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지는 풀잎처럼, 스러지는 눈발처럼 또 한 해를 보낸다. 저리고 아쉽기만 한 나날들. 그야말로 시작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허망하기만 하다.

 

 

  해마다 그랬듯이 올해도 새 아침이 밝아오자 달뜬 나머지 희망의 단춧구멍을 터무니없이 넓게 뚫어버렸다. 천의 질감, 옷의 종류나 활용도 등은 고려하지도 않은 채, 일단 계획이란 단춧구멍부터 뻥 뚫어버렸다. 구멍에 맞는 단추를 찾아, 온 열두 달을 헤맸지만 끝내 제대로 된 것 하나 구하지 못했다. 한 해의 끝인 지금, 자그맣고 어설픈 단추 몇 개만이  손바닥 위에서 민망해할 뿐이다. 이미 크게 터 잡은 구멍에 끼워봤자, 금세 단추는 쏙 빠져나가고 말 것이다. 거창한 계획에 미미한 결과, 해마다 이런 일을 되풀이하고 만다. 하기야 꼭 이뤄져야 하는 게 계획이라면 굳이 새해마다 그것을 짤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계획은 세우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야겠다. 그 실천 유무를 따지다 보면 안 그래도 치운 가슴 찬바람만 들어찰 것 같다. 대신 내 곁을 맴돌던 두 단어를 떠올리면서 한해를 마무리해야겠다.

 

 

  우선 ‘힐링’이란 말을 되뇌인다. 올 한 해 밥상 위의 숟가락처럼 자주 오른 말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마음 둘 곳 많지 않아 우왕좌왕한다. 당신과 나, 툭 터놓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나 외롭고, 어디서나 힘들다. 그뿐이랴. 무엇을 하든 상처는 곁에 있고, 언제나 마음은 흔들린다. 이런 나약한 속성을 지닌 인간에게 필요한 게 치유의 연대감이다. 위로의 주체이자 대상인 개별자끼리 공감하다 보면 진심으로 치유에 맞닿게 된다. 힐링은 연대의 감정이지 폐쇄적 구원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사람 곁에서 얻는 치유가 골방의 치유보다 한결 낫다. 상처이지만 이내 구원이기도 한 사람 곁에서 많은 것을 얻고 누렸다. 이보다 더한 개인적 힐링이 어디 있겠는가.

 

 

  그 다음 떠오르는 말이 ‘깨달음’ 이다.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거창한 걸 말하려는 건 아니다. 생활의 발견이란 말처럼 일상 속에서 얻는 깨알 같고, 바람결 같은 생각들이 내면을 키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깊고 늦게 오는 깨달음은 그만큼 크고 무겁다. 하지만 찰나적이고 순간적인 깨달음은 작고 가벼운 대신 내면을 따스하게 해준다. 생의 근원을 뒤바꿀 수 있는 큰 깨달음보다 제비꽃 같은 소박한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생활의 발견을 얻은 것만으로도 올 한 해 고마운 일이다.

 

  한 호흡만 참았더라면 하는 자책, 원망보다는 이해, 미적거림보다는 재바른 발걸음, 우울보다는 환희 등을 깨쳐준 이는 다름 아닌 내 곁의 사람들이었다. 어느 누구도 대놓고 이렇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충고하지 않았지만 온당한 그들 삶을 보면서 많은 걸 느꼈다. 더 많이 내어주고, 더 많이 보듬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베풀어라고 몸과 마음으로 가르쳐준 모든 이에게 감사하는 한 해이다.

 

  좋은 사람들이 품은 가없는 기를 느끼면서 내가 얼마나 미흡한지를 절로 알게 된 한해였다. 잡다한 생각들이 온몸과 마음으로 휘몰려올 때 저릿하고 따뜻한 그들의 한 호흡을 떠올린다. 내 부실한 나무뿌리를 안 그런 척 하면서 슬쩍 다독여준 모든 가르침을 준 이에게 감사장을 대신한다. 내 어설픈 한 해가 감사로 아롱지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내일이면 오늘을 잊고 새 태양을 마중하러 나갈지라도 내게 소박한 깨달음을 준 모든 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아듀,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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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12-31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 곁에서 얻는 치유가 골방의 치유보다 한결 낫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진심으로요. 그리고,
제가 제 스타일을 고수하는 한, 당연히 저를 편안해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 스타일을 고수하는 쪽으로 선택할 것임을, 그러므로 제가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함께 받아들여야 함을 수용하게 된 한 해였습니다.

팜 언니, 언니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
또 한 분의 좋은 언니를 알게 되어서 너무 기쁩니다, 년말에 큰 기쁨 중 하나네요.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즐거운 새해 맞이하셔요.

다크아이즈 2013-01-01 09:02   좋아요 0 | URL
달여우님, 귀한 동상 한 분 생기는 건가요? ㅋ
연배는 언냐일지 몰라도 하는 짓은 동생만도 못할 수 있으니
이해해주신다면야 기꺼이...

인간 기본 성정을 꿰뚫고 있는 달여우님 한 말씀,말씀이 제겐 구슬이고 보배이옵니다. 모든 이를 다 내 안에 담는 건 불가하니 내 안에 오신 이라도 제대로 보듬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랄게요. 달여우님 감사해요. 해돋이 보러 먼 길 떠나을 수도 있겠네요. ^^*

프레이야 2012-12-31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힐링과 깨달음! 이거야말로 제가 올해 팜님글에서 얻은 선물이었어요.
위에 달여우님도 제게 그렇구요. 아..좋아라. 왠지 마음 따스해져요.
고마워요. 참 많이요^^

다크아이즈 2013-01-01 09:06   좋아요 0 | URL
제가 프레님께 얻은 건 다사로움과 우아한 아우라~~
결 곱고, 성실한 님께 많은 걸 배웠지요.
올해도 열심히 따르렵니다. 오늘 거나하게 울집 마루에서 해돋이를 해서 왠지 기분이 좋습니다. 크~ 프레님 ㄱㅖ신 곳도 비슷 할 듯... ^^*

2013-01-01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3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3-01-01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팜므느와르님이라고만 부르다가 오늘은 팜님이라고 부를게요 ㅎㅎ
제 서재에 들러주시고 댓글 달아주시고 관심 가져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사람에게서의 치유, 위로... 팜님 덕분에 많이 얻었고, 이젠 제가 보답해드릴게요. ㅎㅎ
2013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크아이즈 2013-01-01 09:12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다정한 님들처럼 팜님이라 불러주세요.
제 개인적으로도 이진님께 거는 기대가 크답니다.
알라디너들의 희망이자 한국 문단의 미래인 그대를 언제나 응원합니다.
많은 걸 깨쳐주신 소이진님께 제가 감사드려야지요.
새 날이 밝았으니 소이진님께도 그 햇살이...^^*
 

 

 

 

 

 

 

 

 

 

 

 

 

 

 

 

  한 어머니, 아들 전화 받고 서울나들이 가신다. 임신한 며느리 힘드니 아이 둘 좀 보살펴달란다. 고향 떠나 사흘 밤도 잔 적 없는 어머니, 난생 처음 일주일 예상으로 서울행 기차에 오른다. 아들의 두 번째 부인인 며느리는 덩치 크고 머리 큰 어머니에 비할 바 아니다. 황소 같은 몸집에다 성격은 착하다 못해 맹하기까지 하다.

 

 

  아들의 핏줄이 아닌, 며느리가 데리고 온 두 아이가 ‘할머니’라고 부르는 소리를 어머니는 듣고 싶지 않다. 냉랭한 아들은 어머니를 살갑게 챙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장 깨끗하고 넓은 공간인 지하실에 어머니의 침실을 마련해드렸고, 당신도 그곳을 딱히 싫어하지는 않는 눈치지만, 이웃들이 그런 자신더러 어머니를 지하실에 처박아 두었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한다. 다만, 그 옛날 수학선생님이었던 어머니가 동료 교사와 사랑에 빠져, 자신과 아버지를 돌보지 않은 채 자주 신경질을 냈던 것은 기억하고 있다. 잘못했다는 소리를 절대 하지 않는 어머니 때문에 아들은 유년 이후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왔다.

 

 

  첫 결혼에 실패한 것도, 그 후 고향에 돌아오지 않는 것도 어머니 때문이다. 이혼 전문 사교 모임에서 두 번째 아내를 만났고, 상처 많은 두 영혼은 정신과 상담의의 도움으로 정신적 자립을 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오죽하면 상담의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갔을까.

 

 

  예정된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어머니 짐을 싸신다. 핏줄 아닌 손주가 부르는 ‘할머니’ 소리 때문도 아니고, 변할 것 같지 않은 아들의 냉정한 시선 때문도 아니며, 대책 없이 맹한 며느리 성격 때문도 아니다. 어머니를 서울로 오게 한 아들의 진짜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극도로 변덕스러운 어머니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입 다물고 살았던 아들은 커서도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다. 아들 부부는 상담의의 권유로 ‘용서하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어머니를 초대했던 것이다. 심리 치료 모임에서 아들이 이 모든 걸 재연할 걸 생각하니 어머니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아들은 어머니를 이용하고, 속수무책 상황에 처한 어머니는 수치심에 치를 떤다. 어머니는 사흘 만에 고향 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용서에 대해 생각한다. 용서하거나 용서받는다는 건 지극한 이기심의 발로이다. 용서하는 자는 준비가 필요하고, 용서 받는 쪽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이 편하고자 성급히 용서를 바라도 안 되고, 용서할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에는 섣불리 그것을 받아들여서도 안된다. 급하면 체한다. 주고받는 용서의 방식은 어느 누구의 일방적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상호 합의에 도달했을 때 가장 명쾌하다. 당사자 둘 다 만족하는 이기심이어야 하는 용서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시간만이 그것을 해결해준다

 

 

** 여기 나오는 어머니는 뉴욕에 간<올리브 키터리지>의 서울 버전입니다.

    소제목 <불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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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12-27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 사람 이야기인줄 알았어요.^^
용서란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날 때만 할 수 있겠죠~
저도 내일은 서로 화해할 분과 점심을 먹기로 했어요.
먼저 손내밀지 않으면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꽁하고 있었는데 어제 오해를 풀자면서 청하더군요. 인간관계의 어려움은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갈리는 거 같아요.
이 글을 읽고 내일 어찌해야 할지 답을 얻은 것 같아~ 고맙습니다!^^

다크아이즈 2012-12-28 12:09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주변 이야기라면 제가 여기 블로그 있는 거 아무도 모르지만 쓸 수는 없을 것 같아요.ㅋ 몸짓이 주는 상처는 견딜만하고(누구나 그 정도는 하고 사니까),말이 주는 상처는 그 사람 인품을 규정짓는 잣대로 삼으면 되니 그런 대로 필요악이지만,글이 주는 상처는 흔적을 남기니 그건 못할 짓이지요. 해서도 안 되구요.

먼저 손 내미는 것 진짜 중요해요. 잘 해결한 뒤 차 한 잔 하고 있을 순오기님 상상하옵니다. 서로 준비가 됐을 때 화해해야 후유증이 없거든요. 연말 잘 맞이하고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페크pek0501 2012-12-27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서... 혜민 스님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남을 용서하라고 썼죠.
그런데 용서라는 것도 진짜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마음이 이성의 판단력에 따라오기까지 시간이 걸려서요.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게 마음이란 거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변덕을 부릴 때처럼 갑자기 마음이 변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론 너무 천천히 흐르는
마음 때문에 시간이란 간격을 필요로 하지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정신적인 상처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좋은 글이에요.

다크아이즈 2012-12-29 17:19   좋아요 0 | URL
페크님 맞아요. 용서는 남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하는 거 같아요.
용서하고 용서받는 거야 말로 가장 이기적인 행위라고 생각해요.
스스로 편하려고 하는 거다 보니, 타이밍이 절절하게 맞아야 제대로 된 효과를 보는 거지요. 어느 한 쪽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용서하겠다고, 용서 받겠다고 한다면 좀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는 거지요.
가장 이기적인 행위인 용서지만, 가장 필요한 인간 행동 양식이라고 생각해요. 페크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녀고양이 2012-12-28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서 뿐만 아니라 충고도 마찬가지인거 같아요.
받을 상대가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거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선물도요. 상대에게 필요없는 선물을 강권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기다림.... 저는 그게 참 필요하지만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새해 즐거운 일 가득하셔요.

다크아이즈 2012-12-28 17: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오지랖 떠는 충고도 참 보기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충고랍시고 하는 모든 말들은 상처가 되지요.

그래도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해결된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달여우님 학문 닦는 틈틈이 공유하고 교류해요. 늘 응원하고 따를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어요.^^*

프레이야 2012-12-30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안', 아주 인상적이었지요.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사두고 못 읽었는데 그걸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올리브의 아들은 불안은 두려움이라고 했지요?^^
안나 카레니나,에선 이성이 있는 이유는 불안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라는 구절이
나오더군요. 팜님, 저는 비이성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요즘 들어 부쩍부쩍 더 들어요.^^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서 늘 그르치는 것 같아요. 새해엔 좀 더 이성적인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어요 팜님, 저말이에요.^^
용서에 대해 용서에 필요한 시간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전 불안만 얘길했네요.

다크아이즈 2012-12-31 15:15   좋아요 0 | URL
프레님처럼 이성적으로 참한 사람이 있을까요? 혹,비이성적인 면이 있더라도 전 그런 프레님을 더 좋아할 것이야요.

저야말로 비이성적인 사람이예요. 이성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 사람들 보면 자신이 이성적인 것에 대해 은근 자부심을 풍기는 듯해서 재미가 없는 걸요. 약간은 모자란 듯, 주책인 듯, 헬렐레한 듯 그런 사람이 되어도 좋을 듯해요. 프레님께 그런 면을 상상한다는 건 힘든 일이긴 하지만 ㅋ

프레님 새해에도 멋진 행보 기대할게요. 고맙고 사랑합니다^^*
 

 

 

 

 

  깊은 밤 자다가 깨는 시간이 잦다. 나이 탓도 있고, 생활 리듬이 변한 탓도 있다. 그간 글을 쓸 때는 웬만해선 늦은 밤까지 활용하지는 않았다. 변변한 직장이 있는 것도, 규칙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늘 있는 것도 아니라 글 쓸 일이 있어도 꼭 밤까지 미룰 이유가 없었다. 집에 있는 한, 직장인들 근무하는 셈치고 낮에 주로 글을 써왔다. 한데 어느 순간 체력은 달리는데 해야 할 일은 늘어나면서 밤 시간 대로 쓰는 일이 미뤄지기 시작했다. 너무 피곤하면 깊은 잠을 잘 수 없다. 깨다 자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불면증까지는 아니다. 30분 이내로 다시 잠들기 때문에 재수면도우미로 텔레비전만 있으면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시청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잠들곤 한다. 대개 무엇을 본지도 모르고 잠들 경우가 많은데 며칠 전 새벽에 본 특집 다큐멘터리는 마치 한 번 만났을 뿐인데도 강렬한 매혹을 남기는 그런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난 가을 오스트리아인 펠릭스 바움가르트너는 고도 39킬로미터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했다. 헬륨 가스 기구에 달린 캡슐을 타고 지구 성층권까지 올라가 단숨에 지상으로 뛰어내리는 장면이 고스란히 중계되었다.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기압과 공포를 이기지 못해 펠릭스의 눈빛이 두어 번 흔들리긴 했다. 지상 관측소에서는 객관적인 정보 외에는 그 어떤 충고나 의견 없이 펠릭스의 결정을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인류 최초 최고의 높이에서 점프에 도전할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는 펠릭스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펠릭스는 잠시 망설인 끝에 도전을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초정밀 우주복을 입은 그가 캡슐 문을 열고 까마득한 지상을 향해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캡슐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가 잡은 공활한 무대는 장관이었다. 둥근 지구 표면이 보이고, 육지와 바다의 경계도 어렴풋이 보였다. 저 먼 지상을 향해 뛰어내리기 직전 그가 한 말은 보는 이의 가슴에 잔잔한 감흥을 일으켰다. ‘높은 곳에 올라와 봐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나는 지금 집으로 갑니다.’ 이 한 마디를 남기고 그는 주저 없이 캡슐에서 뛰어내렸다.

 

 

  자유낙하는 거침이 없었다. 수초 만에 음속을 돌파했고, 최대 낙하 시속은 1100킬로미터가 넘었다. 낙하 초반, 의식을 잃은 펠릭스는 마치 바람에 종잇장이 흔들리듯 이리저리 허공을 맴돌았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낙하 운동을 재개했다.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안도의 환호성을 질렀다. 뉴멕시코주 한 사막에 펠릭스는 허무할 정도로 안착했다. 감사의 인사로 대지를 향해 고개 숙일 때 세계인들은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극한 도전 중에 하나인 고공 점프를 생각해내고 실천한 인간 의지력에 무한한 경외심이 인다. 작은 일에도 힘겨워하고, 어려워하고, 마침내 포기하기 일쑤인 스스로를 돌이켜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고만고만한 나약함을 공유한 사람끼리 그 나약함을 서로 위안하는 일은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얼마나 나약한지 아무도 모른 채 다만 서로를 연민할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한 상황, 광활한 무대에서 들여다 본 스스로의 존재감은 평소와는 훨씬 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지켜 본 사람들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드넓은 우주 공간에서 인간사 아귀다툼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따라서 내 삶의 현재가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를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의 근원을 찾아 지상 최대 낙하를 꿈꾸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말 - ‘나는 지금 집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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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6 2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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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7 0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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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7 22: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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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8 11: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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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8 1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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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이브, 우리는 '텃밭'이란 제목으로  쓴 누군가의 글을 합평했다. 평소 글을 잘 쓰시는 분이라 글 자체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조언을 할 만한 것은 크게 없었다. 오히려 좋은 글 덕에 농사 관련 단어 몇 개를 확실하게 알게 되어서 개인적으로 도움이 된 날이었다. 회원 중에는 짬짬이 농사를 짓는 분도 있었고, 글쓴이처럼 막 텃밭을 일구는데 재미를 붙이는 이도 있었고, 나처럼 밭고랑 제대로 밟아 본 적 없는 이도 있었다. 농사의 나라 후예답게 우리말은 과히 농사 관련 용어들이 발달되어 있다. 하지만 산업사회를 지나 첨단 글로벌 사회를 지향하는 지금에 와서 그것들을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다.

 

 

  처음 궁금증의 도마에 오른 말이 ‘사래’였다. 남구만의 그 유명한 시조에 나오는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할 때 나오는 그 말. 모두 앉은 자리에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한다. ‘이랑의 길이’나 ‘이랑의 옛말’로 그 가닥이 잡힌다. 사전의 예문에서도 ‘사래 긴 밭’이란 관용구가 나오는 걸로 보아 ‘사래’는 이랑이 좀 길 때 활용할 수 있는 낱말이란 걸 알겠다. 이랑이 길지 않다면 ‘두둑’이란 말이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누군가 자연스럽게 ‘이랑’과 ‘고랑’에 대해 알아보자고 한다. 차고 넘치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개인적으로 개념이 확실히 잡히지 않던 용어였다. 잘됐다 싶었다. 이랑은 ‘고랑 사이에 흙을 높게 올려서 만든 두둑한 곳, 두둑’을 일컫는 말이다. 고랑은 ‘두둑한 땅과 땅 사이에 길고 좁게 들어간 곳으로, 이랑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

 

 

  그제야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해풍에 일렁이던 보리밭에도, 무서리 맞으며 단단해지던 배추밭에도 이랑과 고랑이 있었다. 다만 농사를 모르니 한 번도 의식해본 적이 없었을 뿐. 배수와 통풍의 길인 고랑이 없다면 씨앗과 열매의 길인 이랑도 보장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농사라면 고랑 없는 이랑도, 이랑 없는 고랑도 없다. 둘이 맞물려야 수확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러니 지금 처한 상황이 고랑이라고 의기소침할 일도, 이랑이라고 의기양양할 일도 아니다. 이듬해 이른 봄, 밭갈이 한 번이면 지난 이랑과 고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오히려 그 둘의 운명은 바뀔 확률이 높다. 그리하여 현명한 조상들은 이런 속담을 남기지 않았던가. ‘고랑도 이랑 될 날 있다’라고. ‘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 된다’고.

 

  이 한 밤, 이랑 드높이기 위해 제 운명의 고랑에서 호미질 가열차게 하고 있을 모든이에게 메리크리스마스!

 

 

 

 

**태그의 '글로 쓰지 않은 좋은 것이 내게는 없다'(106쪽)

   황인숙 시인이 한 말인데, 이 글 출처인 김도언의 이 책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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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2-25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해피크리스마스 보내시고 계신가요? 우리들 마음에 늘 평강이 가득하길 빌어봅니다. 이 페이퍼는 나중 다시 잘 읽을게요. ^^

프레이야 2012-12-25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만사 새옹지마, 전화위복 이런말이 그냥 있는 게 아닌가 봐요. 고랑이라고 섣불리 기뻐하지도 이랑 이라고 쉽사리 슬퍼하지도 말아야겠지요. 작은 사람은 작은 일에 기뻐하고 흡족해한다고 하더군요. 마음속 중심 잘 잡고 살아야겠다 다짐해봅니다. 팜님 좋은글 고마워요~~♥

다크아이즈 2012-12-26 01:41   좋아요 0 | URL
프레님,맞아요. 새옹지마,이랑고랑~~이지요.
프레님도 새해 잘 맞이하시고, 건강 조심하시고, 여전히 빛나는 삶도 꾸려가시고... 어여쁘고, 글 잘쓰시고, 맘 드넓은 님을 알게 되어서 고마울 뿐입니다.
 
골목안 풍경 전집 - 김기찬 사진집
김기찬 지음 / 눈빛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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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은 1985년 생 여아에겐 썩 어울리는 이름이다. 유진은 달동네 골목 돌담에 엄마랑 서 있다. (524쪽) 1960년대 산(産)인 유진엄마의 이름은 ‘말숙’ 또는 ‘복남’ 같은 것일 게다. 엄마의 트레이닝복 무릎은 낡고 불룩하다. 햇살은 무심히 엄마가 안은 애완견에다 그늘 한 번 드리우고, 서울 중림동 골목과 어울리지 않는, 유달리 하얀 엄마의 손등에 가서 박힌다. 미간이 넓은 네 살의 유진은 ‘짜가’일 게 뻔한 엄마의 아식스 바지에 매달려 천진한 미소를 짓는다. 그 골목의 사진 한 장은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과거로 돌려놓는다.

 

 

  그 어떤 사전 정보 없이 열두 살에 도시로 떼밀려왔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은 우주 빅뱅 그 이상이었다. 고향은 수몰대상지역이어서 새마을 운동 열풍에서도 예외가 되었다. 지붕 개량은커녕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았다. 전형적인 깡촌 생활이 내가 열두 살까지 겪은 삶의 전부였다. 이사 간 도시는 당시로서는 신동네였다. 넓은 골목은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어 있었고, 아이들은 아스팔트 위에다 분필로 모형을 그리고 돌차기 놀이를 했다. 맨땅이 익숙한 나는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고무줄놀이도, 돌차기도 내 눈에는 부자연스럽고 생경하기만 했다.

 

 

  문화충격은 위로부터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린 눈에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지난한 도시 골목의 풍광들이었다. 시골에서는 아예 골목이란 개념이 없었다. 여러 집이 돌담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어도 집과 집을 이어주는 길 역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특별히 비루하거나 남루하다는 느낌 없이 시골은 그런 면에서 누구나 부르주아였다. 하지만 오래된 도시 골목에서는 삶의 신산한 냄새들과 소리들이 지글거렸다. 아스팔트 골목과는 다른 또 다른 충격이었다. 그때 어렴풋이 계급의식 같은 걸 자각한 것 같다.

 

 

  유진은 3,4년 간격으로 세 번 더 골목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마지막 사진은 일산의 어느 아파트 앞일 수도 있겠다. 남루한 도시 뒷골목을 떠나 번듯한 아파트 청소년으로 자랐다. 유진의 골목 찰나를 끈덕지게 따라잡은 이는 김기찬이다. 그의 두꺼운 사진집『골목안 풍경 전집』에는 수십 명의 유진들이 나온다. 비리고, 질퍽이는 삶에서 순간의 미소를 찾으려는 누군가에게 이 사진집은 서럽고 따가운 위안이 돼줄 것이다.  

 

 

    썸네일  썸네일 썸네일

 

   

  두껍고 제본 엉망인 이 사진집은 펼치는 수고가 만만찮다. 아무래도 뒷골목 체험은 이 책 펼치는 것만큼 무겁고 수고롭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 같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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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2-23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이 사진책 리뷰 반가워요. 역시나 참 좋구요. 골목은 제게도 향수가 있는 키워드에요. 낯선 골목을 누벼보는 상상 언젠간 이룰 수 있겠지요. ^^

다크아이즈 2012-12-25 05:01   좋아요 0 | URL
프레님, 메리크리스마스!
식구들과 멋진 밤 보내셨나나요?
전 글쓰기반 종강 수업하고 바로 들어와서, 사 놓은 치즈케익으로 세 식구 조촐한 파뤼했네요. 딸이 없어서 서운했지만, 누구 말처럼 솔로대첩 안 간게 어디야 하면서 위로했답니다. 그새 한 숨 자고 자정 넘어 일어나 놀고 있어요.
아침에 또 자겠지요ㅠ

라로 2012-12-24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가운데 아이들 같았을 때 저도 골목에서 막내 이모와 찍은 사진이 있는데!!! 어즈버~~~.
이 책 늘 관심만 갖었었는데 제본이 엉망이군요,,ㅠㅠ

다크아이즈 2012-12-25 05:03   좋아요 0 | URL
어즈버 사십 년 돼가네요. 저는...ㅠ
나비님, 제본은 엉망이었어요.
책은 독자를 위해 있는데,
제본이 엉망이거나 읽기 불편한 재질로 되어 있으면 이거 뭐지, 하는 생각은 어쩔 수 없어요.
나비님도 메리크리스마스 앤 해피 누이어~~

마녀고양이 2012-12-24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마지막 문구에서 제가 엄청 웃어버렸어요.
팜님의 유머가 정말 멋지시네요. ^^

아련한 추억이 들면서도,
이렇게 추운 겨울에는 제가 아파트에 산다는게 너무 감사해져버려요.
이런 이중성이라니! ㅡㅡ;;;

다크아이즈 2013-08-04 07:16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참에 마지막 말 뭐 썼지, 찾아 봤다는...
제 유머가 특히, 달여우님께 통했다니 그저 황송황송~~ 조아립니다.
저도 아파트 생활을 쉽게 포기하지 못할 것 같아요. 편하다는 이유로...
달여우님 뵙고 싶었는데 드디어 뜨셨군요. 지금 님 서재로 마중 갈게요.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