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여, 살림을 놓고 책을 들자
[한겨레 2006-10-17 18:54]    

[한겨레] 오한숙희의 얘들아 책과 놀자 /

내 친구 중에 절대 책을 빌려달라고 하지 않는 애가 하나 있다. 우리 집에 와서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에 앉아서 읽어 버린다. 다 못 읽고 가게 되어 빌려 준다고 하면 손사래를 쳐 완강히 거절하며 하는 말, “지금 여기서밖에 읽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나로 하여금 찐한 독서를 하게 만들었는데 가져가면 뭐가 되냐.” 스스로 독서의 배수진을 치는 이 친구 앞에, 남의 책 못 갚으면 마음의 짐이 되니 안 빌린다는 나의 수준은 무색해진다.

하루는 그 친구 집에 놀러 갔다. 마침 그는 책을 읽고 있었고 주변에는 물컵과 과일 깎아 먹은 접시며 과도, 휴지, 수건 이런 것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는 약간 겸연쩍어 하면서 치우는 시늉을 했으나 나는 그를 헤아렸다. 그리고 내 입에서 “아, 됐어. 놔둬” 소리가 나오길 은근히 기다리는 그의 마음까지 읽어버렸다. 읽던 책을 냉큼 덮지 못하고 편 채로 방바닥 엎어 놓는 것이 그 증거였다.

책읽기는 오줌누기와 닮았다. 한번 ‘필’을 받았을 때 내리 읽어야지 끊었다가 이어 읽기란 오줌발 잇기만큼 어렵다. 집안 살림하는 아줌마들이 독서와 거리가 멀어지는 까닭이 여기 있다.

우리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언니들과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살림 대충 하고 살아라. 하루에 한 끼는 빵이나 국수로 때워라. 밥 세 끼 다 해 먹고 살림 완벽하게 하다 보면 책 읽을 시간이 안 나온다. 그런 삶은 힘이 없고 재미가 없다. 죽는 순간에 후회하게 된다.” 그래서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어떤 심부름도 시키지 않으셨다. (그래도 밥상 앞에서 책 들여다보는 것은 철저히 금지하셨다.)

책은 도서관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집을 떠난 공간은 다 도서관이다. 눈앞에 일거리가 보이지 않는 공간은 다 도서관이다.

집안에 있는 최고의 도서관은? 정답은 화장실. 우선 책읽기의 가장 중요한 조건, 착석이 자연스레 보장되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경주 천마총에 갔을 때를 잊지 못한다. 유난히 배롱나무가 많았는데 그 나무 아래 저마다 앉아 책을 읽는 아줌마들이 드문드문 있었는데, 헝겊깔개와 작은 보온병이 그들의 독서가 어제오늘 우연한 게 아님을 증언하고 있었다. 집을 떠날 수 있는 용기, 집을 나와 다른 것도 아니고 책을 읽는 선택,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몰입하는 소신, 그것은 왕궁을 나와 견성을 향해 고요히 고행하는 붓다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제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아이들은 없다. 그러나 어미를 존경하는 자식은 드물다. 책을 읽는 어머니는 존경받지 않을 수 없다.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삶의 수행자이기 때문이다. 살림은 여자를 놓아주지 않는다. 여자 스스로 살림을 놓을 때, 책이 깃들 시공이 생기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삶이 움튼다. 그게 자기 집 화장실이면 또 어떠랴. 오히려 더 쉽고 편한 것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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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0-18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의 주부들은 이 방면에서 고수 같다. ^^

프레이야 2006-10-18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살림은 대충, 밥은 하루 한 끼 정도만 챙겨주고(점심은 학교급식으로 해결), 정리정돈 잘 안 하고 대충 찾아서 입고 신고 다니게 하고 그런 불량주부입니다. ㅎㅎㅎ
마노아님, 오늘도 즐거운하루~~

하늘바람 2006-10-18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전 언제나 대충이어서^^

마노아 2006-10-18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범 주부들께서 왜 이러십니까^^;;;;

ceylontea 2006-10-18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런 글을 읽으면 좀 짜증이 나요...
책 읽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요.. 하지만.. 살림이 책 읽는 것보다 하찮은 것처럼 이야기되어지는 것에 대해 화가 나요.
가사노동이 일방적으로 또는 상당 부분 주부에게만 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살림이 이렇게 하찮게 평가되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밥 세끼를 다 해먹어서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면, 가족이 서로 분담하여 일을 나눠야 하는 것이지 대충 끼니를 해결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니요.. ㅠㅠ;
살림을 잘 하는 어머니가 존경받지 못한다면, 세상의 어떤 어머니가 존경을 받아야 하나요? 책을 읽어야만 존경받는 어머니라는 주장 자체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살림 잘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 주부의 가사노동과 육아...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마노아 2006-10-18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하신 얘기가 옳아요. 그런데 이 글을 쓰신 분은 좀 공격적으로, 그리고 극단적으로 말씀하신 것 같아요. 모든 여성학자들이 다 공격적인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는 없지만, '살림'에 관한 부분은 좀 민감해 하시는 듯. 이 분도 꼭 '책'이 아니더라도 살림만 하는 여자가 자기 시간을 갖는 게 참 힘들다.. 이런 얘기를 하시는 게 아닐까요. 제가 아는 한 분은 나이가 쉰인데, 원래 깔끔주부로 유명한 분이었어요. 그런데 산악동호회에 들면서 산행에 목숨을 걸기 시작하더니 살림은 계속 멀어지고 집이 아주 지저분해 지더라구요. 건강 챙기고 취미 생기고, 늘 웃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좋은데 집안 꼴은 말이 아니게 된 거죠. 실론티님 말씀하신 것처럼 가사일 분담. 그게 그 집에서 그 때문에 되어졌어요. 바깥 분이 못 참겠다 싶으셨는지 같이 일하시던 걸요. ^^ 이 글 쓰신 분이 가사 일을 하찮은 것으로 표현한 것은 좀 심하다 싶은데요. 살림을 잘 하는 어머니가 존경받는 세상도 아닌 것 같습니다. 살림'도' 잘할 때라면 또 모르지만요. 그게 옳다는 게 아니라, 그런 세상인 것 같아요. 주부의 가사노동과 육아... 그거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인데, 평가는 더 어렵네요.. ;;;;