시스 버넷의 아동소설들에는 늘 고아가 주인공이다.
이 책 말미의 프랜시스 버넷에 대한 설명을 읽고 있으려니, 왜 그녀가 이러한 주인공들을 아꼈는지 알게된 것 같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몰락 귀족신세로 살아가게 되었던 프랜시스 버넷.
영국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그런 그녀와 그녀의 가문을 구해준 것이 바로 그 상상력이었던 것이다.
역경속에서 피어났던 상상력과 그래서 탄생한 소설들. 그것으로 일약 스타덤에 이르는 작가가 되었던 프랜시스 버넷은, 힘든 상황일수록 뛰어난 상상력과 긍지로 현실을 견뎌내는 아이들을 자신처럼 그려냈던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 읽었던 소설들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지만, 그건 어린 아이의 기준에서 멋대로 해석해버린 것에 지나지 않았던지, 다시 읽은 <소공녀>는 익숙하면서도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사라는 금발이 아니라 흑발이었고,(아마도 어디선가 금발머리 사라가 주인공인 소공녀 애니메이션을 봤던 듯.) 생각보다 훨씬 맹랑하고 성깔있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저 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밟으면 꿈틀하는 성질머리와 자긍심이 있고, 퇴락한 자존심을 상상으로 극복하는 듯 보이다가도, 혼자 남으면 여전히 비참한 기분을 느끼는 인간다운 면도 발견할수 있어서  어린 시절보다 훨씬 사라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사라가 다락방에 갖힌 하녀가 되어서도 자기정체성을 잃지 않고, 여전히 "공주다운" 고고함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존심이고, 그 자존심이 그녀를 꿈꾸게 만든다. 충분히 울고불고 할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나쁜 것에 실망하기보다는 더 나쁜 상황이 오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여전히 꿈을 지어내고, 이야기를 만들어내 힘든 상황을 극복할수 있었다.

어른이 된 후 이 소설을 읽고 있으려니 한편으로는 섬찟한 느낌도 들더라.
상상으로 도피하는 수 밖에는 아무 희망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속에 어린 아이가 내버려져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짠하고, 한편으로는 섬찟했다. (심지어는 <판의 미로>같은 암울한 영화도 겹쳐보이고...)
소설속에, 동화속에는 고달픈 현실에서 상상으로 도피하는 아이들이 참 많았다.
<빨강머리 앤>의 앤 셜리도 틈만 나면 몽상에 빠져 마릴라 아줌마에게 혼나기 일쑤이고, <소공녀>의 사라 역시 어떠한 순간에도 신비한 상상으로 도피함으로써 현실을 잊었다.
상상은 고달픈 현실을 잊게 해줄까?
어린 아이에게는 가능할지 몰라도, 동심을 잃은 어른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의 마지막, 고생하던 사라가 다이아몬드 광산 실패로 도망쳤던 아버지의 친구를 찾아 다시 공주가 되는 드라마틱한 전개에 동심을 잃은 어른인 나는 씁쓸한 미소가 지어질수 밖에....
상상으로 즐거울 나이는 지났다는 것이, 그저 소설로써 고난을 딛고 성공하는 주인공을 박수치며 즐거워해줄수 없다는 것이, 이런 신데렐라 드라마가 이제는 터무니없는 환상이라고 느껴진다는 것이 슬프다.

현실을 하루하루 견디며 지내는 어른이면서도, 그래도 아직은 소녀이고 싶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상상으로 현실을 잊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상상함으로써 현실은 조금 더 나은 곳이 된다고.
아무 환상없이 살아가는 것보다, 가끔씩 백일몽을 꾸며 살아가는 것이 더 재밌다고.
적어도 나는 아직 공상의 힘을 잊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소설들과 작가들에게 감사한다.
어린 시절 나를 꿈꾸게 해주었고, 그 몽상들의 잔향을 아직도 간직하게 해주어서.

p.s 1.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 책의 주인공을 "세라"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내게 "사라"라는 발음은 왠지 낯설었다.
왠지 세라가 더 고상해보이잖아.
아마 "메리"보다 "메어리"가 더 익숙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리라.

p.s 2. 표지도 예쁘고 다 좋은데, 오탈자 좀 어떻게 해주었으면.... 펭귄 클래식은 탈고에 신경을 좀 쓰시기 바란다. 이전에 읽었던 펭귄 클래식 책들에서도 잘못된 어미 사용이나 오탈자를 꽤 많이 보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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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박스 판타 빌리지
리처드 매드슨 지음, 나중길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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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반전의 매력을 제대로 만끽할수 있는 것은 장편보다는 오히려 단편인 것같다.
긴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제대로 전달하는 능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 함축적인 이야기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뒤집어놓는 반전까지 마련한다는 것은 여간 글쓰기에 여유롭지 않는 이상 힘든 일 같다.
리처드 매드슨의 <더 박스>는 그런 느낌으로 재밌게 볼수 있는 단편집인데, 대부분의 단편들이 아주 짧은데 비해 임팩트도 확실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도 뚜렷하다.
"어라?"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한번 생각해볼 여지까지 주는, 참 즐거운 반전들이 이 책에는 가득하다.

첫번째 짧은 단편 <버튼, 버튼>은 2009년 카메론 디아즈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는데, 소식이 그닥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영화가 성공적이지는 못했나보다. 아주 짧으면서 임팩트 있는, 단편집의 섬문을 열기에 적절한 단편인데, 어디서 본 것같은 느낌은 왜일까. 이 비슷한 단편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이 단편을 다른 곳에서 읽었던 것만 같은데, 어디서 였을까...하고 곰곰히 생각해보고, 리처드매드슨의 <줄어드는 남자>에서 읽었던 것을 간신히 떠올려냈다. 아...이제 내 기억력도 맛이 갔구나...허허...
<버튼, 버튼> 이외에도 기상천외하면서 환상특급같은 느낌의 단편들이 가득한데, 개인적으로는 <흡혈귀 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 >, <특이한 생존 방식>, <매춘부 세상>같은 단편들이 재밌었다.

리처드 매드슨의 단편들은 소설자체를 읽는 즐거움을 만끽할수 있다기보다는, 다분히 영화적인 느낌을 주는 것들이 많은데, 그래서인지 리처드 매드슨의 많은 작품들이 영화화, 드라마화 되었다고 한다.
무척 단순한 글쓰기임에도 그 한자 한자를 생각해내기 위해 분명 작가는 고심했을 터.(이래놓고, <버튼, 버튼>을 5분만에 썼소-라고 얘기하면 할 말 없지만....그럼 당신은 천재!)
줄줄히 늘여쓰지 않음에도, 대사 하나하나가 전달하는 의미는 정확히 전달되고,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깊이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신경질적인 문체는 스릴감을 더해준다.

문학적인 즐거움보다는, 단순한 일상에 단순히 표현되되, 기이한 이야기를 들을수 있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다.
오랜만에 한큐에 책을 다 읽는 즐거움을 또 느껴보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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