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 우리는 '텃밭'이란 제목으로 쓴 누군가의 글을 합평했다. 평소 글을 잘 쓰시는 분이라 글 자체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조언을 할 만한 것은 크게 없었다. 오히려 좋은 글 덕에 농사 관련 단어 몇 개를 확실하게 알게 되어서 개인적으로 도움이 된 날이었다. 회원 중에는 짬짬이 농사를 짓는 분도 있었고, 글쓴이처럼 막 텃밭을 일구는데 재미를 붙이는 이도 있었고, 나처럼 밭고랑 제대로 밟아 본 적 없는 이도 있었다. 농사의 나라 후예답게 우리말은 과히 농사 관련 용어들이 발달되어 있다. 하지만 산업사회를 지나 첨단 글로벌 사회를 지향하는 지금에 와서 그것들을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다.
처음 궁금증의 도마에 오른 말이 ‘사래’였다. 남구만의 그 유명한 시조에 나오는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할 때 나오는 그 말. 모두 앉은 자리에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한다. ‘이랑의 길이’나 ‘이랑의 옛말’로 그 가닥이 잡힌다. 사전의 예문에서도 ‘사래 긴 밭’이란 관용구가 나오는 걸로 보아 ‘사래’는 이랑이 좀 길 때 활용할 수 있는 낱말이란 걸 알겠다. 이랑이 길지 않다면 ‘두둑’이란 말이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누군가 자연스럽게 ‘이랑’과 ‘고랑’에 대해 알아보자고 한다. 차고 넘치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개인적으로 개념이 확실히 잡히지 않던 용어였다. 잘됐다 싶었다. 이랑은 ‘고랑 사이에 흙을 높게 올려서 만든 두둑한 곳, 두둑’을 일컫는 말이다. 고랑은 ‘두둑한 땅과 땅 사이에 길고 좁게 들어간 곳으로, 이랑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
그제야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해풍에 일렁이던 보리밭에도, 무서리 맞으며 단단해지던 배추밭에도 이랑과 고랑이 있었다. 다만 농사를 모르니 한 번도 의식해본 적이 없었을 뿐. 배수와 통풍의 길인 고랑이 없다면 씨앗과 열매의 길인 이랑도 보장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농사라면 고랑 없는 이랑도, 이랑 없는 고랑도 없다. 둘이 맞물려야 수확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러니 지금 처한 상황이 고랑이라고 의기소침할 일도, 이랑이라고 의기양양할 일도 아니다. 이듬해 이른 봄, 밭갈이 한 번이면 지난 이랑과 고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오히려 그 둘의 운명은 바뀔 확률이 높다. 그리하여 현명한 조상들은 이런 속담을 남기지 않았던가. ‘고랑도 이랑 될 날 있다’라고. ‘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 된다’고.
이 한 밤, 이랑 드높이기 위해 제 운명의 고랑에서 호미질 가열차게 하고 있을 모든이에게 메리크리스마스!
**태그의 '글로 쓰지 않은 좋은 것이 내게는 없다'(106쪽)
황인숙 시인이 한 말인데, 이 글 출처인 김도언의 이 책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