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산님께
가을산님이 답변을 너무 빨리 주셔서 조금은 부담스럽습니다. 혹시 논쟁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여러 가지 다양한 일을 하고 계신 가을산님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저도 인간적 본성에 이기적 면과 이타적 모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을산님이 말씀하신 ‘이른바 이타적인 행위는 즉 좀더 큰 “우리”를 위한 행위의 필요성에 의해 우리 본성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사회생물학에서 여러 증거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될 문제가가 우리의 정의입니다. 우리는 다른 말로 ‘자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자아’가 개인마다 그리고 그 개인이 처한 사항마다 인식의 범위가 다릅니다. 어린 아이의 자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자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조금 성장하게 되면 가족을 확장된 자아로 인식하고 가족의 유익(이기적 면)을 구합니다. 어떤 기업가는 회사의 이익을 위해 나라에 대해 해가 될 수 있는 비리를 저지릅니다. 좀 더 확장되면 국가가 자아가 되고, 그 후에는 인류, 그 다음에는 모든 생명을 포함한 자연이 되겠지요.
가장 좋은 자아는 가장 확장된 자아, 즉 모든 생명체에 대한 경외감과 모든 인류에 대한 박애 정신을 모두가 갖게 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 자아는 연속적으로 확장되지 않고 몇 가지에서 계단식으로 확장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개인, 가족, 국가가 그것에 해당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런 경향이 오히려 두드러진다고 생각합니다. 어렵게 살던 시절에 외국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경험이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히려 흑인이나 동남아인 등을 포함한 외국인을 백안시하고 있습니다. 가족의 이기심도 저는 보통이 넘는다고 생각합니다. 가을산님께서 이전의 편지에서 80:20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오히려 이기적인 마음에서 사회 안정망 또는 시스템을 말씀하였지만 어떤 이들은 오직 우리 가족만이 우리이며 즉 자아이며 다른 사람을 딛고 현재의 우월한 위치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사는 가족이 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테레사 수녀님같은 인류애는 아니더라도 이웃을 내 이웃으로 여기는 정도의 자아의 확장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또는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이웃을 우리로 여기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장애아 시설 수용의 거부, 심지어 임대 주택까지 거부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일반적인 개인의 행동이 이타적으로 피부로 느끼거나 잘못된 행동에 직접적으로 제제를 받는 단위는 집단의 크기가 180명 정도 되는 작은 마을에서는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작은 마을은 대량생산 소비의 효과가 상대적으로 적으므로 경제적으로 보다 가난한, 저성장의 경제를 누리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희생적 사랑에 공명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에 어느 일정 부분 동감합니다. 저는 이런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지구 한 대륙1에 철저하게 이기적인 인간을 창조하였습니다. 대륙2에 현재의 이기성과 이타성을 갖은 인간을 창조하였습니다. 대륙3에 철저하게 이타적인 인간을 창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창조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대륙2에 살던 사람이 대륙1과 대륙3을 점령한 것이 아닌가하고. 인간의 생존(또는 번영)에 아마 이기적인 면이 유리하게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자본의 논리이든 Evolutionary Stable Strategy이든 간에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에 자연과학적 사실이 작용했습니다. (마립간 페이퍼 2004년 1월 19일자 티민thymine과 우라실Uracil에 관하여 참조)
미래의 유익을 위해 현재의 유익을 미루는 것은 지적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그렇게 행동을 하지만 일반적 사람들은 어려움이 겪은 후에 미래의 유익을 위해 현재의 유익을 미룹니다. 제가 알기로는 미국이 철저하게 자본주의가 된 까닭에 공황이라는 어려움을 겪은 후입니다. 우리나라 어느 마을에서는 오폐수 배출을 스스로 철저하게 통제하는데 이는 상수원 보호를 위해 마을을 폐쇄하려는 정부의 조치가 정해지자 오폐수 배출을 줄이고 정화시절을 설치 가동했다고 합니다. 갈대님이 남겨 주신 댓글에 전적으로 동감하는데 자본주의의 성장 제일 주의가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오염, 부익부, 빈익빈 심화, 석유고갈 등에 제어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근친결혼은 그 결과가 어떠했다는 것이 학습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이익을 위해 당장의 욕망 혹은 이익을 보류하는 인간의 특성에서 나오는 독특한 행위입니다.’라로 하셨지만 저는 학습을 통한 습득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1984년> 나오는 Big brother이 있어 작은 교통위반도 처벌된다면 아마 현재보다 교통법규를 훨씬 잘 지킬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스템에 의한 의견은 합의를 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상적인 시스템이 없다고 해서 최선의 시스템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시스템에 의해 불이익을 받는 사람의 불평을 완전하게 해결할 수 없는 내재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발전이라는 단어의 뜻이 ‘인간의 얼굴’을 찾아가는 것과 같이 하였으면 합니다. 여기에서는 제가 자문을 구하고 싶습니다. ‘인간적이다’라는 용어에 자연과학(물리학, 생물학)적인 정의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인문학에서 정의를 찾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이견이 없으니 나중에 자세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체제를 이루면서도 신자유주주의 물결에 삼켜지지 않을 대안이 아직까지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약 대안을 찾지 못하면 목표는 있으나 실행 불가능한 것이 될 테니까요. 국제연합 WTO 초국적 대안운동은 세계화가 자본주의 팽창의 한 수단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세계화를 반대해야 할 기구(예를 들면NGO)의 세계화가 되는 내재적 모순이 있어 저는 크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저의 개신교는 저의 선택이며 그 보수성이 개신교를 선택했지만 개신교과 보수성을 강화하는 것은 아니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쉽게 말하면 개신교를 선택했지만 개신교 종교인은 아직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연보라빛 우주님과 stella09님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저의 철저한 분석적 사고는 개신교에 여지없이 적용됩니다. 오강남씨가 쓴 여러 책과 <성경:고고학인가 전설인가> 등의 철저하게 비기독교적인 책도 읽고 있습니다. 저의 기독교관의 변천을 다른 페이퍼에 쓰겠습니다. 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회색분자의 정치 성향과 녹색당을 지지하는 가을산님에서 공통점을 찾으니 참 좋습니다. 출발과 지향점이 같게 되면, 아마 현실에서 선택할 결론과 방법이 많지 않을 듯 합니다.
짧게 쓰려는 편지가 갈수록 길어집니다. 몇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편지가 너무 길어질 것으로 생각되어 다음 편지 나머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혹시 가을산님에게 부담 드릴까 우려됩니다. 제가 문제를 제안하고 가을산님이 답변하는 것 같아서요.
새로운 달이 시작됐네요. 좋은 9월이 되십시오.
2004년 9월 1일
마립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