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산님께


 벌써 8월이 다 지나갑니다. 저는 바쁜 생활 속에서 지금과 같은 망중한이 되면 유수流水같은 시간을 느끼고 조금은 감성적이 됩니다.


 가을산님이 8월 27일 저에게 주셨던 댓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가을산님의 글에서 동감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가을산님의 글이 진실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몇 가지 부분에서 회의를 느낍니다.


 첫 번째로 ‘자연스러운 인간으로서의 생각이 있다면, 현재의 우월적인 위치나 이익에 빠지지 않고, 앞날을 대비해서 염려할 것입니다.’라는 글을 주셨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공대 지망생이었습니다. 당연히 제조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여기에서 환경오염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되었습니다. 당시 친구가 한 이야기는 현재의 과학이면 무공해, 또는 저공해 물품을 만들 수 있음에도 단기적 이윤 추구를 위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가 쓴 글 (마립간 페이퍼 2004년 1월 2일자) ‘신석기 혁명, 농경사회로 전환’과 (마립간 페이퍼 2004년 1월 13일자) ‘가게를 가려고 하는데’에 저의 의견을 나타낸 바 있습니다. 당장에 자신에게 어려움이 닥치지 않으면 대비하지 않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그리고 당장의 편함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날지 못하는 새 모아giant Moa가 있는데 이것을 멸종시키지 않고 사냥을 했다면 자자손손 이 동물을 잡아먹을 수 있지만 사람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봐, 친구 이렇게 사냥하다가는 이 새가 멸종하겠어. 글쎄, 하지만 우리가 사냥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사냥해서 마찬가지일 텐데. 방학이 끝날 무렵 방학 숙제를 미리 하지 않아 고생했던 일, 미리미리 할 것을. 시험이 닥쳐오면 미리미리 공부 할 것을. 반복되는 후회지만 항상 현재의 즐거움을 희생하여 미래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건 단순히 동정이나 이타적인 생각이 아니라 언제라도 내가, 나의 자녀가, 나의 가족은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라고 생각하여 미리 대비하고 싶지만 생각만 그렇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모두 교통질서를 지키면 도로 소통이 잘되고 전체적으로 이익이 되지만 남들이 질서를 지킬 때 새치기, 끼어들기를 하면 그가 제일 빠르게 갈 수 있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이에 대한 과학적 수학적 접근은 게임의 이론에 의한 모델인 Evolutionary Stable Strategy로 설명합니다.


 한 가지 고백을 하면 위 글은 현시점에서의 상황입니다. 미래의 사회가 더 도덕적인 사회가 될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는 인간의 도덕성이 진화를 할 것인가의 문제와 닿아있습니다. 이는 다시 인지과학에 대한 것과 연관되어 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로 시스템에 관한 것입니다. 수학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투표 방법이 있을까요. 답은 없습니다. 여러 팀이 운동 경기를 하는데 가장 합리적인 경기 진행 방식은  토너먼트 아니면 리그. 역시 답이 없습니다. 세 팀이 경기를 하는데, 경기스타일 때문에 A는 B를 항상 이기고, B는 C를 항상 이기고 C가 A를 항상 이긴다면 토너먼트 대진표가 작성하는 것이 결국 우승팀을 결정하게 됩니다. 리그 경기 방식은 어느 팀이 다른 팀에게 일부러 져 주어 종합 성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는 것 경우를 이미 실제에서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회 구조의 80:20에 대한 설명은 보다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저의 글 (마립간 페이퍼 2004년 8월 24일자) ‘보수와 진보’와 (마립간 페이퍼 2004년 7월 20일) ‘불평등의 기원’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한 듯 합니다. <80/20법칙>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현재 상황을 설명하는 것인데, 현재 시스템에서 이것을 극복할 방법이 당장에 저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가을산님의 실천의지는 제가 알고 있지만, 조선인님은 ‘개인적 실천으로 불평등이 해소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저는 ‘아니오’로 대답했습니다. 개인적인 실천이 대부분에서 개인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 질 경우만 가능합니다. 가능성이 매우 적습니다. (알라딘너 중 몇 분이 가을산님처럼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제도에 의해 강제될 경우에는 강제할 수 있는 기관(국가자체이든, 아니면 국가기관이든)이 필요하고, 힘을 가진 이 기관이 순수할 때는 문제가 없지만 만약 부패한다면 제동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산술체계 하에서 스스로의 완전성을 증명할 수 없는 불완정성의 원리를 떠 올리고 있습니다.)


 저의 의견은 최선(시스템)이 안 되면 차선(동정)을 택하는 것이며, ‘동정’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부정적 의미를 주지만 저는 저의 나름대로 의미를 달리 하는 용어입니다. 이 아이디어 의미는 아담스미스 경제 이론으로 안 되면, 케인즈 이론으로 밀어 붙이자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첫 편지에 사용된 저의 보수에 대해 간단히 추가 말씀드리면 경제적 정의에 의한 추구하는 가치는 진보입니다. 즉 자발적 가난을 일컫습니다. 정치권의 가장 진보 정당인 민주노동당도 저는 진보로 보지 않습니다. 자발적 가난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 스스로를 보수로 정의하는 것은 아버지 원리를 택했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이유는 제가 남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기독교의 개신교) 때문입니다.


 오늘은 휴일인데 잘 보내십시오. 태풍이 온다고 하던데 이곳 지금 밖의 날씨가 화창합니다.


2004년 8월 29일

마립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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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8-29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공이 높은 글이라 감히 댓글을 달기가 어렵네요. 추천만 합니다.

가을산 2004-08-3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곧 답신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태님, 부채질 하시니, 시원하시죠? ^^

가을산 2004-08-30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

주말 잘 보내셨는지요?
어제 오후는 다른 일로 차분히 글을 읽거나 쓸 수가 없어서 답글이 늦어졌습니다.

1. 우선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저는 토론이라는 것은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상대방과 생각을 교류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거나 상대를 나의 생각과 같게 교화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이나 수학의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명백하게 진위를 밝혀낸다는 것이 무척 어렵고, 그 주제가 ‘가치’와 관계될 때에는 하나의 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런 생각을 언어라는 도구로 소통하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구요.

2. 제가 지난 번 마립간님의 글에 답글을 단 이유는 ‘이타적인 행위’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이타적인 행위는, 즉 좀더 큰 ‘우리’를 위한 행위의 필요성에 의해 우리 본성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2.1 사회생물학

사회생물학 논쟁을 촉발시킨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를 보면, 윌슨은 ‘이타주의’에 책의 한 chapter를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타적인 행위는 한 개체에는 불리하지만 인간이라는 공동체에는 이익이 되고, 이 때문에 실재로는 이타적인 것도 이기적인 본성의 발로라고 합니다. 이것은 진화심리학이라는 분야에서도 공통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장과 주부가 가족을 위해 일하느라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하는 것, 국가가 위기에 놓였을 때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현재에도 한 개체의 희생으로 공동체의 이익을 확대하는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2.2 종교와 본성.

세계의 주요 종교들을 볼 때, 그 가르침에서 이른바 ‘원시 종교’와 다른 주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 그것도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입니다.

악의 퇴치와 기복의 차원을 넘어선, 자기 자신을 다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 자신의 깨달음을 중생들과 나눈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류의 마음에 큰 울림을 줍니다. 이런 이타적인 메시지는 작은 공동체보다 더 보편적인 인류 차원의 포용을 가르치는데, 이것이 인류 역사에 뿌리내렸다는 것은 이런 메시지에 공명하는 인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설사, 제국의 성립시기에 부족적인 기복을 넘어서는 이데올로기의 필요성에 의해 선택된 종교라 하더라도, 그 메시지에는 분명 보편성이 있고, 우리에게는 그 메시지에 공명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3. 인류가 다른 동물과 다른 문명을 이루게 된 주요 요인으로 - 불의 발견 이외에 - 농경의 시작과, 레비 스트로스가 지적했듯이 ‘근친결혼 금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두가지의 공통된 특징이 미래를 위해 당장의 이익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마립간님께서 예로 들으신 모아새 뿐 아니라 많은 생물들을 멸종하게 한 우를 범한 반면, 농경과 가축을 발명해 냈습니다. 즉, 식량이 되는 식물과 동물을 지금 베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잘 익을때까지 기다리는 것, 당장의 식량이 부족하더라도 내년의 농사를 위해 열매의 일부를 남겨 겨울을 나는 것은 인간 문명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입니다.

사회에 성적 도덕이 문란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배우자 이외의 대상에 대한 성적 욕망을 억제하고, 특히 가까운 친족간의 결혼을 금기로 하는 것은 어떤 미개한 부족사회를 가더라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인간사회의 특징입니다. 이 역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당장의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사회와 종족의 보존에 더 유리한 장치로 작용합니다.

숙제나 공부 같은것, 물론 밀리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현재의 노동력을 공부에 투자함으로써 미래의 더 큰 생산성을 바라보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미래의 이익을 위해 당장의 욕망 혹은 이익을 보류하는 인간의 특성에서 나오는 인간의 독특한 행위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두고 농경을 발전시킨 면을 볼 것인지, 동물들을 멸종시킨 면을 볼 것인지,
교육이라는 문화를 볼 것인지, 아니면 숙제와 공부를 미루는 심리를 볼 것인지,
결혼과 근친결혼 금기를 볼 것인지, 아니면 문란한 성도덕과 범죄행위를 볼것인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공중도덕의 존재를 중시할 것인지, 새치기 하는 사람의 존재를 중시할 것인지에는 각자의 시각차가 있겠습니다.

단, 앞부분의 특성을 무시했을 때, 인간이 인간으로서 현재와 같은 문명을 건설할 수 없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4. 인간의 도덕성은 더 강하게 진화가 될 것인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현재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인간들이 현재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는데 현재의 시스템으로 얼마나 더 문명을 지속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다고 봅니다.

4.1 의사 결정 과정의 문제

인간은 인간 역사의 90% 이상을 부족사회로 지내왔습니다. 부족 단위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의사 결정 과정이 비교적 공정하고, 빈부격차도 크지 않습니다. 집단 내의 동질성도 큽니다. 그런데 인류가 점점 큰 단위의 공동체와 국가를 이루어 살게 되면서 집단 내의 동질성도 떨어지고, 의사결정 과정이 상층부의 권력계층에 집중되게 됩니다.

이런 새로운 변화에 의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로 사람들은 민주주의니, 사회주의니, 대의제니, 대표 소환제, 지방자치제, 이익집단의 등장 등, 점차 정교한 사회 시스템을 고안해 왔습니다.

이런 변화 과정에서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개인이나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대중’으로서의 의사결정이 매우 미숙하고 혼란스럽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장기적인 비젼을 제시하고 이끌 지도자는 키워지지 않고, 그때그때의 여론에 정치가 휩쓸리는, 그리고 그것을 잘 이용하는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부작용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편, 의사 결정의 문제에서, 한 지역의 현안울 결정할 때 그 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배재한 채, 중앙정부에서 밀어붙이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새만금 간척사업, 부안의 원전폐기물 저장소 건설 문제, 천성산 공사 문제 등은 그 사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당사자의 의견을 소외시켰기 때문에 부작용이 컸습니다. 필요한 일은 진행하되, NIMBY 현상을 배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아직 우리는 고안해내지 못했습니다.

4.2 인간의 얼굴을 한 시스템

부족시대에는 부족원들의 친족관계도 동질성이 있었고, 사회의 빈부격차가 있어도 한 공동체 내에서 소외되어 죽어가는데 한쪽에서는 그런 계층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른채, 혹은 알더라도 무시한 채 지내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회가 ‘발전’했다고 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이 없도록 시스템을 복원해야 합니다. 최소한 인간적인 삶과 죽음을 영유할 수 있는 사회는 그 수혜자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갈등과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도 줄일 수 있습니다.

계층간의 언어와 세계관과 가치관이 요즘처럼 갈라지고 갈등이 커지는 경우도 거의 없었습니다. 사회가 ‘발전’한다는데 이런 일이 오히려 심화되는 것은 시스템이 거대화 되어가면서 ‘인간적인’ 면을 잃어가기 때문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볼 때 인간 대 인간으로서 보지 않고 ‘자본가’와 ‘노동자'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사람으로, ’빨갱이‘와 ’보수 꼴통‘으로 보면 인간적인 면을 잃어가는 겁니다.

이제는 ‘발전’이라는 단어의 뜻을 ‘인간의 얼굴’을 찾아가는 것과 동의어로 바꾸었으면 합니다.

4.3 자본주의, 그 경쟁력!

이런 사회와 시스템의 물적 바탕이 과학기술의 발전과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입니다.

금년 초(2월 9일)에 올린 페이퍼 “발자국 - 북방계와 남방계 - 오늘날은?” 에 설명한 대로, 현재의 경제사회체제는 인간이 가장 살기 좋은 체제라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가장 경쟁력이 있는 체제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입니다.

분명히 과학기술의 발전과 시장경제가 인류의 생활 수준 향상에 기여한 바가 크고, 원시부족사회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주객이 전도된 듯 합니다. 인간의 생명보다도 자본의 이익과 특허권이 존중되고 있고, 수백 수천년 한 곳에서 살아온 부족이 지구 반대편에서 사는 기업 대주주의 이익을 위해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납니다. 분명히 재생가능한 에너지체제가 실현 가능한데도, 석유/자동차 산업계와 원자력 산업의 로비가 더 먹혀들어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저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체제를 이루면서도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삼켜지지 않을 대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실천'으로 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한 개인이나 집단, 심지어 몇몇 국가의 힘으로도 불가능하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국제연합이나 WTO 등의 초국적 시스템을 만들었던 인류이니만큼, 초국적 대안운동도 가능하기를 희망합니다.

5. 그간의 마립간님의 글에서 보수적 - 아버지의 원리 - 사고가 지배하는 것은 익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종교적으로 개신교이신 것과 일맥 상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신교에도 상당히 진보적인 분들도 많습니다만.... )

분석적 사고는 타고난 것일 것이고, 종교는 어려서 주어진 것이든지, 본인의 선택이겠지요.

개신교에 따라 보수적 원리를 따른다기보다는 마립간님의 보수적인 성향이 개신교를 선택하게 했고, 개신교의 성향이 그 보수성을 강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하느님이 선택해 주셨다’고 하시면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립간님의 과학적, 분석적 사고의 틀과 개신교는 어쩐지 묘한 부조화를 이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 아직 종교 - 개신교 - 가 마립간님의 분석적 사고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 의외입니다.

6. 자발적 가난과 녹색당..... ^^ 먼 길을 돌고돌아 의외로 또 일치점이 생기는군요.

저도 지속가능한 인류의 문명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재화의 생산과 소비에 바탕을 두지 않은 가치관과 사회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의 정치적 성향도 - 원래 회색분자라 자처하지만 - 굳이 정당을 선택하자면 녹색당에 가깝습니다.

글이 좀 길어졌네요.

서늘한 밤입니다. 평안하세요.


가을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