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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안 풍경 전집 - 김기찬 사진집
김기찬 지음 / 눈빛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유진’은 1985년 생 여아에겐 썩 어울리는 이름이다. 유진은 달동네 골목 돌담에 엄마랑 서 있다. (524쪽) 1960년대 산(産)인 유진엄마의 이름은 ‘말숙’ 또는 ‘복남’ 같은 것일 게다. 엄마의 트레이닝복 무릎은 낡고 불룩하다. 햇살은 무심히 엄마가 안은 애완견에다 그늘 한 번 드리우고, 서울 중림동 골목과 어울리지 않는, 유달리 하얀 엄마의 손등에 가서 박힌다. 미간이 넓은 네 살의 유진은 ‘짜가’일 게 뻔한 엄마의 아식스 바지에 매달려 천진한 미소를 짓는다. 그 골목의 사진 한 장은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과거로 돌려놓는다.
그 어떤 사전 정보 없이 열두 살에 도시로 떼밀려왔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은 우주 빅뱅 그 이상이었다. 고향은 수몰대상지역이어서 새마을 운동 열풍에서도 예외가 되었다. 지붕 개량은커녕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았다. 전형적인 깡촌 생활이 내가 열두 살까지 겪은 삶의 전부였다. 이사 간 도시는 당시로서는 신동네였다. 넓은 골목은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어 있었고, 아이들은 아스팔트 위에다 분필로 모형을 그리고 돌차기 놀이를 했다. 맨땅이 익숙한 나는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고무줄놀이도, 돌차기도 내 눈에는 부자연스럽고 생경하기만 했다.
문화충격은 위로부터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린 눈에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지난한 도시 골목의 풍광들이었다. 시골에서는 아예 골목이란 개념이 없었다. 여러 집이 돌담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어도 집과 집을 이어주는 길 역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특별히 비루하거나 남루하다는 느낌 없이 시골은 그런 면에서 누구나 부르주아였다. 하지만 오래된 도시 골목에서는 삶의 신산한 냄새들과 소리들이 지글거렸다. 아스팔트 골목과는 다른 또 다른 충격이었다. 그때 어렴풋이 계급의식 같은 걸 자각한 것 같다.
유진은 3,4년 간격으로 세 번 더 골목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마지막 사진은 일산의 어느 아파트 앞일 수도 있겠다. 남루한 도시 뒷골목을 떠나 번듯한 아파트 청소년으로 자랐다. 유진의 골목 찰나를 끈덕지게 따라잡은 이는 김기찬이다. 그의 두꺼운 사진집『골목안 풍경 전집』에는 수십 명의 유진들이 나온다. 비리고, 질퍽이는 삶에서 순간의 미소를 찾으려는 누군가에게 이 사진집은 서럽고 따가운 위안이 돼줄 것이다.
두껍고 제본 엉망인 이 사진집은 펼치는 수고가 만만찮다. 아무래도 뒷골목 체험은 이 책 펼치는 것만큼 무겁고 수고롭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 같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