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루 기담
아사다 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고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밤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 또한 하나뿐인 목숨을 위해, 그리고세계의 평화와 질서를 위해
절대로 발설할 수 없었던 귀중한 체험을 마음껏 이야기 해주시기 바랍니다.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야기를 하시는 분은 절대로 과장이나 미화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야기를 들으신 분은 꿈에서라도 발설해서는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말씀하시고, 바위처럼 입을 굳게 다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모임의 규칙입니다."

고층 빌딩의 펜트하우스, 공중정원까지 있는 이 럭셔리한 장소에 각분야의 최고가 된 사람들이 모여있다.
인생을 한 분야에 바친 지긋이 나이든 사람들은 무엇때문에 이런 모임을 가지고
자기 비밀을 털어놓거나, 남의 비밀을 옅들으며 앉아있는 것일까.
사고루(沙高樓). 모래로 쌓은 높은 누각. 높은 자리는 무르고 위험하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말의 "모래성"을 떠오르게 한다. 겉보기에 근사하지만, 쉽게 허물어 질수 있는.....

아사다지로의 <사고루 기담>은 이런 사람들이 모여 네가지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소설은 사고루에 대한 간단한 정의를 내리고 곧바로 이야기에 뛰어들어
소설을 읽는 독자를 이 사고루 모임을 처음부터 참석한 자가 아닌 중간부터 들어와
어쩌다 이야기를 듣는 이방인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를 처음부터 들을 필요는 없지 않는가.
중간부터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 세상에는 그런 이야기가 얼마든지 많다.

그들이 나누는 네가지 이야기는 기이하지만, 아련하리만치 익숙하다.
정원사 노인을 빼놓고 그들은 모두가 최고의 지위와 굉장한 부를 소유한 사람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돈으로 처바른 천박할 정도의 고상함이 느껴진다거나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너무나 소박한, 누구의 마음에나 다 있을법한 감정들-
호기심, 두려움, 집착과 사랑, 집념, 믿음....그런 것들이 너무도 익숙하고 담담하게 느껴진다.
사실 이 책의 리뷰를 어떻게 써야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분명 이 책을 너무나 재밌게, 뚜렷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마음속으로 그려가며 히죽히죽 웃으며,
코가 시큰할 정도로 감동적으로 보았음에도, 그 감정을 어떻게 얘기해야할지 모르겠다.

<철도원>으로 유명한 아사다 지로라는 작가.
<철도원>도, <파이란>도 영화로 보았기 때문에, 책으로는 읽지 않았던 건 나의 오만.
무덤덤하게 읽어나가다가 갑자기 아껴읽고 싶어졌고,
억지로 책에서 눈을 떼게 만들었던 아사다 지로라는 작가-무척 매력적인 인물이다.
무덤덤하고 소박한 감수성. 너무나 평범한 소시민의 감수성.
매우 치밀한 짜임새도, 뒷통수를 때리는 반전도 없다.
지식으로 똘똘 뭉쳐 미사여구로 포장된 근사한 대사도 하나 없다.
소설을 재밌게 하는 요소들이 다 빠져도, 이 소설에는 포장되지 않은 진심이 주는 감동이 있다.
그것 하나로 족하다.

아무렇게나 말하는 듯한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아무렇게나 던져진 물음에 대답을 해보고,
아무렇게나 내뱉는 주인공들의 대사에 마음이 울린다.
무척 멋진 사람. 멋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세상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사람을 아무렇게나 멋대로 정의해버리지만, 그것에서조차 애정이 담긴 따뜻함이 느껴지는 작가.
그가 멋있는 이유는 그가 많이 배웠거나, 똑똑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글은, 매일 런닝셔츠만 입고 나른하게 가겟집에 앉아있는 아무것도 아니어 보이는 노인이
어느 날 "인생은 말이지..."하고, 어떤 미사여구도 없이, 건조하게 내게 딱 맞는 충고와 격언을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리는 듯한- 그런 감동과 멋이 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
예쁘지 않지만, 멋있는 세월의 지혜가 담긴 주름.
삶을 살았고, 세상을 미워해보기도 했고, 좋아하는 여자를 떠나보내기도 했고, 짝사랑도 해보았으며,
인간을 혐오해보기도 했고, 실패도 좌절도 겪어본 자가 가진 이 알수없는 여유로움이 너무나 멋있다.
늙는다면 이런 사람이 되야지.
설사 사람을 욕하더라도 그 안에 따뜻함을 담아낼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야지.
담담하게 세상을 바라보면서, 미움도 정으로 녹여낼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아사다 지로를 발견한 첫 책.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었다.
사고루 이야기가 끝이 없이 이어지기를 바랬건만, 그래서 아껴서 천천히 읽으려고 용을 썼건만
아쉽게도 이야기가 끝이 났다.
평범하지만, 아름답다. 마음에 따뜻한 것이 번지고, 그리운 풍경이 아련히 떠오른다.
이번 기회에 아사다 지로의 소설들을 더 읽어봐야겠다. 뭐라 말할수 없이 느낌이 좋다.
(하지만 지나치게 종류가 많다는 사실에 한번 좌절하게 된다........
일단 철도원과 장미 도둑부터 시이이자아악!!!! 물론 그것도 아껴서 읽어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