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물든 방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0
앤절라 카터 지음, 이귀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때 동화를 각색한 잔혹동화들이 인기있었던 적이 있었다. 이미 있는 이야기를 전복시키는 스타일의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터라, 한때 꽤 많이 쏟아져나오는 바람에 삼류로 흘러가던 잔혹동화 이야기들도 꽤 재밌게 봤었는데, 이 책 <피로 물든 방>을 그런 류의 잔혹동화로 치부할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은 이미 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시 지어낸 새로운 이야기이거나, 색다른 해석, 잔혹동화라고 치기에는 다소 난해한 점도 많고, 이야기를 완전히 전복시켜 사람 깜놀하게 만드는 재주는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원래 있는 동화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도 볼 수 있다-정도로 조금 더 현실적인 해석으로 풀이해놓았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들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있는 동화 이야기를 오래전에 들었을 때 막연하게 느꼈던 찝찝한 느낌, 막연하게 야했던 것만 같은 느낌, 막연하게 무서웠던 느낌이 어디에서 근거했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준달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린 시절 <푸른 수염>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린 아이들이 무서워했던 부분은 푸른 수염이 자신의 옛 아내들을 죽여서 아무도 모르는 방에 전시해놓았다는 사실 뿐이었을까?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몸집이 커다란 푸른수염을 가진 남자가 "알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숨기는 척 하면서, 한편으로는 어린 아내에게 열쇄를 쥐어주며 절대로 열어보지 말라 당부하며 묘하게 훔쳐보기 욕망을 자극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으스스하기도 하다.
또는, 돈많은 이 과묵한 푸른 수염이 하필이면 어린 신부를 데려다 놓았다는 사실 또한 꽤 기묘하고 에로틱 하지 않았을까.
표제인 <피로 물든 방>은 이 <푸른 수염>의 이야기를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로 풀어놓은 이야기로써, 동화로 읽을 때 막연히 기묘하고 으스스했던 분위기가 어디에서 근거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푸른 수염> 뿐만이 아니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라던가 <빨간 모자>, <미녀와 야수>, <장화신은 고양이>, <백설공주>같은 동화들도 이런 식으로 해석해 놓고, 조금더 노골적인 장르들을 원작의 으스스함에 더해낸다.
그렇게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서는 기묘한 날 것의 냄새가 난다.
향긋하지만은 않은, 조금 더 동물적인 살냄새라던가, 소녀의 생리혈같은 불안정하고 기묘한 기운이 모든 단편에 깔려있어, 전체적으로 몽환저이고 에로틱하면서도 으스스하고, 귀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꼭 기묘한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하면 딱 좋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의 단편들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요점을 확실히 알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편이고,(뒤에 해설보고나 조금 알수 있을 정도.) 분위기와 개성이 넘치다 못해 독자를 압도시켜버리는 필력 또한 인정하지만, 해설자의 말처럼 이것을 패미니즘과 연관지어 볼수 있을런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이 단편들이 오히려 소녀가 처녀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 아닐까 싶다.
모든 동화들의 여주인공들이 "순수"와 "무지"에서 출발했으나, 환경에 의해, 아니 그보다는 자기자신의 변화에 의해, 욕망이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순간, 더이상 순수한 소녀가 아니라 욕망을 가진 한 여자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이 단편집에서 그러한 과정들을 겪은 여자들은 기묘하게도 마녀같은 느낌을 풍긴다.
이 책의 작가 앤절라 카터는 "영문학의 마녀"라고도 불린다는데, 책을 읽다보면 왜 그녀에게 그런 별명이 주어졌는지 막연하게 동감하게 된다.
꽤 강렬한 소설이라서, 다소 난해한데도 불구하고 참 매력적이어서, 지루하게 읽히지는 않았다.
기회가 닿으면 이 작가의 다른 책들도 언젠가 읽어봐야겠다.

p.s.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은 반양장본보다는 양장본이 느낌이 훨씬 좋은듯 싶다.
앞으로는 양장본으로 사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