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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1
키리노 나츠오 지음, 권남희 옮김 / 산성미디어 / 2001년 5월
평점 :
품절
나는 어릴 때 이명이 심했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어린 시절에 많이 예민했던 내가 새로운 환경에 놓여졌을 때 적응하지 못한 스트레스가
이명으로 나타났던 것 같다.
엄마와 어딘가 다녀오다가 버스에서 자다가 내렸을때,
명절이라 부모님이 나를 친척집에 두고 갔을때,
낮잠중에 악몽을 꾸고 일어났을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그럴때마다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마치 귓속에서 보일러라도 돌아가듯이 소리는 웽웽대면서 기분을 한없이 몽롱하게 만들었다.
커가면서 차츰 이명은 사라져 갔지만, 그 기분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느낌을 말로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겠지만, 아마도 그것은 이런 느낌이었다.
현실인데 현실이 아닌 느낌.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전혀 종잡을수 없는 느낌.
기리노 나츠오의 책을 읽다가보면 종종 그런 느낌을 받는다.
특히 거의 황당무계하다고까지 말할수 있는 결말로 가면 꼭 그런 느낌이 든다.
말도 안돼!!!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척 기분이 나빠지고 동시에 몽롱해지면서 무서워진다.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마음과 내가 뭘 잘못본 것 같은 두려운 기분.
단지 시시한 결말이라고 말하기엔 뒤끝이 길어버리니,
이 해괴망측하고 당혹스러운 결말을 내버리는 작가를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모르겠다.
이 책 "내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는 기리노 나츠오의 책 치고는 좀 유하다 했다.
어딘지 확실하게 땡기는 부분도 미미하고, 특유의 날카로운 혐오의 분해도 매우 미미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마지막까지 다 읽지 않았었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히 충격적이라고 말할수 있는 이 결말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겠다.
잃어버린 아이 유카의 시선으로 풀이해버린 것이 맞는지, 아니면 이것조차 꿈인지.
보고나서 어찌나 무서웠던지 다시 읽을 용기도 나지 않았다.
(사실 남들에게는 별것 아닐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것을 무서워한다.
내가 정말로 무서워하는 부분을 송곳으로 해체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 여자 카스미와 모든 것이 갖춰진 남자 이시야마가 사랑에 빠진다.
평범한 연애라면 그런가보다 하겠지만, 둘다 애가 둘이나 딸린 유부남, 유부녀.
한때의 불장난이 아닌, 진지한 감정으로 불타오르는 두 남녀는 겁도 없이 서로의 가족들과 다함께 별장으로 놀러간다.
그러다가 아이를 잃어버린다.
엄마 카스미를 묘하게 닮은 딸 유카를.
아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른다.
산중에서 잃어버린 아이의 생사를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산중의 마을이라 사람도 얼마 없고, 범인으로 지목될 만한 사람도 아무도 없다.
1년, 2년,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아이.
유카를 잃어버린 순간, 카스미와 이시야마의 불타는 로맨스도 끝난다.
카스미의 권태로운 결혼생활도, 이시야마의 부족할것 없어보이는 결혼생활도 결국은 다 끝나버린다.
유카를 잃어버린 순간부터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난다.
일찌감치 포기한 남편과는 다르게, 카스미는 몇년이고 유카를 찾아 헤맨다.
사랑에 빠져 아이를 버려도 좋다고 생각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었을까.
아니면 모든 것이 끝장나버린 후에 놓아버린 것들을 하나씩 주워담기 위해서 였을까.
홀홀단신으로 유카를 찾아헤매는 카스미앞에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위암환자이자 전직 형사인 우츠미가 가새해
함께 찾기 시작한다.
우츠미는 왜 거의 죽어가면서 남의 아이를 돈도 받지 않고 찾아주겠다고 나섰을까.
카스미와 우츠미가 찾는 것은 진짜 유카였을까.
아니면 앞을 보느라 뒤를 돌아볼 틈이 없었던 두 사람이 버려놓았던 것들을 찾는 것일까.
보는 내내 기분이 거의 바닥까지 기어내려 갔다.
무엇을 찾아야하는지, 무엇을 향해 가야하는지, 어떤 것들을 남겨두어야하는지
살면서 많은 것들이 희미해져간다.
문득 문득 그런 사실이 떠올라버리면 세상은, 그리고 살아가는 것은 참 두려워져 버린다.
무언가 하나를 잃어버리는 동시에 모든 것이 산산히 부숴지지나 않을까.
조각 하나가 빠지면 실패해버리는 도미노처럼.
그만큼 사는 것은 위태롭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카스미와 우츠미가 유카를 찾는 여정을 그리고 있지만, 사실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엔 뭣하다.
유카가 왜 없어졌는가. 범인은 누구인가. 하는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명쾌한 해석을 바란다면 분명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을 소설이다.
보고난 후에 마음에 찬바람이 쌩쌩 돌 정도로 공허한 느낌이 남는다.
슬프고, 너무나 무섭고, 허무하다.
p.s 전체 오타라고 해야할지 일부러 이렇게 한건지 모르겠다.
책의 원제는 "부드러운 볼"이고, "부드러운 볼"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책이 나왔던데,
다시 찍어낸 책의 제목은 "내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그런데 왜 책 한장 한장마다 "부드러운 볼"이라고 당당히 써있는것인지...-_-;
어쩐지 표지와 제목만 살짝 바꿔내고 내용물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듯한 출판사가 약간 괘씸해진다.
한권에 내도 될만한 분량을(합치면 550페이지 정도?) 두권으로 나눠낸 것도 괘씸하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