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
모리 히로시 지음, 안소현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인간관계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라고 모리 히로시에게 묻는다면, 이런 책이 되돌아올 것이다.
고독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라고 모리 히로시에게 또 묻는다면, 이런 책이 또 되돌아올 것이다.
 
조금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
조금 더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
아주 조금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
더더욱 조금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
그저 조금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
아직도 조금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
조금 특이한 아이, 끝났습니다
 
이상의 오감도를 보는 듯한 요상한 목차를 가지고 있는 이 책 <조금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는 솔직히 말해서
소설로써의 재미는 거의 느낄수 없는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소설을 읽는 것인지, 모리 히로시의 수필을 읽는 건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는데,
묘하게도 중간에 그만두게 되지는 않는다.
특별한 재미가 없어도 계속 읽게된다.
이런 느낌은 이 소설속에서 주인공이 이상한 음식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계속 받는 느낌인데,
(미인이지만, 그다지 기억될만한 부분이 없다던가,
그런대로 맛은 있는데, 다시 먹고싶은 생각이 강렬하게 들게되지 않는 음식이라던가-
엄연히 멀쩡한 외형을 가지고 묘하게 기억은 잘 되지 않는 상태..)
모리 히로시 자체가 이런 느낌을 노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설의 주인공 교수 역시, 본인이 교수인 모리 히로시를 모델로 그려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설의 주인공의 이야기를 읽고 어떤 사람인줄 알게 되듯이
작가 모리 히로시라는 인간 자체를 알게된 것만 같은 기분에 휩쌓이는데,
이런 류의 사람- 지식인이면서 어딘가 멍하고 세상과 동떨어져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은
모리 히로시의 대표작 <모든 것이 F가된다>의 주인공 사이카와 교수와도 무척 흡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고야마 교수는 어떤 음식점을 알려주고 어느날 사라져버린 이라키를 떠올리면서,
이 수상한 음식점에 들어서게 된다.
모든 주문은 전화로 이루어지고, 예약을 해놓으면 그쪽에서 손님을 데리러 오며,
갈때마다 장소가 바뀌고, 맛은 있는 편인데 묘하게 기억에 남지않는 음식과
미인인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기억에 남지 않아, 거리에서 마주친다면 모르는 사람으로 생각해버릴 여주인장.
식사할 때마다 매번 들어와 맞은 편에서 함께 식사를 해주는 우아한 식사예법을 가진 여인들.
음식점에 대해서 묻지 말것, 다른 손님의 정보를 묻지 말것,
매번 식사중에 들어오는 여자는 바뀌며, 추후에 만날 생각은 하지 말 것,
음식값은 혼자와서 매번 손님이 두사람 몫을 내며 늘 버려진 곳을 택해 손님을 끌어들이는 이상한 음식점.
혼자 밥을 먹으러 가서 두사람분의 음식값을 내고,
어떤때는 수다스럽게 일상을 털어놓고, 또 어떤 때는 거의 한마디도하지 않는 여자들과의 식사는
도대체 어떤 기분일지 모르겠지만, 소설속의 고야마 교수는 그런 시스템이 꽤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래. 어찌보면 이 소설은 인스턴트 인간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에 몇시간 함께 있었던 여인들, 그녀들의 일상이나, 그녀들의 외향이나,
어느 것 하나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허무한가?
아니, 소설을 보다보면, 인간관계의 일회성은 허무하다기보다는 당연스럽게 느껴진다.
고야마 교수처럼 순간순간 스쳐가는 인연에 대해 무척 유연한 사고를 가진 인간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냐만은,
보는 내내 모든 것을 흐르는 물처럼 관조하며, 어떻게 되더라도 섭섭해하지 않는 모습이
꽤나 유동적이고 강한 사람으로 느껴져서, 조금 부러워졌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관계에 있어 꽤 질척대며 집착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나 역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자살하지 않는다고, 고야마 교수는 말한다.
어떻게 살든 인간을 끊임없이 따라다니게 되어있는 고독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것은
어느 단계에 이르러서는 자신을 좀 더 강하게 해준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제목은 <조금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이지만, 특이한 사람은 나오지 않고, 특이한 소설도 아니다.
오히려 소설로써는 실패작이 아닐까...싶기도 하지만,
한바탕 사색의 시간을 가진 것같은 느낌이 든 달까, 아니면 모리 히로시와 대화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달까.
어딘지 묘한 소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고루 기담
아사다 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고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밤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 또한 하나뿐인 목숨을 위해, 그리고세계의 평화와 질서를 위해
절대로 발설할 수 없었던 귀중한 체험을 마음껏 이야기 해주시기 바랍니다.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야기를 하시는 분은 절대로 과장이나 미화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야기를 들으신 분은 꿈에서라도 발설해서는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말씀하시고, 바위처럼 입을 굳게 다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모임의 규칙입니다."

고층 빌딩의 펜트하우스, 공중정원까지 있는 이 럭셔리한 장소에 각분야의 최고가 된 사람들이 모여있다.
인생을 한 분야에 바친 지긋이 나이든 사람들은 무엇때문에 이런 모임을 가지고
자기 비밀을 털어놓거나, 남의 비밀을 옅들으며 앉아있는 것일까.
사고루(沙高樓). 모래로 쌓은 높은 누각. 높은 자리는 무르고 위험하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말의 "모래성"을 떠오르게 한다. 겉보기에 근사하지만, 쉽게 허물어 질수 있는.....

아사다지로의 <사고루 기담>은 이런 사람들이 모여 네가지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소설은 사고루에 대한 간단한 정의를 내리고 곧바로 이야기에 뛰어들어
소설을 읽는 독자를 이 사고루 모임을 처음부터 참석한 자가 아닌 중간부터 들어와
어쩌다 이야기를 듣는 이방인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를 처음부터 들을 필요는 없지 않는가.
중간부터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 세상에는 그런 이야기가 얼마든지 많다.

그들이 나누는 네가지 이야기는 기이하지만, 아련하리만치 익숙하다.
정원사 노인을 빼놓고 그들은 모두가 최고의 지위와 굉장한 부를 소유한 사람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돈으로 처바른 천박할 정도의 고상함이 느껴진다거나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너무나 소박한, 누구의 마음에나 다 있을법한 감정들-
호기심, 두려움, 집착과 사랑, 집념, 믿음....그런 것들이 너무도 익숙하고 담담하게 느껴진다.
사실 이 책의 리뷰를 어떻게 써야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분명 이 책을 너무나 재밌게, 뚜렷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마음속으로 그려가며 히죽히죽 웃으며,
코가 시큰할 정도로 감동적으로 보았음에도, 그 감정을 어떻게 얘기해야할지 모르겠다.

<철도원>으로 유명한 아사다 지로라는 작가.
<철도원>도, <파이란>도 영화로 보았기 때문에, 책으로는 읽지 않았던 건 나의 오만.
무덤덤하게 읽어나가다가 갑자기 아껴읽고 싶어졌고,
억지로 책에서 눈을 떼게 만들었던 아사다 지로라는 작가-무척 매력적인 인물이다.
무덤덤하고 소박한 감수성. 너무나 평범한 소시민의 감수성.
매우 치밀한 짜임새도, 뒷통수를 때리는 반전도 없다.
지식으로 똘똘 뭉쳐 미사여구로 포장된 근사한 대사도 하나 없다.
소설을 재밌게 하는 요소들이 다 빠져도, 이 소설에는 포장되지 않은 진심이 주는 감동이 있다.
그것 하나로 족하다.

아무렇게나 말하는 듯한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아무렇게나 던져진 물음에 대답을 해보고,
아무렇게나 내뱉는 주인공들의 대사에 마음이 울린다.
무척 멋진 사람. 멋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세상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사람을 아무렇게나 멋대로 정의해버리지만, 그것에서조차 애정이 담긴 따뜻함이 느껴지는 작가.
그가 멋있는 이유는 그가 많이 배웠거나, 똑똑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글은, 매일 런닝셔츠만 입고 나른하게 가겟집에 앉아있는 아무것도 아니어 보이는 노인이
어느 날 "인생은 말이지..."하고, 어떤 미사여구도 없이, 건조하게 내게 딱 맞는 충고와 격언을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리는 듯한- 그런 감동과 멋이 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
예쁘지 않지만, 멋있는 세월의 지혜가 담긴 주름.
삶을 살았고, 세상을 미워해보기도 했고, 좋아하는 여자를 떠나보내기도 했고, 짝사랑도 해보았으며,
인간을 혐오해보기도 했고, 실패도 좌절도 겪어본 자가 가진 이 알수없는 여유로움이 너무나 멋있다.
늙는다면 이런 사람이 되야지.
설사 사람을 욕하더라도 그 안에 따뜻함을 담아낼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야지.
담담하게 세상을 바라보면서, 미움도 정으로 녹여낼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아사다 지로를 발견한 첫 책.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었다.
사고루 이야기가 끝이 없이 이어지기를 바랬건만, 그래서 아껴서 천천히 읽으려고 용을 썼건만
아쉽게도 이야기가 끝이 났다.
평범하지만, 아름답다. 마음에 따뜻한 것이 번지고, 그리운 풍경이 아련히 떠오른다.
이번 기회에 아사다 지로의 소설들을 더 읽어봐야겠다. 뭐라 말할수 없이 느낌이 좋다.
(하지만 지나치게 종류가 많다는 사실에 한번 좌절하게 된다........
일단 철도원과 장미 도둑부터 시이이자아악!!!! 물론 그것도 아껴서 읽어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녀의 눈동자 1939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1
한 놀란 지음, 하정희 옮김 / 내인생의책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이날은 심판의 날이었다.
심판은 하늘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땅에서 이루어졌다.
선량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으며 악한 사람들은 지옥으로 추방되지 않았다.
선과 악, 죄인과 무고한 사람을 가르는 기준은 바로, 나이가 몇살인가에 있었다.

 -한 놀란 <소녀의 눈동자 1939>

잊어버려야할 것은 깨끗하게 잊고 사는 것이 스트레스 받지 않으며 사는 길이거늘,
이 책은 주인공 샤냐의 할머니 입을 빌어 끊임없이 잊지 말 것을 당부한다.
열여덟, 샤나의 눈에 비친 지옥보다 더한 삶.
잊지 말고 모두 기억해두어 똑같은 역사가 되풀이되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
사실, 모든 것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는 것은 이전의 사건을 잊지 때문에 발생한다.
잊지 말것이며, 기억해둘 것이며, 나의 고통을 떠올려 타인에게 고통을 짊어지게 하지 말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늘 엄마에게 내버려졌다고 생각하는 힐러리.
반항적이고, 분노에 가득찬 이 소녀 힐러리는 어느 날 길에서 브래드를 발견하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를 따라 신나치 집단에 빠져들게 되었다.
유대인 아이를 괴롭히고, 여기저기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이 문제아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깨끗하게 한다고 착각한다.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힐러리의 무의식속에 히틀러가 살아있고,
폴란드가 점령되었던 1930년대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샤나'라는 열여덟살의 소녀였고, 굶주림과 공포속에서 살아간다.
힐러리는 샤나를 통해 알수 있을까.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의 행동이 엄청난 실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할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곤란과 공포속으로 빠트리고 있는지.
 

개인적으로 극도로 피하는 이야기중 하나가 나치와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인데,
알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도 무섭고 불쌍하고 뭐라 말할수 없이 기분이 안좋아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그런 기분을 느꼈다.
나는 세상의 진실, 분명히 있었던 사실에 도피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가져오는 너무도 인간적인 감정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소설은 잊지 말 것을 당부한다.
잊지 말고 기억해두어 다시는 참혹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라고.

이해할수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나는 유대인들이 겪었던 혹독한 추위도, 굶주림도,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데 감사해야하는
삶의 고단함과 공포를 겪어본적이 없다.
몸의 고통으로 사람의 마음까지 피폐해져, 생존본능이외에는 모든 감정을 죽이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에서 살아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모두 이해할수 있다면 커다란 만용이겠지만,
샤나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나는 무척 괴로웠고, 슬펐다.
인간으로 태어나 어떻게. 어째서 인간이 인간을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

무척 재밌게 읽은 책이지만, 책을 후반부에 가서는 지나치게 기독교적인 가르침으로
마무리를 지으려 하는 점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양인들의 시선에서 보았기 때문일까. 고생하는 내내 신을 부정하던 샤나가 신의 존재를 믿게 된다.
아니, 어째서? 왜?
신이 있다면, 어째서 이런 사악한 인간을 만들었을까.
신이 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사람들이 필요할때
단 한번도 나타나 주지 않는것일까. 무슨 놈의 신이 그래?
그런데도 왜 신은 있고, 신이 언제나 곁에서 지켜주고 있었다고 말하는 거지?
가족들이 산산히 흩어지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의미없이 죽어나갔는데,
신은 어디있었다는 거지?

이 모든 일은 인간이 벌인 짓이다. 인간은 그만치 사악하고, 폭력적이다.
그리고 견뎌낸 것도 인간이다.
절대로, 신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일은 땅에서 이루어진다. 하늘이 아니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녀와 비밀의 부채 2
리사 시 지음, 양선아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이야기는 한때 중국의 거의 모든 소녀들이 고통을 인내해가며 전족을 해야했던 시대의 이야기.
여자를 다른 가족들을 위한 집안의 재산중에 하나로 여기고, 남편을 하늘같이 받아들여야했던 시대에
여자로 태어나 일곱살에 전족을 하고 시집가기 전까지 방밖으로는 나와서는 안되었던
나리와 설화 두 여자의 이야기이다.
 
여자는 참고 참고 또 참아서 자신의 권력을 가지고 하고자 하는 바를 할수있었던 시대.
3세에서 7세 사이의 여자아이들이 발가락이 부러지고 썩어가는 고통을 겪으며 붕대로 발을 꽁꽁 묶어매고,
열명 중 하나는 전족 과정중에서 죽기도 했으며,
발이 묶여있듯이 몸과 마음마저 가족과 남편에게 묶여있을수 밖에 없었던 시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여자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지극히 부당하고 잔인했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어머니는 시집 보내면 끝일 딸에게 굳이 애정을 주려 하지 않았고,
딸은 사랑을 갈구했으나, 어머니가 되고 또다시 자신의 딸에게 애정을 주려하지 않고,
그저 참고 인내하는 법만을 강요받았던 여자의 이야기이다.
 
평범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금련같은 발을 가지고 있기에 부잣집으로 시집간 나리와,
고귀한 집안의 고귀한 막내딸로 태어나 푸줏간 아낙내가 될수 밖에 없었던 설화-
두 소녀는 라오통이라는 특별한 관계로 묶인 친구이다.
그 시대에 결혼이 현실적으로는 여자들에게 여자의 인생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면,
라오통-영원히 함께 하는 것, 같이 늙어감을 뜻하는 이 관계는 또하나의 영혼의 결혼식이었던 셈이다.
두 여자의 대비된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일곱살부터 죽을때까지 서로를 사랑했던 두 여자의 이야기는
그들이 주고받는 여자만의 글자 뉴수(女書)에서 오가는 달콤한 언어들처럼, 이들의 남편과의 사랑보다 더 애틋하다.
그들은 남편을 존경하며 사랑하지만, 그 사랑에는 어느 정도 체념이 담겨있기에
그들은 남편을 전적으로 믿기 보다는, 라오통이나 의자매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했고,
소설 후반부 나리가 설화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관계를 끊으려 했던 이유 역시, 
남편에게 받는 배신보다 가장 친한 친구, 가족보다 더 사랑하는 친구에게 받는 배신감에
더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가 평생 자신을 더 괴롭힐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소설은 거의 전적으로 순종적으로 살아야하는 여자들의 인생을 보여주고, 소설 전체적인 느낌 역시 무척 순종적이라
여성인권적인 관점같은 것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에게, 남편에게, 아들에게 종속되어있는 관계에 일말의 불만을 갖지 않고,
지금의 시선으로써는 당연히 부당한 사실을 "인내"가 여자가 가질수 있는 최고의 미덕이라는 듯
참고 견뎌내는 것만을 당연시 여긴다.
얼마전에 읽었던 "컬러퍼플"과 이 소설이 대비되는 점은 그런 점이다.
똑같이 서러운 여자의 인생을 그렸음에도, 자신만을 위한 인생을 찾아가는 <컬러 퍼플>의 씰리의 독립적인 삶과
남자에게 종속되어 순종하는 삶을 당연시 생각하는 <소녀와 비밀의 부채>의 나리나 설화의 복종적인 삶은
똑같이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임에도 참 많이 다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아마도 그런 점일 것이다.
나리와 설화 두 여자의 인생과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사회에 순응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그 순종안에서 행복을 찾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옛날의 가치관에 의해 쓰여진 옛날 소설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내 선입견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외국인이 쓴 중국소설이기 때문에
그 시대에 여자들이 감내해야했던 순종과 인내의 고통을 외국인의 입장에서 낭만적으로 그려냈다는 생각도 든다.
만약, 이 소설을 동양권 작가가 썼더라면, 이처럼 아름답게만 그렸을까.
이 점은 영화 <게이샤의 추억>을 볼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인권유린에 가까운 순종과 복종을 강요받은 여자의 인생 역시 하나의 동양의 신비처럼 받아들이는 느낌이었달까...
 
다 읽고나서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꽤 재밌는 책이었다.
아이들이 자라나는 장면이 유독 길어서 초반부가 다소 지루하지만,
나리의 결혼과 함께 밝혀지는 진실부터 매우 스피디하고 재밌게 펼쳐져서 두권의 분량을 한권처럼 먹어치울수 있는
재밌고, 한편으로는 씁쓸해졌던 소설이었다.
읽으면서 영화 <조일럭 클럽>을 떠올렸는데, 그런 느낌을 기대하고 읽는다면 충분히 재밌을 소설이다.
그러나 책 띠지에서처럼 펄벅과의 비교를 굳이 하려하신다면, 코웃음이 나는 수 밖에....
 
 
 
그들 말대로, 딸들은 쓸모없을지도 모른다.
딸들은 웃자란 가지처럼 거추장 스럽고, 쓸데없는 걱정거리이며,다른 가족을 위해 기르는 자식일지도 모른다.
많은 어머니들은 주문을 걸듯 그렇게 독한 말을 스스로에게 되풀이한다.
딸을 위해 어떤 감정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사랑은 물론, 동정, 가여움, 희생, 귀여움 등등의 그 어떤 감정도 배제하려 한다.
될수 있으면 독하고 쌀쌀맞은 어미로 남기를 원한다.
그래야 멀리 남의 집으로 시집간 딸이 더 이상 친정 생각을 하며 눈물 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아무리 사랑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친정식구들은 딸을 사랑하고 아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야 뉴슈로 쓴 여자의 은밀한 편지에 "나는 아버지 손안의 진주였다"같은 구절이 왜 그렇게 자주 등장하겠는가?
 
-리사 시 < 소녀와 비밀의 부채> 中에서...
 
 
p.s 1. 오역인지, 오타인지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 도중에 거슬리는 문장이 종종 발견된다.
 "나는 설화의 자식들이 내 식구들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p142)
"우리집에 오면 늘 마누라가 음식이나 책, 돈과 같은 선물을 안고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p168)
같은 문장들이 종종 눈에 띄여서 교정을 보지 않은 듯한 인상을 풍긴다.
p.s 2. 그래도 이 정도 분량의 책이라면, 분권을 해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듬성듬성하고 큰 글씨에, 한권당 270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데 왠 분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물아홉, 그가 나를 떠났다 - 2005 페미나상 상 수상작
레지스 조프레 지음, 백선희 옮김 / 푸른숲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제목이나, 책 표지가 주는 이미지로만 이야기를 유추해보자면,
스물 아홉살에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나도 너따위 필요없어!"라고 외치며,
자기직업을 사랑하는 직업 여성으로써의 새로운 삶을 살게되며, 거기엔 꼭 연하남 하나정도는 등장해야하는
노처녀를 위한 요즘 드라마의 트랜드를 따른 이야기처럼 느껴진다만,
막상 이 책은 그런 상상과는 많이 다르다.
흡사 아멜리 노통의 소설을 떠올릴수 밖에 없이 숨가쁘게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는
기이하고 냉소적이기 이를데 없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
 
스물아홉살의 지젤에게 어느날 남자친구 다미앙의 아버지가 찾아온다.
수도꼭지를 갈아주려고 찾아와서는 이것저것 잔소리를 늘어놓더니만,
이 아버지 하는 말씀이, 갑자기 다미앙이 헤어지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해달란다.
자다 말고 깨어나 정신이 없는 지젤에게 다미앙은 더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고,
이제 결혼을 해야할 그에게는 너보다 더 어린 여자- 스물 서넛 정도 먹은 아가씨가 필요하며,
그녀를 위해 한바탕 충고를 멋대로 늘어놓더니만, 집에서 다미앙 물건을 다 가져가야겠다고 하지 않나,
그것도 모잘라 좀 도와달라고 하지 않나, 급기야는 너랑 자고 싶다는 얘기를 꺼내지 않나.
상식 이하의 아버지보다 더 열받는 남자 다미앙.
매사에 무감각하며 이별 통보조차 아버지에게 맡겨버리는 비겁하고 파렴치한 다미앙.
그에 한술 더떠, 가뜩이나 충격받아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지젤에게 전화해서
다미앙과 헤어져야할 이유는 친절히도 설명해주시는 수다스럽고 잔인한 다미앙의 어머니까지.
 
사랑이란 공해이며, 피를 빨다가 문득 우리의 몸이 역겨워진 피곤한 모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도발적인 이 소설에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된 인간들이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겁하며, 남 탓하기 좋아하고, 수다스럽지만, 정작 서로 대화는 거의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한쪽이 일방적으로 퍼부어버리는 충고 아닌 충고만 있을 뿐.
소설의 이야기는 아주 간단해서, 스물 아홉살의 지젤을 비겁한 다미앙이 떠나는 것 뿐이지만,
그 안에 내재된 가족 갈등과 불신, 인간에 대한 애증이 이 소설의 주된 이야기가 되겠다.
그래서 이야기의 굴곡이 너무 없고, 수다스럽게 자기 입장만 떠드는 사람들 때문에
전체적으로 다소 지루하고 평이하며 엇비슷한 비유가 연속적으로 소설 내내 등장해
작가의 의도된 문장인지, 아니면 작가가 그 단어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의아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소설 내내 정액에 관한 비유를 하는 점-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는 비유들은
꼭 마치 작가가 그 단어를 쓰기 위해서 문장을 써내려간 것처럼 짜맞춰진 느낌이 든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아멜리 노통의 소설을 꽤 재밌게 봤었는데,
아마 지금 아멜리 노통의 소설을 읽는다 해도 이와 똑같은 기분이 들었으리라.
죽도록 싸우고 남을 헐뜯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의 수다를 듣기에는
내가 이미 조용함이나 무언에서 오는 메시지를 더 즐기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시끄러워서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
그 안에는 자기 변호로 얼룩진 비겁한 변명이 있을 뿐이다.
너무 소심하고 나약해서 남을 비난하지 않고는 자신감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뒤틀린 변명들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