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다메 칸타빌레에 이어 피아노의 숲을 너무 재밌게, 감동깊게 읽었더니 클래식이 너무너무 듣고 싶어졌다.  클래식에 관해선 별로 아는 바가 없어서 일단 집에 있는 씨디를 모두 뒤져 클래식만 뽑아 보았다.  그런데 맨땅에 헤딩하자니 원하는 만큼의 감흥을 얻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피아노의 숲 경우는 잘 만든 홈페이지를 발견, 거기서 노래를 들었는데 작품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면서 감상을 하니 즐거웠다.

그러다가 오늘은 "예수와 함께 한 저녁식사"를 뜻깊게 읽었더니 CCM이 마구마구 듣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집에 왔는데, 소울 메이트 7편(이미 한참 전에 한)을 보고서 거기 배경음악으로 자주 나온 노래가 또 흥미를 자극했다.  지금 찾아서 열심히 듣고 있는 중....;;;;;

아, 지조가 없는 것인가.... 뭔가 허전한 것인가.... 자꾸 어떤 음악을 파고 들고 싶어진다.

이러다 내일 되면 또 뭐가 듣고 싶어질지...

일단 피아노의 숲에 이어 다음 음악 만화로 "나나" 나 "kiss"를 읽을까 한다.  또 다시 어떤 음악이 미친듯이 고파질지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은 Lasse Lindh의 C'mon Through가 귀에 감긴다.

영상과 음악의 결합은 이토록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구나... 새삼 놀랍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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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 영혼의 허기를 채워줄 하룻밤의 만찬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데이비드 그레고리 지음, 서소울 옮김 / 김영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근래 들어 편견을 갖고 있던 책에서 뜻밖의 수확을 많이 걷어, 지레 짐작했던 마음들이 미안했던 적이 많았는데, 이 책에도 편견을 갖고 있던 나는 이제 부끄러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처음 나왔을 때 워낙 광고가 많이 나오길래 신앙서적으로 둔갑한 뻔하고 상업적인 그런 책이 아닐까 했었다.  그래서 호기심은 일었지만 더 많은 리뷰가 쏟아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몇몇 리뷰에서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관심을 갖게 되었고 바로 구입하게 되었다.

책은 워낙 페이지도 짧고 활자도 큰 편이기 때문에 금방 읽을 수 있었는데, 내용들을 곱씹어 보느라고 좀 더 조심스레, 그리고 아끼면서 읽었다.  뒤에 몇 페이지가 남지 않은 것을 알았을 때는 예수님과의 저녁식사 그 자리에 내가 앉아 있는 것처럼 조바심이 났다.  아직 질문이 많은데... 벌써 끝나면 안되는데...

주인공 닉은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그는 회사의 일에 적당히 시달리고 있었고, 아내와의 관계는 조심스럽고 어려웠으며, 아이를 키우는 일도 많이 버거웠다.  그는 자신에게 도착한 예수로부터의 저녁식사 초대를 친구들이 준비한 이벤트성 장난으로 여겼고,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식사에 임했다.

그런데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자신을 정말 예수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었고, 심지어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닉은 오기가 생긴다.  자신도 대학에서 종교학에 대해 공부 좀 했었던 사람이고, 상대를 조금은 정신이 나갔거나 아니면 광신도 혹은 무례한 전도 집단쯤으로 여기는 닉은 그의 행동을 좀 더 지켜보자고 결론을 내리고 식사에 임하게 된다.  풀코스로 준비되는 식사와 그와의 대화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메뉴를 고르고 에피타이저를 선택하고 샐러드를 먹고 메인코스를 즐기고 디저트에 커피에 이르기까지 그는 차차 눈앞의 사내에게 동화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처음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공방처럼 오갈 때는 언짢기도 하고 짜증도 날 뻔 했지만, 그는 예수라 자처하는 사내의 말에 오류가 없음을, 그의 이야기에 자신이 공감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식사가 무르익어갈 때 쯤이면, 그가 가졌던 많은 의문과 불신, 그리고 무지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져 간다.  그리고 그 점은 이 책을 읽는 독자로서의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글쎄... 설명하기는 조금 어려운 부분이지만, 신앙은 내게 있어 몹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비록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어무이께서 백일불공을 드리느라 치성을 다하던 때였고, 태몽 역시 연꽃이 안겨오는 꿈이었을 만큼 지극히 불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지만, 지금 어머니는 목사님이 되어 계시고, 나는 지극히 보수적인 신학 대학교를 졸업했다.

교회는 당연히 가야하는 곳이었고, 그 분위기도 내게는 몹시 익숙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어서 나의 환경이 나를 100% 좌우하진 못했다.  그래서, 살아있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 나이지만, 그 신의 임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나는 늘 난감했다.  나라는 인간은 지극히 holy 하고는 거리가 멀었고 말 그대로 세속적인 인간 전형에 불과했다.  그래서 나는 신앙서적 읽는 것도 아주 싫어했다.  부족하고 부끄러운 내 모습을 확인하게 될 그 순간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책을 다 읽으며 어떤 운명적인 힘을 느꼈다.  그토록 피해가려고 하다가 정면에서 바로 걸린 것 같은 기분.  책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와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그러나 쉽고 간결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믿고 안 믿고, 받아들이고 못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다.  원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받은 자와 준 자 외에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니까.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몇 개 골라본다면,

"사라가 일곱 살 때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벌로 접시를 몇 개나 씻어야 다시 아빠의 무릎에 앉고, 아빠 품에 안길 수 있을까요?"

"하나도 씻지 않아도 돼요."

"그럼 사라는 학교에서 A를 몇 개나 받아야 하나요?"

"그런 질문이 어딨습니까?"

"왜요?"

"그 아인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소. 내 딸이니까."

낯이 뜨겁게 느껴졌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을 가슴으로 부정하면서 보낸 많은 시간들이 떠올랐다. 

많은 기도 중에 "왜요? 왜 그래야 했는데요? 날 사랑하잖아요."라는 질문을 많이 했었다.  삶의 불합리한 부분들에 대한 원망과 억울함을 호소했었다.  하지만 그 숱한 경우들에서 결국에 내리게 되는 결론은 당신 탓이 아닌 내 탓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어떤 원망이나 불평을 쏟아내어도,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내가 진작부터 알고 있음을 다시 확인하곤 했다.  그 마음을... 다시 또 오래 잊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메인코스를 먹을 때에 예수는 자신을 희생해 인간의 죄를 사해준, 대가 없는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닉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여, 질문을 하게 된다.

"그 선물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그냥 받기만 하세요. 그뿐입니다."

"그 대가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요?"

"없습니다."

"그럼 그건 어떻게 받는 거죠?"

"하나님을 믿기만 하세요.  모든 인간관계의 바탕이 바로 믿음이잖아요.  하나님이 선생의 죄값을 갚기 위해 희생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맺는 겁니다.  하나님이 선생의 죄를 용서해 주실 거라고, 영원한 삶을 주실 거라고 믿으세요.  하나님이 선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니까요.  선생을 되찾고 싶은 거니까요.  선생은 그저 그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내 눈은 얼어붙은 것 같았다.  신이 왜 날 그토록 사랑하는지 납득되지도 않았고, 내가 그를 원하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남자의 마지막 말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알 수가 없네요.  성경에 보면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예수이지 하나님이 아니잖소."

"닉."

그가 말했다.

"내가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를 교리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게 각인된 부분이었다.  나는 사실, 울컥하는 마음에 울뻔 했다. 

'영생'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은 내 주의를 크게 환기시켰다.  한번도 그렇게 접근해보지 못했던 내용인데 나는 올곧이 설득당하고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헤어지면서 다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예수는 닉의 명함에 짧은 글을 적어준다.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명함에는 요한계시록 3:20 이라고 적혀 있었다.  집에 돌아온 닉은 대학교 시절 이후 펴보지 않았던 성격책을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찾아냈다.  그리고 성경구절을 찾는 장면에서 책은 끝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작품은 맨 마지막 부분을 이 책을 읽으면서 갖게 된 생각들을 토론할 수 있게 QT형식의 질문을 남기며 끝을 맺고 있다.  큐티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이 벅차 본 것은 아마 살면서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부끄럽게도)

책을 덮으며, 나는 오래오래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어서 그 고마움의 정체를 내가 글로 옮겨 표현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한권의 책으로 나의 시간이 조금 더 감사로 채워질 것을, 보다 많은 위로를 얻으며 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미 받은 은혜를 다시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

그래서, 예수와 함께 한 저녁식사는, 곧 나와 함께 한 저녁식사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 시간은 너무 로맨틱했고, 식사는 최고로 맛있고 또 유익했다.  함께 한 시간과 앞으로의 남은 시간 모두 축복임을 다시 또 감사로 받아들인다.  이 책은 별점 다섯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열 개 정도 주고 싶다.  아마, 금년 들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만족스럽게, 또 행복하게 읽은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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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도로 보는 세계, 세계인
황근기 지음, 이루다 그림 / 계림닷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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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처음 책을 펴들었을 때는 목차부터 해서 쓰윽 훑어보았다.  언뜻 보기에 책 구성이 재미있어 보였고,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어 몹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쉽게 쓰여졌고, 내용도 재밌었으며 그림도 귀여웠다.  성인이 보아도 즐거울 책으로 느껴졌다.  다양한 나라의 문화와 지리, 그들의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행운으로 여기는 상징과 불길하게 여기는 상징 등등을 콕콕 찝어서 만든 책이라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 좋은 책이라고 나는 여겼다.  가격도 그럭저럭 만족하는 편이었고, 먼나라 이웃나라 같은 학습서가 되지 않을까... 나는 무지무지 후한 점수를 주었었다.

그런데, 제대로 펴들고 보니 조금 속았다는 기분이 든다.  앞서 얘기한 장점들은 모두 그대로이긴 한데, 글을 구성한, 그리고 편집한 사람들이 좀 못마땅해졌다.

이유는, 내용의 구성이 지나치게 미국, 그리고 서구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단 대한민국 다음으로 나오는 나라가 미국이라는 것에서 나는 좀 불편했다.  어떤 기준을 갖고서 다음 나라가 나온 것이 아니라 무작위로 나오는데(대륙이라던가 문화권 구성은 아니었다.) 왜 하필 미국부터?  내가 예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것은 편집자가 의도했거나, 혹은 무의식 중에 미국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생각들이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전이되는 것에 경계심이 일었다.

그리고 유럽이 이어서 나오는데, 나는 실소가 나왔다.  유럽에 대한 설명은 그래도 멋스럽고 그럴싸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지만,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남미가 나올 때는 우리가 인식하기에 지저분하고 야만스럽다고 여길 법한 예시들이 주를 이루었다.

음식 문화를 얘기할 때, 프랑스에서는 와인을 예로 들었다고 한다면, 비서구권 지역에서의 예는 '바퀴벌레'를 먹는 나라도 있더라... 라는 식이다.

화장실을 얘기할 때에도 동남아시아권의 나라나 인도에서는 강물에 그냥 실례를 한다. 그리고 그 물에 머리 감고 목욕하고 심지어 먹기도 한다... 라는 식의 설명이다. 그렇게 나온다면, 산업혁명기까지도 열악했던 화장실 문화를 자랑(?)했던 유럽의 상태는 왜 얘기하지 않는가.  왜 향수가 발달했고 왜 하이힐이 유행했는 지는 왜 말하지 않는가.  페스트가 창궐해서 전 유럽이 도가니에 빠질 만큼 지저분했던 그들의 이야기는 왜 생략하느냔 말이다.

거죽만 보고는 속을 알 수 없다고, 매력적으로 보았던 책이 속을 들여다 보니 이만저만 실망인 게 아니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하나 건진 게 있다면 각 나라별 국기를 그려주고 그 나라의 크기와 인구수, 정식명칭, 사용언어, 사용화폐를 일목 요연하게 정리해 준 것인데, 여기서 내 시선을 끌었던 것은 다른 나라의 면적을 비교하면서 한반도의 몇 배 크기다...라고 써 준 것이다.

독일의 면적, 한반도의 1.5배... 이런 식으로....

아... 독일이 생각보다 많이 크지 않았네.... 하고 생각해 보니, 비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남한'이 아니라 '한반도'라는 사실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남북한을 모두 합해 놓으면 크진 않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작다고 느껴지진 않을 텐데... 하는 마음...

그래도 각국 면적을 '한반도'와 비교한 것은, 그래도 조금 땅을 넓혀보겠다는 마음보다 우리 땅이라는 소중한 마음이었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  그랬더니, 책을 보고 불쾌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우리 학생들이 배우는 세계사 책을 들여다 보면 틀린 기술도 많거니와 다분히 서양 위주의 서술이 많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만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정도 반성하고 고칠 일이다. 어린 아이들이 보는 책일수록, 가치 판단의 문제는 신중하게 다뤄야 하건만, 이 책은 중립성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별 셋은 주려다가 다시 맘이 바뀌어 별 둘만 주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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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동생이 있습니다 벨 이마주 60
D.K. 래이 그림, 존 W. 피터슨 글, 김서정 옮김 / 중앙출판사(중앙미디어)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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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장애 가족을 두었다고 하는 것은 끝모를 슬픔과 서러움의 연속으로 이미지가 연결됩니다.  장애를 부끄러워 하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내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분명 있지만 그렇지 않은 가족이 더 많다는 것에 우리 사회의 치부가 숨겨져 있습니다.

여기, 한 언니가 있습니다.  듣지 못하는 여동생을 둔... 그러나 듣지 못하는 대신 더 많은 장점을 가진 여동생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예쁜 언니... 그리고 아름다운 자매가 있습니다.

아마도 소녀는 아주 어려서부터 듣지 못하는 동생과 함께 살면서 장애 자체를 그저 조금 '불편'한 것 정도로만 인식하며 살아온 듯 합니다.  그래서 장애를 거부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은 채 자연스럽게 접근합니다.

소녀는 듣지 못하는 대신 다른 많은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는 동생의 장점들을 열거합니다.  소리의 진동과 울림의 느낌으로, 또한 귀 대신 더 발달한 눈으로 동생은 자신보다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허나, 동시에 동생이 할 수 없는 것들도 얘기합니다.  동생은 소리의 종류를 알아차릴 수 없고, 소리의 느낌도 알지 못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소녀의 목소리는  처음처럼 차분하지만 깊이 가라앉은 슬픔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다시 반복해서 얘기합니다.  내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동생이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당연히 동생을 사랑하고 있음을...

전체적으로 무채색 느낌의 색깔톤을 유지한 작품은 동화책답지 않은 차분함과 정적인 감동을 갖고 있습니다.  감정을 쏟아내지도 않는데,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작품 속에서 찡한 감동과 먹먹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몹시 감동적이고 교훈을 주는, 아름다운 책이랍니다. 우리를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도 같이 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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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 수 없는 이미지 2 - 한국전쟁에 휩싸인 사람들
박도 옮김,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RA) 사진 / 눈빛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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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을 먼저 보고 1편을 보았는데, 서평은 1편부터 쓰고 2편을 이어 쓴다^^;;;

2권은 1권과 비교한다면 꽤 담담하게 읽힌, 보인 편이다. 참혹한 사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편에 비하면 직접적인 참상(처형장면 같은...)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인민군 포로들에 대한 인권 탄압이 눈에 많이 띄어 안쓰러운 편이었다.

놀랍게도, 그 잔인한 시간을 살아내면서도 사진 찍는 사람이 보이니, 포즈를 취하며 씨익 웃는 순박한 얼굴들의 사람들이 간혹 보였다는 것이다.  인민군 포로들은 모두 메마른 얼굴에 촛점 잃은 눈빛이었지만, 포로가 아닌 일반인들 중에는 카메라라고 하는 신기한 물체를 재밌게 보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전란에 휩싸였건만, 그래도 사그러들지 않는 학구열은, 자신도 어리면서 동생을 끼고 학교를 찾아가게 하였으니, 찡하면서도, 그 역시 생존에 대한 욕구가 아닐까 싶어 싸아한 기분이 들었다.

북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인민군들도 있었지만 게 중에는 북도 싫고 남도 싫다며 제3국으로 가기를 희망하는 군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 가는 길에 UN군이 지급한 군복마저도 벗어던지고 새 길을 향해 떠났다.  과연 그들이 도착한 땅에 바라던 자유는 있었을 지...ㅠ.ㅠ

미국에서 찍은 사진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그들의 시선이 담겨 있을 법하다.  그래서라고 꼭 집고 싶지는 않지만, 사진들 중에는 가난하고 굶주린 우리 국민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미군과 UN군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사진을 마무리하면서 이어진 글에 몇몇 구절이 눈에 띈다.  개전 7개월 동안 서울의 주인은 네번이나 바뀌었고, 전쟁 중 가장 큰 희생자는 군인이 아니라 민간이이었다는 사실...

새롭게 밝혀지고 있는 사실들이 많긴 하지만 전쟁 중에 학살되어 지금껏 덮여지고 가려진 목숨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일이다.

개별적, 산발적 소규모 학살보다 집단적, 조직적, 대규모 계획 학살이 더 많았다는 사실도 읽는 것조차 끔찍하다고 여겨졌다.  內爭같은 국제전쟁... 外戰같은 동족전쟁.... 그것이 한국전쟁의 모습이었다.

오늘 동독과 서독의 통일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잠시 떠올랐던 생각인데... 우리 남한은 통일 당시 서독보다 잘 살지 못하고, 북한은 동독보다 잘 살지 못한다.  둘은 연합군에 의해 갈라졌지만, 우리는 우리끼리 싸우고 서로 등을 돌렸다.  원인이 어디에 있건, 그 과정에 무엇이 있었건, 그 사실 자체는 결코 변할 수 없다.  우리의 상처는 너무 깊고, 치유의 길은 그보다 더 험난하다.  피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는 길인데도, 앞길이 막막하다.  더 두려운 것은, 통일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 더 어려워질까 봐...

지울 수 없는 이미지... 이 사진들로... 고의건, 자의건 잊으려 했던 옛 상처와 기억들을.... 되돌릴 수 있었으면 한다.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 지도 심각하게, 깊이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  더 늦어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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