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소녀
잭 케첨 지음, 전행선 옮김 / 크롭써클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에 맥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여동생과 함께 이사온다.
빨간 머리에 어여쁜 소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 소년은 이웃집에 사는 소녀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맥의 부모는 죽었고, 보호자인 루스 아줌마는 맥에게 살찐다며 음식을 주지 않고, 사사건건 맥의 자유를 방해한다.
자존심이 강한 열네살 소녀 맥은 루스 아줌마의 폭언과 학대를 못견디고 경찰에게 자신들의 상황을 말해보지만,
보수적인 작은 마을안에서 그 일은 루스아줌마의 교육태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집안 망신시키는 철없는 계집애의 망언이 되어버린다.
그 일을 계기로, 루스 아줌마는 맥을 점점 더 학대하기 시작한다.
방공호로 만들어진 지하실에 맥을 가두고, 음식도 물도 주지 않은 채, 대답할 가치없는 어이없는 질문을 하며 지하실에 매달아놓고 고문하며, 여기에 자신의 10대 세 아들들까지 가세시킨다.
그리고 점점 동네 10대 소년들은 이 이웃집 소녀 맥이 고문당하는 것을 구경하려고, 또는 고문을 자행해보려고 지하실로 모여든다. 그들은 루스를 발로 차고, 때리고, 칼로 찢고, 화상입을 정도로 뜨거운 물에 샤워시키고, 담뱃불로 지지고, 성폭행까지 하고 맥의 몸을 만신창이로 훼손시킨다.
루스 아줌마 옆집에 사는 열두살 주인공 데이비드 역시 그런 아이 중 하나였다.
이것을 모두 지켜보고 있으면서, 데이비드는 때로는 방관하고, 때로는 그들의 행동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다.
데이비드가 직접 맥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는다. 데이비드에게 맥은 첫사랑 소녀였기 때문에.
그러나 데이비드는 벌거벗겨진 채 천장에 매달린 맥을 보며 끊임없이 만지고 싶어하고, 그 모습을 잊을수가 없어서, 루스의 집 지하실에 자꾸 드나들게 된다.
죄책감과 쾌감을 동반한 엄청난 자극. 12살 데이비드는 거기에 홀려버린 것일까.
 
정황을 모르고 본다면, 이 소설은 천인공노할 만큼 어이없을만큼 끔찍한 스릴러 소설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부모잃은 두 아이를 거둬키우는 주인집 아줌마가 소녀를 상대로 학대를 저지르는 것 하며, 그것도 모잘라 10대의 세 아들들이 여기 가세하고, 거기에 동네 10대 아이들이 모두 가세해 한 소녀를 농락하고 고문하는 일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일은 아니지 않는가.
이들중 누구라도, 경찰에 신고하거나, 부모에게 말했을 법도 한데, 누구도 그러지 않는다.
철저히 광기어린 폭력에 물든 모습들과 내 일 아니라고 고개 돌려버리는 모습들, 그 모든 것이 치가 떨리게 공포스럽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이 소설은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장소와 인물과 약간의 사건을 변경했을 뿐, 거의 똑같은 사건이며, 정말 어이없게도 이 정도가 실화를 순화시킨 거란다.
"인디애나주 역사상 한 개인을 상대로 저질러진 가장 끔찍한 범죄"라는 이름이 이 책에 붙어있는데,
아마도 이런 비슷한 종류의 끔찍한 일들은 세상에 더 벌어지기도 하지만, 어디에도 갈수없는 상태에서, 아무도 믿지 못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출구없는 공포를 이 사건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맥의 말을 단순한 가정불화로 설명하려드는 경찰,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게 미덕이라 믿는 이웃집 사람, 같이 놀았던 기억도 있으면서,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어린 소녀를 보고 자신들도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동네 아이들.
모든 사람이 공범자이며 가해자다.
그리고 이 소설의 화자 데이비드의 존재 역시 공범자가 되듯, 이 소설을 잃고 있는 독자 역시 공범자가 되어버린다.
 
이 기묘한 집단 광기속에서 고통받고 외로운 맥은 꿋꿋하고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인간다운 사람은 맥이었다. 아무리 찢기고 밟혀도, 인간으로써 포기하지 않아야 할것은 포기하지 않는 맥은 끝까지 너무나 아름답다. 그래서 맥의 고통들이 더 슬프고, 마음이 찢어질정도로 애처롭게 느껴졌으리라.
옆집 소년 데이비드가 자신도 알수 없는 광기에 휘말려가며, 적어도 나는 직접 고통을 주지는 않는다며 자신을 위로하는 가운데에서도, 까닭없이 자신이 망가져가고 있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때, 그래서 종종 이유없이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이유없이 울음이 터져나올 때 나도 같이 울었다.
그리고 데이비드가 맥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도 같이 많이 울었다.
끝없는 고통과 공포속에서 맥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이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맥이 말했을 때에도 나는 계속 울고 있었다. 근 몇년간 이렇게 슬픈 소설은 또 난생 처음이라 울고 또 울면서 책을 보았다.
 
끔찍하게 무서운데, 동시에 끔찍하리만큼 아름다운 소설이다.
만약 이 소설을 다른 작가가 썼을 때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사유하지 않고, 고통에만 초점을 맞춰, 세상에 넘쳐나는 다른 스릴러 소설들과 똑같은 접근을 했더라면, 이 소설은 망작중의 망작이 되었을 터.
그러나 작가는 끔찍한 현실에 필터를 거르기 위해 이웃집 소년을 등장시키고, 그 이웃집 소년을 통해 우리들의 무관심과 방조죄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며, 언제나 상냥하던 이웃집 아줌마가 광기에 쩔어가며 이유없는 학대를 일삼는 괴물이 되기까지의 일들을 천천히 보여주면서 보고있는 사람들 까지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되찾을수 없는 순수와 인간성 상실의 아픔을 맥의 아픔만큼이나 절절하게 느낄수 있게 만들었던 문체 또한 탁월했다. 어쩌면 글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맥의 고통과 죄책감의 고통은 더 배가 된다.
이 책은 공포소설의 외형을 띈 고발소설이면서, 한편으로는 돌아올수 없는 일을 회상하는 성장 소설이었어서 더더욱 마음 아팠는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그녀를 고문하고 죽였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떤 사람은 죽었고, 어떤 사람은 비슷한 범죄를 저질러서 감옥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10대였던 그들이 어른이 된 지금, 모두가 한마음으로 맥을 잔인하게 고문했을 그때의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모르겠다..(1965년도 사건이니, 살아있는 사람들은 이미 중년을 넘겼겠다.)
한때 치던 장난으로 기억하고 있을지, 뒤돌아 생각해보고 끔찍하게 잔혹했던 자신을 반성했을 지.
그들이 그 일을 죽을 때까지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죽을 때까지 죄책감의 공포속에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단다.
"악이 승리하는데 필요한 유일한 한 가지는 선한 자들의 방관이다"
내 손으로 저지른 죄가 아니래도, 우리는 잘못된 세상을 향해 어느정도 죄책감은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내가 귀찮아 무시한 일들이 커다란 사건을 불러일으킨다.
세상에 하찮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고, 도망치지 말아야하지 않을까.
타인을 소중하게 여겨야 자신도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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