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어머니, 아들 전화 받고 서울나들이 가신다. 임신한 며느리 힘드니 아이 둘 좀 보살펴달란다. 고향 떠나 사흘 밤도 잔 적 없는 어머니, 난생 처음 일주일 예상으로 서울행 기차에 오른다. 아들의 두 번째 부인인 며느리는 덩치 크고 머리 큰 어머니에 비할 바 아니다. 황소 같은 몸집에다 성격은 착하다 못해 맹하기까지 하다.
아들의 핏줄이 아닌, 며느리가 데리고 온 두 아이가 ‘할머니’라고 부르는 소리를 어머니는 듣고 싶지 않다. 냉랭한 아들은 어머니를 살갑게 챙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장 깨끗하고 넓은 공간인 지하실에 어머니의 침실을 마련해드렸고, 당신도 그곳을 딱히 싫어하지는 않는 눈치지만, 이웃들이 그런 자신더러 어머니를 지하실에 처박아 두었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한다. 다만, 그 옛날 수학선생님이었던 어머니가 동료 교사와 사랑에 빠져, 자신과 아버지를 돌보지 않은 채 자주 신경질을 냈던 것은 기억하고 있다. 잘못했다는 소리를 절대 하지 않는 어머니 때문에 아들은 유년 이후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왔다.
첫 결혼에 실패한 것도, 그 후 고향에 돌아오지 않는 것도 어머니 때문이다. 이혼 전문 사교 모임에서 두 번째 아내를 만났고, 상처 많은 두 영혼은 정신과 상담의의 도움으로 정신적 자립을 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오죽하면 상담의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갔을까.
예정된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어머니 짐을 싸신다. 핏줄 아닌 손주가 부르는 ‘할머니’ 소리 때문도 아니고, 변할 것 같지 않은 아들의 냉정한 시선 때문도 아니며, 대책 없이 맹한 며느리 성격 때문도 아니다. 어머니를 서울로 오게 한 아들의 진짜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극도로 변덕스러운 어머니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입 다물고 살았던 아들은 커서도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다. 아들 부부는 상담의의 권유로 ‘용서하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어머니를 초대했던 것이다. 심리 치료 모임에서 아들이 이 모든 걸 재연할 걸 생각하니 어머니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아들은 어머니를 이용하고, 속수무책 상황에 처한 어머니는 수치심에 치를 떤다. 어머니는 사흘 만에 고향 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용서에 대해 생각한다. 용서하거나 용서받는다는 건 지극한 이기심의 발로이다. 용서하는 자는 준비가 필요하고, 용서 받는 쪽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이 편하고자 성급히 용서를 바라도 안 되고, 용서할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에는 섣불리 그것을 받아들여서도 안된다. 급하면 체한다. 주고받는 용서의 방식은 어느 누구의 일방적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상호 합의에 도달했을 때 가장 명쾌하다. 당사자 둘 다 만족하는 이기심이어야 하는 용서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시간만이 그것을 해결해준다
** 여기 나오는 어머니는 뉴욕에 간<올리브 키터리지>의 서울 버전입니다.
소제목 <불안>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