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기억
다카하시 가츠히코 지음, 오근형 옮김 / 이야기(자음과모음)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참 독특하다.
어떤 기억은 오래도록 남아서 트라우마로 작용하기도 하고,
어떤 기억은 너무 충격적인 나머지 뇌에서 삭제가 들어가기도 한다.
예전에, 임신부가 아주 극적인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뱃속의 아이를 위해서 뇌에서 자체적으로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충격적인 기억을 삭제해버린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본능에 가까운 기억상실인 셈이다.
 
아주 먼 얘기 말고 자기자신의 얘기를 상상해보자.
누구나 아주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을 정확히 기억해낼수는 없다.
어떤 기억은 생생히 떠오르고, 어떤 기억은 아주 잊혀졌으며,
어떤 기억은 반쯤만 남아서 앞뒤를 구분할수 없는 미스테리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내게도 그런 기억이 몇개쯤 있다. 잊어버리고 있었다가 어느순간 갑자기 생각나버리는 경우가.
고등학교때 언젠가 시험기간에 책상에 앉아있는데, 아주 충격적인 기억이 하나 떠오른 적이 있었다.
그 전까지는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기억인데, 별 사건없이 갑자기 떠올라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생각해보니 거의 모든 것이 떠올랐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떠오른 기억이 희한하게도 모르던 도중에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을까.
나는 한번도 기억해내지 못했던 기억인데, 어떻게 그게 나도 모르는 새에 사고방식까지 바꿔놓은 계기가 된 것일까.
아마도 나는 그 사건을 완전히 잊은 것이 아니라
없었던 거라고 덮어두고 나서 이성적으로 차례를 맞추어 보기를 포기해버렸던 것이 아닐까.
그 때 쯤부터 나는 뒤를 돌아다보는 것이 두려워졌다.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내 어느 부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살면서 종종, 어린시절에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한 장면 한장면씩이 어떠한 계기도 없이 연결되어서 생각날 때마다,
별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어렸을때라서 소름이 끼칠때가 있다.
그것은 거의 끼워맞추어진 퍼즐처럼 내 기억에 아직도 존재하지만,
떠올린 과정이 굉장히 뜬금없고, 그 기억속의 내 나이가 너무나 어리기 때문에,
이것이 환상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만큼, 기억이 뇌에 남아져 있는 형태가 희한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환상이었다고 치부하기엔 그런 쓸데없는 기억을 만들어내서 뭐하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카하시 가츠히코의 "붉은 기억"은 간단히 말해서,
기억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일곱가지의 다른 이야기를 환상특급의 분위기로 풀어내고 있는 단편집이다.
단편속의 모든 기억은 모르는 사이에 주인공의 트라우마로 작용하며, 파국으로 연결되어있다.
90년대에 나온 이 책이 지금와서는 어쩐지 좀 뻔해진 감이 있어서 완전히 마음에 들었다고는 할수 없으나,
한여름밤, 누군가의 괴담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꽤 재미를 느낄수 있는 책이다.
언뜻 언뜻 소름끼치게 기분나쁜면도 존재하기 때문에, 겁이 많은 사람이한밤중에 읽는다면,
덜덜 떨면서 읽을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환상특급이나, X파일류의 "진실은 저 너머에..."스타일의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만족할 만 할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는 "진실은 기억안에..."로 바뀌어 있지만 말이다.
 
책 제목이 되어버린 <붉은 기억>은 너무나도 뻔해져버린 이야기라 조금 실망적이었지만,
식중독과 엄마 뱃속의 기억을 버무린 <살갗의 기억>이라던가,
어디선가 많이 들은 이야기이지만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면 꽤 스산한 <뒤틀린 기억>이나,
마지막 한줄에 소름이 돋아버린 <머나먼 기억>은 무척 흥미로웠다.
아쉬운 점은 모든 이야기가 살인이나 죽음,강간과 연관되어 있는 점이지만,
짧게 끊어읽을 괴담류의 이야깃거리로는 꽤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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