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짜고짜 근황 페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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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을 떠난 지 1년여...신해철은 말했다. “아침엔 우유한잔, 점심엔 패스트푸드 쫒기는 사람처럼 시계바늘 보면서 (중략) 디스이스더시티라이프!” 이젠 마음까지도 턱별시민이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증거가 수요일, 대중교통을 이용해 상경한 서울에서 부대낀 수많은 인파에 섞이며 살쩍 멀미를 느껴버렸으니까. 특별시는 분명 특별시로써의 장점이 있겠으나 지금의 내 사정상 분명 버거운 도시가 돼 버린 것 같다.

 

2. 아버지가 많이 호전되셨다. 워낙 고집불통의 성격을 가진 완고한 양반이셔서 치료와 재활에 많은 애로사항을 겪었으나 주치의와 간호사도 깜짝 놀랄 정도로 그 회복속도가 빠르신가 보다. 뇌경색의 특징 상 후유증은 분명 존재하겠으나 그 정도가 경미하다면 그 또한 반가운 일이다. 주말마다 본의 아니게 병원에서 1박을 하며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뿐만 아니라 보호자들의 모습에 많은 연민을 느끼게 된다. 제대로 된 밥 한 끼 먹기 힘든 상황에서 병상을 간호하는 그들에게 일종의 경외감을 느꼈다. 긴병에 열녀와 효자가 없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마지막 끈이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가족들은 최선을 다한다. 그게 피가 물보다 진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3. 졸지에 미쿡에 사는 누나가 급하게 들어왔다. 사실 아버지가 쓰러지실 때 매형이 일 때문에 한국에 나와 있었다. 많이 놀란 매형은 아버지의 병상을 지켰고 출국날짜가 다가오자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결국 조카 녀석들 때문에 매형은 출국하고 누나가 입국하게 되었다. 초반엔 고생을 했지만 아버지가 호전되다 보니 한시름 놓게 되었다. 시간적으로 심리적으로 여유를 찾게 되니 여러 가지 문화적 충돌이 오고 있나 보다.

 

에피소드 1)

재활병동으로 옮기신 아버지가 제법 도도한 레지던트의 진료를 받았었나 보다. 이런저런 검사를 약간은 고압적으로 했고, 그게 제법 못마땅했었나 보다. 검사를 마치고 차트에 휘갈겨 쓴 꼬부랑 영어가 누나의 눈에 띄었다. 그 중에 단어 하나가 스펠링이 틀렸다고 살짝 지적했더니 그럴 리 없다는 반응을 보였단다. (사실 누나는 의료관련 봉사를 많이 하다 보니 의학전문영어를 알고 있는 상황) 슬쩍 인터넷으로 검색한 레지던트는 자신의 실수에 겸연쩍게 반응하며 “대체 어디 사세요?”라고 질문을 던졌단다. 누가의 답변은 “엔변이요” 였다.

 

에피소드 2)

짜장면이 먹고 싶다 하여 병원 부근의 중국집을 수소문해 주문을 넣었다. 메뉴판을 보던 누나는 “쟁반 짜장”에 시선에 머물렀다. 이게 뭐냐? 란 질문에 이런 저런 설명을 했더니 이걸 먹어보자고 한다. “군만두는 서비스로 준다며?” 이에 나는 4인분부터 서비스란 설명을 해줬더니 치사하다를 연발한다. 도착한 배달부의 모습을 보며 낄낄낄 웃기 시작한다. 왜 웃나 물어보니 한국에서 유년을 보냈던 조카 녀석이 저 철가방을 기억한다고 한다. 그것도 “스테인리스 스틸 실버 백 딜리버리”로 말이다.

 

4. 누나를 만나 조카들의 근황을 들었다. 첫째가 벌써 우리나라로 따지면 고3이란다. 내년이면 대학생이 되는 것이다. 둘째 놈은 주니어와 동갑이다. 세월이 그렇게 지난 것이다. 그런데 첫째 조카 녀석이 제법 똘똘한가 보다. H대나 M대나 J대 중 장학금을 많이 주는 곳으로 선택하여 간다고 한다. 아마도 조카 녀석들은 매형 두뇌를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확실해지는 부분이다. 예정대로 M대를 가게 된다면 말미잘님의 페이퍼에서 보여 준 3분 19초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남자를 만난다는 것인데 나중에 소감이나 물어봐야겠다. 다행히 조카 놈은 한국말도 한다. 더불어 학교에서 말 춤도 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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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근황은 대략 이랬다. 이 중엔 차마 말하기 어려운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으나 그건 그냥 내 속에 묻어두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지난 1년여 동안 나에겐  수많은 별 일이 발생했다. 고속도로에서 3번 황천길을 건너갈 뻔 했고, 왼쪽 손등이 박살날 뻔도 했고 양쪽 팔뚝과 종아리엔 아마 지워지기 힘든 물리적 흉터가 남겨졌다. 사업을 하는 사람의 아집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도 알았으며,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의 본색이 드러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삶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지는 덤이다. 더불어 아버지는 쓰러지시고 과감히 버렸던 예전의 밥벌이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전쟁으로 따지면 패잔병이고 사회적으로 말하면 패배자일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난 수 많은 별일과 함께 살고 있지만 분명한 건 어제보단 오늘이 오늘보단 내일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별일이 있다한들 나날이 좋아진다면 패잔병이고 패배자일지라도 현실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언제까지 남의 밑에서 일할래? 너도 늬 사업을 해야지. 분명 달콤하고 유혹적인 말이긴 하다. 넘어갈 뻔 했지만 막판에 정신을 차렸길 다행이다. 시간이 지났지만 되묻고 싶다. 엄청난 빚더미에 가족과 형제까지 팔아먹으며 사업을 하고 싶을까. 수많은 거짓말로 여러 사람 수렁에 빠트리느니 조금 부족해도 그냥 월급쟁이로 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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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theme 2012-11-16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그동안 많은 일들을 겪으셨군요. 그래도 그모든 일들이 좋은 쪽으로 수습되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앞으론 좋은 일이 더 많이 생기길 기원드립니다.
알라딘에서 자주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Mephistopheles 2012-11-16 09:33   좋아요 0 | URL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일이 있긴 하지만 그건 제가 그리 신용하지 않는 법의 힘을 빌려볼까 하고요. 관련 법규만 따져보니 어마어마하더군요. 노동법은 기본에 도로교통법에 식품 위생법에 금융에 관련된 법에...분명한 건 한꺼번에 터트리면 완벽한 재기불능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인 2012-11-16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끝내주는 태그네요. 그 모든 1년을 살아낸 메피스토님에게 건배를. 슬쩍 곁들여 모든 생존경쟁에서 끈질기게 버틴 우리 모두에게 건배를.

Mephistopheles 2012-11-16 09:34   좋아요 0 | URL
라디오에서 줏어 들었는데 "젖은 낙엽 정신"이라는게 있다더군요. 비온 날 아스팔트 바닥에 찰싹 붙어서 무진 빗질에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그런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 세상이라고..^^

토트 2012-11-16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힘드셨겠어요.
안좋은 일은 한꺼번에 일어난다니까 이제 당분간 좋은 일만 일어날거에요.
힘내세요!! ^^

Mephistopheles 2012-11-16 09:35   좋아요 0 | URL
근데 제가 내년부터 삼재라더군요. 아니 그럼 이 모든 건 단지 리허설이고 전야제였단 말인건지..나원참..

깐따삐야 2012-11-16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의 큰오빠 메피님! 역시 큰오빠다운 선택이세요. 힘든 일을 겪는 중에도 온정과 유머와 희망을 잃지 않는 가족의 모습이 좋아 보여요. 메피님이 이곳에 계셔서 왠지 모르게 항상 든든해요.^^

Mephistopheles 2012-11-16 12:02   좋아요 0 | URL
와하하하하...제가 큰오빠면 제 윗 연배이신 분들은 아저씨군요.와하하하하 왠지 아저씨와 오빠의 경계에서 오빠의 영역에 안주하는 이 뿌듯함이란!!

개인주의 2012-11-16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머를 잃지 않으시는 메피님과 가족. ^^
굉장히 공감가는 글이네요.
특히 맨 마지막 글이.=_=
막 달리다 보면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지더라구요.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Mephistopheles 2012-11-16 18:10   좋아요 0 | URL
넵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죠.
말리고 제지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그게 당신들의 한계라고 큰소리를 칩니다.
하지만 단 몇개월만에 바닥이 전부 보여버리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않합니다. 참 묘하죠?

프레이야 2012-11-16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으셨군요. 참 별일 없이 산다는 게 쉽지 않다는..ㅠㅠ
아버님, 잘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에피소드 1) 때문에 웃다가 넘어질라 합니다.ㅎㅎㅎㅎㅎ
유머도 가족내력인가 봐요.^^

Mephistopheles 2012-11-16 18:11   좋아요 0 | URL
그 레지던트는 그 다음부터 회진돌때 유독 어색하고 불편하게 무언가로 왠만하면 가리면서 차트를 쓴다...라고 하더군요.

moonnight 2012-11-16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힘드셨겠어요.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도 꿋꿋이 이겨내시는 모습이 정말, 멋지십니다. ^^ 언제까지 남의 밑에서 일할래? 이렇게 부추기는 사람들, 나빠요. -_-;;;;; 아버님 빨리 회복되고 계시다니 참 감사합니다. 하여간에 건강이 최고예요. 메피님도 건강 잘 챙기시길 바라며, 컴백하신 직장(직종?)에서 좋은 하루하루 보내시길 또 기도합니다. ^^

Mephistopheles 2012-11-16 18:12   좋아요 0 | URL
그 부추킴이 내면 깊숙히 이용가치를 철저히 계산한 언행이었기 아마도 걸려들어가지 않았나 봅니다. 사기를 칠려면 제대로 치던가 속이 뻔히 보이는 사기를 컴퓨터 파일 몇개와 세치 혀로 해볼려고 하다니..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기도 하지만 한심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BRINY 2012-11-1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은 '사업본부장' 명함을 갖고 다니는 동생에게 그대로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나저나 태그는 정말 쇼킹하네요. 동생은 그 정도 그릇은 아니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Mephistopheles 2012-11-16 18:13   좋아요 0 | URL
이 태그는 새발의 피랍니다. 전 이번에 인간의 바닥을 봤습니다. 인간과 짐승의 아슬아슬한 경계...

비연 2012-11-16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네요....
그래도, 어렵게 돌아돌아 자리를 다시 잡으신 것 같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걸 계기로 알라딘에 자주 들러주시니 더욱 좋네요, 저는.

Mephistopheles 2012-11-16 18:1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참 많이도 돌아서 왔네요. 바로 전의 일터가 최악의 상황인지라 이젠 왠만한 일에도 여유가 생기더군요. 무슨 대장간의 담금질 당한 쇠덩이도 아니고 한껏 쇠망치로 두둘겨 맞았더니 단단해졌습니다..ㅋㅋ

무해한모리군 2012-11-16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건강이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예요.

Mephistopheles 2012-11-16 18:16   좋아요 0 | URL
건강은 늘 소중해요 정말..
그런데 그걸 지키는게 생각보다 힘들더군요.
주위환경의 영향도 무시못하고요.

마노아 2012-11-16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 많으셨지만 여전히 씩씩한 메피님을 보니 다행스러워요. 격렬히 응원합니다.^^

Mephistopheles 2012-11-16 18:17   좋아요 0 | URL
씩씩하진 않고 요즘은 그냥 품속에 칼하나 품고 다니는 기분입니다.
튀어나오지 말아야 할텐데 자꾸 튀어나오게 도발하는 사람하나가 있어
문제입니다. 빨리 정리하고 털어내야죠..

몬스터 2012-11-16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살아낸다는게 견뎌내는 것인듯 합니다. 기운내세요 3번 썼다가 지웠다가 했습니다. (조심스러워서요). 기운내요. 내강외유이신 분인듯 합니다.

Mephistopheles 2012-11-18 17:2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문오현님. 저만 그렇겠습니까. 요즘 사는 것자체가 많이 힘든 시기다 보니 저보다 더 힘들분들도 신나게 웃으면서 사실꺼 같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누웠는 중환자 분들이나 사건 사고로 급하게 응급실로 실려오시는 분들이요) 아 전 내강외유라기보단 그냥 내유외유하고 싶습니다..^^

saint236 2012-11-18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 패잔병일리가 없죠. 가끔은 그 자리에서 버텨주는 것이 가장 힘든일이고, 주변 사람에게 가장 힘이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힘내시고요. 컴백한 메피님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컴백 공지를 하신 다음에도 메피님답지 않은 글을 보면서 의아했던 적이 꽤 있었습니다.

Mephistopheles 2012-11-18 17:26   좋아요 0 | URL
이미 지난 일이라 그려려니 합니다만. 받은 건 반드시 되돌려줘야겠기에 준비 중인 것이 있습니다.^^

2012-11-20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1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