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지는 풀잎처럼, 스러지는 눈발처럼 또 한 해를 보낸다. 저리고 아쉽기만 한 나날들. 그야말로 시작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허망하기만 하다.
해마다 그랬듯이 올해도 새 아침이 밝아오자 달뜬 나머지 희망의 단춧구멍을 터무니없이 넓게 뚫어버렸다. 천의 질감, 옷의 종류나 활용도 등은 고려하지도 않은 채, 일단 계획이란 단춧구멍부터 뻥 뚫어버렸다. 구멍에 맞는 단추를 찾아, 온 열두 달을 헤맸지만 끝내 제대로 된 것 하나 구하지 못했다. 한 해의 끝인 지금, 자그맣고 어설픈 단추 몇 개만이 손바닥 위에서 민망해할 뿐이다. 이미 크게 터 잡은 구멍에 끼워봤자, 금세 단추는 쏙 빠져나가고 말 것이다. 거창한 계획에 미미한 결과, 해마다 이런 일을 되풀이하고 만다. 하기야 꼭 이뤄져야 하는 게 계획이라면 굳이 새해마다 그것을 짤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계획은 세우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야겠다. 그 실천 유무를 따지다 보면 안 그래도 치운 가슴 찬바람만 들어찰 것 같다. 대신 내 곁을 맴돌던 두 단어를 떠올리면서 한해를 마무리해야겠다.
우선 ‘힐링’이란 말을 되뇌인다. 올 한 해 밥상 위의 숟가락처럼 자주 오른 말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마음 둘 곳 많지 않아 우왕좌왕한다. 당신과 나, 툭 터놓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나 외롭고, 어디서나 힘들다. 그뿐이랴. 무엇을 하든 상처는 곁에 있고, 언제나 마음은 흔들린다. 이런 나약한 속성을 지닌 인간에게 필요한 게 치유의 연대감이다. 위로의 주체이자 대상인 개별자끼리 공감하다 보면 진심으로 치유에 맞닿게 된다. 힐링은 연대의 감정이지 폐쇄적 구원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사람 곁에서 얻는 치유가 골방의 치유보다 한결 낫다. 상처이지만 이내 구원이기도 한 사람 곁에서 많은 것을 얻고 누렸다. 이보다 더한 개인적 힐링이 어디 있겠는가.
그 다음 떠오르는 말이 ‘깨달음’ 이다.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거창한 걸 말하려는 건 아니다. 생활의 발견이란 말처럼 일상 속에서 얻는 깨알 같고, 바람결 같은 생각들이 내면을 키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깊고 늦게 오는 깨달음은 그만큼 크고 무겁다. 하지만 찰나적이고 순간적인 깨달음은 작고 가벼운 대신 내면을 따스하게 해준다. 생의 근원을 뒤바꿀 수 있는 큰 깨달음보다 제비꽃 같은 소박한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생활의 발견을 얻은 것만으로도 올 한 해 고마운 일이다.
한 호흡만 참았더라면 하는 자책, 원망보다는 이해, 미적거림보다는 재바른 발걸음, 우울보다는 환희 등을 깨쳐준 이는 다름 아닌 내 곁의 사람들이었다. 어느 누구도 대놓고 이렇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충고하지 않았지만 온당한 그들 삶을 보면서 많은 걸 느꼈다. 더 많이 내어주고, 더 많이 보듬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베풀어라고 몸과 마음으로 가르쳐준 모든 이에게 감사하는 한 해이다.
좋은 사람들이 품은 가없는 기를 느끼면서 내가 얼마나 미흡한지를 절로 알게 된 한해였다. 잡다한 생각들이 온몸과 마음으로 휘몰려올 때 저릿하고 따뜻한 그들의 한 호흡을 떠올린다. 내 부실한 나무뿌리를 안 그런 척 하면서 슬쩍 다독여준 모든 가르침을 준 이에게 감사장을 대신한다. 내 어설픈 한 해가 감사로 아롱지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내일이면 오늘을 잊고 새 태양을 마중하러 나갈지라도 내게 소박한 깨달음을 준 모든 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아듀,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