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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눈동자 1939 ㅣ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1
한 놀란 지음, 하정희 옮김 / 내인생의책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이날은 심판의 날이었다.
심판은 하늘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땅에서 이루어졌다.
선량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으며 악한 사람들은 지옥으로 추방되지 않았다.
선과 악, 죄인과 무고한 사람을 가르는 기준은 바로, 나이가 몇살인가에 있었다.
-한 놀란 <소녀의 눈동자 1939>
잊어버려야할 것은 깨끗하게 잊고 사는 것이 스트레스 받지 않으며 사는 길이거늘,
이 책은 주인공 샤냐의 할머니 입을 빌어 끊임없이 잊지 말 것을 당부한다.
열여덟, 샤나의 눈에 비친 지옥보다 더한 삶.
잊지 말고 모두 기억해두어 똑같은 역사가 되풀이되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
사실, 모든 것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는 것은 이전의 사건을 잊지 때문에 발생한다.
잊지 말것이며, 기억해둘 것이며, 나의 고통을 떠올려 타인에게 고통을 짊어지게 하지 말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늘 엄마에게 내버려졌다고 생각하는 힐러리.
반항적이고, 분노에 가득찬 이 소녀 힐러리는 어느 날 길에서 브래드를 발견하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를 따라 신나치 집단에 빠져들게 되었다.
유대인 아이를 괴롭히고, 여기저기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이 문제아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깨끗하게 한다고 착각한다.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힐러리의 무의식속에 히틀러가 살아있고,
폴란드가 점령되었던 1930년대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샤나'라는 열여덟살의 소녀였고, 굶주림과 공포속에서 살아간다.
힐러리는 샤나를 통해 알수 있을까.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의 행동이 엄청난 실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할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곤란과 공포속으로 빠트리고 있는지.
개인적으로 극도로 피하는 이야기중 하나가 나치와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인데,
알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도 무섭고 불쌍하고 뭐라 말할수 없이 기분이 안좋아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그런 기분을 느꼈다.
나는 세상의 진실, 분명히 있었던 사실에 도피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가져오는 너무도 인간적인 감정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소설은 잊지 말 것을 당부한다.
잊지 말고 기억해두어 다시는 참혹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라고.
이해할수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나는 유대인들이 겪었던 혹독한 추위도, 굶주림도,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데 감사해야하는
삶의 고단함과 공포를 겪어본적이 없다.
몸의 고통으로 사람의 마음까지 피폐해져, 생존본능이외에는 모든 감정을 죽이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에서 살아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모두 이해할수 있다면 커다란 만용이겠지만,
샤나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나는 무척 괴로웠고, 슬펐다.
인간으로 태어나 어떻게. 어째서 인간이 인간을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
무척 재밌게 읽은 책이지만, 책을 후반부에 가서는 지나치게 기독교적인 가르침으로
마무리를 지으려 하는 점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양인들의 시선에서 보았기 때문일까. 고생하는 내내 신을 부정하던 샤나가 신의 존재를 믿게 된다.
아니, 어째서? 왜?
신이 있다면, 어째서 이런 사악한 인간을 만들었을까.
신이 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사람들이 필요할때
단 한번도 나타나 주지 않는것일까. 무슨 놈의 신이 그래?
그런데도 왜 신은 있고, 신이 언제나 곁에서 지켜주고 있었다고 말하는 거지?
가족들이 산산히 흩어지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의미없이 죽어나갔는데,
신은 어디있었다는 거지?
이 모든 일은 인간이 벌인 짓이다. 인간은 그만치 사악하고, 폭력적이다.
그리고 견뎌낸 것도 인간이다.
절대로, 신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일은 땅에서 이루어진다. 하늘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